'하나님을 만난 행복'에 해당되는 글 51건

  1. 2009.09.16 본향 찾는 사람들
  2. 2009.08.26 한 영혼
  3. 2009.08.22 교회가 부흥하기를 바라는가
  4. 2009.05.24 갚아 주시는 하나님
  5. 2009.05.01 도전은 아름답다
  6. 2009.04.23 인생의 난제 풀이
  7. 2009.03.29 나는 왜 예배에 목숨을 거는가
  8. 2009.03.07 너희가 에로스를 아느냐
  9. 2009.02.21 잠수함의 서울 구경가기
  10. 2009.02.03 섭리

본향 찾는 사람들

묵상 2009. 9. 16. 13:51 |
 

 나는 고향이 둘이다. 하나는 아버지의 고향이고 하나는 내가 태어난 나의 고향이다. 나의 아버지는 일찍이 고향을 떠나 처가살이를 했다. 겉보리 서 말이면 처가살이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왜 아버지는 고향을 등졌을까? 아버지가 등진 고향이지만 나는 지금도 그곳을 찾기만 하면 어릴 적의 추억이 아련히 되살아난다. 먼 훗날 아버지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어머니의 무덤이 고향의 양지바른 산자락 밑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고향은 두메산골이다. 그곳 산자락 밑에 일가친척들이 옹기종기 모여 정답게 살고 있다. 같은 성씨가 대를 이어 살아가는 씨족마을이기에 옆집에서 기침만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안다. 논보다는 밭이 휠씬 많은 마을, 낮닭이 한가하게 울고 삽살개가 마을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 산꿩이 푸드덕 날아오른다. 예부터 어른들은 이 마을이 입구는 좁고 속은 넓어서 꼭 단지 같다 했다. 그래서 단지마을이라 하던가. 봄철이면 여기저기 밭두렁에는 자운영 보랏빛 꽃이 피고 피기가 올라온다. 그러면 아이들이 피기로 허기진 배를 달랜다.

 

 나는 아버지의 고향을 설, 추석이면 어김없이 일 년에 꼭 두 번씩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찾아오곤 하였다. 우리 집이 예수를 믿었기에 아버지는 고향을 찾아올 수 없었다. 문중에서는 아버지를 아예 죄인처럼 취급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집안의 장남이 예수 믿는 아내에게 미쳐서 조상 봉제사를 팽개치고 고향을 등지고 말았으니 말이다. 사실 나의 아버지는 장남이 아니었다. 육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지만 장남이 남의 집 양자로 가 버리자 졸지에 장남의 무거운 짐을 떠맡게 된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만주를 두 번이나 갔다 오셨다. 단지 살기 위하여. 한 번은 남만주로 또 한 번은 북만주로, 솔가(率家)하여 이주하지 않았던 것은 그놈의 추위 때문이라 했다. 내가 다른 것은 다 견디겠는데 추위는 안 되겠더라 하시면서 그때 일을 들려주실 때의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언제나 제자들에게 巴人 김동환의 서사시 ‘국경의 밤’을 강의할 때면 의례히 나의 아버지의 간도(間島)의 삶을 나의 삶으로 치환(置換)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곤 하였다. 그러면서 무슨 대단한 영웅이나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치열했던 삶의 경험을 나의 사치한 대리경험으로 바꾸어 오만을 떨었던 일을 나는 지금 철저히 회개한다.

 

 내가 태어난 고향과 아버지의 고향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추석이면 언제나 나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곤 했다. 점심을 일찌감치 먹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서는 것이다. 해가 지기 전에 산마루를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을 산은 먹을 것이 많다. 다래, 머루가 산 속에는 지천으로 많다. 빨갛게 익은 포구를 따 주는 어머니의 손길은 또 얼마나 따스한지, 가을산은 간식(間食)이 풍부하다. 눈에 보이는 대로 거저 따 먹으면 된다. 계곡 아래로는 솔바람이 불고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걸린다. 해가 뉘엿뉘엿 질 녘이면 어머니와 나는 산마루에 이른다. 산 아래에 펼쳐진 고향 마을은 언제나 정답다. 집집마다 저녁연기가 오르고 초동(樵童)들이 나뭇짐을 지고 사립문을 열고 들어간다.

  

 나는 일 년에도 몇 번씩 내가 태어난 고향과 아버지의 고향을 찾는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나의 아내의 고향이기도 하기에 더욱 자주 찾는다. 세상은 참으로 무섭게 변했다. 변소와 처가는 멀수록 좋다는 것이 미덕이던 시대에 태어나서 나는 결혼도 했었지만 요사이는 화장실과 처가는 가까울수록 좋다 하니 그만하면 세상은 참 많이 변하기도 했다 싶다.

 

 고향은 언제나 좋다. 몸이 편해서 좋고 마음이 푸근해서 좋다. 이제는 마을도 변하고 길도 변하고 논두렁 밭두렁도 달라졌다. 그러나 산은 예전 그대로다. 마을 뒤 산자락 끝 내가 뒹굴던 묏등이 그대로이고 왕소나무도 그대로이다. 마을 뒤 못에 올라가 둑길을 걸어 본다. 멀리 두어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어린 시절의 고향동무는 많이들 대처(大處)로 나가 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고향을 지키고 있는 벗이 몇 안 된다. 아, 참으로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구나.

 

 나는 성경의 히브리서 11장을 참 좋아한다. 거기에는 본향 찾는 사람들이 많다.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 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내 영혼에 안식을 주는 구절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인생에게 허상의 고향과 참 본향의 고향이 있음을 분명히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 세상의 사람들도 늙으면 고향을 찾는다. 이것은 아마 고향에서 자기의 정체성(正體性)을 찾고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동물에게는 대체로 회귀본능(回歸本能)이 있다. 이것을 귀소본능(歸巢本能)이라고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고향에 돌아가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종내에는 고향땅에 묻히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찾는 고향은 허상이다. 우리의 고향은 하늘에 있다.

 

 성경은 인간을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주 앞에서는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29:15)” 라고 하였으니 영락없는 나그네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말하였다. 또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전당에 오른 자들은 모두 자신을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 증거하였다.

 

 해 아래서 새것은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은 신속히 지나간다. 하나님이 나에게 네 육신의 장막을 걷어라 명하시면 나는 툭툭 털고 일어나 미련 없이 나의 장막을 걷어야 한다. 나의 본향은 하늘에 있다. 이 세상이 목적지가 아니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새겨본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성령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하는 말씀 앞에 조용히 머리 숙여 기도해 본다. “주여, 오늘도 겸손과 온유로 당신을 닮아가게 하소서. 나의 본향은 하늘에 있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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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

묵상 2009. 8. 26. 15:14 |
 

 흐르는 강물 위로 잠길 듯 말 듯 삐죽 솟아오른 주먹 바위 끝에 외다리로 서서 목을 빼고 물속을 한없이 들여다보고 있는 황새 한 마리가 마냥 시간을 붙들어 매고 있다. 팔월 말의 저녁 햇살이 아직도 따갑기만 한데 진부에서 발원한 평창강은 오늘도 유유히 세월이란 화물을 부지런히 바다로 실어가고 있다. 강물 위로 갑자기 한 줌의 금가루가 뿌려진다. 눈이 부시다. 구름에 가리었던 해가 얼굴을 내밀면서 산 아래로 잠겨든다. 강원도는 언제나 찾아와도 정겹다. 산이 있고 강이 있고 또한 바다가 있어 좋다.

 

 내가 지금 찾아온 이곳 평창은 우리나라에서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스키장이 많고 겨울은 외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현지인들 말로는 전국에서 펜션이 가장 많단다. 동계 올림픽을 대비해 지어놓았지만 올림픽 유치가 무산되면서 빚만 늘었다고 한숨들이 보통이 아니다. 평창에 바위 공원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외지인인 나에게 자연의 진수라 할 수 있는 돌의 품평회에 초대받는 행운을 선사한 지인에게 감사한다. 나는 바위 공원에 전시된 자연석들을 둘러보며 태고의 신비를 맛본다. 참으로 하나님의 창조함이 위대하다. 금강산 만물상을 축소한 듯한 갖가지 형상의 만물바위,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모자바위, 그 외 수 없이 많은 바위들이 떼를 이루어 한 자리에 누워 있는 모습이 퍽 인상 깊다.

 

 여름밤은 깊어만 간다. 도회지 같으면 열대야로 밤잠을 설칠 시간인데도 여기 평창은 몸이 땀으로 끈적거리는 느낌이 없이 쾌적하다. 오염되지 않은 일급수의 에메랄드빛 강물과 싱그러운 숲이 군무를 이루어 풍부한 오존을 공급하는 탓인지 몸이 가뿐해지며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나는 오늘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천리 길을 허우적거리며 달려왔다. 밤을 새워 예배를 드리는 우리 일행들에게는 이에서 더한 축복은 없다. 밤하늘의 별자리가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대나무 장대에 조래기를 매어 가지고 감 따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별을 하나 따서 나의 방에 걸어보고 싶다.

 

 주여, 이 밤도 당신을 찬송하며 한 영혼을 사랑하게 하소서. 한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그리고 한 영혼을 찾아가게 하소서. 오만과 편견으로 얼룩진 이 땅에서 나를 내려놓고 내가 먼저 손 내밀게 하소서. 내가 먼저 나의 몫을 포기하게 하소서. 욕심과 자만으로 오염된 이 땅에서 나로 하여 가족과 이웃이 편안하게 하소서. 존경과 배려로 섬기며 살게 하소서. 이 땅이 옥토(沃土) 되는 토양을 만드는데 나로 하여 한 줌의 부토(腐土)가 되게 하소서. 예배는 비움이요 섬김의 훈련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배설하는 천국 예배에 나로 시중들게 하소서. 나의 가족을, 나의 이웃을 그리고 열방의 뭇 영혼들을 당신이 초대할 때 나도 거기 있게 하소서. 

 

 주여, 당신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십니다. 나로 한 영혼을 깨우는 파수꾼이 되게 하소서. 세상에는 나보다 잘난 사람도 많습니다. 개중에 어떤 이는 너무 잘나서 현란(絢爛)한 필치와 난삽(難澁)한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하면서 영혼을 도둑질하는 악역을 맡은 자도 있지만 나로 영혼을 미혹케 하는데 쓰임 받지 않고 영혼을 살리고 세우는데 사용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배우는 감독이 맡겨준 배역에만 충실할 뿐이니 악역을 맡기시지 않은 감독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달리는 열차는 종착역이 있고 항해하는 배는 귀항지가 있다. 세상일에는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끝없이 집착하고 끝없이 거머쥐려 한다. 시기와 질투는 분노를 낳고 분노는 다시 분노로 증폭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무엇으로 끊어야 할지? 대안은 없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주님, 진리 안에서 참자유룰 주시는 당신만이 유일한 대안입니다.

 

 세상은 만만치 않다. 그리고 인생이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저 배 바다를 산보하고 / 난 여기 파도 흉흉한 육지를 항행한다” 중국의 시인 지센의 ‘배’란 시의 한 구절이다. 수많은 시를 읽고 또 교단에서 그것을 가르쳐 왔지만 이보다 더 인생을 깊이 함축하고 있는 작품을 발견하지 못했다. 인생을 얼마나 역설적으로 묘사해 놓았는가. 배가 바다를 항해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나의 고등학교 동창 중에 해양대학 항해학과 출신이 있다, 그는 반평생 배를 탔다. 그것도 그리스 선적의 유조선을 탔다. 평상시에는 선장인 자기가 키를 잡는 일이 거의 없다 하였다. 선장이 키를 잡을 때는 가장 위험한 때 즉, 태풍이 불거나 갑자기 돌풍이 불어 수십만 톤이나 되는 그 거선(巨船)이 가랑잎처럼 파도 위에 들어 얹혔을 때라고 했다. 한 순간의 판단을 잘못하면 배와 함께 모든 승무원은 물귀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은 만만한가? 이 시인은 인생이 세상을 헤쳐 가는 일이 배의 항해보다 더 어렵다고 본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을 배의 항해에 유추한 것이다.

 

 우리의 선장(船長)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길이며 생명이시니 나의 일생을 온전히 그분께 다 맡겨 버려도 좋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16:3)”하였으니 나는 나의 무거운 짐을 그분께 맡기고 그분이 주시는 평강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기만 하면 된다. 인생은 남의 불행에 함께 하며 울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해결해 줄 능력이 없다. 그것이 인생의 한계(限界)이다. 나는 나의 삶을 살아오면서 이 냉엄한 사실을 참으로 많이 경험해 왔다.

 

 나의 문제를 참으로 시원히 해결해 줄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를 지어셨기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전능하신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신문의 사회면에  흉악범이 경찰에 쫒기다가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숨어드는 기사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때 자기를 찾아온 아들을 어머니가 신고한 경우를 우리는 거의 찾아보지 못한다. 이를 두고 그 어머니를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도 별로 없다. 왜일까? 어머니의 사랑이 그 자식의 죄를 덮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죄로 고민하고 절망하며 끝없이 좌절하는가? 숨을 곳을 찾지 못해 애태우는가? 예수께로 돌아오라. 돌아오기만 하면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돌아오기를 주저할 때 나보다 먼저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돌아오는 한 영혼을 사랑하며 두 팔로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리고 자기의 피로 나의 죄를 덮어 주신다. 아멘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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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나는 요사이 참 행복하다. 왜냐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의 눈으로 똑똑히 보기 때문이다. 나의 자녀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생생히 일하시고 또한 한 젊은 목사님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기 때문이다.


2. 교회 부흥의 최우선 순위는 무엇인가

 교회는 부흥하여야 한다. 이는 절대 절명(絶對絶命)의 과제다. 교회를 세우신 이도 주님이시요 교회의 부흥을 명한 이도 주님이시다(마16:18) 그러기에 교회 부흥은 목회자들의 최대 관심사요 또한 최대 고민거리다. 그러나 무엇으로, 어떻게 하여야 교회가 부흥하는지에 대해서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상당수의 목회자들과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교회부흥의 주체가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교회 부흥을 위하여 열정을 가지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엄청난 착각이다.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께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마음을 시원케 하여 드릴 수만 있다면 교회는 저절로 부흥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3. 지상교회(地上敎會)의 한 모델을 만나다

 6월 21일 주일 오후 예배는 아주 색다른 예배였다. 이웃 교회와 찬양교환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양 교회의 찬양대 지휘자가 제안을 하여 이 일이 성사되었지만 나 개인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우리 교회를 방문해 준 목사님은 나의 자녀들의 주일 학교 시절의 신앙지도를 맡아서 지도를 해 준 분이시다. 나는 그분을 오래도록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분이 50여 명의 찬양대를 거느리고 우리교회를 방문해서 설교를 하시었다. 그분의 신앙 간증을 겸한 설교는 실로 나에게는 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그분의 간증을 잠깐 소개한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

 나는 지병으로 그 동안 섬기던 대도시 교회에서의 부교역자 직을 사임하고 가덕도 기도원을 찾게 되었다. 거기에서 원장님의 도움으로 기도원 사역을 맡아 충성되게 그 일을 감당하면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기도의 훈련을 쌓아온 지 2년 후에 부산으로 다시 나와 변두리 지역에서 개척을 시작하게 되었다. 교회 개척의 어려움은 여느 분과 다름이 없었지만 가장 큰 고민은 교회 설립의 목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의 머리에서는 수많은 상념들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때 섬광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한 단어가 떠올랐다. 바로 음식점이었다. 음식점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다다르면서 고민의 실마리가 단번에 풀리는 것이었다. 음식점은 무엇으로 승부를 거는가? 서비스? 인테리어? 목 좋은 자리?  물론 이들도 중요하다. 화려한 전문 음식점들을 보면 이것들도 얼마만큼 성공에 기여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이다. 맛이 좋으면 손님은 어디서든 찾아온다. 음식점은 맛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가? 나는 교회의 본질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로 예배다. 예배를 목표로 정한 나는 목회의 방침을 말씀과 찬양에 두었다. 첫째, 나는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전하되 가감 없이 전한다. 둘째, 나는 하나님의 인격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양한다. 이 두 가지의 방침을 붙잡고 나와 우리 교회 성도들은 말씀에 아멘하고 온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훈련을 거듭해 왔다..

 교회 개척한지 5년 만에 우리 교회는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던 건물을 비워주고 쫓겨나야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기도로 훈련된 나는 룻의 심정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 나에게 보아스를 붙여 주옵소서” 그랬더니 좋으신 하나님은 나에게 사람이 아닌 은행을 보아스로 붙여 주셔서 10억은 교인들의 헌금과 작정으로, 20억은 은행의 융자로 해결하여 개척한 지 13년째인 현재 교세는 지하 1층, 지상 5층의 780평 규모의 교회로 성장하여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에 목숨 거는 교회가 되었다. 우리 교회는 모든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다윗과 같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노래로 찬송하고 감사로 여호와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는 교회다.


4. 순서를 바꾸지 말라

 성경의 중심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가?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것이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최고의 행위는 무엇인가? 바로 예배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예배로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 드리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의 예배를 받으시고 은혜를 내려 주셔서 영혼 구원의 열정과 능력을 선물로 주신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신 후에 하신 세 가지 질문이 무엇인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먼저의 일이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그 해답을 우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밝히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다시 말하면 자기의 아들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으니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라 명하셨고 진실로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 당신은 영혼을 맡기신다.  

 목회자가 교회를 설립하거나 어느 교회로 부임하게 되면 목회 비전을 짜게 마련이다. 어떤 교회는 기도와 심방에, 어떤 교회는 양육과 교육에, 또 어떤 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목표를 둔다. 기도, 양육, 전도, 선교  등등 이 모두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이런 것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을 목회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쉽사리 목표 달성이 되지 않는다는데 고민이 있다. 성경은 밝히 말한다. 이는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며 능(能)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하였으니 나의 열정과 능력으로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오만을 버리라.

 나는 오랜 공직에서 퇴임한 후에 몇 년째 어느 국내 선교회에 부름을 받아 사역을 함께하고 있다. 내가 속한 선교회는 예배 회복을 통하여 개인을 회복하고 교회를 회복하는 일에 부름을 받아 8년째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귀한 선교단체이다. 약 30명 정도로 구성된 목회자와 사명자들이 팀웤을 이루어 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에 나의 개인 블로그를 만들어 집필로 영혼 구원을 위하여 힘쓰고 있다. 나는 영혼을 사랑한다. 내가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일도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내가 집필을 하려고 마음먹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이 말씀을 주셨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 주시느니라(고전8:2∼3)”

하나님은 동일하게 나에게도 네가 먼저 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 때 나는 미련 없이 붓을 꺾을 것이다. 

예배는 교회 성장의 동력(動力)이요 개인과 가정이 살 길이다. 주여, 오늘도 하루를 예배로 시작하게 하소서. 아멘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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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아 주시는 하나님

묵상 2009. 5. 24. 22:37 |
 

 한 달 전 저녁 무렵,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김창진입니다. 1977년에 저희들이 2학년 D반이었을 때 선생님께서 저희들을 담임해 주셨잖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철없는 저희들을 위하여 애쓰신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저희들이 이번에 선생님을 모시고 실로 32년 만에 반창회를 하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며칠 후에 선생님 댁을 방문하겠습니다. 멀리 뉴욕에 있는 봉집이도 오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선생님 찾아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내가 브니엘 고등학교에서 근무한 33년 동안 가장 잊지 못할 추억을 간직했던 학생들이라면 바로 이 2학년 D반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브니엘 학교에 근무한 지 4년째 되는 해였고 한 학급당 65명을 배정받아 그야말로 콩나물시루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수업하던 시절, 그해에는 한 해 동안 반이 두 번이나 바뀌었던 해였기도 했었다. 학년 초인 3월에는 한 학년을 우열반으로 나누어 편성하였으나 열반 학생의 학부형들의 빗발치는 비난과 상부기관에의 진정으로 급기야 학교가 감사를 받게 되고 시정명령을 받아 6월에 다시 반 편성을 해서 한 학년 열 개 반을 모두 보통반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반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우리 반 학생들이 스스로 이렇게 불렀다)였다고 할까.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였다. 1974년 고교 평준화 이후 우리 학교는 대입 진학 성적이 월등하게 좋아 서울대 진학 전국 10위권에 들어 학생들의 자부심도 대단했지만 학부형들의 열성도 가히 굉장하였다. 그럴수록 담임의 책무는 무겁고 힘든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학년 D반은 학급 장악이 정말 만만하지 않았다. 성적이 탁월한 학생도 많았지만 소위 문제아로 지목된 부적응 학생이 아주 많았다. 개중에는 불량서클에 가입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폭력과 각종 비위행위를 자행하는 아이들이 육, 칠 명이나 있어서 골머리를 여간 썩이는 게 아니였다. 그야말로 학급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이틀이 멀다하고 사고가 빈발하였다. 다른 반 학생들을 구타하고 금품을 갈취하는 사건 등등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런데도 한편 감사한 것은 가정환경이 좋고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 가정적으로 어렵고 공부에 쳐지는 자기 동기들을 끔직이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1년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정말 최선을 다해서 학급을 경영하였다. 문제아들을 붙잡고 밤을 새워 상담하고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며 마음과 몸을 함께 하였다. 다른 반에서는 불량서클에 가입한 학생들을 다른 학교로 전학을 보내거나 자퇴를 종용한 사례도 많았지만 나는 끝까지 함께 안고 간다는 생각으로 잘라내는 일을 하지 않았다. 나의 교육철학은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였다는 생각과 함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하나님의 걸작품을 한 순간의 실수나 과오로 말미암아 미리부터 그 밑둥을 자를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먼 훗날에야 안 일이지만 나의 이 마음을 하나님이 아시고 기뻐하셨다는 일이요 또한 그때 나의 제자들이 그들도 성인이 되고 아들 낳고 딸 낳아 기르면서 알아주더라는 사실이었다. 여하튼 나는 나의 하나님께 무한 감사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이 홀로 영광을 받으소서.”

 
 5월 9일, 참으로 이날은 하나님이 나에게 갚아 주시는 날이었다.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제자들을 만나는 날이다.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이후로 종종 잠을 설치곤 하였다. 이들도 이제는 졸업한지 30년이 되었으니 나이 50이 되었을 테고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었으니 어떻게들 변해 있을까? 가정은 어떻게 꾸리고 자녀들은 얼마나 두었을까?  다들 훌륭히 자라서 사회에 중요한 한몫을 감당하고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설레는 날들이었다.

낮 12시에 집으로 찾아온 제자의 차를 타고 산성에 위치한 만남의 장소로 올라가니 제자들이 마당에 나와서 일렬로 도열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나를 맞아주는 제자들 중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이들도 몇 있었지만 얼굴은 예전 그대로였다. 나는 참으로 반가웠다. “얘들아, 잘 있었나? 정말 보고 싶었다.” “선생님, 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잘 키워 주셔서 우리도 올곧게 잘 자랐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나는 제자 한 명 한 명을 포옹해 주면서 그들에게서 정말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그 제자들이 다 모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 순간 32년 전의 그 아이들을 보듯이 감개가 무량하였다. 나는 감사의 눈물을 5월의 신록 속에 담아두면서 제자들과 못다 한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나의 하나님이 이 순간을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하니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실로 32년 만에 거두는 열매가 아닌가! 당시에 학급반장을 맡아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봉집이가 왔다. 그것도 태평양을 건너 단숨에 달려왔다, 친구와 스승을 만나기 위해. 이쯤 되면 자랑하지 아니하고 어찌 배길 수 있으랴. 2학년 D반은 정말 멋진 아이들이고 나는 정말 축복받은 선생이 아닌가!

“선생님,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 말은 나의 소중한 제자 봉집이의 말이다. 봉집이는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날 생각에 수 주 동안 잠을 잘 자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꿈에 나를 두 번이나 보았다고 고백하였다.

 
 애들아, 나는 너희들이 정말 소중하다. 너희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나의 제자요 이 땅의 자랑스러운 국민이다. 부디 모교의 교훈을 잊지 말라.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면서 조국과 민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정직과 성실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임을 잊지 말고 감사하며 살아 풍성한 의(義)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히는 나의 자랑스러운 제자들이 되기를 나의 하나님께 기도한다. 다시 만날 때까지 역사를 창조하는 멋있는 삶을 살기를, 안녕 (2009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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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은 아름답다

비전 2009. 5. 1. 13:40 |
 

1. 나의 도전

 이사를 하려고 서재를 정리하던 중 나의 눈에 띄는 조그만 책자의 표지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나는 1%의 가능성에 도전한다’ 는 책자였다. 나는 갑자기 얼굴이 상기되면서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용암처럼 분출하는 것을 느끼면서 이 책자가 어떻게 내 서재에 있게 되었는지를 더듬기를 시작했다. 꽤나 오래 전인가 보다. 졸업한 어느 제자가 나에게 건네 준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는 봉투채로 준 서류 속에 묻혀 있었기에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 얼마나 나를 설레게 하는 말인가. 나에게 도전이란 말만큼 나를 고동치게 하는 말은 없다.

 내가 살던 고향은 마을 앞으로는 더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는 실개천이 휘돌아 흐르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 뒤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있고 그 산자락 끝에는 어느 문중의 무덤인지 모르는 능 같은 무덤들이 즐비하게 엎드려 있었다. 우리들의 놀이터인 이곳에서 나는 마을 밖으로 멀리 벋어나간 길을 따라 상상의 날개를 펼쳐볼 때가 많았다. 저 길 끝에는 또 어떤 세상이 있을까 하고. 그러다가 나는 항구가 있는 도시로 옮겨가게 되고 초등학교 시절 항구로 들어오는 외항선들을 보면서 바다 끝에 있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무척이나 동경하게 되었다. 나는 뱃고동소리를 참 좋아한다. 그래서 항구를 좋아하고 항구가 있는 도시에 내 인생의 닻을 내리고 내리 사십 년 이상을 살아왔다. 수평선 너머로 배들이 사라져가고 수평선을 넘어 배가 항구를 찾아든다.

 계절의 여왕 5월이 오고 있다. 아카시아 꽃이 휘들어지게 피고 꿀벌들이 윙윙거리는 신록의 계절이 오면 나는 꼭 생각나는 게 있다. 그때 그 벗들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몇몇 벗들과 함께 영화 ‘자이언트’를 보러 갔다. 영화 속의 텍사스는 무한제로 넓어 보였다. 푸른 초원에서 풀을 뜯는 소떼들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들 중 누군가가 갑자기 옆 친구의 어깨를 툭 치면서 이렇게 외치는 것이 아닌가, “야, 우리들도 언젠가 반드시 미국 간다. 알았지?” 그때 그 벗들 중에 태반이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다.

 나는 그 후 결국 미국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도 아련한 미련은 남는다. 나는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나의 제자들에게 심어주려 하였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심어주려 애써 왔다. 지금은 제자들이 사회 각개 각층에 나아가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내가 근무한 학교의 교훈은 아마 학교 교훈 중에는 가장 길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지금도 이 교훈을 생생히 기억하면서, 나의 열강(熱講)탓에 자기 앞으로 튀어가는 침 세례를 맞아가면서 내 앞에서 수업을 받던 제자들을 추억한다. “1.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련다. 2.나는 마음껏 뛰놀고 마음껏 공부하는 사람이 되련다. 3.나는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웃는 자가 되련다. 4.나는 조국과 민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 내가 처음 이 학교에 부임하여 수업에 들어갔을 때 교실 한쪽 켠에 걸린 액자 속에서 발견한 이 글귀가 나를 온통 사로잡았다.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면서 내가 올 인해야 할 곳이 바로 여기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나의 삶은 열정 그 자체였다. 주당 서른 시간 가까운 살인적인 수업이 고달프지 않았다. 정규 수업, 보충수업, 연이어 계속되는 서울 연 고대 특별반 특강 등들 마치면 밤 9시가 넘어서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일과가 끝난 게 아니다. 다시 제자들과 개인 상담이 시작된다. 일과를 다 마치고 귀가하면 자정이 가깝다. 나는 나의 자녀들을 거의 돌보지 못했다. 자녀 교육은 매번 아내의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자녀들은 정말 훌륭히 자랐다. 이게 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나의 아내의 헌신적 수고의 덕분이다. 나의 아내는 오로지 믿음과 기도로 자녀들을 양육하였다. 한없이 자녀들에게 베풀기만 하였다. 결국에는 나의 하나님이 나와 아내에게 다 갚아 주셨다. 아내에게는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하나님 당신의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시간과 건강을 허락하셨고 나에게도 갚아 주셔서 나의 분야에 최고가 되게 하시고 지금도 나의 달란트를 사용하시어 집필과 특강으로 청소년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나를 사용하시는 공평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2. 믿음의 파이를 키우라

 오늘의 젊은이들의 병폐(病弊)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좌절한다는 것이다. 내가 열정을 가지고 가르치던 7,80년대의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나의 제자들 중에는 기막힌 어려움에 처한 학생도 많았지만 적절한 동기 부여를 하였더니 역경을 거뜬히 이기고 자립하는 것을 보아 왔다. 자생력이 약한 원인 중의 하나가 저(低) 출산 시대의 자녀에 대한 과잉보호가 아닌가 생각한다. 실천적 교육방법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시행착오(施行錯誤)의 방법이다. 자녀들은 자기 스스로 자라가는 방법을 터득하여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열정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 이 열정과 의지를 끊임없이 부모가 먼저 실천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자녀를 하나님이 걸작품으로 만들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 당신이 만들었다면 만든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또한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 내 자녀를 어디에 쓰기를 원하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부모님이 있다면 아마 최고의 부모가 아닐까?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 단연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使命)을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일에 도전(挑戰)하는 일이다. 그 일이 곧 천직(天職)이다. 천직을 발견한 사람은 믿음을 가진다. 전능자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맡겼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전능자가 맡겼으면 그 끝은 전능자 당신이 책임진다는 믿음을 또한 갖는 것이다. 그러기에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너의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였다. 한 젊은이가 이 말씀에 목숨을 걸었더니 오늘날 세계 최고의 명문인 옥스퍼드 대학이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전능자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지난여름 어느 날 휴전선 북쪽에 위치한 신도시 일산의 종합 운동장 한 쪽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서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는 창세기 18장 14절의 말씀이 내면의 책망으로 들려오면서 성령이 강력하게 나에게 감동을 주시었다. 나는 소스라쳐 놀라며 나도 모르게 “주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나이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 비로소 믿음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 순간을 잊지 못한다. 말씀은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며 사건이다. 천지를 창조한 것도 사실이며 동정녀 탄생도 사실이다. 말씀을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잃어버린다. 믿음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을 의미한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하신 주님의 말씀의 참 의미를 아는가?  전능자가 나를 통하여 일하시겠다는데 왜 나는 응답하지 못하는가?  


3. 믿음의 씨앗을 말로 심으라.

 말은 나를 지배한다. 독일의 언어 철학자 헤르더는 말은 인간의 이성뿐만 아니라 여타 모든 정신적 기능까지 지배한다고 말하였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품고 있던 잡다한 생각들은 말로 표현하기 전에는 유동적이다. 그 유동적인 생각들이 말로 표출될 때 비로소 확정된다.

청세기 1장에서 선언의 원리를 배우라.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 이 얼마나 드라매틱한 천지 창조의 역사인가! 말은 한 사람의 전(全) 인격이다. 그러기에 좋은 말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 좋은 말은 자신의 삶을 궁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말을 의미한다. 긍정적인 말을 심으라. 그리고 적극적인 말을 심으라. 나는 날마다 잘 된다고 자신에게 말하라. 말은 사람의 습관까지도 바꾸어 버릴 수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잡다한 책들은 충고하기를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생각을 바꾸라고 말하지만 이는 옳지 않은 이론이다. 말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 말은 생각을 지배한다. 이를 증명하는 성경적 근거를 민수기 14장 28절에서 찾아보자.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시행하리니” 라는 이 말씀보다 더 명쾌한 해답이 어디에 있는가?  말대로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언하신 진리이다.


4. 열정를 가지라

 열정은 노력과 자기 관리의 원동력이다. 아무리 훌륭한 도전 정신을 가졌어도 열정이 없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언젠가 신문에서 가수 페티 김의 기사를 읽었다. 그는 1928년생이다. 만 70세에 ‘노래하는 인생 50주년’ 기념 공연을 세종 문화회관에서 거행하고 연이어 전국 투어에 나서 하루 2회(1회 2시간)를 거뜬히 소화해 내며 청중을 사로잡았다는 기사는 나에게 정말 큰 도전이었다. 나는 아직 그보다 다섯이나 젊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멋있는 사람 하나를 들라면 나는 갈렙을 들고 싶다. 그는 여호수아와 동격이다. 그러나 자기의 권위와 권리를 내세운 적이 한 번도 없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갈렙은 나이 85세에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요청한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지치지 않는 열정을 가진 갈렙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생의 사표(師表)가 아닌가.


5. 나의 도전은 계속된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롯데 그룹 신격호 회장은 올해 87세다. 그가 지금 한국의 디즈니랜드를 꿈꾸고 있다. 잠실에 제2 롯데월드를 짓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 원래는 중국 상하이나 베이징에 지을 계획이었지만 중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굳이 한국을 고집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란다. 롯데 그룹 기획 담당 간부와 기자의 대담 내용을 들어 보자.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자금이 얼마나 소요됩니까?”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아마 천문학적일 것입니다.”

“이윤 창출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이윤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입니다. 굳이 한국을 택한 이유가 있다면 회장님은 오늘의 롯데가 있게 한 조국에 보답하려는 의미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멋있는 사람도 많다. 나는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훗날 나의 자녀들이 “아빠는 참 멋있는 삶을 살았어” 라는 말을 듣고 싶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네게 더 큰 일을  맡기리라. 내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까지 나의 도전은 계속된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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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난제 풀이

묵상 2009. 4. 23. 10:41 |
 

1. 화장실에 목숨 건 사나이

 동네 공동변소에서 엉덩이를 까고 앉아 시원스레 큰것을 보고 있는 한 소년은 이제사 온통 이곳이 자기 것이 된 듯이 의기양양하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내 차례를! 소년은 늘상 차례에서 밀려나곤 했으니까. “야, 임마, 너는 나중에 봐. 쬐그만 꼬마가 왼 새벽부터 변소에 오기는.” 소년은 날마다 어른들의 핀잔만 받았다. 어느 날인가 엄마가 어쩌다가 생콩을 갈아 별식으로 칼국수를 빚어 줄 때면 소년은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진다. 먹고 나면 그날은 어김없이 뱃속이 전쟁터로 변하기 때문이다. 설사다. 변소에 가야 한다. 소년은 배앓이를 참지 못한다. 매번 먹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뿐 소년은 또 생콩 칼국수를 먹게 된다. 어른들은 변소가 빨리 찬다고 야단들이다. 소년의 동네는 전쟁 통에 급조된 산동네다. 소똥같이 다닥다닥 들어붙은 판자촌이다. 그러기에 분뇨차가 오지 않는다. 소년의 소망은 온통 변소가 있는 내 집이다.

 시간은 가고 소년은 어느 듯 어른이 되었다. 산 너머 남촌에서 바람이 부는가 했더니 태평양 너머로 양풍(洋風)이 몰아쳐 변소가 슬그머니 화장실로 바뀌고 그 소년은 이제 어른이 되어 내 집 안에 아담한 화장실 하나를 갖게 되었다. 그 동안 강산이 세 번쯤 바뀐 것 같다. 구청의 정화조 차가 일 년에 한 번씩은 꼭꼭 집주인을 찾아온다. 참 세월이 많이도 변한 것 같다. 이제는 신 새벽에 동네 변소에서 줄 설 일은 없어졌다. 어른들의 핀잔을 받을 일도 없다. 화장실에 앉아서 느긋하게 여유를 즐겨도 된다.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소년은 어느 새 중년의 신사가 되었고 세월은 바뀌어 남북으로 길게 벋은 고속도로 위로는 까만 세단들이 꼬리를 물고 시원스레 달린다. 이제 중년의 신사는 다시 새 소망을 가져 본다. 화장실이 안방에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식구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식탐(食貪)을 마음껏 부려도 좋다. 왜냐하면 화장실이 보호해 주니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나와 화장실만이 알뿐이다. 한밤중이든 신 새벽이든 내가 갈 때면 언제든 맞아주니까 말이다. 말 타듯 양변기에 의기양양하게 앉아서 볼일을 시원히 보고 손을 뒤로 돌려 엄마의 젖꼭지 같은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모든 비밀은 물과 함께 흘러가 버린다. 아, 좋은 세상이다. 나는 이런 세상을 꿈꾼다.

 시간은 또 저만치 한참 달려가서 시속 300km의 고속 열차가 중년의 신사를 한 실버타운 앞에 내려놓는다. 중년의 신사는 이제 노신사가 되었다. 노신사는 자기 집 안방으로 들어가 화장실의 양변기에 겨우 걸터앉는다. 거동이 몹시 불편한 모양이다. 주름진 손등 위에는 점점이 저승꽃이 번져 나온다. 손이 조금 떨린다. 맞은 편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노신사의 목덜미에는 유달리 잔주름이 많다. 깊게 패인 얼굴의 주름살은 꼭 시골 동네 한가운데 터줏대감처럼 엉버티고 자리한 사백 년 된 느티목 밑둥의 주름살 같다. 아내더러 신문을 가져다 달란다. 신문의 문화면을 훑어본다  거기에는 낯선 작가의 꽁트 한 편이 실려 있다. ‘화장실에 목숨 건 사나이’ 천천히 기사를 읽어가던 노신사의 얼굴에 갑자기 경련이 일어난다. 안면 근육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기 시작한다. “ 아, 나는 정말 다 얻었는가? /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오히려 다 잃어 버렸어.”


2. 난해한 문제에도 해답은 있다

 며칠 전에 아내가 인터넷의 개인 블로그를 뒤적거리다가 거기에 실린 이야기를 읽고 나에게 들려준 것인데 자꾸만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아 하나님께 묻기를 계속하였더니 나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있어 우리세대와 같이 어두웠던 시절을 살아오던 때를 회상하면서 그 이야기를 꽁트로 잠깐 재구성해 보았다. 거울 앞에서 이 노신사는 왜 끝없이 절망하는가? 화장실이 가치 없다는 말도 아니요 화장실에 목숨 거는 일이 무가치하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이 노신사는 자기가 진정 목숨 걸어야 할 곳에 걸지 못했다는 자괴감(自愧感)과 절망감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정답을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나는 유달리 수학을 못했다. 그러기에 나는 수학을 싫어했고 수학이 두려웠으며 수학 시간은 나에게는 고문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소위 명문고였기에 학교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어른이 빨리 되고 싶어 교복을 거부하고 사복을 고집하던 그 때에도 상의(上衣) 중에 남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어느 한 곳에는 언제나 학교 뱃지를 달고 다녔고 그것이 결국 증거물이 되어 학교 훈육주임(생활 지도 부장선생님)에게 교외지도에 걸려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자연히 국∙영∙수 세 과목은 필수 과목으로 다들 열심히 하였다. 나는 국어 영어 과목은 전교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았지만 수학은 만점이 100점이면 25점을 매번 넘지 못했다. 한번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어느 여름날 집에서 수학 문제를 풀다가 너무나 풀리지 않아 머리를 벽에다 사정없이 박으며 내 머리를  탓하면서 나를 낳아준 부모마저 원망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는데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수학 문제집을 바깥에다 냅다 던져 버렸더니 종이가 퉁퉁 불어 다시는 못쓸 줄 알았더니 며칠 뒤 다시 햇볕에 말려서는 그 문제집으로 내 생애 처음으로 수학 점수 50점을 받는 쾌거를 거두고는 전교 모의고사에서 럭키 세븐(전교 7등)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수학 선생님이 이를 아시고 동정 점수를 주시곤 한 기억도 있다. 나는 이때 깨달을 것이 있었다. 대학에 갈 때는 수학이 없는 곳으로 가면 된다는 깨달음이었다. 결국 나는 우여곡절 끝에 국어 선생님이 되었고 너무나 자랑스런 나의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다. 나에게는 수학이 없는 전공의 선택이 내 인생에 정답이 된 셈이다. 나에게 이 길을 가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인생의 정답을 알려 주시고 그 길을 가게 하셔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날마다 나의 전공에 기쁨과 보람을 가지고 더 깊고 넓은 지식을 제자들에게 가이드해 줄 수 있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3. 감사가 해답이다

 지난여름 아들이 있는 수원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4층에 있는 아들의 원룸에서 슬리퍼를 신고 계단을 다 내려와서 1층의 마지막 계단을 밟다가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져서 왼쪽 엉덩이와 오른 쪽 팔목을 심하게 다친 것이다. 전날 저녁에 비가 많이 와서 미끄러운 대리석 계단을 더욱 미끄럽게 만들고 있었음을 내가 미처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였다. 넘어지면서 엉겁결에 오른 손을 짚다가 계단 끝부분에 오른 쪽 팔목이 부딪히면서 팔목도 다치게 되었다. 물 위에 넘어진 나는 너무나 아픈 고통으로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아들을 부를 만큼의 여력도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감사의 마음이 용솟음치며 나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나 자신에게 놀라고 있었다. 내가 그런 놈이 아닌데 이상하잖아. 평소 같으면 틀림없이 불평이나 원망의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을 터인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픈 통증의 신음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벌벌 기어서 4층까지를 되돌아 올라와서는 아들의 방문을 겨우 비틀었다. 이틀간을 아들의 방에 머물면서 자가 치료를 하는 동안 한 번도 불평의 말이 나오지 않았으니 나에게는 지금도 그 일이 불가사의하다. 아들과 딸은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지 않는다고 성화였지만 팔이 붓지 않고 다리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을 보고 뼈에는 이상이 없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나에게 감사의 시험을 치렀다고 자꾸만 생각이 되었다.

 문제에도 난이도(難易度)가 있듯이 세상의 삶에도 난이도가 있다. 세상에는 쉬운 삶을 두고 굳이 어려운 삶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어려운 삶이란 곧 꼬여 있는 삶, 뒤틀린 삶, 막혀 있는 삶이라 할 수 있다.  닫히다와 열리다, 뚫리다와 막히다 등 낱말에도 짝이 있다. 나의 삶이 막혔는가? 절망하지 말고 짝이 되는 반의어를 찾아보라. 막히면 뚫으면 되고 닫히면 열면 된다. 그러면 혹자(或者)는 나에게 이렇게 힐문(詰問)할지도 모른다. “이 바쁜 세상에 나하고 말장난하자는 거요? 그쯤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소? 시건방진 짓거리 그만 하시오.” 하고 말할지 모른다. 맞다. 이 정도 반의어 하나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라고. 문제는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나를 옥조여오는 엄청난 상황 앞에서 당황해 하고 주저앉을 뿐 상황 너머에 있는 해답의 길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막힌 것을 뚫어주고 닫힌 것을 열어주는 길 되시고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답답해 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의 전문가요 생명을 살리는 전문가이다.

 성경 누가복음 17장에는 열 명의 문둥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병을 치료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열 명의 문둥이가 모두 치료를 받았지만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인 한 명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다시 돌아와 감사를 드렸을 때 주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셨는가?  “이 이방인 이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 기록에서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감사를 돌리는 행위를 주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감사하는 자에게 주님은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주신 것을 보라. 문둥병을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 곧 죄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얻는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감사하지 않는 삶은 원망하는 삶이다. 성경 민수기 14장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원망했을 때 하나님은 이 백성이 나를 멸시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꼬이고 뒤틀리고 저주받은 삶이 될 수밖에 없다.


4. 감사는 훈련이다.

 성경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이 나온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은 권면이나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셨을까? 이는 범사에 감사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랜 훈련과 인고(忍苦)의 끝에 깨닫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게 당신의 아들을 하나님이 요구하신다면 선뜻 감사하며 순종할 수 있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순종은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만큼 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감사로부터 시작된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는 순종이 있기까지 그에게는 얼마나 많은 훈련과 인고의 세월이 있었겠는가!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이 명령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기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셨다. 우주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주님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신 연후에 십자가의 구원 사역에 순종할 수 있었다. 감사는 쉬운 삶으로 들어가는 열쇠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보장하고 하나님이 책임지는 삶으로 들어가는 열쇠이다. 우리 모두 쉬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감사하라. 억지로라도 감사하라. 그러면 당신의 삶에 기적이 일어난다. 감사는 축복을 불러오고 원망은 저주를 불러온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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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언

 나는 평상시 형식이나 의식 등 격식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나를 아는 한 선배는 “김 선생은 외모는 오리지널 ‘토종’인데 삶의 스타일은 전혀 아니야, 아마 미국에서 살면 딱 맞을 것 같애.” 하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한국같이 체면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나는 용케도 이 지긋지긋한 겉치레를 의도적으로라도 벗어던져 버리려고 몸부림쳐 왔다. 그러다보니까 어떤 때는 맞지 않은 옷을 입었을 때처럼 삶이 어색했던 때도 참으로 많았다. 지금은 그래도 얼마나 좋은가! 나의 개성시대에 나만의 라이프 스타일이 인정되고 내 소신대로 살아도 아무도 간섭하려 하거나 빈정거리는 사람이 없다.

 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먼 이국땅에서 고등학교 동문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푸른 초원에 가든파티를 열고 모인 동문들은 직업도 다양하였고 미국에 건너온 사연도 다양하였다. 그런데 미국이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눈치 안 보고 소신껏 살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자연히 나의 신앙생활도 남과 달랐다. 예배에도 의식을 싫어하고 삶이 예배라는 생각으로 예배를 꼭 교회에서만 드려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가진 적이 많았다.

 예배에는 시간이나 장소 혹은 목적에 따라 여러 종류의 예배가 있을 수 있겠으나 예배에 대한 인식이 바뀐 계기가 있었다. 워싱턴의 웰링턴 국립묘지에서 한국참전 기념비를 참배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은 하나뿐인 목숨을 이국(異國)의 형제를 위하여 고귀한 희생의 피를 흘려 준 미국인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란 아무런 대가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비문에 새겨진 글귀는 나를 더욱 숙연하게 만들었다. 아! 그렇다. 인생에 있어서는 매듭이 중요하고 역사에 있어서는 기념이 중요하며 그 기념물이나 기념비가 잊혀져가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게 하는구나 하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인생에 있어서 의식(儀式)의 중요성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되고 예배에도 의식(儀式)이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2. 예배의 본질

 예배는 인간이 찬양과 경배로 구원의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거룩한 행위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배에는 거룩함 곧 구별함이 있어야 한다. 구별함이란 일상적 삶과의 분리를 의미한다.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타당한 말이지만 삶이 예배란 말은 결코 옳지 않다. 구약시대의 예배를 깊이 살펴보면 하나님은 구별된 곳에서 예배를 통하여 자기의 백성을 만나셨다.


가) 장소의 구별

 하나님이 만나시는 장소는 일상생활 속의 공간이긴 하나 반드시 하나님이 그곳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셨음을 볼 수 있다. 제단을 쌓고 주위에 도랑을 깊이 파고 물을 도랑에 붓도록 명하셨다.(왕상18:30∼36) 이스라엘 민족은 초기 족장시대로부터 광야의 성막시대를 거쳐 가나안 정복 이후의 성전시대에 이르기까지 예배하는 민족으로 살아왔다. 가나안 정복 후 왕정시대를 맞은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은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던 성전 신앙에서 차츰 벗어나 삶의 현장에서 가까운 곳마다 산당을 지어놓고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시작하면서 급속히 타락하여 갔다. 이 산당 신앙은 편의주의요 세속주의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하나님은 이를 격노하셨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가장 잘못된 신앙 사상이 편의주의라 할 수 있다. 이 사상은 주일 성수를 약화시키고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 모범을 거부한다. 이는 사악한 사탄의 궤계(詭計)임을 밝히 알아야 한다. 혹자(或者)는 이렇게 강변한다. 성전 예배를 강조하는 것은 구약 시대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하면서 지금은 신약 시대라고 자기들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말씀하시고 내 집을 너희가 도둑이나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도다(막11:17)” 라고 책망하신 기록을 보라. 물론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는 어떤 건물을 의미하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교회는 총회 또는 회중이라는 개념으로 헬라어 에컬레시아의 어원은 (세상 밖으로) 불러낸 무리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를 정의하면 교회는 거룩한 무리인 성도들의 공동체라는 뜻이다. 그러나 주님이 교회를 창시하셨고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거룩한 무리가 모이는 구별된 장소 즉 교회당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지배하는 곳으로 그곳을 주님이 중요시했었고 주님도 성전을 인정하셨다. 따라서 예배의 공간은 성령이 임재하도록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교회당이 가장 적합한 예배의 장소라고 확신한다. 그것을 쉽게 증명할 수 있는 간단한 사례를 들어 보자. 우리는 어떤 때 심령이 답답하여 기도하고픈 욕망이 찾아올 때를 느낀다. 그때 우리는 산 기도를 가거나 기도원을 찾아간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기도가 잘 되지 않고 두려움이 엄습하여 오거나 잡생각이 들어 짜증이 날 때가 있다. 이것은 악령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기도가 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 눈이 이곳을 향하고 내 마음이 이곳이 머물리니 네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이곳에서 너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리라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이 향하여 계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머물러 계시는 곳에서 기도하여야 한다. 물론 전능자 하나님은 우주의 어느 곳에도 편만(遍滿)하시지만 예배의 장소로는 성령이 임재하여 계시는 교회당이 가장 적합하다.


나) 예물(제물)의 구별

 예배에는 반드시 드림이 있다. 마음의 드림, 몸의 드림, 시간의 드림, 예물(물질)의 드림 네 가지가 있을 것인데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신령과 진정으로 마음을 드려야 하고 내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하고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구별하여 드림이 바람직하겠다. 그러면 제물은 어떠한가? 구약 시대에는 제물로 드려지는 짐승은 저는 것, 눈 먼 것, 얼룩진 것, 병든 것은 제물에서 제외되었다. 반드시 온전한 것이어야 하였고 굽이 갈라진 것, 되새김질하는 짐승 곧 분리된다(구별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소, 양, 염소가 제물의 대상이었다. 그러기에 예물도 즐거운 마음으로 구별하여 정성껏 드려야 할 것이다. 액수의 과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성이 문제라고 본다. 

 

3. 예배의 3요소

 예배에는 찬양과 설교와 기도가 있다. 예배를 지상(地上) 예배와 천상(天上) 예배의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천상예배에는 찬양만 있다 하겠다. 이렇게 보면 예배의 하이라이트는 찬양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배에서 설교를 가장 중요시하고 찬양을 등한시할 때가 굉장히 많이 있다.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유교의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엄숙함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유교는 죽은 조상을 추모하고 조상신을 부르는 초혼(招魂)적 의식 행위이다. 이와 결부된 초기 기독교 예배는 필연적으로 정적(靜的)이며 엄숙하였다. 예배의 역동성(力動性)이 없는 죽은 예배가 되어 버렸다 하겠다. 설교는 구약 시대의 성경 강론에 해당한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말씀은 생명이요 능력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선포될 때 생명이 살아나고 치유와 회복의 능력이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설교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찬양 또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은 반드시 찬양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찬양에는 노래와 춤이 있어 몸으로 드리는 몸 찬양을 흔히 워십이라 부른다.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조의 찬양은 춤이다. 사무엘상 6장 16절 이하를 보면 오벳에돔의 집에 머물던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왕이 자기의 성(城) 다윗 성에 모셔올 때의 기록이 나온다. “궤가 성으로 들어올 때에 왕이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춤춘지라” 이때에 왕의 아내 미갈이 이를 업신여기다가 저주를 받아 일생 동안 자식을 낳지 못한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示唆)하는가? 이로 보아 예배에서의 찬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할 것이다.


4. 예배와 내려놓음

 나는 2007년 8월에 삼십삼 년 간 근무해왔던 정든 학교 교정을 등지고 명예퇴직을 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좇아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있던 나에게 아내가 이렇게 제안하였다. “여보, 내가 동역하고 있는 선교회에 와서 먼저 예배부터 몇 개월 드려보는 게 어떻겠어요?” 나는 이에 선뜻 응하기로 하고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로부터 일 년 육 개월 동안 나는 한 주도 빠짐없이 예배 훈련을 받았다. 내가 참석한 선교단체는 생수 은혜 선교회라 이름하는 국내 선교단체로서 예배 회복을 위하여 설립된 단체이다. 매주 전국을 순회하면서 1년 52주를 월요일 밤부터 목요일 저녁까지 모두 열 번의 집회를 갖는 모임으로서 예배의 회복을 통하여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교회와 사회를 살리고 회복하는 일을 사명으로 7년째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선교회의 예배 성격은 아주 길다는 것이다. 한 번의 예배가 평균 세 시간 이상이다. 나는 이곳의 예배에서 정말 놀라운 체험과 변화를 겪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현대교회가 예배 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대형교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예배의 시작부터 마침까지 한 시간 내외라고 보면 된다 나는 단언컨대 예배의 시간과 내려놓음은 정비례한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왜 내려놓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짐을 내게 맡기라” 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시며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시지만 정작 내려놓고 쉼을 얻는 자는 드물다. 왜일까? 생각의 충돌 때문에 내려놓지 못한다. 생각의 충돌이란 무엇인가? 나의 생각, 지식, 교만, 자존심, 고정관념, 옳음(신념) 등과 하나님의 생각의 충돌이다. 이 충돌은 결국 대형 사고를 일으킨다. 갈등과 번민은 분노로 증폭되고 급기야는 나를 온통 불살라 버리기까지 한다. 이 생각의 충돌에서 해결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예배를 통하여 젖어져야 한다. 발목만 적시면 안 된다. 무릎으로 발목을 거쳐 허리에까지 물이 차오르게 맡겨야 한다. 물이 나를 완전히 삼키어 내가 물속에서 헤엄을 칠 수밖에 없을 때까지 나는 물속에서 젖어져야 한다.  물속에서 나는 죽고 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기까지 나는 젖음의 훈련을 하여야 한다. 젖어짐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면 젖게 되고 젖어지면 벗게 되어 있다. 내가 그렇게도 내려놓기 싫어했던 것들, 벗어버리기를 거부했던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엔가 저절로 내려지고 벗어지게 된다. 이것이 예배의 기적이다. 나는 이 훈련을 통하여 나의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웠다. 나의 소원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당신이 계시하시는(열어 주시는) 하늘의 비밀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을 주시며 간절히 자기를 찾는 자에게 만나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하셨으니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 내가 예배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받기 원하시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만능(萬能)이다. 아직까지 마스터키를 갖지 못했는가? 창세기(35:1∼5)에서 그 해답을 찾고 하나님의 만능키를 가지라.


5. 주인을 바꾸라 

 예배의 훈련은 궁극적으로 주인을 바꾸는 작업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나의 주인이었으나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그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나의 주인은 나를 창조하신 그분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인은 나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착각도 자유라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야 어찌하겠는가. 문제는 기독교인들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진정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모르기에 진정한 누림의 자유를 즐기지 못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말씀은 우리를 죄악의 종에서 해방시킨 감격의 메시지다. 그러면 진리가 무엇인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신 이가 누구인가? 곧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진리이시니 예수 안에서 생명을 소유하라.


6. 나의 벧엘은 어디인가

 아버지로부터 기어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낸 야곱이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밧담아람으로 도망갈 때에 광야에서 그를 만나 주신 하나님, “네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말씀하신 이가 지금도 나를 벧엘로 부르신다. 나의 벧엘은 어디인가? 나는 나의 축복의 통로인 벧엘에서 예배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나는 세 가지의 질문을 하고 싶다.  

맺힌 것이 있는가  /  예배에서 풀어라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는가  /  예배부터 드려라

응답받을 일이 있는가  /  예배에서 승부를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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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학 작품 속의 에로스


이 탑의 코니스 위에는 기다란 깃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들의 눈길은 이 깃대로 쏠렸다.

시계가 여덟 시를 친 지 몇 분 뒤에 무엇인지

깃대 위로 느릿느릿 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검정 깃발이었다.


※ 검정 깃발:사형을 집행했다는 표지


 위의 지문은 19세기 말 영국 작가 토마스 하디의 소설〈테스〉290쪽에 나오는 글귀이다.

이 소설로 인하여 작가는 붓을 꺾을 수밖에 없었지만 시•공간을 초월하여 21세기를 살고 있는 이방인인 나에게도 영원히 불멸의 감동으로 다가오기에 여기 나의 글의 서두에 잠깐 인용하게 되었다.〈테스〉는 당시의 영국 사회의 도덕적 편견과 사회적 인습, 인간의 운명 등 아주 복합적 주제를 작품의 배면(拜面)에 깔고 씌어진 작품이지만 내가 이 글에서 가장 주목하고자 하는 이슈는 한 남자의 에고이즘에 희생된 한 여인의 삶의 역정이다.


2. 어느 노교수의 강연

 

 나의 둘째 딸이 대학 입학 OT에 다녀와서 나에게 들려 준 말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대학 새내기가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대학 강당에 집결하여 있는 젊은이들에게 한 노교수가 등단하더란다. 사회자의 멘트에 의하면 이 학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기 교수라는데 등단하여 내뱉는 몇 마디가 심상치 않다.

“여러분은 이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다음의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에 목숨을 거십시오. 반드시 가치가 있습니다.”

“첫째, 후회 없이 마음껏 노십시오.”

“둘째, 후회 없이 마음껏 사랑하십시오.”

“셋째, 후회 없이 마음껏 공부하십시오.”

 나는 지금도 이 노교수의 말을 마음에 두고 있다. 그 당시 나의 딸의 말을 들었을 때는 이 사람이 젊은 후학(後學)들에게 시의적절하지 않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나 하고 마음속에 이상야릇한 분노가 일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기막힌 강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사랑에 목숨을 거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 아픔과 분노로 밤을 지새우는 자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이혼율 1위의 불명예 국가이다. 이대로 두어도 좋은가? 이혼율을 낮출 만한 방안은 없는가? 가을이면 낙엽은 어디서나 지천(至賤)으로 많다. 그러기에 그 낙엽이 있을 곳에 있을 때 빛을 발한다. 내장산 단풍은 가을의 진수성찬이다. 그러나 미화원 아저씨의 빗자루에 쓸려 가는 낙엽은 피로의 퇴적물(堆積物)일 뿐이다. 이 세상에는 온통 사랑으로 넘쳐난다. 그러나 빛을 발하는 사랑은 얼마나 되는가? 나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랑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 나의 사랑은 여전히 빛을 발하는가?


 3. 에로스의 본질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랑을 네 가지로 나누었다고 한다. 아가페, 스톨게, 필레오, 에로스.

이 분류를 보면 에로스는 사랑 중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한다. 나는 최근에 참으로 존경하는 벗을 잃었다. 언제나 믿음의 상담자요 인생의 동반자로, 만나지 않아도 기억만 하면 즐거운 벗이었다. 오랜 동안 투병 생활을 하다가 얼마 전 두 아들의 간을 받아 이식 수술을 하였지만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버지를 위하여 자기의 귀중한 장기를 드린 두 아들의 섬김을 보면서 스톨게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 장한 두 아들을 통하여 나의 벗을 생각하게 된다.

 에로스는 조건적 사랑이다. 그러기에 사랑을 준 자는 준만큼 받기를 원한다. 무조건적이라는 말은 에로스에는 적합하지 않다. 하나님의 무한 사랑, 어버이의 주는 사랑, 형제간의 나누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에로스에 있어서의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에로스의 또 다른 측면일 뿐이다. 내가 상대에게 베푼 만큼 나도 상대로부터 받기를 기대하는 것이 에로스의 속성이다, 몫이 돌아오지 않으면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가 싹트며 분노는 둥지를 틀고 내 속에서 자리 잡게 되면서 자라가게 되고 언젠가는 증오로 폭발하게 된다.   


4. 성경적 결혼은 축복이다.

 

 사랑만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던 결혼 생활도 세월이 가면 ‘생활’이란 방패 뒤에 나를 교묘히 감출 수 있게 되면서 고운 정은 어느 새 미운 정으로 자리바꿈하고 허울 좋은 세월 속에 길들어져 있는 나는 사악한 한 마리의 포식자(捕食者)로 바뀔 뿐이다. 나는 결국 이런 자였나 하는 자괴감(自愧感)에 빠지면서 자신의 추한 모습에 끝없이 절망하고 분노하면서 나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결혼 생활을 오래 한 남편이나 아내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당신은 결혼 생활을 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상대에게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란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는가?” 라고. 우리는 언제 이런 이방인의 감정을 느끼는가? 상대방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정체성(正體性)을 깨달았을 때 즉, 인간은 궁극적으로 타락한 존재요 이기적 존재라는 것, 자기 생존을 위하여 철저히 상대를 이용하려는 에고이즘을 보았을 때 다시 말하면 위장된 사랑을 보았을 때 당신은 상대에게서 소름끼치도록 차가움을 느끼며 끝없이 절망하게 된다.

 그러면 잠깐 시각을 바꾸어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에 관한 내용은 어떠한가를 한번 살펴보자. 지혜자 솔로몬은 이렇게 말한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전9:9)” 결국 성경은 결혼이 해 아래서 의미 있는 삶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엡5:31∼32)” 라고 말하면서 결혼의 성스러움을 강조하였다. 결국 결혼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5. 행복의 용광로는 결코 꺼질 수 없다.

 

가) 열정을 가지라

 나는 올해로 아내를 만난 지 41년을 맞는다. 7년 간 연애하고 34년을 부부로 살아왔다. 나를 아끼는 어느 인생 선배는 연애를 하려면 오래 하라 그러면 다시 헤어지는 일은 없다는말을 했다. 정말 꼭 맞는 말이다. 연애를 오래 하다보면 장점과 단점이 다 보이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상대의 단점이 보이면 실망하게 되고 자신이 미워지기도 하지만 어느 새 상대가 나에게는 거울이 되어 그 단점이 나의 것으로 확인되어지며 상대에게 미안해지고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하다가는 끝내는 둘은 하나가 된다. 그러기에 미운 정도 정이라 하지 않는가. 입 안의 혀도 물릴 적이 있다는데 40여 년 동안 어찌 부부 간에 위기가 없었겠는가. 오랜 세월 동안 굴곡도 많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서 순결하게 살아오려고 노력하여 왔다. 고지식하리만치 진실하게 오직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여 왔다. 위기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집중할 수 있었다. 말씀이 나를 지켜 준 셈이다. 요셉을 지켜 준 말씀은 나에게도 능력으로 다가왔다. “내가 어찌 여호와 앞에 범죄(犯罪)하리이까(창39:9)” 이것은 신전 의식(神前意識)이다.

 행복은 거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주 안에서 계속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앙을 가지고 순결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부부간의 갈등으로 정말 힘들 때가 있을 것이다. 이때마다 좋은 것만 생각해야 한다. 첫 만남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려보라. 첫사랑의 아름다움도 되씹어보라. 여건이 허락되면 추억의 그 장소에도 한번 들러보라. 얼음장 아래에서 새봄을 준비하는 미나리의 새싹처럼 당신들의 사랑의 새순은 얼어 죽지 않고 그날 그곳에서 새봄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이러다 보면 당신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들여오는 당신도 소스라쳐 놀라는 이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데!” 이 순간 행복에의 열정을 가지고 사랑의 용광로를 다시 지피라.


나) 배려하고 존경하라

나를 지으신 자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않음을 아시고 돕는 배필로 하와를 지어 주셨다. 부부간의 사랑을 성경적으로 정의하면 배려와 존경이라 할 수 있다. 배려를 일방적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대로부터 받음이 없이 무한정 베풀 수는 없다. 각자에게 부족한 부분을 서로가 보완하여 주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면 언젠가는 상대방도 나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 지어진 상대방을 존경하는 것이다. 그 속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속성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상대방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약점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되면 이루리라는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상대방의 인격을 존경하고 나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여보, 부족한 나에게 당신은 너무나 과분하오.” “여보,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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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딸이 예약해 준 무궁화 열차를 타기 위해 부산역으로 나오는 중이다. KTX나 최소한 새마을이라도 예약해야겠다는 딸의 고집을 무참히 꺾고 굳이 무궁화를 고집하였던 두 가지의 이유가 나에게는 있었다. 우선 딸애에게 거금 오만 원의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고 다음으론 차창가로 흐르는 풍광을 보며 여유로운 여행을 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딸애의 마음엔 자기 아빠가 퍽이나 안쓰러운가 보다.

 
 6․25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나의 가정은 마산으로 이주를 했었다. 그때 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난생 처음 기차를 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시절은 무임승차가 많아서 역무원이 열차 안에서 수시로 승차권을 검사하는 일이 있었다. 나도 초등학교 때 방학을 맞아 고향을 오가며 몇 번이나 무임승차를 한 기억이 있다. 역무원을 피해서 객차 화장실에 숨거나 승객 좌석 밑에 숨기도 하였다. 그 당시엔 기차의 등급도 특급열차, 급행, 완행의 세 등급뿐이었다. 서울행 통일호 특급열차는 모두에게 꿈의 열차였다. “나는 언제나 통일호를 한번 타 보나” 하면서 어린 마음에 꿈을 키워 보기도 했지만 초등학교를 끝내고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나에게 돌아오는 몫은 언제나 완행뿐이었다. 세간에서는 완행을 십이열차라 불렀다. 자랑스런 그 명성 그대로 서울행 십이열차가 용산역에 도착하는데는 꼭 열두 시간이 걸렸다.

 
 꿈은 이루어진다더니 나에게도 한양을 구경할 기회가 왔다. 1966년 1월 초순, 대학입시를 위해 청운의 꿈을 품고 아침 8시 서울행 십이열차(승객 칸 열두 량을 달고 가는 열차)에 몸을 실은 적이 있었다. 열차는 숨차게 북으로 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십이열차는 그 정체성(正體性)을 확인이나 하려는 듯 간이역도 빼놓지 않고 인사를 꼬박꼬박하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부산을 출발한지 꼭 여섯 시간만에 열차가 대전역 플랫폼에 미끄러지듯 들어가기가 무섭게 “대전~, 대전~. 광주, 목포 방면으로 여행하실 분은 여기서 호남선으로 바꾸어 타시길 바랍니다. 열차가 많이 연착되오니 가급적 역구내에서 기다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목쉰 소리의 역무원 안내 방송이 잠든 승객을 깨운다. 좌석에 앉은 사람, 통로에 서거나 그냥 퍼질러앉은 사람, 정말 열차 안은 조선 팔도의 군상들로 메뉴가 다양하다. 그래서 가장 인간적이다. 객차는 승객들을 꾸역꾸역 밖으로 토해낸다. 빈 배를 채울 기세로 사람들은 우루루 통로 쪽으로 몰려나간다. 플랫폼에 판자촌처럼 엉성하게 꾸며진 가락국수집 좌판은 갑자기 촌 장터같이 붐비기 시작한다. 대전을 출발한 열차가 상당히 북쪽으로 올라왔는가 싶었는데 이제 겨우 천안이다. 얼마 전 대전에서 통일호와 급행열차를 대피해 무한정 역구내에 눌러 앉았는데 열차는 천안에서 또 늑장을 부린다. 목과 손등에 때가 꾀죄죄하게 낀 소년들이 열차 안으로 들어와 호도과자를 팔고 있다. ‘천안 호도과자 사려―’ 길게 끄는 소년의 변성음에 충청도의 밤은 깊어만 가고 철마는 또 종착역을 향하여 달려간다.

 
 밀레니엄 시대인 지금은 무궁화가 완행이다. 이제 나도 시속 300키로의 초특급을 타도 될 만큼 넉넉해졌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물질의 복도 아주 넉넉히 받았다. 그런데도 굳이 완행을 고집하는 이유는 뭔가? 나는 완행을 타야 마음이 편하다. 특급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어색하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만 잘 살면 되는가 하는 마음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빚 진 자다. 모두에게 빚 진 자다. 그것을 갚아야 한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사치가 어울리지 않는다. 언제나 구수한 된장국이 좋고 어머니의 품 속 같은 조국의 산천이 좋다. 나는 지금 34평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런데 자꾸만 미안한 생각이 든다. 너무 잘 사는 것이 아니냐고. 나는 정말 부지런히 살아 왔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에 가깝게 살려고 노력해 왔다. 나의 아내는 무지기도 주기를 좋아한다. 이걸 보면 나와 아내는 하나님이 짝지어 준 천생 연분임이 틀림없다. 나의 어머니가 그랬다. 어린 시절 농촌에서 경험한 일이다. 암탉이 알을 낳으면 모아지는 대로 교회의 전도사님 댁에 가져가는 것이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이 생기면 교회로 가져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 어머니가 광신자(狂信者)로만 보였다. 모전여전(母傳女傳)이라더니 나의 장모가 그렇고 나의 어머니가 그랬다. 그러니 모두 한 통속이다. 이제는 나의 딸, 아들이 그러하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주어 본 자만이 주는 자의 기쁨을 안다. 나는 이 기쁨은 누리면서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한 평생 부지런히 그리고 성실하게 살면서 분외의 욕심을 부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남의 말을 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내 앞도 다 가리지 못하면서 왜 남의 말을 하나?” 하셨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정직을 배웠고 나의 어머니에게서 베품의 행복을 배웠다.

 
 나는 이번에 나의 생의 반려자인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경복궁을 둘러보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딸, 아들과 함께 근정전 앞에서 역대 왕들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고 역사의 허망함도 느꼈다. 사람은 가고 역사는 남는다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어떻게 남은 삶을 살아야 할까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의 아들과 딸들에게는 무엇을 남기고 가야 할까를 묵상해 보면서 하나님의 싸인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나의 딸과 아들이 한없이 자랑스럽다. 여보, 사랑해. 아들아, 딸들아, 사랑한다. 나의 하나님, 언제나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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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

비전 2009. 2. 3. 15:00 |

 

  지루한 칠월의 장마가 보름째다. 오늘은 영도교회 중고등부 수련회에 특강을 해 주기로 약속이 된 날이다.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아침녘에는 폭우가 되어 퍼붓기 시작한다. 나를 특강 장소에까지 바래다주기로 되어 있는 영도교회 중고등부 부장 집사님을 만나러 나는 지금 지정된 장소로 가는 중이다.

 

 나를 태운 차는 언양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지방 국도를 타고 이십여 분쯤 더 북쪽으로 올라가더니 산길을 더위잡아 오르기 시작한다.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빠져 나갈 수 있을 듯한 시골길이다. 시멘트 포장은 되어 있어나 곳곳이 패어 장마비로 웅덩이가 되어 있다. 그러나 나를 픽업해 가고 있는 집사님은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영과 영은 통하는 법, 집사님을 통하여 주님의 흔적을 보게 되니 정말 기쁘다. 주님의 일에 내가 동참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감격을 이 베스트 드라이브를 통해 읽고 있으니 정말 흐뭇해진다. 길은 두 산의 계곡을 따라 산 중허리로 뻗어 있다. 장마비로 계곡은 물의 천지다. 빗소리와 물소리로 계곡은 지금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중이다. 짙푸른 녹음이 싱그럽다 못해 그 짙고 검푸른 녹색 물로 우리를 삼켜 버릴 듯이 달려든다. 칠월의 장마비와 소란스런 계곡물, 싱그러운 녹음과 빼어난 산세(山勢). 정말 기막힌 자연의 궁합이요 오묘한 하나님의 창조 신비다. 우리는 매양 하나님의 축복 속에 당신이 차려 준 진수성찬을 먹으면서도 날마다 투정하고 살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수양관의 식당은 먼저 온 교회의 도우미 여집사님들의 손길로 바쁘다. 부장 집사님과 나를  반갑게 맞아 준다. 모두의 얼굴에는 기쁨과 감사의 웃음이 활짝 피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여기서 보는 것 같다. 영도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흐뭇하다.

 

 청소년들의 여름 수련회는 언제나 마음 설레는 집회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에게는 일생일대의 회심(回心)의 계기가 되는 추억이 한 번쯤은 있다. 그런데 그 기회는 대개 청소년기의 여름 수련회일 때가 많다. 그러기에 이 여름 수련회는 더욱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신앙생활에 굴곡은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을 향한 질펀한 감격과 환희의 눈물이 있었다면 메마른 사막과 같은 절망과 좌절의 모래언덕도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때 지난날의 첫사랑을 추억할 일이다. 주님과의 첫사랑을 기억할 일이다. 이 추억을 우리 청소년이 오늘 여기 이 집회에서 만들어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내가 여기에 왔다는 거룩한 사명을 깨닫는다.

 

 해맑은 청소년들의 얼굴을 바라보니 나의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 사십여 년 전 신마산 교회에서의 중․고등부 시절,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우리는 한 달 내내 교회에서 죽치고 살았었다. 밤마다 남녀 학생들이 교회당에 모여 연극을 준비하였고 여름 수련회 때는 많이도 울었던 기억이 새로워진다. 우리를 그렇게도 울렸던 강사 목사님의 목쉰 소리 속에 녹아 있던 그 ‘예수’. 그분이 지금도 나의 용광로가 되어 나를 활활 불태운다.

 

 오늘 여기 모인 젊은이들이여, 예수의 불로 나를 태우고 소명(召命)의 불로 나를 담금질하여 나로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꾸게 하소서. 양치기 목자의 손 안에 있는 마른 지팡이가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로 바뀌게 하소서.

“주여, 나는 이제 더 이상 실망과 좌절의 미디안 광야 모세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명자입니다. 오, 주여, 나를 사용하소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옵소서.”

 

 나는 오늘 이 젊은이들을 통하여 미래의 영도 교회를 보며 미래의 한국을 보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 또한 미래의 젊은이를 키우는 영도 교회의 열정적인 교사들을 보게 되니 더욱 기쁘다.

 

 우리의 만남에 우연은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다.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하고 나의 하나님을 자랑하면서 나는 살아 갈 것이다. 영도교회의 청소년들과의 아름다운 만남을 예비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2006. 0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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