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능력

공지사항 2010. 8. 12. 23:00

 

1. 블랙홀


 사람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삶과 죽음은 인생에 있어서 풀리지 않는 숙제요 영원한 테마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가진 재산이 몽땅 잿더미나 되지 않을까? 사랑하는 아내가 나를 배신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날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죽음이 두려워 눈을 감기가 무섭다는 사람의 고민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종교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종교가 우리를 이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종교에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없을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만고만한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구도자의 길을 걷고자 고행이나 끝없는 수행의 길을 떠나 보지만 본래 길이 없으니 어찌합니까? 이 두려움은 인생에 있어서 블랙홀과 같습니다. 그 누구든 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빠져나올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생에게 희망은 전혀 없는 건가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삼백 육십 다섯 번을 ‘두려워 말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두려워하고 있는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사41:10)” 하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전능자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그분만이 인간을 가장 잘 아시며 인간의 고민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2. 복음의 능력


1) 죄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를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니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이 진화의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고등동물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기독교에 입문도 하지 못한 자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고정 관념을 내려놓고 성경에서 말하는 죄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경청하여 보십시오.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어느 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과일은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 그런데 어느 날 사탄이 이브에게 찾아와 이렇게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과일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하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 하셨을까요? 이것은 창조주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한 선언이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언한 메세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재권(主宰權)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밝히 말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그러나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창조된 목적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불신(不信)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정녕 죽으리라(창2:17)” 하셨으나 인간은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3:3)”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죄입니다(요16:9).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주재권에 도전하려던 사탄의 꾐에 빠져 그 선악과를 따 먹게 되고 그 댓가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켰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詐欺)는 무엇일까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하는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인간을 속인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꾐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담 이후 죄를 지은 모든 인간은 “정녕 죽으리라” 하는 하나님의 선언대로 모두가 죽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근본 원인은 죄인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롬1:28)고 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리고(렘2:13) 사탄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죄라고 성경은 밝히 말합니다.


2) 죄의 삯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3:23)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입니다. 우리는 흔히 거짓말하는 죄, 속이는 죄, 도둑질하는 죄 등을 죄라 생각하지만 이것들은 죄의 현상일 뿐입니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죄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하나님을 버린 것이 죄입니다. 화살이 과녁의 정곡(正鵠)을 벗어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벗어난 모든 생각과 행위가 죄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고민하게 됩니다. 죄의 고통으로 인하여 뼈가 상하게 되는 번민을 해 보셨나요? 사도 바울은 죄로 인한 번민을 이렇게 토로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롬7:24)” 하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죄악의 사슬에서 해방되는 길은 없을까요? 아닙니다. 길이 있습니다.


3) 심판에 대하여

 성경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 라고 말합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보아 왔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으며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 반드시 심판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합니다. 이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영접하지 않은 자는 심판의 부활로 그분 앞에 서야 합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거기는 불도 꺼지지 않고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이요 불로 소금 치듯 하는 곳(막9:48-49)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16장에는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같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이후에 그들은 죽어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으로 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 사건을 들어 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지옥의 실상(實狀)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옥의 실상을 잠깐 소개하면 이러합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 저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말하되 /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천국은 위로받는 곳이요 지옥은 밤낮으로 고민하는 곳입니다. 이제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영원을 좌우할 것입니다. 성경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심판을 피하리요(히2:3)” 라고.


4) 행위 거절

 성경 마가복음 10장 17절에 보면 한 청년이 예수를 찾아와 질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질문은 아주 본질적 질문이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없는 무서운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무슨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모두 죄인입니다. 이 사실을 철저히 인식하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하지만 “인간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 옷과 같다(사64:6)”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언젠가 어느 교회를 방문하여 아주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한 청년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는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 있습니까?” “예” /  “누구의 은혜로 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갈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정확한 정답입니까.  교회를 오래 다닌 성도들 중에도 상당수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성도는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 있습니까?” 하고 질문해 보면 “해 놓은 게 있어야지요, 그러니 아직은…” 하면서 자신 없는 대답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하고 성경은 분명히 못을 박아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왜 자신이 없습니까?

 어떤 교회는 “날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지옥 간다 ” 라고 설교하는 목회자가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 복음적 오해에서 빚어진 잘못된 독소입니다. 회개에는 ‘생명 얻는 회개’와 ‘생활 속의 회개’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생명 얻는 회개는 사도행전 11장 1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을 버리고 본질상 죄의 종이 된 타락한 인간이 십자가의 피로 거듭남을 의미하는, 평생에 단 한 번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생활 속의 회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생활 속에서 지은 여러 죄들을 하나님 앞에 자복하므로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날마다 회개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천국 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밝히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는 생각은 나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얻겠다는 생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은사가 구원의 보증 수표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나는 내 주위에서 은사자가 자기의 의를 내려놓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은사가 구원의 보증 수표인 양 은사를 받지 못한 자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모습을 보아 왔습니다. 은사가 복음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큰 착각이요 자기체면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은사가 없었나요? 사도행전 19장 12절에 보면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라는 기록을 보면 사도 바울은 큰 은사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환상 중에 셋째 하늘을 보았다(고후12:2)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서신 어디에도 셋째 하늘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 만을 자랑해 왔습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로 보건데 은사를 자랑함은 ‘나의 의로운 행위’를 자랑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에게 은사는 왜 주시는 것일까요? 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그 첫 번째 이유의 근거를 누가복음 10장에서 보겠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칠십 인을 세우사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과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왜 이런 능력을 주셨을까요? 그 정답이 10장 20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하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영혼 구원을 위해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의 근거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찾겠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신령한 은사를 받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문제도 많았던 교회입니다. 은사를 주신 두 번째 이유의 정답이 12장 7절 하반 절에 있습니다.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는 바울의 권고를 보면 개인과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덕(德)을 세우기 위하여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은사가 자기 의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은사를 받은 자는 더욱 큰 은사 곧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더욱 겸손하여야 할 것입니다.

 은사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또 하나의 궁금증이 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자도 권능을 행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하셨습니다. 이로 보건데 구원 받지 못한 자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영을 받아 권능을 행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인지 악령의 열매인지는 그 나타나는 열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지 아니하면 그런 자는 거짓 영을 받은 거짓 선지자요 삯군으로 보아도 잘못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삯군은 이리가 오면 양떼를 버리고 도망을 가지만 목자는 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 앞으로 끌고 와서 그 여인을 힐문(詰問)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를 책잡으려 그 여인을 힐문하던 말을 듣고 있던 예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하시니 힐문하던 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하나씩 다 떠나갔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의 경중(輕重)을 따지지만 하나님은 죄의 유무(有無)를 보십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육백열세 가지의 율법 중 한 가지만 어겨도 모두를 범한 자가 된다(약2:10) 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의로운 행위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또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갈3:10)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라고. 하나님은 인간의 의로운 행위를 구원의 수단으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라고 말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라고 말하면서 구원이 인간의 의로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를 찾아온 청년은 영생을 얻었을까요? 결국 얻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이 떠난 후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6-27)”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요 하나님의 주재권(主宰權)이란 것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위하여 한 몫 거들려하는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교만이요 가장 큰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이 깊이 새겨듣고 회개해야 할 대목입니다. 


5)하나님의 요구

 죄를 지은 자는 정녕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公義)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그들의 벗은 몸을 가리기 위하여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입혔습니다. 한 마리의 짐승이 대신 죽어 그 피흘림의 댓가로 그들은 치부(恥部)를 가리게 되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 레위기 17장 11절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너를 속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피흘림과 죄사함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기 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명령한 한 규례(規例)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상징성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 사건입니다. 그것은 출애굽하기 바로 전날 밤, 양이나 염소룰 잡고 그 피를 그 집의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그 집 안에 있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피가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발린 집은 그 집 안에 어떤 자들이 있든지 관계없이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치지 않고 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이 피는 결국 무엇을 상징하며 제물로 사용된 양이나 염소는 누구를 상징합니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요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인을 속죄하기 위하여 흘리시는 보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한마디로 요약한 가장 중요한 한 구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들이 죄로 말미암아 이미 죽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되어 있을 때 하나님 당신이 먼저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저주의 십자가 위에 높이 달아 죽이시고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당신은 당신 아들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저주의 죽음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시면서 당신의 거룩한 사랑으로 당신의 공의를 덮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롬5:8)”


6) 구원의 방법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누구입니까? 성경 빌립보서 2장에서 그를 밝히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또한 그의 아들입니다.

 나는 지금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나는 나의 죄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라는 처절한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죄인임을 철저히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세주라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라고 했습니다.

 인종과 신분에 관계없습니다. 미모나 재산과도 관계없습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아직도 주저하십니까? 기회는 그리 자주 오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아마 내 생애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성경 마가복음 10장에는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기록이 나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바디매오의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가 자기가 구걸하는 곳으로 지난다는 소식을 듣자 수많은 군중들의 소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고 부르짖었습니다. 군중들의 핀잔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수많은 병들을 고친 소식, 눈 먼 자를 눈 뜨게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다시는 내 곁을 지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눈은 이때에 떠야 한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더욱 소리를 높여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경 바디매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눈을 뜨고 더 큰 구원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를 반드시 돌아보아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구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이보다 더 확실하고 명료한 복음의 소식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 곧 아들을 대속 제물로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서울행 KTX 기차표를 예매했으면 언제든 서울에는 갈 수 있으니 이미 서울에 가 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또한 최후의 심판도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었기 때문에 면제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육신은 세상에 살아 있지만 나는 영생의 티킷을 얻었으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입니다. 


7) 온전한 속죄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온전히 속죄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말씀하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여기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몇 가지의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수에 관하여 예언한 서른여덟 가지의 모든 예언들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가 있고 둘째는 육백열세 가지의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요 셋째는 모든 인류의 죄와 나의 모든 죄를 온전히 사(赦)하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온전한 속죄를 이렇게 명쾌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10:10-12)”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하였습니다.


8) 하나님의 영원한 보장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이 온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을 뿐 아니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4)”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되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赦)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10:16-18)” 하고 말씀하십니다. 



9) 복음의 능력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고전15:3-4)’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라고 말입니다. 바울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사명자들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였기에 이 복음전파에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습니다.


10) 영접

 이 글을 읽고 있는 형제자매 여러분, 정말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1:9)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가산(家産)을 탕진한 탕자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흉악한 행악자도 돌아올 때 구원을 얻었습니다. 돌아오십시오. 돌아오는 것은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나의 주인이 사탄이었다면 나는 사탄의 종이었으나 이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로 살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을 후사(後嗣)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영접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한 사람이라는 단순한 지적 동의(知的同意)는 영접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의 허다한 사람들도 예수가 위대한 인물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은 자는 아닙니다. 성경은 이렿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하였습니다.

 형제자매님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나의 구원의 주로 영접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 모으고 꿇어앉아 보십시오.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큰 소리로 따라해 보십시오.


예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나의 마음에

나의 구세주로, 나의 주인으로, 나의 왕으로 모십니다.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나를 다스려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1) 확신

 이제 형제자매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삶을 살아가다가 내 속에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자꾸만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여 번민하는 날이 찾아오더라도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내 구원이 혹시 취소되지나 않는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구원은 생명이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 곧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새로이 태어났으니 결코 취소될 수 없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성경은 단호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하였습니다. 또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8:33-34)”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형제자매님의 구원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