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캠브리지 힛데겔 김상덕 한 권의 책'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3.09.01 정의와 탐욕

정의와 탐욕

묵상 2013. 9. 1. 08:35 |

 오늘은 고향으로 가는 날이다. 서울역 광장은 온갖 사람들의 물결로 넘쳐난다. 다들 물 찬 제비처럼 발걸음도 가볍다. 나는 맥도날도에서 빅맥을 셋트로 주문하여 플랫폼으로 내려간다. 8번 게이트를 지나 에스컬레이트에 몸을 기댄 채 아래로 얼음 타듯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옆의 젊은이들을 힐끗 쳐다본다. 도톰한 얼굴에 뽀얀 살결이 정말 아름다운 얼굴의 소녀다. 아마 막바지의 피서를 해운대로 가는 모양이다. 언제나 그러하지만 여행만큼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은 없다. 나는 벌써 고향의 들판을 달리는 소년이 되어 있는 것이다.



 열차는 홈을 빠져나와 남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다운타운을 다 지나기까지 나는 잠을 청하기로 했다. 선글라스를 벗고 시트에 몸을 맡기니 나른해지면서 잠이 온다. 얼마를 잤을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눈부신 정경에 나는 잠을 깼다. 차는 충복 영동을 지나고 있었다. 차창 밖은 온통 초록의 바다다. 싱그러운 팔월의 들판은 온통 파랗게 칠해진 한 폭의 수채화다. 언제나 보아도 싫지 않고 질리지 않는 푸르름. 너는 때론 강이 되어 흐르고 때론 산이 되어 그곳에 우뚝 서 있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바다로 모든 것을 휘몰아 가기도 하는 난폭자. 그러나 너 푸르름을 만드는 모태를 너는 아는가? 언제나 안아주고 품어주며 다 주기도 하지만 자신의 실체(實體)는 드러내지 않는 것이 바로 흙이 아닌가! 푸르름도 결국 한 줌의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벋으며 무성한 숲을 이루어 들판과 산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나의 눈앞에 펼쳐지는 푸르름의 파노라마를 보면서 내가 흙의 고마움을 새삼 발견하게 되니 이번 여행이야말로 나에게는 참으로 유익한 여행이 아닐 수 없다. 문득 한 권의 책이 생각난다.



 뭐 읽을 게 없나 해서 딸애의 방을 기웃거리던 열흘 전쯤 전, 책 한 권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장하준 교수가 최근에 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아! 인간 세계에도 ‘흙’과 같이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듯이 장하준 교수는 이제 흙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는 유명해졌고 세상이 다 아는 석학이다. 그런데 고마운 것이 그는 의도적으로 흙이 되어 살아가려 하는 모습을 나는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캠브리지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한 해가 1990년부터라니까 한 지성이 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해 오던 최근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세계에는 정말 정의가 있었던가 되묻고 싶다. 정의(正義), 정의가 무엇인지 나는 그것의 정의(定義)를 내릴 만큼 해박하지 못하다. 더더욱 나는 정의(正義)를 논할 만큼의 당당한 삶을 살지도 못한 한 사람의 범부(凡夫)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세상에는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 정의에 관한 많은 저서들도 쏟아져 나와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게 된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세상에는 언제나 가난한 자들이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면서 재판관은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지 말 것이며 장사하는 자들은 저울추를 속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다. 세상에는 언제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억누르는 자와 억눌린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가 있기에 고아와 과부는 내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인간은 정말 정의를 논할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성경은 오히려 인간을 탐욕적 존재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어느 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으라는 사탄의 유혹을 받는다. 사탄은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다. 성경에는 탐욕과 죄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는 몇몇 구절이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이 두 구절들에서 보듯이 죄의 뿌리는 욕심 곧 탐욕이다. 그리고 탐욕의 정점(頂点)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는 것이다.



 인간은 정의를 논할 가치가 없는 존재다. 근본적으로 타락하고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진노의 자식이다. 죄와 허물로 죽어버린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사이비 정의가 도처에 넘쳐난다. 난삽(難澁)한 지식적 정의나 나를 헷갈리게 하는 변증적 정의 등등. 그러나 이것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박제물처럼 생명이 없다. 그러기에 감동이 없고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 이런 때에 장 교수의 책 한 권은 나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고 나로 이 글을 쓰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였으니 고마울 수밖에. 경제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쉽게 이해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이 우선 고마웠고 방대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를 통하여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주어 더욱 애착이 가는 책이었다. 그러나 이것뿐이었다면 나는 이 책을 다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를 가장 감동시킨 이유는 전혀 딴 곳에 있었다. 장 교수가 크리스천인지의 여부에 대하여 내가 아는 바는 없다. 다만 그의 책 속에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정의 편에 서려 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나 본능적으로 권력에 약하다. 최근 삼십여 년의 세계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의, 주장이 현실화되는 강대국의 지배 세상이었다고 책에서는 밝히고 있다. 더더욱 영국은 자본주의의 발상지요 힘은 좀 잃었지만 여전히 강대국인 나라다. 그 중심에서 영국의 이념과 이상을 끊임없이 재창조해야 하는 대학에 몸담고 있는 자로서 어찌 주류(主流)에 속하고 싶은 유혹이 없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경제학자들과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우면서 강대국의 패권주의를 신랄히 비판하고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의 빈국(貧國)이나 동남아, 라틴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약자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옹호하는 경제정책의 모델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온몸으로 실천하려 하는 한 지성의 리얼한 정의를 만나니 내 마음 참으로 흡족하다. 책을 읽으면서 그 내용은 어려워 비록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저자의 따뜻한 인간애를 읽을 수 있어서 읽는 동안 내내 행복하였다.



 인생은 짧다. 영원히 살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Posted by 힛데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