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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07 이렇게 쉬울 줄이야
  2. 2009.01.17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쉬울 줄이야

묵상 2013. 1. 7. 14:42 |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승강구 좌우편에 이런 광고가 종종 붙어 있음을 보게 된다. “×× 대학병원에서 고혈압 임상실험에 참가하실 분을 모집합니다” 질병에는 임상실험이 있는데 삶에는 왜 임상실험이 없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참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께나 먹고 세상을 살만치 산 내가 인생은 단 한 번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라는 것을 모르다니 말이다.

 

 

 나는 오늘 이 글에서 일반 독자들을 상대로 하기보다는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인생의 난제(難題)를 던져보려 한다. 한자어의 갈등을 어원적으로 풀이해 보면 칡 갈(葛)자와 등나무 등(藤)자의 합성어가 갈등(葛藤)이다. 칡과 등나무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꼬면서 올라간다. 그러기에 칡과 등나무가 만나면 그 꼬임이 결코 풀리지 않는다. 우리의 삶에서 너무나 답답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질병의 경우처럼 임상실험이라도 한번 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때가 종종 있지만 인생은 그럴 수 없는 게 운명이다. 그만큼 고민도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에 쓰려하는 글은 또한 나의 블로그에 이미 올린 ‘약속1,2’에서 따져 본 주제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 연장이라 보아도 좋겠다. 인생을 살아갈 적에 답이 둘이어서 답답할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에 어떻게 하는가? 세상 사람들이야 점괘도 보고 사주관상도 보고 각종 운명서적도 뒤적이면서 용하다는 사람 다 찾아가면서 별별 짓 다해 보겠지만 우리 크리스천은 어떻게 하는가? 성경에 정작 답이 있음에도 얼마나 많은 세월을 죽여가면서 허둥대고 있는가? 칡과 등나무가 서로 엇갈려 꼬인 것처럼 내 인생은 더욱 더 꼬여만 가는가?

 

 

 나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인 지난 12월 30일 주일 아침, 예배에서 불현듯 이 사실을 깨달았다. 15분 정도 먼저, 교회 예배실에 도착하여 ‘나의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아들이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하고 묵상기도를 하고 ‘내가 여호와의 계시는 집과 여호와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라는 시편의 다윗의 시를 읊조리면서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날 예배의 주제는 역대상(29:10-19)절을 중심으로 다윗의 삶을 최종 결산하는 ‘비전의 삶과 믿음과 감사의 삶’이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중에 너무나 또렷하게 성령의 감동이 나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나의 입에서 나온 세 마디의 말, ‘이렇게 쉬울 줄이야’

 

 

 예배를 드리고 교회 문을 나서는 나의 발걸음은 새털같이 가벼웠다. 이 비밀을 먼저 나의 자녀들에게 알려 주어야지 하면서 집으로 달려온 나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나와 내 자녀만이 아니라 믿음의 동역자들과 나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크리스천 독자님들과 함께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 동안 인생의 난제(難題) 앞에서 얼마나 좌절하고 절망해 왔는가? 그리고 혼자 가슴앓이 하면서 날밤을 지새운 날이 그 얼마이던가? 명색이 집사요 장로며 몇십 년 믿었다는 경륜은 있지만 그것들이 정작 문제의 해답이 되었던가? 못 되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성경 창세기 18장 10절 이하에는 한 여자가 등장하는데 이름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사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는 약속을 하신다. 그때 사라가 장막 문에서 듣고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엿고 내 주인도 늙었거늘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이때 하나님이 사라에게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하시니

 

 

 성경 누가복음 1장 11절 이하에는 또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한 여자는 마리아요 한 남자는 제사장 사가랴이다. 아느 날 하나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하시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가랴는 그가 자기 아들의 태어남을 볼 때까지 벙어리가 되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이 일이 이루리라’

 

 

 한편 사가랴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가 육개월 후에 마리아에게 나타나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연이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니 마리아가 대답하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하매

 

 

 창세기의 사라와 누가복음의 마리아와 사가랴의 기록을 통하여 살펴볼 때 인생의 난제들에 대한 모든 해답이 바로 성경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다. 사라와 마리아에게 공통적으로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라는 질문이다. 그러면 지금 나에게 요구되는 믿음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 라는 믿음이다. 바로 창세기 1장 1절의 믿음이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다. 창세기 21장 1절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기록이 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쎄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여기에서 ‘말씀대로’ 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거듭 나온다. 그렇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민수기 23장 19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라기 이후 400년 간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지만 때가 되니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 구주로 오셨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되 온전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했다.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물으시는 그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의 얄팍한 지식을 믿었고 돈을 믿거나 철밥통을 믿어왔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이외는 다 가 버린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나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뢰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라고 말씀하셨으니 나의 길을 하나님께 맡긴다. 그리하면 말씀대로 일은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이루신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다. 그러니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신다. 말씀대로, 말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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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사이 나는 하루가 정말 즐겁다. 새벽에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고 눈을 뜨자마자 새벽하늘에 걸려 있는 조각달을 보는 것도 분주한 도회의 생활에서 분외의 복이려니와 별이 빛나는 밤을 날마다 기대하며 소년처럼 마음 설레는 것이 어찌 축복이라 할 수 있지 아니하랴.

“장로님 내외분, 정말 축하합니다. 그렇게도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시더니 이제 만년에 하나님이 장로님 내외분께 갚아 주시는군요.  정말 심은 대로 거둡니다.”

며칠 전 나의 새 아파트를 방문했던 동료 몇몇이 우리 부부에게 던져주고 간 말이다. 

 
 정말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다. 브니엘 고등학교에 부임한 지 삼십 이 년, 나는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학교와 교회만을 오가며 제자를 가르쳤고 가정과 지역사회에 최선을 다해왔다. 아내는 자녀를 기르며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부지런히 씨를 뿌려왔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아내에게 빚진 자다. 그 많은 세월 동안 아내에게 얼마나 많은 고뇌와 번민을 하게 했던가. 나의 편협한 아집과 탐욕이 아내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어 가고 있을 때 아내는 한나처럼 교회로 달려가곤 하였다. 하나님은 아내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남편이 주지 못했던 참된 평화와 안식을 주시었다. 아내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었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이었다. 장애인 교회인 백합교회에서 삼 년 동안 봉사했던 일, 선교단체 인터콥에서의 헌신 등은 나의 가정 역사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요 진국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아름다운 삶’을 꿈꾸며 살아간다.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아내와 왕자같이 살아가기를 꿈꾸는가 하면 초고층 아파트의 옥상위에 펜터 하우스를 짓고 중세의 성주처럼 호령하며 세상을 움켜쥐고 싶은 자도 있다. 꿈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그러기에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희망적 동물)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망하며 좌절하는가.

 
 나는 정말 행복한 족속이다. 모로 누워 생각해도 행복하고 엎드려 누워 생각해도 행복하고 벌렁 누워 생각해도 행복하다. 너무 행복해서 몸살이 날 지경이다. 왜냐고 묻는 이가 없는 것이 이상하여 스스로 그 해답을 줄 수밖에 없다.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게 한없이 행복하다. 이건 기적 중의 기적이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하나님의 우주 창조보다 더 신비로운 비밀이다. 매일 밤 나는 하늘의 별을 헤아려본다. 별은 빛나고 우주는 운행한다. 그 운행 속에 내가 있다. 순간의 선택이 우주의 운행 속에 나를 참여시킨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역사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소망을 알고 있는 자는 극히 드물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 당신의 마음을 알려 주신다. 불 가운데에서도 아니요 우레 가운데서도 아니요 물 가운데서도 아니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코자 하는 자에게 당신은 세밀(細密)한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민족 지도자 모세의 기록을 출애굽기 4장 2절 이하에서 보라. 애굽의 모든 지식과 권력으로도 자기 민족을 구원하지 못하고 미디안 광야로 쫓겨 간 모세, 그는 이제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실의와 절망 속에서 패배의 쓴 뿌리를 질겅질겅 씹고 있던 모세, 그의 손에는 양떼를 치는 마른 막대기 하나뿐, 민족을 구원하지 못한 자책감과 나약한 자신의 무능에 대한 자괴감(自塊感)으로 한 없이 절망하고 있는 모세. 그는 한낱 양치기였을 뿐이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은 찾아오셨다. 이날도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모세는 단순히 풀을 좇아가는 양떼를 따라 갔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불 붓는 가시떨기에서 그를 기다리고 계셨다. 거기에서 모세를 만나 주셨다. 그리고 사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셨다.   

 
 이제  우리 함께 출애굽기 4장 20절을 보자. 나는 이 구절을 보면서 온 몸이 떨려 옴을 느낀다. 아니, 천체의 감시자가 망원경 속에서 새로운 별을 발견하듯이 환희와 감사의 눈물이  흐른다.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어제의 마른 막대기가 오늘에는 ‘하나님의 지팡이’로 바뀐 사실, 이것이 기적이다. 기적은 하나님을 만날 때 이루어진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묻고 계신다. 하나님은 나에게도 일할 수 있는 두 팔과 기도할 수 있는 두 무릎을 주셨다. 나는 이제 나에게 무엇이 있는가를 헤아려 볼 것이다. 아직 건강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열정이  있다. “나의 건강과 시간과 재능은 하나님의 것이옵니다. 하나님, 이것을 하나님의 지팡이로 만들어 주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하여 일하기 원하옵니다.” 아멘  (200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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