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칙하고 무거웠던 온갖 잡내의 무게를 홀가분히 털어내고 기어이 가을은 성큼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한낮의 가을 공원풍경은 참으로 눈부시다. 우거진 숲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가을 햇살은 마법사의 지팡이로 한바탕 자연의 진수성찬을 차려 놓는다. 빛의 깊이와 각도에 따라 나뭇잎의 색상은 모두 조금씩 달라진다. 모양이 다르고 색상이 다르니 잎만으로도 훌륭한 앙상블을 이룬다. 가을바람이라도 한번 불라 치면 숲속은 여지없는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 베토벤의 <전원>을 여기에 견주랴?

 

 중국 발 미세먼지와 사드의 보복으로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지루하고 답답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름의 무더위와 칙칙함을 견딤이 없다면 가을의 풍성함도 없을 것이다. 한 개인의 삶도 그러하고 한 나라의 장래도 그러하다. 짓누르는 무거움 속에서 내일을 생각해야 하고 내일의 소망 속에서 알참을 준비해야 한다. 준비가 없고 치열한 노력과 기다림이 없으면 어찌 탐스러운 열매가 있으랴?

 

 가을은 생각의 계절인가? 요즘 부쩍 생각이 많아진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걸작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보면 생각이 없는 인간은 투명인간이 아닌가?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고 생각을 발전시켜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이 자기를 갉아먹는 해악(害惡)으로 변질되어 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요사이 생각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생각이 걱정이나 근심으로 나를 몰아넣지는 못한다. 문제없는 인생은 없다. 나는 삶의 거의 태반을 문제를 보고 그 문제에 매몰되어 살아왔지만 이제는 문제를 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보지 않으려 한다. 문제 너머에 계시는 문제를 주시는 그분의 의도를 보려한다. 내 힘으로 문제를 풀지 못하면 전능자 하나님에게 그 문제를 맡겨 버린다. 그러기에 생각하며 살아가는 특권을 누리면서 그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맛보며 산다.

 

 이 가을에 소중한 나의 깨달음 하나, 함께 나누고 싶다. 얼마 전에 나의 소중한 벗을 한번 만났다. 못 만난 지 오륙년 되었으니 참 반가웠다. 그러나 함께 오래 머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인생이 그런 게 아닐까? 그리워하면서도 아니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니 인생은 언제나 미완성이다. 벗이 나에게 이렇게 말해요, “요사이 당신도 잘 아는 그 사람 있잖아, 거의 매일 나를 불러내어서 귀찮아 죽겠어, 만나면 자기 자랑인데, 집이 칠십 몇 평이라느니, 자기 아들은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의 치과를 나와서 수하에 네 명의 부원장을 거느리고 있다느니… 하면서 자랑하는데 듣기 싫어 죽을 지경이야, 그런데 그 친구, 벗들을 위해 밥 한 끼는 절대 내지 않아” 이 말을 다 듣고 난 나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벗님, 버리십시오” 버림이 정답이다.

 

 시간이 지나도 결코 쇠퇴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 그게 바로 자랑이다. 시간이 지나면 쇠퇴하거나 어쩔 수 없이 놓아 버려야 할 것들이 많다. 건강도 그러하고 돈도 명예도 지위도 다 놓아야 한다. 그러나 자랑만은 절대 놓지 않는다. 자랑에는 끝이 없다, 외모, 힘, 건강, 자식, 배우자, 돈, 명예, 지식, 지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자랑할 것이 없으면 ‘내 이웃에 그 부자, 그 사람 살았잖아’ 이 식이다. 그래서 호가호위(狐假虎威)란 말이 생기지 않았을까?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 한다. 나의 중학교 2학년 때 에피소드이다. 옆의 친구가 쉬는 시간만 되면 무엇을 꾹꾹 씹는다. 육이오 한국 전란이 끝나고 오륙년쯤 지났으니 껌도 귀한 시절이었으니까 껌을 씹는 줄로만 알고 ‘야, 같이 씹자’ 했다. 그 시절엔 친구가 씹던 껌도 받아 씹었으니까. 그런데 이 친구,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더니 조그맣고 바짝 마른 무엇을 주는 것이다. 뭔고 보니, 하얗게 생긴 도라지 같은 뿌리였다, 먹어 보니 약간 쓴 맛이 나면서 아주 딱딱했다. ‘이거 뭔데?’ 물은즉, ‘인삼이다, 이 바보야’ 나는 졸지에 바보가 되어 버렸다. 이 친구는 자기 엄마가 시내의 약방주인이었기에 늘 인삼을 가지고 와서 먹었으니 키도 크고 얼굴도 달덩이같이 함지박얼굴이었다. 이때 나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옆의 한 친구가 끼어드는 장면 한번 보소, “ 우리 엄마는 다섯 명이다, 나의 엄마는 그 중에 넷째다, 한 번씩 우리 큰엄마한테 가면 바나나 실컷 먹는다, 우리 큰엄마, 나에게 엄청 잘 해 준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큰엄마 자랑한 그 친구네집, 엄청 복잡합디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랑하는 혀를 끊어 버리신다 하였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극단적인 말씀을 하셨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도 그저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 이제 와서야 깨닫게 하시다니, 신문기사의 한 토막이지만 어느 영국 의학전문 잡지에 실린 연구결과를 보니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말 속담이 사실이었다. 임상통계에 의하면 사촌이 논 샀다는 말을 듣고 실제 배가 아픈 자들이 대부분이었단다. 아담 이후, 타락한 사람이란 존재는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보아 준다. 그래서 남이 자랑하는 것을 들으면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시기심과 질투가 솟아나고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나며 심하면 상대방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랑은 듣는 자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 이를 잘 아시고 자랑하는 혀를 끊어 버리시겠다고 하셨다. 정말 자랑하고 싶으면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라, 바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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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무엇이냐

묵상 2016. 5. 3. 12:57 |

 족히 5미터도 더 될 듯한 방음벽 위로 살금살금 기어오르더니 마침내 정상에 이르고는 한 고개를 넘어 뒷 등허리까지 다 점령해 버릴 기세다. 한 해의 사분의 일을 이 낯선 서울에서 보내야 하는 길고도 지루한 겨울 동안 나는 이 상계고등학교 담벼락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담쟁이를 바라보면서 노원 롯데백화점으로 향하곤 한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런데 가끔씩은 주의 깊게 보게 된다. 그때는 물론 내가 신호대기를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멍청히 서 있을 때이다.



 싱그러운 5월의 첫날이다. 오늘도 상계고등학교 담벼락을 감싸고 있는 담쟁이들은 수많은 촉수로 가파른 수직의 벽에 발을 내리고 한걸음 한걸음, 조금씩 조심 조심, 위로 올라 마침내 연초록 물감으로 그 우울하고 답답했던 겨울의 무거움을 단번에 날려버린다. 간밤에 내린 비로 말끔히 먼지가 씻긴 잎들이 너무 영롱하여 길 가던 나를 멈춰 세운다. 생명이 충일한 잎들이 등교하는 수많은 젊음에게 축복을 선사한다. 담쟁이 잎이 아름답지 않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담쟁이만큼 고마운 넝쿨식물도 더물다. 칙칙한 담벼락에 푸르름을 선사하고 무너질 듯 불안한 담벼락을 제 몸으로 얼기설기 얽어매어 안전을 선사하고 때로는 코흘리개들의 물티슈 대용으로도 쓰이지 않는가? 가을의 단풍은 또 어떤가? 담쟁 잎만큼 아름다운 단풍을 나는 보지 못했다. 해마다 가을이면 나는 담쟁이 잎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서울시립대학 캠퍼스를 찾곤 한다. 공과대학 서편건물의 사분지 삼을 점령한 담쟁이 잎이 가을햇살에 반사될 적이면 세상은 온통 반․고흐의 캠버스 위에 짓이겨진 진홍의 유화 그대로다. 담쟁이 잎은 자기를 불태우며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세상은 담쟁이 잎을 주목하지 않는다. 늦가을이 되면 담쟁이 잎은 거저 귀찮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낙엽 수거자루에 담겨 어디론가 실려가 버리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이는 빌라도가 자기 앞에 붙잡혀 온 예수에게 한 질문이다. 세상을 살 만큼 살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질문을 한 번쯤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나는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정말 혼란스럽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낙엽 수거자루에 실려가 버리는 담쟁이 잎처럼 실려 가 버리는 것 같다, 주목받지 못한 채. 사람은 최소한 주목 받고 살아야 한다. 주목 받음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알게 되고 자신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나는 삼심여 년 교단에 서 오면서 주목 받는 사람을 키운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깨달았다. 주목 받지 못하는 담쟁이 잎이 작가 오․헨리에게서 ‘마지막 한 잎’으로 거듭나고, 시인 수필가에게서 그리고 드물기는 하지만 조경사나 화가에게서 재조명을 받지 않는가? 그렇다면 담쟁이 잎을 재조명한 이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나는 오래 전에 나의 블로그에 ‘사랑하면 보인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빌라도는 자기 앞에 세워 두고도 그가 곧 진리임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 수 없었고 그러기에 그를 십자기에 내어 주지 않았는가? 진리는 공허한 관념도 아니요 심오한 이론도 아니다. 길이요 생명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모든 인류의 그리스도(구세주)가 되어 자기 몸을 주어 만 사람의 몸을 사고, 자기 생명을 주어 만 사람의 생명을 산 것이다. 이 모든 동력(動力)의 원천이 무엇인가? 사랑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자기를 떠나간 제자들을 부활 후에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었다. 사랑은 평강을 만들어 내지만 탐욕과 아집은 끊임없이 미움과 증오, 분노와 울분을 만들어 낼 뿐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대상이 무엇이든 진정 사랑하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주목 받는 자로 나 자신이 바꾸어질 것이며 평강을 만들어내는 자로,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자로, 더 나아가 주목 받는 자를 만드는 자로 나 자신을 바꾸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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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보인다.

묵상 2013. 11. 25. 16:31 |

  창밖의 느티나뭇잎에 늦가을의 따뜻한 햇살이 눈부시다. 나뭇잎들이 셋에 둘은 떨어지고 이제 그 하나만 남아 겨울을 재촉하고 있다. 느티나뭇잎이 처음에는 노랗게 물들었다가 다음에는 붉게 변하고 떨어질 때쯤이면 검붉게 물들어 땅 위에 갈린다는 사실도 서울에 와서 살면서 비로소 알았다. 그만큼 나의 서울생활이 하루가 소중하고 고마운 날이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무심히 보던 나뭇잎 하나도 유심히 보게 되고 관심 있게 보게 된 소이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흔히 단풍하면 진홍색의 붉은 단풍을 연상한다. 그러나 단풍에는 노랗게 물드는 단풍들도 있다. 특히 한여름 내내 실실이 푸르던 수양버들이 늦가을에 노랗게 물들어 연못가에 가지를 드리우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내가 즐겨 찾는 서울시립대 캠퍼스 연못가 벤치에는 오늘도 선남선녀들의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젊음이 있고 낭만이 넘쳐나는 대학 캠퍼스에서 인생의 후반기를 달려가는 한 시니어가 젊음과 함께 오늘도 남이 보지 못하는 노란 단풍을 보너스로 보면서 사랑하면 보인다는 진리를 깨친 사람에게만 허여(許與)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림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조금 있다 중랑천으로 나가볼까 한다. 반가운 손님들의 귀환(歸還)을 보려 함이다. 매년 이맘때면 찾아오는 손님이지만 내 마음의 한켠에는 무거움이 가시지 않는다. 양계농을 하는 농민들의 한숨소리 때문이다. 이들이 조류독감을 몰고오는 주범이라고 방송에서 연일 보도를 쏟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은 참 어려울 일, 세상은 고루 공평하지 않다. 그러기에 겨울에는 가정마다 닭 한 마리 더 먹기 운동을 벌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반가운 철새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그들의 찬란한 비상(飛翔)을 이 땅의 강과 호수 어디에서나 마음껏 볼 수 있기에 그러하다.



 오래 전의 추억이다. 어느 모진 겨울밤, 나는 퇴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날따라 매서운 칼바람의 겨울 추위가 옷 속을 파고들어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오는 내 발걸음이 퍽이나 빨랐던 것 같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와서 집쪽으로 방향을 틀려 하는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오는 한 모자(母子)상이 나의 발걸음을 그 자리에 그대로 묶어 버렸다. 한 여인이 조그만 연탄화로를 놓고 지하철 입구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군밤을 구워 팔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등 뒤에는 귀여운 한 아기가 매달려 연신 콧물을 흘리며 앙증스런 두 손으로 엄마의 목을 끌어안고 자기 코를 비벼대도 있지 않은가. 얼핏 보기에도 그 여인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스카프로 머리를 살짝 동였지만 얼굴이 희고 이목구비가 또렸했다. 나는 그 순간 그 여인이 너무나 고마웠다. 나의 손은 저절로 나의 주머니 속을 뒤적이고 있었다. 나는 내 지갑을 꺼내들고 그 여인의 군밤을 사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거기 군밤 구워 놓은 것 봉지채로 다 싸 주세요. 아기가 참 귀엽내요” 나는 그 여인이 팔려고 내어놓은 군밤 봉지들을 몽땅 다 샀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여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몽땅 다 사 주는 일뿐일 것이라 믿어졌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 머릿속은 갑자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저만한 인물이면 쉽게 살 수 있을 텐데, 그 길을 마다하고… 아! 그 엄마 고마워.‘”



 전에 내가 나의 블로그에 ‘아름다운 동행’이라 하여 한 편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는 미국에 사는 우리 교포 부부 한 쌍을 대상으로 했지만 이번에는 우리나라에 현재 살고 있는 한 부부의 이야기다. 이 부부의 이야기는 이미 방송에 소개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이 방송을 보면서 참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부부라고 생각했다. 매일 방송되는 이야깃거리에는 정말 하잘것없는 것들도 많다. 어떤 프로는 시청자들의 비위에 맞추느라고 지식과 스펙을 고루 갖춘 이들을 패널로 등장시킨다. 프로를 짜는 입안자들은 구색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이건 정말 대 착각이다. 구색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식과 스펙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세상은 왜 더 자꾸 꼬여만 가는가? 소위 지식인이란 작자가 자행하는 만행들을 그들은 보지 못하는가? 지식과 스펙만 그렇게 좋아한다면 그들은 진정 맘몬주의에 맹종하는 굴종적 노예근성의 발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이라 할 수밖에 없다. 화려한 말잔치 뒤에 남는 것은 허무와 공허뿐이다. 이것들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오로지 사랑만이 가능하게 할 뿐이다.



 배에는 단 네 사람만이 타고 있을 뿐이다. 선장과 세 사람의 인부. 선장은 한 쪽 팔이 없고 나머지 세 사람은 외국계 노동자 청년. 이 배는 오징어잡이 어선이다. 선장은 고향 울릉도를 떠나 오징어의 이동을 좇아 연중 동해에서 서남해안으로 이동 중이다. 그러니 고향으로 입항하는 일은 일 년에 한두 번이나 될까? 바다에서의 생활이 태반이다. 바다에서의 일이야 소개할 필요도 없는 일, 한 마디로 극한 작업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의 가슴을 찡하게 해 주었던 일은 바로 선장의 진정성이다. 그에게 있어서 외국계 청년들은 단순한 고용인이 아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이다. 남이 어떻게 자신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사랑하면 보인다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그에게는 보이는 것이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더니 선장의 아내를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이 부부를 존경함을 금할 수 없었다. 배가 어느 날 몇 시에 어느 부두로 입항한다는 남편으로부터의 소식이 오면 아내는 불원천리(不遠千里) 남편 곁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새벽이든 한밤이든 시외버스 터미널에 그녀는 서 있는 것이다. 남편을 만나기 위하여, 남편의 항구로 그녀는 가는 것이다. “선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선 새벽, 선창가에 서서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의 입에서 하선(下船)하는 남편에게 던지는 이 한마디의 말! 당신은 내 삻의 이유란 뜻이 아닐까(You mean everything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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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탐욕

묵상 2013. 9. 1. 08:35 |

 오늘은 고향으로 가는 날이다. 서울역 광장은 온갖 사람들의 물결로 넘쳐난다. 다들 물 찬 제비처럼 발걸음도 가볍다. 나는 맥도날도에서 빅맥을 셋트로 주문하여 플랫폼으로 내려간다. 8번 게이트를 지나 에스컬레이트에 몸을 기댄 채 아래로 얼음 타듯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옆의 젊은이들을 힐끗 쳐다본다. 도톰한 얼굴에 뽀얀 살결이 정말 아름다운 얼굴의 소녀다. 아마 막바지의 피서를 해운대로 가는 모양이다. 언제나 그러하지만 여행만큼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은 없다. 나는 벌써 고향의 들판을 달리는 소년이 되어 있는 것이다.



 열차는 홈을 빠져나와 남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다운타운을 다 지나기까지 나는 잠을 청하기로 했다. 선글라스를 벗고 시트에 몸을 맡기니 나른해지면서 잠이 온다. 얼마를 잤을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눈부신 정경에 나는 잠을 깼다. 차는 충복 영동을 지나고 있었다. 차창 밖은 온통 초록의 바다다. 싱그러운 팔월의 들판은 온통 파랗게 칠해진 한 폭의 수채화다. 언제나 보아도 싫지 않고 질리지 않는 푸르름. 너는 때론 강이 되어 흐르고 때론 산이 되어 그곳에 우뚝 서 있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바다로 모든 것을 휘몰아 가기도 하는 난폭자. 그러나 너 푸르름을 만드는 모태를 너는 아는가? 언제나 안아주고 품어주며 다 주기도 하지만 자신의 실체(實體)는 드러내지 않는 것이 바로 흙이 아닌가! 푸르름도 결국 한 줌의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벋으며 무성한 숲을 이루어 들판과 산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나의 눈앞에 펼쳐지는 푸르름의 파노라마를 보면서 내가 흙의 고마움을 새삼 발견하게 되니 이번 여행이야말로 나에게는 참으로 유익한 여행이 아닐 수 없다. 문득 한 권의 책이 생각난다.



 뭐 읽을 게 없나 해서 딸애의 방을 기웃거리던 열흘 전쯤 전, 책 한 권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장하준 교수가 최근에 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아! 인간 세계에도 ‘흙’과 같이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듯이 장하준 교수는 이제 흙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는 유명해졌고 세상이 다 아는 석학이다. 그런데 고마운 것이 그는 의도적으로 흙이 되어 살아가려 하는 모습을 나는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캠브리지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한 해가 1990년부터라니까 한 지성이 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해 오던 최근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세계에는 정말 정의가 있었던가 되묻고 싶다. 정의(正義), 정의가 무엇인지 나는 그것의 정의(定義)를 내릴 만큼 해박하지 못하다. 더더욱 나는 정의(正義)를 논할 만큼의 당당한 삶을 살지도 못한 한 사람의 범부(凡夫)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세상에는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 정의에 관한 많은 저서들도 쏟아져 나와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게 된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세상에는 언제나 가난한 자들이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면서 재판관은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지 말 것이며 장사하는 자들은 저울추를 속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다. 세상에는 언제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억누르는 자와 억눌린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가 있기에 고아와 과부는 내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인간은 정말 정의를 논할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성경은 오히려 인간을 탐욕적 존재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어느 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으라는 사탄의 유혹을 받는다. 사탄은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다. 성경에는 탐욕과 죄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는 몇몇 구절이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이 두 구절들에서 보듯이 죄의 뿌리는 욕심 곧 탐욕이다. 그리고 탐욕의 정점(頂点)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는 것이다.



 인간은 정의를 논할 가치가 없는 존재다. 근본적으로 타락하고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진노의 자식이다. 죄와 허물로 죽어버린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사이비 정의가 도처에 넘쳐난다. 난삽(難澁)한 지식적 정의나 나를 헷갈리게 하는 변증적 정의 등등. 그러나 이것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박제물처럼 생명이 없다. 그러기에 감동이 없고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 이런 때에 장 교수의 책 한 권은 나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고 나로 이 글을 쓰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였으니 고마울 수밖에. 경제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쉽게 이해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이 우선 고마웠고 방대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를 통하여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주어 더욱 애착이 가는 책이었다. 그러나 이것뿐이었다면 나는 이 책을 다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를 가장 감동시킨 이유는 전혀 딴 곳에 있었다. 장 교수가 크리스천인지의 여부에 대하여 내가 아는 바는 없다. 다만 그의 책 속에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정의 편에 서려 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나 본능적으로 권력에 약하다. 최근 삼십여 년의 세계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의, 주장이 현실화되는 강대국의 지배 세상이었다고 책에서는 밝히고 있다. 더더욱 영국은 자본주의의 발상지요 힘은 좀 잃었지만 여전히 강대국인 나라다. 그 중심에서 영국의 이념과 이상을 끊임없이 재창조해야 하는 대학에 몸담고 있는 자로서 어찌 주류(主流)에 속하고 싶은 유혹이 없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경제학자들과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우면서 강대국의 패권주의를 신랄히 비판하고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의 빈국(貧國)이나 동남아, 라틴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약자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옹호하는 경제정책의 모델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온몸으로 실천하려 하는 한 지성의 리얼한 정의를 만나니 내 마음 참으로 흡족하다. 책을 읽으면서 그 내용은 어려워 비록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저자의 따뜻한 인간애를 읽을 수 있어서 읽는 동안 내내 행복하였다.



 인생은 짧다. 영원히 살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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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날같이 뾰족한 창포잎 끝에 새벽이슬이 맺혔다. 어제 밤부터 세차게 내리던 마른장마 뒤의 폭우라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창가를 거반 가리는 느티나무 잎들 위로 우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는 나의 잠자는 동심(童心)을 깨워 놓는다. 황순원의〈소나기〉가 아니라도 여름날 소나기는 시원하다. 밤새도록 시원스레 내리는 소나기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새벽을 기다린다. 새벽이 주는 새 세상을 보기 위함이다. 모두가 깨끗하다. 보드라운 비로드 천으로 곱게 닦아 놓은 듯 나뭇잎은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풀잎마다 블루다이아몬드가 맺혀 있다. 투명한 이슬방울 속에 내 얼굴이 들어 있다. 육십여 년 전의 그 앳된 소년의 얼굴이.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행복할까? 사람들은 나름대로 행복을 찾아 동분서주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껏 행복을 찾아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면서 못할 짓들 많이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나에게 정말 행복한 선물을 내가 태어날 때 이미 주셨다는 것을 세삼 깨닫게 된다. 그게 바로 불 수 있다는 축복이다.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태어나서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그러하고 엄마를 닮은 나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엄마, 이게 뭐야?” 아기가 태어나서 세상을 볼 때 제일 먼저 하는 질문이다. 세상과의 대화의 첫 질문이 봄을 통해 시작된다. 만약 아기가 볼 수 없다면 세상과의 소통(疏通)이나 교분(交分)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볼 수 있다는 축복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눈을 마음의 창(窓)이라 하지 않는가. 눈은 마음의 창을 열어 나와 너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게 하고 나와 너를 공유하게 하며 나와 풀잎, 뭇 새들과의 속삭임의 다리를 놓아주기도 한다. 나는 요사이 태어나 이제 반년 남짓 된 손자의 해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읽고 있다. 손자의 눈동자는 나로 가족을 보게 하며 가족 너머 대양(大洋)을 보게 한다. 그리고 우주(宇宙)를 보게 될 때에는 만유(萬有)를 지으시고 나를 조성하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러니 어찌 보게 되는 축복을 누림이 행복하지 아니한가!

 


 우리가 공원을 산책하거나 등산을 할 때면 꼭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한두 명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을 꺾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왜 이럴까? 꼭 꺾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잇는 욕망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 가지의 욕망을 경계하셨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이면 누구나 생득적(生得的)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셋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 육신의 정욕이다. 육신의 정욕은 그 끝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안목의 정욕은 보암직한 정욕을 말함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먹음직한 정욕으로 나아가려 하는 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당신이 지으신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축복을 주셨다. 그러나 철저하게 안목의 정욕을 경계하신다.



 갤러리에 가게 되면 입구에 ‘보시기만 하고 만지지는 마세요’ 란 팻말이 붙어 있음을 본다. 이는 바로 안목의 정욕을 경계함이다. 자동차의 가속기능과 제어기능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바보 같은 질문일지 모르나 정답은 제어기능이다. 왜일까? 제어기능을 소홀히 하면 오 분 먼저 가려다 오십 년 먼저 간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제어기능을 잘 작동시키지 못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패가망신하게 된다. 요사이 항간에는 정말 바보 같은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간 큰 남자들이 있음을 본다. 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종종 분노를 넘어 허탈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제발 철 좀 들었으면 한다. 교수, 법관, 의사 등등 소위 최고의 도덕관을 지닌 자요 지성인이라는 자들이 지하철에서 성희롱을 하였다, 자기의 집무실에서 제자나 환자와 성희롱 내지 성폭행을 하려다 어찌어찌되었다는 기사로 거의 매일 일간지를 도배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막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실망감을 가지게 된다. 반년만 더 살면 내 나이 고희(古稀)에 이르게 된다. 나와 같은 세대는 어릴 때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이렇게 배워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하는 것을 체득(體得)하도록 말이다. 다시 말하면 가속기능보다 제어기능을 더욱 소중히 배워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 중에 최고의 걸작은 여인이다. 그러기에 여인의 몸을 보는 것은 아름다운 축복이다. 르느와르의 누드화는 불멸의 명작이다. 나도 대가들의 누드화 보기를 좋아한다. 동서양을 넘나들며 동양화 서양화 가릴 것 없이 누드화를 즐겨 본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칠 뿐이다. 보지만 꺾으려 하지 않는다. 여체의 신비를 통하여 하나님의 청조섭리를 보게 되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꺾으려 할 때 비극이 발생한다. 순간적인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여 나 자신을 파멸의 늪으로 던져버릴 것인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책임져야 할 가정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순간의 쾌락은 지극히 달다. 그러나 그 결과는 지극히 쓰다. 욕망의 유혹은 악마의 속삭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 순간의 쾌락에 나와 내 가정의 행복을 송두리째 걸 수는 없다. 한 순간의 쾌락이 나와 내 가정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족쇄가 된다는 것을 뼛속에 새길 일이다. 나는 언제나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삶을 마음속에 간직한다.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요셉을 유혹하였으나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득죄(得罪)하리요” 하면서 말씀을 붙잡았던 요셉의 삶을 나의 삶의 지표로 삼아왔다. 어른이면 다 어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나에게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철 든 어른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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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쉬울 줄이야

묵상 2013. 1. 7. 14:42 |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승강구 좌우편에 이런 광고가 종종 붙어 있음을 보게 된다. “×× 대학병원에서 고혈압 임상실험에 참가하실 분을 모집합니다” 질병에는 임상실험이 있는데 삶에는 왜 임상실험이 없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참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께나 먹고 세상을 살만치 산 내가 인생은 단 한 번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라는 것을 모르다니 말이다.

 

 

 나는 오늘 이 글에서 일반 독자들을 상대로 하기보다는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인생의 난제(難題)를 던져보려 한다. 한자어의 갈등을 어원적으로 풀이해 보면 칡 갈(葛)자와 등나무 등(藤)자의 합성어가 갈등(葛藤)이다. 칡과 등나무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꼬면서 올라간다. 그러기에 칡과 등나무가 만나면 그 꼬임이 결코 풀리지 않는다. 우리의 삶에서 너무나 답답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질병의 경우처럼 임상실험이라도 한번 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때가 종종 있지만 인생은 그럴 수 없는 게 운명이다. 그만큼 고민도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에 쓰려하는 글은 또한 나의 블로그에 이미 올린 ‘약속1,2’에서 따져 본 주제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 연장이라 보아도 좋겠다. 인생을 살아갈 적에 답이 둘이어서 답답할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에 어떻게 하는가? 세상 사람들이야 점괘도 보고 사주관상도 보고 각종 운명서적도 뒤적이면서 용하다는 사람 다 찾아가면서 별별 짓 다해 보겠지만 우리 크리스천은 어떻게 하는가? 성경에 정작 답이 있음에도 얼마나 많은 세월을 죽여가면서 허둥대고 있는가? 칡과 등나무가 서로 엇갈려 꼬인 것처럼 내 인생은 더욱 더 꼬여만 가는가?

 

 

 나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인 지난 12월 30일 주일 아침, 예배에서 불현듯 이 사실을 깨달았다. 15분 정도 먼저, 교회 예배실에 도착하여 ‘나의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아들이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하고 묵상기도를 하고 ‘내가 여호와의 계시는 집과 여호와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라는 시편의 다윗의 시를 읊조리면서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날 예배의 주제는 역대상(29:10-19)절을 중심으로 다윗의 삶을 최종 결산하는 ‘비전의 삶과 믿음과 감사의 삶’이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중에 너무나 또렷하게 성령의 감동이 나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나의 입에서 나온 세 마디의 말, ‘이렇게 쉬울 줄이야’

 

 

 예배를 드리고 교회 문을 나서는 나의 발걸음은 새털같이 가벼웠다. 이 비밀을 먼저 나의 자녀들에게 알려 주어야지 하면서 집으로 달려온 나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나와 내 자녀만이 아니라 믿음의 동역자들과 나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크리스천 독자님들과 함께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 동안 인생의 난제(難題) 앞에서 얼마나 좌절하고 절망해 왔는가? 그리고 혼자 가슴앓이 하면서 날밤을 지새운 날이 그 얼마이던가? 명색이 집사요 장로며 몇십 년 믿었다는 경륜은 있지만 그것들이 정작 문제의 해답이 되었던가? 못 되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성경 창세기 18장 10절 이하에는 한 여자가 등장하는데 이름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사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는 약속을 하신다. 그때 사라가 장막 문에서 듣고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엿고 내 주인도 늙었거늘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이때 하나님이 사라에게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하시니

 

 

 성경 누가복음 1장 11절 이하에는 또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한 여자는 마리아요 한 남자는 제사장 사가랴이다. 아느 날 하나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하시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가랴는 그가 자기 아들의 태어남을 볼 때까지 벙어리가 되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이 일이 이루리라’

 

 

 한편 사가랴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가 육개월 후에 마리아에게 나타나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연이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니 마리아가 대답하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하매

 

 

 창세기의 사라와 누가복음의 마리아와 사가랴의 기록을 통하여 살펴볼 때 인생의 난제들에 대한 모든 해답이 바로 성경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다. 사라와 마리아에게 공통적으로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라는 질문이다. 그러면 지금 나에게 요구되는 믿음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 라는 믿음이다. 바로 창세기 1장 1절의 믿음이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다. 창세기 21장 1절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기록이 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쎄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여기에서 ‘말씀대로’ 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거듭 나온다. 그렇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민수기 23장 19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라기 이후 400년 간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지만 때가 되니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 구주로 오셨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되 온전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했다.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물으시는 그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의 얄팍한 지식을 믿었고 돈을 믿거나 철밥통을 믿어왔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이외는 다 가 버린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나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뢰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라고 말씀하셨으니 나의 길을 하나님께 맡긴다. 그리하면 말씀대로 일은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이루신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다. 그러니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신다. 말씀대로, 말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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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서운 한파가 살 속으로 파고들어 온 몸이 저려온다. 하필이면 이때에 어금니를 뺄 게 뭐람, “선생님, 무조건 빼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안 되겠는데요.” 제자의 말을 입 속으로 반추하면서 나는 을지로 입구, 지하철 게이트로 터덜터덜 내려온다. 이쯤 되면 나도 이제 영락없는 영감인가? 머지않아 고희를 바라보는 나를 아내는 그래도 만년 청춘이란다. 그래, 나에게도 청춘은 있었지, 나에게 펭귄이란 닉네임을 붙여 준 제자들 덕분에 나는 남극의 신사처럼 올곧고 멋지게 청춘을 보낸 적이 있었지.

 

 

 그 펭귄에게도 어김없이 겨울은 찾아오고 또 한 해가 저물려 하고 있다. 온 세상을 용광로같이 달구던 여름의 태양은 어디로 숨어 버렸는가? 베란다의 아침 햇살은 어찌 그리 인색한지 두 손을 내밀고 맞으려면 어느 새 숨어 버린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베란다 절반도 찾아 주지 않는다. 동향 아파트는 그래서 서럽다. 그러나 어찌하랴, 절반의 은택에도 감사할밖에. 쪽방 촌에 사는 독거노인이 얼마며 이 겨울에 동사하는 노숙자가 얼마인가.

 

  

 12월의 세상은 온통 선거물결로 쓰나미다. 공영방송뿐 아니라 지상파 방송은 모두 선거로 도배를 했다. 무슨 세상에 애국자는 그렇게 많은지, 말말이 애국이요 나라 살리는 비책이란다. 그러나 대부분은 구라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임을 국민은 안다. 그런데 정작 정치인은 모른다. 이게 바로 역설(逆說)이다. 기막힌 역설!

 

 

 광화문 광장은 시차를 두고 진분홍, 연녹색 머플러의 물결로 넘쳐난다. 왕의 남자들, 천하의 말꾼들은 다 모였다. 군중 뒤에 점잖이 않으신 세종대왕이 빙긋이 웃고 있다. “말꾼들아, 너희가 어린 백성의 마음을 아는가?” 세종대왕이 대갈일성을 하실 것 같다. 바로 앞 시청광장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구세군 자선냄비가 들어섰다. 어느 독지가가 일억을 기부하였다 하여 장안의 화제다. 기부자에 정치가는 없는 것 같다.

 

 

 오늘은 펭귄이 서울도서관으로 출근한다. 며칠 전에 도서관 회원증을 발급받았다. 나도 이제 당당한 서울시민이다. 왜냐하면 서울시민이 아니면 회원증을 발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산지도 벌써 삼 년이 넘었다. 그러나 언제나 이방인 같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르다. 인구 천만의 서울시민 중의 한 사람이다. 옛 서울시청 청사가 도서관으로 개조되었다. 내부시설을 완전히 개조해서 서울시민을 위한 지식의 산실로 만든 서울시에 정말 감사한다. 국제 열람실을 비롯하여 열람실에는 주니어뿐 아니라 시니어를 배려하여 연령에 관계없이 서로 간 대화가 가능한 공간을 마련하여 단절을 넘어 소통을 도모한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어 너무나 좋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세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도서관은 신대륙에 도전하는 젊은이의 타이타닉이다. 도서관에는 열람할 책도 많고 검색할 정보도 많다. 나는 도서관에서 나의 무료함을 떨쳐 버린다. 책들을 열람하고 책표지의 신선한 유혹에 흠뻑 취하다 보면 나는 어느 새 젊은이가 된다. 생물학적 젊은이가 아니라 생각의 젊은이로 거듭난다. 지금 우리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처럼 더 높이, 더 멀리 날개를 쳐야 한다. 그리하여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함께 울고 함께 웃어 주어야 한다. 공감과 소통을 위하여.

 

 

 서울 도서관 오른쪽 건너편에는 덕수궁이 눌러앉아 있고 궁을 안고 도는 돌담길을 돌아 조금 올라가면 서울시립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는 천경자홀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관람료는 기획전시를 제외하고는 무료이므로 부담이 없다. 서울에서 사는 쏠쏠한 재미는 미술품을 많이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볼 때마다 화가가 그 시대의 아픔을 체화(體化:몸으로 느끼면서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작업)한 모습을 보기에 다른 어떤 예술보다 좋아한다. 서울의 변천사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서울사진전도 기획전으로 전시되어 있어 이 또한 분외의 복이다. 개화기 서울의 모습으로부터 현재의 서울의 모습까지를 천개천 천변풍경을 비롯하여 서울의 중심거리의 변천사를 아울러 볼 수 있어 좋다. 이 사진전을 보고 있노라면 서울이 정말 인고와 환희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속에서 나는 나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갑자기 며칠 전에 본 TV의 어느 연예프로가 생각난다. MC가 예닐곱의 남녀 대담자들을 상대로 이혼을 주제로 대담을 벌이고 있었다. 이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한 갑론을박으로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MC가 뜬금없이 대담자들 가운데 앉은 한 원로 여성 연예인에게 주제와는 상관없는 질문을 했다. “OO 선배님, 남녀 간에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이때 이분, 대뜸 동문서답 같기도 하고 질문자에게 무안을 주는 것 같기도 한 말 한 마디를 내뱉는데 그 표정이 정말 너무나 진지해서 TV를 보는 나에게는 너무나 아픔으로 다가왔다. “사랑은 무슨? 빌어먹을, 다 주는 거야. 받으려면 상처만 남아.” 이 말 속에 담긴 뜻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나의 아내와 만나고 사십여 년만에야 알았다.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로 오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가난한 자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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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책 그리고 캠퍼스

묵상 2012. 10. 10. 16:13 |

“선생님, 김철입니다. 댁으로 몇 번 전화 드렸더니 소식이 없어 외국 나가셨나 했습니다”

언제나 들으면 반갑고 다정한 그 때 그 목소리의 제자 음성이다. 가을과 함께 묻어오는 추억의 목소리들, 올해 가을은 나에게는 유난하다. 아내의 육순을 맞는 가을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내를 만난 것도 가을이며 밤나무 아래에서 가슴조리며 기다린 것도 역시 그해 가을이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내가 즐겨 찾는 여기 시립대학교 캠퍼스엔 서서히 가을이 오고 있다. 학생들의 옷맵시가 사뭇 달라졌다. 남자야 뭐 늘 그렇지만 여자는 패션에서 계절을 읽을 수 있다. 소매가 길어지고 셔츠 위에는 가벼운 니트가 걸쳐지면 이제 가을이다. 옛날에는 두툼한 대학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도서관을 맴도는 것이 캠퍼스의 낭만이었는데 이제는 삼삼오오 교정의 비치파라솔 밑에 앉아서 스마트폰 조작으로 바쁘다. 님은 먼 곳에 있는 걸까?

 

 

 나는 오늘이 행복하다. 오늘 내가 대학의 캠퍼스를 거닐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 여기 대학은 젊음이 있고 꿈이 있고 낭만이 있어서 좋다. 나는 이곳에서 새로이 태어난다. 지난 사십여 년 전의 나의 대학생활은 정말 각박하였다. 나에게서의 대학 사년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고 낭만이 아닌 사실(寫實)이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나는 낭만을 그리워하고 아직도 꿈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고호와 고갱이 좋고 르느와르의 욕녀(浴女)가 좋다.

 

 

 캠퍼스의 한쪽켠에 자리잡고 있는 연못은 꽤나 고풍스럽다. 연못가는 이끼 낀 돌들이 어깨동무하며 주위를 감싸고, 물 위에는 부레옥잠이 무리지어 떠다닌다. 연못 위를 가로지른 반달 모양의 나무다리 위에서 수십 마리의 참붕어 새끼들이 어미를 따라 원을 그리며 물속을 유영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그대로 동양화 한 폭이다. 그러나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다른 한 손에는 아메리카노 커피잔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옛적의 우리 선조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니 말하자면 퓨전이라 할까?

 

 

 가을 단풍의 왕자는 단연 능수버들이다. 단풍이 꽃보다 배승(倍勝)하다는 것은 물론 정비석의 ‘산정무한’에서 알았지만 능수버들의 단풍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정말 몰랐다. 연못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여기 능수버들은 실실이 황금색깔을 띠었다. 꼭 페르시아의 황금빛 카펫 같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 스마트폰에 담아보지만 영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래, 아름다운 것은 그대로 두고 보아야지, 꺾어서야 되는가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한다. 캠퍼스에 찾아올 때마다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에 고마워하고 많은 것을 보려 한다. 왜냐하면 이것도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인생 이모작의 시기에 대학 캠퍼스를 찾을 수 있고 한 권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참 열심히 살아온 결과로 얻어진 행복이라 생각되기에 더욱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첫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아내에게 고맙다. 아내를 만난 지 사십사 년 동안 많이도 싸워 왔지만 아내는 내 인생의 아름다운 동반자요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또한 나는 자녀들에게 감사한다. 다들 잘 자라왔으니까. ]

 

 

 캠퍼스에 소리들이 몰려오고 있다. 나는 캠퍼스를 가로지르며 뻗어있는 넓은 보도 위에서 이 소리들을 맞고 있다. 캠퍼스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소음이 아니다. 나뭇잎 부딪는 소리, 낙엽 갈리는 소리, 보도 위로 굴러가는 젊음의 구두소리는 아름다운 화음이다. 나는 지금 가을 햇살을 가리는 파라솔 밑의 벤치에 앉아 이 화음을 즐기면서 책을 읽고 있다, <미술관 옆 인문학>이라는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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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묵상 2012. 9. 13. 22:13 |

 한여름날 서울의 기온이 35도를 웃도는 날이 열흘째 계속되고 있다. 18년만의 기상 이변이란다. 한밤중에도 열대야로 잠을 설친다. 강변이든 다리 밑이든 열기를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초만원이다. 꼭 죽을 것만 같다. 오늘은 또 어디로 피신을 해야 하나? 이제까지 즐겨 찾던 근린공원 정자 밑도 시원할 것 같지 않다. 청량리 롯데 백화점으로나 가 볼까? 거기는 백화점과 플라자, 마트가 한곳에 몰려있어 눈치 보지 않아도 좋다. 또한 고객이 왕이라는데 배짱 한번 부려보면 어떨까? 지하철에서 내려 자연스레 들어가기도 좋아 정말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그런지 요사이는 백화점 1층 로비는 연일 초만원을 이룬다. 볼거리도 많다. 연중세일 이벤트로부터 각종 문화행사까지 정말 고객을 위한 맞춤복 마케팅이다. 이래서 롯데는 글로벌 유통망을 세계로 내리 깔았는가? 참 재주도 좋다.

 

 

 인간 만사 막히면 답답하다. 부부간이 그렇고 부자간이 그렇다. 어찌 이뿐이랴. 세상은 종과 횡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해와 득실로 얽히고 영욕과 빈부귀천으로 얽힌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반목과 질시로 진흙탕 싸움이다. 세상 어디에 시원하게 뚫어줄 자 없는가? 항간에서 탈출 모티브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빠삐용은 그래서 대중의 우상이다. 쇼생크 탈출이 시원하고 도망자 시리즈가 대중을 매료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 막힌 것을 뚫어주고 가진 자의 승자 독식을 시원하게 날려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자녀들이 어릴 때의 이야기다. “얘들아, 오늘 아빠하고 대화 좀 하자.” 해 놓고 가족회의를 하면 언제나 똑 같다. “아빠, 이게 뭐 가족회의야? 아빠 혼자 실컷 아빠 말만 다 해 놓고, 우리는 듣기만 했잖아, 다시는 이런 가족회의 안 한다.” 뭐 이런 식이다. 그러니 우리 집에는 애시당초 아빠나 남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폭군 한 사람만 있을 뿐 도대체 소통이 없다.

 

 

 올해 여름 우리나라의 하늘이 왜 이렇게 달구어졌는가? 자연의 질서가 깨뜨려졌기 때문이다. 자연도 막히면 광분한다. 사람들은 다를까? 우리나라는 G7에는 들지 못해도 G20에는 든 국민소득 2만 불의 선진국이다. 그런데도 7년째 세계에서 자살률 1위의 나라다. 하루에 42명꼴로 매일 죽는다. 원인이 무엇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후진국의 여러 나라와 비교해 보아도 상당히 낮은 편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돈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한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나다. 60년대 이후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는 산업화 과정에서 돈의 위력을 최대로 맛본 나와 같은 기성세대다. 멀리는 못 보더라도 내 자식에게라도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할 어른세대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치지 못한 책임이 재앙으로 되돌아온 결과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돈을 섬기는 물신주의에 빠져 모든 가치관을 유물적(唯物的) 사고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한국사회는 돈이 양반이다.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을 읽어 보라. 양반이면 안 되는 게 없다. 오늘날이 그렇다. 그러기에 돈으로 부부간을 막아 버리고 부모와 자식 사이를 막아 버린다. 한강은 유유히 흐르지만 돈이 남북으로 갈라놓는다.

 

 

 대안은 없는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돈이라면 최고라는 잘못된 외길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돌이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가? 자녀를 낳으면 일류 대학에 입학시켜야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생각이 복잡하다. 그래서 1차, 2차 5개년 계획들을 세운다. 왜 일류 대학인가? 바로 돈이다. 일류 대학 나오면 돈 많이 받는 대기업이나 사(士)자가 보장되는 라이선스를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녀들을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이라 생각하고 감사하지 않는다. 자녀들의 능력이나 취미, 적성 등을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은 다반사고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는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내 자식만 생각하는 지극한 이기주의가 날로 팽배해져 이제는 소위 사회 지도자층에서도 더불어 사는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사회화 훈련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진정 이 사회에 황희와 같은 청백리는 없는가? 이 시대는 청빈(淸貧)을 요구할 수 있는 전제군주 시대가 아니다. 자유와 경쟁이 가치로 자리 잡은 민주자본주의 시대다. 그러기에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와 같은 청부(淸富)가 미덕이요, 그러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더욱 그리워진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기성세대의 잘못된 가치관으로 도처에서 체증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멀지 않아 추석 귀성길 고속도로는 자동차로 뒤범벅이 될 것이다. 도로야 막히면 뚫으면 되지만 내 안에 막힌 답답함은 어쩌노? 남편과 아내가 생각이 달라 끊임없이 평행선을 달리고 부모와 자식이 평행선을 달려만 가니 누가 뚫어줄꼬? 나만 옳다는 생각으로 아무리 달려가도 평행선일 뿐이다. 만나는 접점(接點)은 없다. 이제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내려놓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되돌아보는 것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절대시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상대화하는 것이다. 내 것만이 옳고 네 것은 틀리다는 혹백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치관과 인생관은 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잘못된 가치관과 인생관의 관성에서 벗어나리란 쉽지 않다. 그러기에 대단한 결단이 필요하다. 내가 잘못된 가치관으로 나의 자녀들을 강요하고 있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다. 나보다 나의 자녀들은 살 날이 많다. 나의 사랑스런 자녀들의 앞날의 행복을 위하여 이것쯤은 해 줘야 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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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가 필연인가

묵상 2012. 7. 11. 14:33 |

 오늘은 참으로 즐겁고 설레는 날이다. 사돈댁에서 나들이를 함께하자는 제안이 왔기 때문이다. 나는 사돈 내외와 모처럼 동승하여 바깥사돈이 직접 모는 승용차 안에서 한여름의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차는 서울 시내를 빠져나와 경부고속도로 위를 질주한다. 일요일 늦은 오후이니 주말도 막판인데 차는 왜 이리 많은지, 톨게이트까지가 한 시간 남짓 걸린다. 참 세월도 많이 변했다. 처음 경부고속도로가 뚫렸을 때는 차라고 해 봐야 고속버스나 트럭 몇 대 정도가 고작이었으니까.

 

 고속도로 위를 달려보면 나라의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 특히 화장실이 그러하다. 세계에서 우리나라 고속도로 화장실이 최고다. 뉴욕이나 파리를 여행하는 관광객이라면 한번쯤은 화장실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2000년 여름이다. 내가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스카이 라운지에 올라갔을 때의 일이다. 전망대에서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는데 화장실가야 할 일이 생겼다. 화장실 앞에는 남녀가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때 화장실 때문에 겪었던 너무나 난감한 일을 지금도 뇌리에서 지울 수 없다. 우리나라가 제 1회 국제 화장실대회를 개최한 주최국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고속도로 화장실이 바뀐 하나의 사건이 우리나라를 문화의 선진국으로 끌어올린 근본적 계기가 되었다 주장한다면 이는 지나칠까?

 

 세상에는 우연이란 없다. 고속도로 화장실 대변혁의 원인을 나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한 전직 군사령관 출신의 도로공사 사장이 취임한 이후 제일 먼저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을 개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신선하고 충격적인 일인가! 옛날 우리네 조상들은 화장실을 뒷간이라 부르면서 멀리 두기를 좋아했다. 냄새나고 불결한 곳이니까 당연히 집 뒤 으쓱한 곳에 두어야 했으리라. 우리속담에도 뒷간과 처가는 멀수록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한 최고경영자의 발상의 전환으로 화장실을 나의 안방같이 가꾸고 나의 가장 가까이하는 친근한 곳으로 바꾼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아니고 무엇인가.

 

 차는 경부고속도로에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로 진로를 바꾸고 얼마 후 논산에서는 다시 호남고속도로를 갈아타고 달리다가 다시 장수익산간 고속도로로 진입하여 달리더니 이번에는 광양익산간 고속도로 위를 바꿔타고 쾌주하기 시작한다. 이 좁은 나라에 왜 이리 고속도로가 많은지 국도나 지방도를 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진짜 행복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어디 우연이 있는가? 이 많은 고속도로를 누가 만들었는가? 비로 우리네 산업역군들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나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으면 우연으로 돌려 버린다. 심지어 나의 나고 죽음까지도 말이다.

 

 과연 나는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그리고 우연히 죽어 가는가? 과학자들은 인과론을 절대시한다. 그런데도 유독 우주생성은 우연이라 주장한다. 이 얼마나 기막힌 자기모순인가. 나는 산이나 들판에 나갔다가 개미떼들을 보면 생각에 잠길 때가 많다. 만약 내가 저놈들을 밟아 짓뭉개 버리면 저놈들은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죽어갈까? 재수가 없어 여기서 죽는다고 말할까? 아니면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죽는다고 말할까? 그들이 뭐라고 말하고 죽는다 하더라도 그를 죽인 자는 분명 나요 나의 구둣발임이 분명하다.

 

 얼마 전에 나는 집 근처의 공원에 나갔다가 나와 연배가 비슷하게 보이는 한 남자분을 만났다. 나는 공원으로 나갈 때면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한다. “주님, 오늘도 복음을 전할 한 영혼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날따라 저녁때가 되어 그런지 공원은 고즈넉하였다. 벤치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에 내장된 성경을 읽고 있는데 맞은편에 한 남자분이 앉아 있다. 얼핏 보니 퍽 쓸쓸해 보인다. 내 마음속에서 자꾸 가까이 가 보라는 사인이 온다. 나는 속으로 성령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인이라 생각하면서 그분 곁으로 다가가 말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그분 역시 은퇴자였다. 오랜 공직 생활을 끝내고 낯선 서울로 올라와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오랜 먹물 생활이 몸에 배어 있어서 그런지 자신을 쉽게 오픈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그와 대화를 나눈 지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선생님은 세상에 우연이 있다고 믿습니까?” 그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을 찾아 보여 주면서 확고하고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나를 지으셨습니다.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나고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필연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합리적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연으로 돌리지만 창조물에는 그것을 지은 창조자가 있고 그 창조물에는 창조자의 목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많은 혼란을 겪는 것 같았다. 생각의 충돌이 일어날 때면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나는 어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른은 생각이 많고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고정관념이 많다. 이 고정관념이 철옹성이다. 그래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 오늘은 여수엑스포 가는 날이다. 아침을 먹고 바깥사돈과 가벼운 마음오로 차에 오른다. 1992년 대전 엑스포 이후 20년 만이다. 그때는 아이들과 함께 갈 것이라고 날짜까지 잡아놓고 있었는데 폭풍우가 몰아쳐 우리가족의 엑스포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내 평생에 엑스포 관람은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차는 조금 후 이순신대교로 오른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광양여수간 소요 시간이 80분이 걸렸단다. 그런데 이제는 10분이면 족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현수교로 길이가 2260m다. 더욱 자랑스러운 것은 주탑높이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발 270m. 참으로 장관이다. 한국의 토목공학 기술이 이 정도인가 생각하니 정말 감개무량하다. 여수 앞바다는 해수의 유속이 굉장히 빠르다. 바다위로 교각을 세우기가 결코 쉽지 않을 터인데 63빌딩보다 높은 교각을 세우고 지구를 두 바퀴나 돌 양의 강선을 엮어 케이블을 만들고 양 교각을 케이블로 연결한 현수교는 필연(必然)의 결정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온통 에메랄드빛이다. 건너편 광양항의 컨테이너부두에서는 연신 화물들을 하역하고 있다. 1976년, 내가 처음으로 여수를 방문했을 때는 여수는 정말 조용한 어항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공단의 화학단지를 지나면서 우리민족의 위대함을 실감한다. 원유정제공장 간에 거미줄같이 엉겨있는 가스관과 원유관이 우리나라의 에너지 심장부가 여기임을 확인하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여행의 둘째 날, 오늘은 정말 내 개인에게는 의미 있는 날이다. 왜냐하면 내 신앙의 뿌리를 찾아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는 백여 년밖에 안 된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와 호주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기독교 선교에 힘썼지만 주로 미국과 캐나다, 호주 세 나라 선교사가 우리나라를 지역별로 분할하여 선교하였다고 들었다. 그런데 호남지방으로 들어온 선교사가 가장 먼저 들어온 지역이 바로 순천지역이다. 지금도 순천과 그 인근지역은 기독교 인구가 많음을 이번에 확인하게 되었다. 내가 이틀 동안 묵은 지역은 순천 인근 지역인데 일찍이 백여 년 전에 미국의 선교사가 들어와 교회를 설립한 곳으로 주민의 70%가 교인이라 한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교사가 들어와 마을에서 최초로 교회를 세운 곳에 지금도 교회가 그대로 남아있다.

 

 바깥사돈이 이번에 나를 인도한 곳은 기독교 선교 백주년 기념관이다. 이곳은 깊은 산 속에 위치해 있었다. 선교사가 직접 교회를 세우고 마을 사람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전한 그 자리에 전라남도 기독교 연합회에서 헌금을 모금하여 기념관을 세워놓았다. 나는 이곳을 방문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정말 감사하였다. 이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을까 생각하니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너무나 고마워진다. 나는 이들에게 빚진 자다. 그러기에 나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세 분의 순교비도 세워져 있었다. 나는 이곳을 방문하면서 초기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아왔는지를 생생히 느껴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였겠지만 차츰 박해를 받았을 것이고 그 박해를 피하여 산 속으로 산 속으로 은신하여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 복음을 전하여 현지인 사역자를 양성하였을 것이고 복음의 사명에 불타는 현지사역자가 마을로 돌아와 가정교회를 열고 교회를 시작하였을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 선교사역의 역사다.

 

 여러분은 짱뚱어란 고기를 아시나요? 이놈은 남해안 개펄에서 사는 정말 못난 놈입니다. 몸통은 개펄처럼 시커멓고 아구(입)가 커서 정말 못생긴 놈입니다. 옛날에는 어민들조차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벌교나 순천지방에서는 별미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순천의 생태공원, 얼마 전까지도 순천 갈대숲이라 불렸던 곳을 방문했다. 바로 이곳에서 짱뚱어를 만났다. 물이 빠진 개펄로 여러 놈이 기어올라 한여름의 선팅을 즐기고 있다. 말 그대로 못난이다, 참 시대를 잘 만났다. 옛날이면 어디 고기축에도 들었을까? 그러나 지금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짱뚱어탕 한 그릇에 자그마치 사만 원이다. 엄청 비싸다.

 

 세상만사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다시 한번 만사가 필연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자연의 일이 그렇고 인간의 일이 그러하다. 결과에는 원인이 반드시 있다.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 여러 사례에서도 지적하였듯이 결과와 원인이 가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결과와 원인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람이 그 둘을 동시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를 한다. 요사이 우리나라에는 남녀노소, 식불식(識不識) 간에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자가 많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일들을 보면 내 속에서 분노가 일어난다.

 

 나는 우연히 와서 우연히 가는 존재가 아니다. 태어난 목적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리고 가야 할 곳이 확실히 있다. 태어남이 필연이요 죽음이 필연이며 죽음 이후의 가야 할 곳이 어디임을 성경은 밝히 말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우연적 삶을 살지 않는다. 당당히 필연적 삶을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창조되었으며 나를 창조한 분이 누구이며 나는 죽음 이후에 어디로 가는가를 알고 살기 때문에 나의 삶이 자조적(自嘲的)이거나 절망적(絶望的)이지 않다. 오히려 소망적(所望的)이요 환희(歡喜)의 삶이다. 절망적인 사람의 삶의 특징은 자기방치 내지는 자기방기(自己放棄)다. 자기를 아무렇게나 내버리는 삶이다. 자기를 방치하지 않는 삶은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따르는 삶이다.

 

 “나의 하나님, 나를 지으시고 나의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시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오늘도 나의 앞에 행복하고 가슴 벅찬 일을 준비하실 당신을 기대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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