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한파가 살 속으로 파고들어 온 몸이 저려온다. 하필이면 이때에 어금니를 뺄 게 뭐람, “선생님, 무조건 빼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안 되겠는데요.” 제자의 말을 입 속으로 반추하면서 나는 을지로 입구, 지하철 게이트로 터덜터덜 내려온다. 이쯤 되면 나도 이제 영락없는 영감인가? 머지않아 고희를 바라보는 나를 아내는 그래도 만년 청춘이란다. 그래, 나에게도 청춘은 있었지, 나에게 펭귄이란 닉네임을 붙여 준 제자들 덕분에 나는 남극의 신사처럼 올곧고 멋지게 청춘을 보낸 적이 있었지.

 

 

 그 펭귄에게도 어김없이 겨울은 찾아오고 또 한 해가 저물려 하고 있다. 온 세상을 용광로같이 달구던 여름의 태양은 어디로 숨어 버렸는가? 베란다의 아침 햇살은 어찌 그리 인색한지 두 손을 내밀고 맞으려면 어느 새 숨어 버린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베란다 절반도 찾아 주지 않는다. 동향 아파트는 그래서 서럽다. 그러나 어찌하랴, 절반의 은택에도 감사할밖에. 쪽방 촌에 사는 독거노인이 얼마며 이 겨울에 동사하는 노숙자가 얼마인가.

 

  

 12월의 세상은 온통 선거물결로 쓰나미다. 공영방송뿐 아니라 지상파 방송은 모두 선거로 도배를 했다. 무슨 세상에 애국자는 그렇게 많은지, 말말이 애국이요 나라 살리는 비책이란다. 그러나 대부분은 구라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임을 국민은 안다. 그런데 정작 정치인은 모른다. 이게 바로 역설(逆說)이다. 기막힌 역설!

 

 

 광화문 광장은 시차를 두고 진분홍, 연녹색 머플러의 물결로 넘쳐난다. 왕의 남자들, 천하의 말꾼들은 다 모였다. 군중 뒤에 점잖이 않으신 세종대왕이 빙긋이 웃고 있다. “말꾼들아, 너희가 어린 백성의 마음을 아는가?” 세종대왕이 대갈일성을 하실 것 같다. 바로 앞 시청광장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구세군 자선냄비가 들어섰다. 어느 독지가가 일억을 기부하였다 하여 장안의 화제다. 기부자에 정치가는 없는 것 같다.

 

 

 오늘은 펭귄이 서울도서관으로 출근한다. 며칠 전에 도서관 회원증을 발급받았다. 나도 이제 당당한 서울시민이다. 왜냐하면 서울시민이 아니면 회원증을 발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산지도 벌써 삼 년이 넘었다. 그러나 언제나 이방인 같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르다. 인구 천만의 서울시민 중의 한 사람이다. 옛 서울시청 청사가 도서관으로 개조되었다. 내부시설을 완전히 개조해서 서울시민을 위한 지식의 산실로 만든 서울시에 정말 감사한다. 국제 열람실을 비롯하여 열람실에는 주니어뿐 아니라 시니어를 배려하여 연령에 관계없이 서로 간 대화가 가능한 공간을 마련하여 단절을 넘어 소통을 도모한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어 너무나 좋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세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도서관은 신대륙에 도전하는 젊은이의 타이타닉이다. 도서관에는 열람할 책도 많고 검색할 정보도 많다. 나는 도서관에서 나의 무료함을 떨쳐 버린다. 책들을 열람하고 책표지의 신선한 유혹에 흠뻑 취하다 보면 나는 어느 새 젊은이가 된다. 생물학적 젊은이가 아니라 생각의 젊은이로 거듭난다. 지금 우리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처럼 더 높이, 더 멀리 날개를 쳐야 한다. 그리하여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함께 울고 함께 웃어 주어야 한다. 공감과 소통을 위하여.

 

 

 서울 도서관 오른쪽 건너편에는 덕수궁이 눌러앉아 있고 궁을 안고 도는 돌담길을 돌아 조금 올라가면 서울시립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는 천경자홀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관람료는 기획전시를 제외하고는 무료이므로 부담이 없다. 서울에서 사는 쏠쏠한 재미는 미술품을 많이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볼 때마다 화가가 그 시대의 아픔을 체화(體化:몸으로 느끼면서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작업)한 모습을 보기에 다른 어떤 예술보다 좋아한다. 서울의 변천사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서울사진전도 기획전으로 전시되어 있어 이 또한 분외의 복이다. 개화기 서울의 모습으로부터 현재의 서울의 모습까지를 천개천 천변풍경을 비롯하여 서울의 중심거리의 변천사를 아울러 볼 수 있어 좋다. 이 사진전을 보고 있노라면 서울이 정말 인고와 환희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속에서 나는 나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갑자기 며칠 전에 본 TV의 어느 연예프로가 생각난다. MC가 예닐곱의 남녀 대담자들을 상대로 이혼을 주제로 대담을 벌이고 있었다. 이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한 갑론을박으로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MC가 뜬금없이 대담자들 가운데 앉은 한 원로 여성 연예인에게 주제와는 상관없는 질문을 했다. “OO 선배님, 남녀 간에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이때 이분, 대뜸 동문서답 같기도 하고 질문자에게 무안을 주는 것 같기도 한 말 한 마디를 내뱉는데 그 표정이 정말 너무나 진지해서 TV를 보는 나에게는 너무나 아픔으로 다가왔다. “사랑은 무슨? 빌어먹을, 다 주는 거야. 받으려면 상처만 남아.” 이 말 속에 담긴 뜻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나의 아내와 만나고 사십여 년만에야 알았다.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로 오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가난한 자 되게 하소서.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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