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에 해당되는 글 36건

  1. 2012.05.23 인생을 공유하라
  2. 2012.04.18 약속2
  3. 2012.03.07 아름다운 동행
  4. 2012.02.02 약속
  5. 2011.11.24 과정과 낭만 1
  6. 2011.11.04 홈커밍데이 1
  7. 2011.09.21 선택과 결단
  8. 2011.04.13 빛과 그림자
  9. 2011.03.03 봄의 천국
  10. 2011.02.08 바른 복음과 다른 복음 1

인생을 공유하라

묵상 2012. 5. 23. 17:55 |

 어제 한 일간지를 보다가 참 마음이 흐뭇했다. 우리나라 한 대기업의 등기임원 평균 연봉이 100억원을 넘어섰다는 기사다. 이날은 또한 2011-2 유럽 챔피언십에서 첼시가 우승컵을 거머쥐었다는 소식으로 안방이 떠들썩한 밤이기도 하였다. 나는 첼시가 그라운드를 누빌 때면 꼭 대한민국이 세계를 누비고 있는 환상에 젖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수들의 가슴에 새겨진 낯익은 로고 때문이다. 한 기업이 세계적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과 어려움이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며 우선 그 기업에 찬사를 보낸다. 세계적인 두뇌들을 스카웃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을 것이며 연구개발과 생산, 판매를 위하여 밤을 새워야 했던 임원, 근로자들의 노고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CEO와 임원 그리고 근로자들의 진정성이 곧 최고의 경쟁력이요 최고의 브랜드임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된 계기가 되어 이 한 밤이 마냥 즐거운 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밤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낸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자는 별로 많지 않다. 나도 최근에야 모 일간지 기사를 통해 알았으니까. 기부금이 우리 돈으로 8000억원이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건립기금 600억원을 선뜻 기부하고도 마냥 부끄러워하는 이분의 모습에서 “어린(어리석은) 백성이 니르고져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이 있는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라” 하신 세종대왕의 애민(愛民) 정신을 보는 듯했다. 나는 이분의 다음 말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내가 기업인이기에 돈 버는 데는 남 다른 재주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을 더 벌면 재벌밖에 더 되겠습니까?” 이 말을 들어보면 이분은 분명 재벌은 아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최고의 멋쟁이로 느껴진다. 멋이 무엇인가?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권리를 나에게만 쓰지 않고 남과 더불어 나누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이렇게 멋지게 한번 살고 싶지 않은가?

 

 나는 재벌을 맹목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나는 이번의 기사를 통하여 한 재벌기업의 임원연봉 1년치가 2조원이 넘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조원이면 천문학적 금액이다. 재벌이 임원연봉 1년치만 열악한 대학의 기초 과학 연구에 기부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인재를 배출할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철의 왕국 포항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흥해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영일만의 바닷가 한적한 야산 한 자락 끝에 자리한 한동 대학교, 이 대학에는 정말 많은 석학들이 와 있다. 돈으로 따지면 연봉이 최소 백억은 다 넘는 분들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오로지 사명 하나로 왔다. 돈의 위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지만 돈이 사람을 돌게 만들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 초연해진 사람이 있다. 나는 한동대학에서 이런 분들을 만나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이분들 중 상당수는 미국에서 연구하던 과학자들이다. 이분들이 한동대학의 설립목적을 알고 이 대학에 동참했던 것이다. 내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이 대학의 총장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렇다. 바로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이 학교는 학교 운영의 상당부분을 이 대학을 졸업한 동문들의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가슴이 뭉클하였다. 정신은 정신을 낳고 인재는 인재를 낳는다는 말은 언제나 진리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가? 이제는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을 따져 보아야 할 때다. 하잘 것 없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며 바둥거리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부부가 싸우다 싸우다 결론이 나지 않으면 한마디 내뱉는 말, “그래, 너 잘났다.” 우리는 도처에서 서로 잘난 것 때문에 싸운다. 수탉 두 마리가 암탉을 사이에 두고 왜 싸우는가? 내 잘났다고 싸우는 게 아닌가? 인간 사회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돈으로 경쟁하고 자리로 경쟁하고 미모로 경쟁하고 하다 보니 싸움할 일만 남는다.

 

 대학 입시에 논술이 등장하고 난 이후 우리나라에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한 권 있다. 그게 바로⟨논리야 놀자⟩라는 책이다. 나는 이 책으로 많은 학생들에게 논술 지도를 해 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논리적 오류는 무엇인가? 흑백논리의 오류이다. 흑백논리의 오류에 빠진 자는 내편이 아니면 모두 나에게는 적이다. 내가 선이면 상대는 악이기에 뭉개 버려야 하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기에 공감이 없고 공존이 없다. 가정에서는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가 그렇고 회사에서는 상관과 부하 사이가 그렇다. 학교는 어떤가? 내 자식이 최고니까 내 자식을 훈계하면 안 된다. 교사는 교원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지식을 파는 자일뿐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교단생활 삼십삼 년 동안 참 많이도 매질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잊지 못한다. 자신이 스스로 깍지 못하는 제 머리를 내가 깎아 주었으니까.

 

 요사이 부모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신세대부모라 부르면서 편을 가른다. 그러나 부모의 개념 속에는 신세대 구세대가 없다. 왜냐하면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꼭 같기 때문이다. 소위 자신들이 신세대라 스스로 일컫는 자들은 농사법을 모른다. 그들이 언제 밭에 나가 씨를 뿌려 본 적이 있는가? 내 자식 무서운 아이로 키우고 싶지 않거든 오늘 당장 주말 농장을 한 밭떼기 마련해 보라 권고해 보고 싶다. 그리고 그 밭에 씨 뿌리고 기다려 보라. 씨 뿌린 밭에 무엇이 함께 나는가를 보라. 내가 뿌리지도 않은 잡초씨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잡초는 새싹보다 훨씬 더 많다. 그 잡초가 나중에 곡식의 새싹을 자라지 못하게 하고 감아 올려서 온통 잡초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자식 농사도 매 한가지다. 고운 자식일수록 더 엄하게 키워야 한다. 여기서 엄하게란 말은 ‘절제 있게’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 나만이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겸손을 배워야 한다. 겸손을 가르치는 최고의 스승은 자연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명이 긴 나무는 양평 용문사에 있는 일천오백 년 된 은행나무란다. 나무박사의 말이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이상은 살지 못한다. 삶이 그렇고 앎이 그러하다. CEO를 넘어 재벌을 꿈꾸는 젊은이여, 꿈을 꾸며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꿈을 꼭 이루기를 바란다. 그러나 다음 말을 마음에 새기며 자신에게 되물어보기를 바란다, “재벌 되고 난 다음에는 무엇 할래? 그 돈으로”

 

 돈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영원은 안 된다. 영원은 결코 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그 많은 돈 움켜쥐고 놓으려 하지 않는 어른은 마치 양 손에 과자를 잔뜩 쥐고도 더 달라고 때 쓰는 어린애 같다고나 할까? 어른들이여 제발 철 좀 들게. 철들자 죽는다더니 일찍이나 철들면 할 일 좀 하고 가지. 그러면 돈 없으면 할 일도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나 같이 돈이 없어도 글재주가 있지 않은가? 나에게 없는 것을 탓하지 말고 있는 것을 찾아보자. 찾아보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많다. 있는 것으로 나누면 된다. 이것이 인생을 공유하는 것이다.

 

 요사이 재능 나누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홈스쿨에서는 여러 가정의 부모들이 자기의 전공과 재능을 살려 학생들의 훌륭한 교사가 되고 있다. 문제는 내 것을 내놓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내 것을 공개하면 경쟁에서 뒤진다는 생각이 우리를 늘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놓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는 것이다. 요사이 취업을 앞둔 젊은이에게 중압감을 주는 말이 무엇인가? 스팩이란 말이다. 그래서 스팩을 쌓기 위하여 학원에 다니거나 해외연수를 다녀오기도 한다. 그 흔한 자격증 몇 개쯤은 기본으로 따 두어야 면접시험에서 낙방하지 않을 테니까. 요사이는 남보다 차별화 된 그 무엇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이다. 블루오션 이론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차별화된 전략이다. 인생의 성공조건에 차별화 전략이 필요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나는 그래서 이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물구나무서서 세상 바라보기는 생각의 틀을 바꾸라든지 고정관념을 깨라든지 하는 발상의 전환을 위한 한 교육 프로그램의 일종이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공한 연후에 그 성공의 과일을 독식하지 말자는 말이다. 과식하면 설사하고 오히려 손해를 보듯이 돈도 재능도 가질 만큼 가진 자들은 이제 자기가 취할 만큼 취하고 나누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하나도 아닌 두 아들을 세계적 명문대학에 나란히 교수가 되게 하는 영광을 얻은 가정을 소개한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다. 두 아들을 기른 아버지의 말씀 왈(曰) “50%는 너 자신을 위해 살고 나머지 50%는 나라와 세계를 위해 살아라” 이 친구들 이제는 정작 자기를 위해 사는 데는 자신의 열매의 오분의 일로도 족하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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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2

묵상 2012. 4. 18. 12:04 |

 지구 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해수온도가 상승하자 북극권의 대기온도가 올라갔다는군요. 그게 뭐 대수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숩니다. 왜 그러냐구요? 봄이 오지 않습니다. 예년 같으면 벌써 봄꽃이 지고 신록을 준비해야 할 때인데도 4월의 중순도 훨씬 지난 지금에야 겨우 벚꽃을 서울에서 보게 되네요. 왠 줄 아십니까? 북극권이 더워져 찬 공기를 북극권이붙잡아 두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쟎아요.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러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타고, 더 많이 움켜쥐고픈 나의 욕심이 지구로 발광(發狂)나게 하는 것입니다. 열대우림이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한다는군요. 얼마 전 영상으로 세계의 3대 폭포를 보았습니다. 그 중에 둘은 열대우림 한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세 개 나라와 경계를 하고 있는 남미의 이과수 폭포는 내가 가 본 나이아가라 폭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나를 압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장관도 얼마나 더 불 수 있을지 미지수랍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한 무분별한 벌채(伐採)는 열대우림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행복을 꿈꾸세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나에게 행복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면서 기대하십시오. 기대하는 자에게는 설렘이 있습니다. 설레며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서 베란다의 창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다가 맞은 편 산자락 위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일출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저층이라 불평했고, 동향이라 불평했던 나에게 아침 일출을 선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새삼 감사했습니다. 연한 새싹을 이제 막 내민 나뭇가지 사이로 솟아오른 새빨간 태양은 늦가을 감홍시보다도 더 붉었습니다. 이 어찌 동향의 저층에 사는 나만의 분복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가지는 알맞은 욕심이 잘못일까요? 아닙니다. 알맞은 욕심은 당연한 욕구(欲求)입니다. 그러기에 알맞은 욕심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선물을 감사하게 받는 것은 순리(順理)입니다. 순리를 지키지 않으면 유기체와 그 유기체가 속한 가정과 사회는 도태되고 마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고 최선의 지혜와 최선의 노력으로 수확을 얻으려 노력하는 행위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따르는 거룩한 행위인 것입니다. 생업(生業)은 성직(聖職)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탐심(貪心)입니까? 성경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탐심은 바로 죄를 낳는 욕심입니다. 인간 최초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내가 먼저의 글 ‘약속’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약속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이요 선언적인 것이라면 인간의 그것은 쌍방적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인간은 그가 지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인간에게 행복하게 살 권리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권세와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은 자기의 주권적 선언이신 약속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2장 16∼17절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선언적 약속을 인간에게 주셨을까요? 바로 인간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인간으로 하여금 확실히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첫째, 인간은 피조물(被造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해 아래서 새것은 없나니’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둘째. 인간은 흙이라는 것입니다. 그 코에서 영이 떠나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찾아온 거짓의 아비 사탄은 이브에게 무어라고 꾀고 있습니까? 창세기 3장 4∼5절을 보십시오.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말합니다. 이브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리고 창세기 3장 6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인간의 비극인 죽음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한 인간의 죽음이 여기에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바로 나의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죽음은 나를 죄와 심판과 지옥으로 끌어가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신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뿐 아니라 나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나도 죄와 사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좀 더 깊이 살펴볼까요? 이브는 왜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을까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탐심이 내면 깊숙이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탐심은 우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상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마음이 가 있는 그것이 우상입니다. 이브는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자기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탐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 자기 오만 바꾸어 말하면 자기가 곧 하나님이라는 망령된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비극입니다. 이 오만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을 불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필연 불순종으로 귀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얼마나 분명합니까.

 

 탐심에 사로잡힌 자의 특징을 보십시오. 욕심이 자기를 삼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합니다. 돈에 미치면 돈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합니다. 명예, 지위, 여자,… 다 마찬가지입니다. 탐심에 사로잡힌 자는 오만합니다. 그것만 가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하는 미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얻기 위해 그것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돈을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영혼을 파는 것입니다. 영혼을 누구에게 팔까요? 사탄에게 파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와서는 지식이 우상이 된 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상대적 가치 그 이상은 결코 천착(穿鑿)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깊이 파고 들어가도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유(萬有) 속에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만유를 지으신 자시요 만유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더할수록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증명할 뿐입니다.

 

 인간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탐심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의 주로 영접하는 길 이외에는 없습니다. 죄는 주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을 주인으로 삼아 사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한 피흘림만이 나의 모든 죄를 깨끗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요19:30)

 

 나는 여기서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사적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을 낙원에서 쫓아내신 하나님이 다시 택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브라함입니다. 이를 성경은 밝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系譜)라”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가나안(지금의 팔레스타인)이 아닌 갈대아 우르(지금의 이락)에서 살았습니다. 아담의 아들 셋의 후손이지만 아버지는 우상을 만드는 자라는 기록으로 보아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부르셔서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명령하셨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순종하여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살펴보면 기복(起伏)이 많았지만 최종 결론을 내리면 믿음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됩니다.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을 때도,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을 때도 한결같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4:18) 하나님이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오고 오는 세대에 경고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탐심의 대상이 되거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짧습니다. 참으로 순간이지요.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모든 것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갔는지를. 그러나 나에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다시 내가 시작해야 할 세상이 있습니다. 그 세상은 영원합니다. 그 영원한 세상에서의 행복한 보장을 성경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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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행

묵상 2012. 3. 7. 11:58 |

 오래 전 일이다. 겨울 철새들이 보고 싶어 주남 저수지에 간 일이 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저수지의 전망대에 오르니 철새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대략 십만 마리 정도에 이른다 한다. 고니, 재두루미, 청둥오리, 기러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이 두 발로 물살을 차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군무(群舞)를 볼라 치면 정말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그래서 언젠가 나는 또 한번 금강 하구언을 찾은 적이 있다. 덩치가 큰 고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은 꼭 보잉 747기가 활주로를 이륙하는 것 같다. 두 발을 가지런히 뒤로하고는 물살을 차고 하늘로 15도 각도로 날아오른다. 내려앉을 때도 너무나 닮았다. 비행기가 랜딩 기어를 내리고 활주로를 미끄러져 내리듯 두 발을 나란히 앞쪽으로 모으고 스키를 타듯이 물위로 내려앉는 것이다.

 
오늘 나는 중양천 둑 위에서 겨울 철새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놈들은 갈 길도 바쁠 터인데 아직까지 미그적거리고 있다. 언제쯤 북쪽으로 떠날려나 궁금하다. 몽골이나 시베리아가 지척이 아닌데 제대로 주린 배나 채웠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참 재미가 있다. 꼭 두 마리씩이다. 조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암컷과 수컷을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수컷은 목에 흰 테두리를 하고 있다. 한 놈이 자맥질을 하다가 짝을 놓칠라 치면 잽싸게 다시 자기 짝에게로 돌아온다. 어떤 놈은 배불리 먹었는지 물 밖으로 나온다. 한 놈이 나오면 꼭 나머지 한 놈도 따라 나온다. 몸통에 비해서 유달리 두 다리가 가늘다. 필연 뒤뚱거리기 일쑤다. 저러다가 짓궂은 개에게라도 물리면 어쩌노… 걱정이 된다. 참 창조의 질서와 오묘함이 고마워진다. 저들에게 날개가 없었다면 아마 지상에서 기러기류(類)는 제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늘의 나의 이 들여다보는 즐거움도 없었으리라.

 
나이 오십을 넘긴 사람이라면 아마 미국쯤은 한 번 정도는 가 봤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미국은 새삼스러운 나라도 아니다. 그러나 ‘미국의 트러커’에 관하여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대형 트럭을 모는 운전기사들이다. 나는 어느 지상파 방송에서 미국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한국교포의 트러커 생활을 취재하여 소개한 기사를 보면서 참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기사를 재구성해서 소개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두 가지의 보물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름다운 동행이요 나머지 하나는 치열함이다.

 
미국에서 대륙을 횡단하며 미국 전역을 누비거나 아니면 멀리 캐나다 동 서부까지 뛰는 장거리 트러커는 약 오만 명이 되고 있단다. 게 중에 한국인은 겨우 1%인 오백 명이다. 이들 대부분의 생활은 도로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것도 끝없이 펼쳐진 하이웨이 위에서다. 어쩌다가 도로 위에서 멀리 지평선 너머로 내려앉는 낙조를 볼 때면 정말 행운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맡겨진 화물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제 시간에 맞추어 배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에겐 시간을 마냥 즐기거나 자연의 풍광(風光)에 취할 여유가 없다.

 여기 한 커플로 소개된 한국교포 한 쌍은 정말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나는 지금도 이 한 쌍의 행복이 계속되길 빌어본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 이들과 이들의 가족을 축복하소서. 나는 이들 부부를 통하여 행복을 배웠습니다.” 이 부부는 언제나 둘이지만 하나였다.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운전석 뒷좌석을 아름답게 꾸며 주었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디스크자키를 자청한다. 그리하여 언제나 함께 간다. 정말 아름다운 동행이다. 집에는 보름에 한 번 정도이다. 부부가 함께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가 좋다. 서로가 배려하는 모습은 정말 눈물 나도록 아름답다. “여보, 오늘은 휴게소에서 뭘 먹을까? 저녁은 내가 쏜다. 당신 먹고 싶은 것 다 먹어” 아내가 남편의 기(氣)를 채운다. 보약 중에 제일 좋은 보약은 배려와 인정이다.

 
오백 명의 한국 트러커 중에는 대부분이 혼자이다. 어떤 이들은 고가 도로 위에서 보내는 나날의 고독을 사진으로 달래거나 책읽기 내지 글쓰기로 자기를 달래며 가족에의 그리움을 대신하고 있다. 사진이나 책읽기 등 여가는 이들에겐 사치다. 그러나 이 사치를 치열(熾烈)함이 극복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라. 이들이 트러커인 자신에게 사진이나 글쓰기가 가당한 일이냐고 냉소하며 그 일들을 버렸다면 트러커의 생업도 조만간 끝내고 말았음이 틀림없다. 이들이 핸들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이러했다. “나 같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체험을 할 수 있어요? 나는 행운아지요. 나는 하이웨이 작가입니다.” 바로 이것이 트러커로서의 자부심의 동력(動力)이다.

 
이들에게는 삶의 치열함이 삶의 매너리즘으로부터 이들을 구했다. 삶의 치열함은 썩음을 방지한다. 바닷물은 썩지 않는다. 바닷물에 소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3%다. 3이 나머지 97의 썩음을 방지한다. 우리의 삶에서 치열함이 있다면 개인이 살고 그 개인이 소속되어 있는 가족이 행복해지고 나라가 행복해진다.

 
바닷물을 바닷물되게 하는 요소가 3%의 소금이라면 내 삶의 치열함의 요소는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순수(純粹)라 말하고 싶다. 순수가 없는 치열함은 가식(假飾)이다. 예를 들어 보자. 한 사람이 자기의 짝을 두고 다른 이에게 사랑의 치열함을 보였다 하자. 그 치열함은 결국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가식이요 자기기만(自己欺瞞)이다. 순수가 전제되지 아니하는 치열함은 썩음을 방지하기는커녕 썩음을 더욱 부채질하게 된다. 사회에는 종종 잘못된 열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는 일들을 볼 수 있다. 잘못된 인간의 야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 왔는가?

 
나는 길거리를 가다가 인도 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휴지조각을 보게 되면 줍게 된다. 언젠가는 주운 휴지를 버릴 통이 없어 한참 동안이나 들고 다닌 적이 있다. 나의 치열함으로 인하여 행복해 하는 이웃이 있다면 이 또한 얼마나 행복한가!

 
“인생에 남는 것은 자식과 여행뿐이다” 라는 말이 있다. 서양 사람들은 돈을 모으는 목적이 여행을 하고자 함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말대로 서양 사람들은 여행에 목숨을 거는 것 같았다. 일정액이 모이면 다니던 직장에도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여행을 떠나는 모습도 보았다. 정말 나에게는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방송 프로에 ‘그곳에 가고 싶다’는 프로가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즐겨 보곤 하였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드물다. 일생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을 가보고 포토나 영상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싶은 것도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알프스, 눈 덮인 킬리만자로, 만연설의 알래스카 빙하, 루레이 동굴 등, 시간과 돈이 허락된다면 소중한 분들과 훌쩍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분명 좋은 일이라 생각된다.

 
용산에 있는 국립 박물관의 전시실은 조도가 굉장히 낮아서 나에게는 불만이 많다. 시원히 밝아서 잔글씨도 잘 보이면 좋을 텐데 왜 그리 어둡게 해 놓았는지 용을 써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죽고 먼 훗날 내 삶을 들여다볼 자들이 있을까를 생각하며 나는 살아야 한다. 세상에는 자기 자식들도 자기 부모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는 삶을 살아가는 부모들이 많다. 말하자면 이들은 막살기 삶을 사는 자들이다. 왜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가? 구린내가 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삶이 자식들에게 구역질나는 삶으로 각인되어 있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나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렇게 기억한다. ‘우록어른은 법 없이도 살 사람, 청도댁은 시골교회의 새벽종치는 박 집사’ 로.

 
먼 훗날, “얘들아, 오늘은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하며 아이들을 재촉하는 나의 아들과 딸들을 상상하며 나는 오늘도 나의 작품을 열심히 만들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선포와 복음 전파를 위하여.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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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묵상 2012. 2. 2. 11:04 |

 새해 첫 달의 마지막 날 밤에 함박눈이 하얗게 내리고 있다. 대도회지에서 맞이하는 눈꽃들의 환희에 함께해 보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솜털같이 가벼운 눈송이가 내 어깨 위에 사뿐사뿐 내려앉는다. 정말 기분 좋은 밤이다. 한겨울의 눈꽃만큼 소년을 설레게 하는 사건은 없다. 소년은 눈 내리는 논두렁 밭두렁을 삽살개와 함께 내달린다. 그 소년이 이제 고희를 바라보며 서울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성스러운 눈송이를 두 손 모아 맞고 있다.

 
이 밤에 나는 조용히 생각해 본다. 아름다운 삶은 무엇일까? 자연은 약속을 지켜 작년에 내린 눈이 올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와 긴 겨울밤이 새하얀 눈송이로 이불을 덮는데 인간 사회에는 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까? 정계가 그렇고 재계가 그렇고 교육계도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어디에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면 인간 사회에는 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까?

 
인간에게 있어서의 약속은 일방적이 아니다. 언제나 쌍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파기권(破棄權)이 약속한 주체에게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약속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다. 쉽게 약속하고 쉽게 그 약속을 깨뜨려 버린다. 약속을 쉽게 깨뜨리는 사람의 내면을 살펴보면 사악한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자신만이 목적이요 가치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약속이 상대에 대한 나의 전인적(全人的) 존중이요 또한 나의 전인적(全人的) 담보임을 인식하지 않는다.

 
인간사에 약속의 허망(虛妄)함을 비꼬는 말로 “인간은 믿을 존재가 아니다. 다만 사랑해 주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요사이 TV 패러디 물에 ‘내 남자는 나의 팻’이란 프로가 있다. 이 프로를 제작하는 PD가 팻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나 이외의 남이 나에게 애완견이 될 수는 없다.

 
아름다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할 것이다. 하나는 현상적 아름다움이요 다른 하나는 내면적인 아름다움이라 할 것이다.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 꽃의 아름다움은 한시적(限時的)일 뿐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였듯이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 눈으로 덮인 세계는 성지(聖地)같이 아름답다. 그러나 눈이 녹는 세상은 녹슬고 일그러진 추한 모습일 뿐이다. 참으로 아름다움은 내면적인 그것이다. 아기를 품에 품은 어머니의 모습이 왜 아름다운가? 그 품 안의 자녀에 대한 엄마의 약속과 그 약속을 지키려는 믿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 밤에 나는 깊은 묵상을 하게 된다. 요사이 나는 모세 오경을 다시 읽으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읽으면서 그 동안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니 너무나 감사하다. 창세기부터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모세 오경을 토라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 토라를 가장 중요시한다. 이 토라는 율법서이다. 기독교인이 지키고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기 때문에 기독교인에게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 중에 나에게는 레위기가 잘 읽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주로 제사의식에 관한 것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루한 레위기의 제사의식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나로 알게 하셨다.

 
창세기에서부터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일관되게 제사를 원하신다. 그것도 반드시 피의 제사를 원하신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 이어 출애굽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왜 그렇게 피의 제사를 원하셨을까? 우리가 모세 오경을 읽어가노라면 제사의 종류와 제사의식이 얼마나 복잡하고 번거로운가에 놀라게 되고 또한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제물이 되어 죽어갔는가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러면 이 제사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약속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인격체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요 우리는 그의 지으신 바 된 피조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이다. 일방적이라 함은 약속의 주체가 객체(상대)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셨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약속한 동기는 무엇이며 약속한 내용은 무엇인가? 동기는 인간에 대한 사랑(엡2:4/요3:15)이며 내용은 아들을 제물로 내어놀았다(창3:15)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사43:21)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송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지도 아니하고 주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의 종이 되어 버렸기에 하나님 앞에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엡2:3)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죄와 사망에서 나를 해방하여 영생을 주시려고 당신의 아들 예수를 구원의 주로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 그 증표로 제사에 일관되게 제물을 요구하셨다는 것이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히9:22) 하였으니 제단에 드려지는 제물로서의 소나 양의 피는 곧 당신의 아들이 저주의 십자가 위에서 나를 위해 흘리시는 대속의 피를 말하는 것이니 이는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줄기차게 죄인된 나에게 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사랑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한다. 너를 위해서 내 아들을 너의 죄의 댓가로 제물로 내어놓았다. 너를 위한 나의 사랑을 제발 좀 알아 주렴” 하고 호소하는 것이다.

 
아담 이후 창세기의 족장들은 아직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자기네의 조상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드리는 피의 제사를 보아 왔으며 이 피의 제사에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을 믿고 자기들도 피의 제사를 믿음으로 드렸음을 볼 수 있다. 보지 못하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갈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 하였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11:6) 하였다.

 
결국 구원의 길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다. 오직 예수, 오직 구원. 이 구원을 무엇으로 받을 수 있는가? 바로 믿음이다. 창세기 6장 9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 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라고 하였는데 노아의 행위가 완전하여 의인이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님과 동행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를 당대의 의인으로 보아 주신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피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노아는 홍수가 그치고 방주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 앞에 정결한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린 일(창8:20)이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를 알고 보지 못하나 보는 것같이 믿고 살아갔음을 보여 준다.

 
나로 하여금 모세 오경의 제사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도움에 깊이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선물로 주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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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과 낭만

묵상 2011. 11. 24. 11:42 |

 굽이돌아 흐르는 낙동강 물 위로 낙조가 아름답다. 때 이른 겨울 철새들의 비상(飛翔)을 느긋하게 즐기며 포근한 시트 속에 피곤한 몸을 파묻고 모처럼의 객기(客氣)를 즐기는 나에게 아이들은 난리다. 아빠는 왜 KTX를 타지 않고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말이다.

 
제자들의 과분한 대접을 받으며 부산을 떠나 귀경길에 오른 내가 굳이 새마을을 고집한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이란 놈을 내가 좀 요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사야 빠르면 좋고, 많으면 좋은 게 아닌가. 그러나 왠지 이번 귀경길은 확 한번 뒤집어 보고 싶었다. 시간이란 놈의 목을 조여주고 싶었다. 시간이란 놈은 괴력을 가진 존재다. 자기 앞에 모든 것을 꿀리고야 만다. 재물, 지위, 명예, 미모 등등 어느 하나 시간을 이기는 절대 강자는 없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시간 앞에 비굴해진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새마을은 좋은 열차였다. 이것만 타면 어깨가 으쓱해지고 무언가 헛기침이 나오면서 갑자기 신분 상승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부끄럽다. 새마을 타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쉽사리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나는 내가 앉은 시트를 자세히 살펴본다. KTX와 비교해 보면 시트의 안락함도 그만 못하지 않고 시트 간 간격도 KTX보다 더욱 넉넉하여 오히려 편안하다. 다만 목적지에 도착시간이 배로 길어질 뿐이다. 그런데 묘하게 이 배(倍)의 시간이 나를 졸지에 2등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오늘 2등 인간으로 서울로 귀향한다. 차창 밖으로는 늦가을의 정취가 참으로 그림 같다. 시골 담장 밖으로 벋은 감나무 가지 끝에 발갛게 익은 감들이 아직도 대롱대롱 매달려 까치를 기다리고 곡식을 거둔 들녘에는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열치가 낙동강 철교를 건너고 있다. 정다운 쌍둥이 철교가 교각을 강물 위로 반쯤 드러내며 나란히 버티고 서 있다. 하나는 부산행이요 다른 하나는 마산행이다. 열차가 아마 삼랑진역으로 진입하려는 모양이다. 삼랑진역은 나에게 참으로 한(恨)이 서린 역이다. 이 역에서 부산과 마산으로 갈린다. 옛날에는 대구에서 마산을 가려면 삼랑진역에서 환승을 해야 했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청도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마산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나는 방학이면 청도 외가로 놀러가곤 했었다. 외가로 갈 때든 집으로 돌아올 때든 나는 반드시 삼람진역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삼랑진에서 마산가는 열차는 도대체 없는지… 아침에 내려와도 밤중, 오후에 내려와도 밤중에만 열차가 있었다. 그러니 청도에서 마산을 가려면 하루가 꼬박 걸리는 거리였다. 그렇게도 멀던지 마냥 역 대합실에서 기다리기만 하던 지난 어린 시절의 삼랑진역으로 나의 열차가 지금 진입하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열차 안을 한번 휘 둘러본다. 커튼을 열고 차창 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왜 사람들은 차창 밖을 내다보려 하지 않는가? 삶에 지쳐 모든 것이 귀찮아진 것인가? 아니면 바깥세상이 두려운 것인가?

 
인생의 삶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들 말한다. 과정적 삶과 결과적 삶이다. 많은 사람들은 결과적 삶을 택한다. 나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어릴 적 시절을 굉장히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러기에 가난은 나에게 반드시 퇴치해야 할 가장 잔인한 적이었다. 결혼한 이후 나는 꼭 십 년 동안 이 가난과 싸워왔다. 나는 결코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 후 오 년 만에 나는 동료가 부러워하는 ‘나의 집’을 가졌고 경제적 안정도 되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결과적 삶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무엇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띵해지면서 갑자기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다 잃어버리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의 주위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돌이켜 보니 나는 나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주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의 아내, 나의 자녀들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데 나는 끊임없이 그들에게 생채기를 내면서도 이것을 몰랐다. 오직 결과만을 이루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너무 많이 나가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깨어진 사발 맞추기식이었다. 후회막급이었다. 이미 아내는 나의 독화살에 상처를 입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독선과 아집, 자만과 고집으로 점철된 나의 괴팍한 삶은 전혀 아내에 대한 배려와 존경이 없었다. 사랑도 일방적이요 대화도 일방적이니 이건 뭐 소통이란 게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삭막한 모래언덕뿐이니 오아시스는커녕 샘물 하나 없었다. 나의 가정에 낭만(浪漫)은 어느 구석에도 없었다.

 
아! 나의 무지(無知)여, 이러고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는가? 내가 문학도라 할 수 있는가? 인생을 모르고야 어찌 문학을 논할 수 있는가? 결과만 추구하는 인생은 결국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시는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내가 이 말씀을 일찍 좀 알았다면 시행착오적 삶을 빨리 끝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앞선다. 하나님의 만드신 삼라만상에는 그 하나하나에 당신의 창조의 목적이 숨어 있다. 그러기에 그 어느 하나도 인간인 나에게 수단이 될 수 없다. 나의 이기적 수단으로 부려먹을 종이나 도구가 아니다. 심지어 풀 한 포기, 돌 하나도 나의 사악한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이용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일들을 찬양하는 것이기에 경이(驚異)의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보이는 모든 것과 들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걸작인데 어찌 우리가 경탄하고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정적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부합하는 삶이다. 과정적 삶은 과정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삶이다. 그러기에 한 순간 한 순 간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소중하고 나에게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깨닫다 보면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소중할 뿐이다. 가족이 소중하고 이웃이 소중하다. 따라서 나에게는 오늘이 소중하고 오늘에의 기대로 가슴이 부풀게 된다.

 
더글러스 태프트 전 코카콜라 회장은 2000년 신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테리며 오늘은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재를 선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 오늘이 없는 내일은 무의미할 뿐이다. 나는 오늘도 감사와 환희로 내 삶의 바구니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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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커밍데이

묵상 2011. 11. 4. 11:33 |

 꽃비 오는 가로수 길을 걸어 본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늦가을이 성큼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온통 오색으로 채색한 듯 요란스런 단풍 길을 혼자 걸어 본다. 사십여 년 살아오던 정다운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지도 어언 2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이 도시는 언제나 나에게는 낯이 설다. 
 
 며칠 전 나는 제자에게서 다정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삼십 년 전의 제자이다. 고교 졸업 삼십 주년을 기념하는 홈커밍데이를 가진다는 것이다. 정말 반가운 전화다. 그들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제자들이다. 내가 브니엘에 몸담은 것이 1974년 시월 말이다. 그때 나는 시간 강사로 잠깐 그곳에 머물렀다. 나는 그곳을 내 삶의 징금다리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에게는 그곳이 내 삶의 고갱이인 이곳으로 바뀌게 되어 버렸다. 나의 이곳은 나에게는 내 생애 노른자위였다. 이곳 브니엘에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 교사로서, 신실한 한 기독교인으로서 제자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다. 
 
 내가 브니엘에 부임하여 강단에 처음 선 날을 나는 잊을 수 없다. 2학년 어느 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윤동주의 ‘서시’를 강의하고 난 후 학생들에게 짤막한 과제를 부여하고 나는 교실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교실 뒤켠에 가서 앞을 보니까 교실 정면 칠판 위 한 가운데는 태극기가 걸려 있고 조금 낮은 위치에 칠판 양옆으로 교훈과 급훈이 걸려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이상하게 교훈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나는 조금 자세히 볼 양으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가 그 교훈을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동공이 커지면서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그 교훈이 나를 이 브니엘에 붙박아 놓아 버렸다. 그 후 33년 동안. 

                                       
교훈
1. 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려는 사람이 되련다.
2. 나는 마음껏 공부하고 마음껏 뛰노는 사람이 되련다.
3. 나는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사람이 되련다.
4. 나는 조국과 민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좋은 교훈이 없노라고. 나는 이 교훈을 제자들에게 체질화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다. 어떤 때는 제자와 밤을 새며 무릎을 맞대고 고민한 적도 있었다. 매질도 많이 하였다. 어찌 나뿐이랴. 나의 동료 선후배 선생님들이 이렇게 제자들을 사랑했다. 그러기에 우리 브니엘은 대학 진학에 있어서 전국 최상위 10위권 안을 유지하는 확실한 명문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남다른 자부심도 갖게 되었다.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이라 확신한다.   

 나는 지금도 조용히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 정말 브니엘은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시는 학교라는 것을 말이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브니엘을 졸업한 제자들은 이 교훈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긴다. 그리하여 언제 어디에 있건 간에 '반드시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브니엘맨들은 언제나 자기의 정체성(正體性)을 잊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서 자기 몫을 감당한다.

 오늘 그 현장을 나는 서울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제자들 칠팔 명과 조촐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삼십 년 전의 그때의 그 얼굴들을 대면하니, “사제(師弟) 간의 정담은 이래서 좋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3학년 9반은 학급 정원이 65명이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콩나물 시루였다. 복교실(복도를 사이에 두고 두 교실이 마주보고 있는 시스템)에 수많은 학생들로 붐비는 우리 학교는 교실 환경이 최악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복도는 자갈치 시장보다 더 요란했다. 그런데도 우리 졸업생들은 모교를 왜 잊지 못하는가? 바로 학생 저들 사이의 참으로 끈끈한 우정과 선생님들의 남다른 사랑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되어진다. 오늘 졸업 30주년을 맞아 나이 오십이 되는 이들은 참으로 자랑스런 나의 제자들이며 시대정신을 갖고 새벽을 일깨우는 이 땅의 진정한 동량지재(棟梁之材)들이다.

 고등학교 시절은 꿈이 가장 활발하게 내면적 동기를 충동질할 때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할 보금자리를 준비할 때이기도 하다. 이러한 때에 만난 진정한 한 친구는 나의 삶에 고향과도 같다. 고향은 언제나 나에게 푸근함을 주듯이 친구는 그런 존재다. “얘들아, 친구란 말의 정다움을 너희들은 아는가?” 
 
 며칠 뒤면 스승과 친구들을 만나러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싣겠지. 너희들은 콧노래를 불러라. 해운대, 송정 백사장에서 봄 소풍 때 담임선생님을 들어 차가운 봄 바다에 헹가래치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우리, 그날 밤 해운대 티파니21 유람선 위에서 만나자. 사랑한다, 제자들아.

나의 좋으신 하나님이 너희들을 축복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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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결단

묵상 2011. 9. 21. 15:54 |

 

 


1. 선택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다. 지난 날 나는 강단에서 감수성 많은 제자들과 함께 이 시를 감상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생은 선택이다. 하나를 빼 놓고는 모두가 선택이다. 다만 부모는 예외다.” 그렇다. 세상에 그 누구도 부모를 자기가 스스로 선택하는 자는 없다. 세상 밖으로 고고의 울음을 울고 나오고 보니 나의 부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기에 부모와의 만남은 숙명이다. 그 이외에 선택이 아닌 것이 있었던가? 심지어 자기가 태어날 나라도 오늘날은 선택하지 않는가! 물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난센스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살 만큼 살고 난 지금 돌이켜 보면 선택 아닌 것은 없는 것 같다. 물론 선택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어릴 적 집 밖으로 나가 놀 짝지의 선택으로부터 시작해서 학교, 학과, 직업, 배우자 등등 모두가 선택이다.


 우리의 주변에서 보면 누구를 선택하고 무엇을 선택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또 선택했어야 할 순간에 선택의 기회를 놓쳤거나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선택했으므로 인생의 운명이 바뀌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선택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할 것이다. 프로스트의 시에서처럼 젊을 때는 하고 싶은 것도 많다. 나의 앞에 펼쳐진 신천지가 모두다 경이(驚異)요 새로움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선택할 수는 없다. 어차피 한 길을 선택하여 갈 수밖에 없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선택이 어렵기 때문에 인생이 어려운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스승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희들의 삶에 의미가 있으려거든 세 가지를 잘 선택하라. 첫째는 벗 둘째는 책 마지막은 배우자다.”  나는 그때 ‘의미 있는 인생’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그날 이후 벗들과 이 세 가지 문제를 가지고 많이도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지금, 그때의 벗들 중에 스승의 말을 새겨듣고 인생에 있어서 이 세 가지를 잘 선택한 벗들은 정말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선택에는 멘토가 필요하다. 한 권의 책이 나에게 선택을 위한 멘토가 되어도 좋고 한 사람이 멘토가 되어도 좋다. 물론 나에게 멘토만 있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멘토가 될 수 있는 자격은 나보다 월등히 나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로 하여금 나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멘토의 쓴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낸 후에 ‘야, 너는 괜찮은 놈이야, 너 멋있어’ 라고 자기 자신과 당당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한번쯤 자식이나 아내로부터 ‘아빠가 자랑스러워’ 라거나 ‘당신 이제 보니 정말 멋있는 남자야’ 라는 말을 내가 선택한 멘토 덕분에 듣게 된다면 최소한 나는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


 성경은 내 인생에 최고의 멘토다. 성경에서 선택을 잘한 사람을 두어 사람만 든다면 나는 아브라함과 룻을 들고 싶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선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할 자유 의지가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분명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믿음과 그렇기 때문에 좋으신 하나님이 나에게 결국은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믿음과 선택은 굉장히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많은 환란과 인고의 세월을 보냈지만 하나님을 선택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끝까지 좋게 하셨고 결국에는 믿음의 조상이요 믿음의 통로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보면 믿음의 선택은 하나님이 보장하는 선택이요 가장 확실한 선택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또 한 인물을 든다면 모압 여인 룻이다. 성경 룻기를 읽어보면 한 이방 여인 룻이 어떻게 살아와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게 되는 큰 축복을 받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그의 성공은 전적으로 선택에 있다 하겠다. 룻기는 그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여인의 기구한 삶을 다룬 세계 명작을 꼽는다면 무수히 많겠지만 ‘주홍글씨’와 ‘테스’가 아닐까 싶다. 이 두 작품에서의 여인들보다 더 기구한 삶을 산 여인이 룻이다. 룻은 이방 여인인 시어미 나오미를 모시고 남편도 없이 살아가는 처지이다. 그런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 리가 없다. 다만 시어미 나오미로부터 하나님이 어떤 신이시며 그 신은 시어미와 그들의 조상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었는가를 단지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들음에서 믿음이 생겼고 그 신에 대한 온전한 신뢰(信賴)가 자신으로 하여금 시어미와 시어미의 신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선택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선택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룻에게는 선택이 곧 삶과 죽음인 것이다. 그러기에 삶과 죽음을 담보로 룻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이시다. 결코 실언을 하지 않으신다. 룻기를 읽어보면 룻이 하나님을 선택한 후 하나님 당신이 직접 연출을 맡으셔서 룻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족보의 주인공으로 사용하시는지 잘 볼 수 있다. 남편이 될 보아서와 만나서 혼약을 맺기까지의 과정은 정말 절묘하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룻에게 후히 흔들어 넘치게 갚아 주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선택한 자에게는 결코 후회함이 없으리라고 나는 성경을 두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아직 주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 바로 하나님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2. 결단


 우리가 인생을 살아 갈 적에 선택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면 결단일 것이다. 이 결단이 왜 어려운가 하면 구습(舊習)을 벗어 던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 습관과 관습에 따라 살아가게 마련이다. 새로운 변화에는 익숙하지 않고 두려움을 가지기에 자기에게 익숙한 길을 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옛 조상들은 시작이 반이라 하였고,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 하면서 첫 삽을 과감히 뜨기를 강조해 왔다. 포항제철을 견학해 본 자들이 있는가? 포항은 196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조그만 어항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불모지에 철을 위한 첫 삽을 뜬 그 순간 미래의 포스코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우물쭈물하다가 좋은 인생 다 간다고. 아무리 선택이 좋아도 그 선택에 따르는 결단이 없으면 인생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결단의 사례를 하나 들라면 나는 단연코 다니엘의 결단을 들고 싶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1:8)” 여기에서 뜻을 정했다는 말은 결단을 말하고 있으며 환관장에게 구했다는 말은 죽음을 담보로 했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절대 왕권국가인 바벨론으로 잡혀간 포로의 신세였다. 왕의 명령은 곧 법이요 불복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다는 뜻의 세움 곧 결단은 하나님이 자기의 삶의 전부인 자가 아니고는 결코 할 수 없는 결단인 것이다. 다니엘의 결단에 하나님이 어떻게 갚아 주셨는가를 보면서 나에게도 아직까지 결단을 못하여 발목 잡혀 있는 일이 있다면 이 차제에 나에게도 다니엘의 결단을 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여 봄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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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

묵상 2011. 4. 13. 01:13 |
 

1. 들어가는 말

 

 지난 3월 6일 내가 출석하는 동안교회 주일 3부예배 설교에 초대된 워싱턴 한인교회 김영봉 목사님의 말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는 미주 한인교회 목회자들이 최근에 한국을 방문하고 느끼는 감회를 이렇게 전하셨다. “한국은 돈과 건강과 외모에 미친 것 같다” 정말 이 말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대학교수가 연구비를 횡령하고 본부에서 내사가 들어가자 자살하고, 또 한 대학교수가 학생에게 돌아가야 할 장학금을 횡령하고 동료끼리 내분이 일어나자 치고받고 다투다가 자살하는 사건을 볼 때 막가는 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여기서 김 목사님의 전한 말을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돈과 건강과 외모에 대한 집착이 우리 민족에게 미칠 빛과 그림자에 관하여 생각해 보려 한다.      


2. 빛


  얼마 전 어느 일간지에 “아시아는 韓版(한반)에 열광한다” 하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아시아 각국에 주재하는 특파원들로부터의 르포로서 일본, 홍콩, 중국은 물론이고 동남아 전역에 ‘한국 닮기’가 한창이라는 기사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는 미래의 성장 동력산업으로 3대 산업을 제시했다. 즉, IT, 기계항공, 생명공학 산업에 나라의 온 힘을 쏟는다고 선언했다. 그 후 20년이 채 못 되어 우리나라는 이 분야에서 세계가 주목할 성장을 일구어 내었다. 남다른 근면성과 성부 근성, 높은 지능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교육열이 복합되어 만들어낸 걸작이다.


 거기에다가 2002년 1월 KBS 2TV에 방영된 드라마 ‘겨울 연가’가 일본 NHK에서 방송되어 일본을 기점으로 ‘한류’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주연으로 출연한 배용준, 최지우는 일본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게 되어 일본 열도에 ‘한류 신드롬’을 일으켰고 드라마의 무대가 된 춘천의 남이섬은 일본인 팬들의 관광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한국의 드라마는 아시아 각국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끊임없는 ‘제2의 욘사마’를 배출시켰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의 외형문화가 아시아 여성들을 사로잡는다”

이는 아시아에 주재하는 특파원들의 공통된 입말이다. 한국여성들보다 아름다운 얼굴과 희고 고운 피부, 가지런한 이를 가진 여성은 없다. 외국을 여행해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느끼는 감정이다. 인종의 전시장이라는 뉴욕에서 가이드로부터 들은 내용이다. “아침에 다운타운에 나와 보면 한국여성, 일본 여성, 중국 여성은 단번에 알 수 있어요. 한국여성은 세련된 몸매에 꼭 명품 하나는 지니지요. 그리고 일본 여성은 치아가 고르지 못해요. 중국 여성은 머리가 더부룩해요.” 중국 사람은 아침에 머리를 감으면 그날 운수가 사납다고 머리를 감지 않는다고 살짝 귀띔도 해 주었다.  


 성형, 미용, 패션 등은 정말 세계 수준이다. 아니, 이제는 세계를 선도한다. 우리나라 여성은 선천적으로 미적 감각이 탁월하다. 옛날에는 때마다 유행이란 게 있었다. 주로 유행은 서구 몇몇 선진국이 독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가 곧 유행’이다. 각자가 유행을 창조한다. 소비자의 욕구가 끈임 없이 상승한다. 그러기에 아름다움과 관련된 산업은 기술의 축적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성형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르고 영상, 음악을 중심으로 한류문화가 세계로 확산된다. 앞으로는 먹거리, 레저 문화도 세계에 주목을 받게 될 것이 확실시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의 문화가 기폭제가 되어 한국 문화를 세계에 수출하고 이를 자본화하여 막대한 부(富)를 축적한다면 무한 경쟁시대인 글로벌 사회에서 한국이 세계 일류 국가가 되는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문화산업을 어떻게 개발하며 수출할 것인가는 이제부터 생각해야 할 때다.


 결론적으로 볼 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의 외형문화가 한국을 살리고 더 나아가서는 풍요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엄청난 자본이 된다는 것은 한국의 미래에 분명 밝은 빛이라 할 수 있다.


3. 그림자


 인간은 물탐(物貪)의 야수


 지난 4월11일자 어느 일간지에 실린 서로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종류의 기사를 읽고 난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들이 살아가는 이 땅,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물려준 이 땅에서 언제까지나 나의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는데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는 “우리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바르게 사는 길인가?” 하는 심각한 고민으로 긴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매스컴의 PD들은 전국을 샅샅이 누비며 생활의 달인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정작 삶의 달인을 찾아 나서는 자는 없다. 여기 기사를 간단히 요약하여 옮겨 싣는다.  


 1) 두 형제가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여 단시일에 떼돈을 벌었다는 기사다.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의 내사가 들어오자 기미를 눈치체고 번 돈 170억 원 중 111억 원을 5만 원 권으로 묶어 플라스틱 김치통에 넣어 마늘밭에 묻었다가 나중에 발각되어 돈은 국고로 환수되고 쪽박 차고 수갑도 차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김제의 마늘밭 화수분’ 이야기다. 집에 두려니 불안하고 은행에 맡기자니 추적당할 것 같고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아 전에 사 놓은 마늘 밭 300평에 새벽과 한밤에 몰래몰래 나가 몰래몰래 묻어놓고 그것도 불안하여 아예 집을 떠나 컨테이너 박스를 밭가에 옮기고 거기에서 기숙하며 날마다 돈다발 밭 위에서 김매고 거름 주며 밭가를 맴돌다가 인생도 맴돌아 버리다. 


2) 역외 탈세로 4101억 원을 국세청으로부터 추징당한 A회장, 그는 ‘유령인간’이었다. 모든 계좌는 차명, 160여 척 선박도 해외 조세 피난처 등록. 십조 원이 넘는 재산가였지만 서울에서 그가 사는 집의 임대차 계약서는 친인척 명의로 허위 작성됐다. 회장님으로 불렸지만 회사의 대표 이사를 맡은 적이 없고 경영활동은 휴대폰 저장장치(USB)나 구두 지시 등을 통해 은밀히 이뤄졌다. 일체의 공개 활동을 피했고 세무 컨설팅도 해외 회계법인을 이용했다. 유령인간 생활의 목적은 단 하나, 바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4. 대안

 

 너희가 청부(淸富)를 아는가 


 한국계 일본인 손정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는 현재 소프트뱅크 대표회장이다. 지난 3월 11일 일본에 사상 최악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각계각층에서 온정의 손길을 보냈다. 이때 그는 일본인과 아픔을 같이 했다. 일본에서 가장 많은 1000억 원을 내놓았다.


 빌게이츠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드니 올림픽 때이다. 내가 개회식을 TV로 보다가 깜짝 놀랐다. 빌게이츠가 관중석에 앉아 열심히 자국선수들의 입장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앉은 자리가 VIP석이 아니라 일반석이었던 것이다. 물론 경호원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그때 나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만약 빌게이츠였다면 나는 일반석에 앉았을까? 그는 지금 빌게이츠 재단을 만들어 세계 빈곤 퇴치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청부(淸富)는 돈과 자신을 분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돈이 나 자신과 붙어 있으면 그 돈이 결국 나를 삼켜 버린다. 돈의 위력은 굉장하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돈이 너무 크게 보이면 그때부터 나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손정의와 빌게이츠는 어떤가?  그들은 진정 청부(淸富)의 대가이다.


 역시 지난 4월 11일자 신문에 실린 기사다. 정말 신선하다. 그대로 소개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달인’을 만날 수 있어 기쁘다.

                           

                                          한 달 40만 원으로 멋지게 사는 법

 

 내가 살고 있는 대관령, 산골 마을은 청정 강릉에서도 상수원 구역입니다. 우리 마을 유기농 채소 같은 할머니 한 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름은 최종옥, 나이는 82세이지만 멋도 부리십니다. 봄이면 화사한 머플러를 두르고 가을이면 프랑스 모델 같은 갈색 모자를 쓰고 마을도서관에 오십니다. 화분이 놓인 창가에 앉아 천천히 녹차 한 잔을 들며 은테 안경을 쓰고 책 읽는 모습이 꼭, 헬렌 켈러 박사 같습니다.


 할머니는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영세민 생활보조금 40만원 남짓한 돈으로 살아가지만 가끔 비슷한 처지의 이웃 노인들이 몸이 아플 때면, 조그만 전기밥솥에다 약밥을 찌거나 팥죽을 쒀 선물로 가져갑니다. 할머니! 그러면 생활비가 부족하지 않나요? 묻는 제가 금방 부끄러워집니다. 살아보니 부족한 것은 항상 마음이지 돈이나 재료가 아니더라, 40여만 원으로도 충분히 문화생활을 하면서 잘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매일 마을도서관에 오셔서 차를 마시며 한두 시간씩 책을 읽고, 일주일에 하루는 배낭에 책 한 권 넣고 강릉 민속시장에 가서 맛있는 것도 사 드시고 밤에는 찜질방에 가서 뜨끈뜨끈한 물로 목욕한 다음 가져간 책을 읽으며 느긋하게 하룻밤을 지내고, 그 다음 날 돌아옵니다. 1박2일 여행인 셈이지요. 여행 경비는 왕복 시내버스비, 식비, 찜질방비, 합해서 약 2만 원 정도라 합니다. 그렇게 멋지게 살아도 생활비가 좀 남아서, 돌아가신 뒤에 장례를 치러줄 고마운 이들에게 수고비로 주려고 조금은 저금도 해 두었다고 합니다.

                                                                              유금옥(2011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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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천국

묵상 2011. 3. 3. 19:49 |
 

 봄이 찾아오는 소리가 조용하게 들려온다. 땅 밑에서 새싹이 꼬물꼬물 용틀임을 한다. 조금 있으면 딱딱한 땅껍질을 헤집고 연한 새순을 쏘옥 바깥세상으로 내밀겠지.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지. '나, 안 죽었걸랑.‘ 맞아. 우리는 모두 안 죽었지. 잠시 매서운 겨울 추위에 조금 움츠린 것뿐어거든. 얼음장 밑에서 조용히 숨죽이며 기다리던 미나리가 새파란 새순을 물 위로 밀어올리며 봄을 부르고 온 산과 들이 봄을 맞을 준비에 바쁘니 계곡의 잔설(殘雪)도 슬그머니 뒷걸음쳐 물러난다.


 요즘 세상 정말 번거롭다. 처처에 재난과 전쟁이 쉴 새 없다. 일본의 화산 폭발과 대 지진, 호주의 대 홍수, 뉴질랜드의 지진에 이어 세계 곳곳에서 민중의 민주화 요구는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이집트의 민주화 요구가 도미노가 되어 종교와 이념으로 민중을 교묘히 묶어두었던 리비아 카다피 42년 독재가 무너져 내리고 이웃 중동의 여러 나라로 번질 태세다. 중국도 걱정이고 북한도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겠는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런 혼란한 세상일수록 정도(正道)를 따라가야 한다. 


 문화 상대주의라는 미명(美名) 아래 우리는 진리의 절대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만드신 일부일처제를 버리고 지구촌 곳곳은 일처다부제나 일부다처제를 정당화한다. 인간의 욕정에 끝이 있는가? 돈이 있으면 다음에 갖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 인간의 잔인한 이기주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가? 이제 우리는 겸허히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하여야 가정을 지킬 수 있고 사회도 지킬 수 있다. 나는 나를 지켜주는 성경 구절 하나를 생명처럼 간직하고 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制御)하라(벧전2:11)” 이 얼마나 귀중한 말씀인가. 이 구절 속에는 참으로 중요한 진리가 숨어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고 우리는 잠시 이곳에서 머무르다 저곳 본향으로 가야하는 존재이며 육체의 정욕을 가진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으니 성령의 도움으로 정욕을 다스리지 못하면 나로 말미암아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내 아내, 자녀부터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경고라 할 수 있다.       


 요즈음은 가정도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마약의 안전지대라 하는 우리나라도 가정주부가 마약에 중독되는 사례를 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다. 현대인이 왜 마약에 쉽게 유혹을 받는가? 향락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쾌락주의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옛적의 우리 조상들은 오늘날의 우리와 달랐다. 옛적에는 지덕(知德)을 겸비한 사람을 ‘선비’라 불렀다. 아무리 지식이 높아도 덕을 지니지 못하면 존경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회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돈이면 최고다. 돈이 지순지고(至純至高)의 가치다. 그러기에 지식과 덕이 따로 논다. 우리 사회에 그럴듯한 지식을 갖춘 소위 전문 지식인이 행동을 개차반 같이 하는 일을 얼마나 많이 보는가. 이들은 한마디로 양심이 화인(火印) 받은 자이다.


 요즈음은 이혼도 아주 쉽게 한다. 그러기에 백년해로(百年偕老)라는 말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 결혼식장에 가 보면 주례자가 이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볼 수 없다. 그러면 왜 이혼을 하는가? 대부분은 성격차를 이혼 사유로 든다. 그러나 엄격히 따져보면 이것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부부는 본래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만나는 법이다. 성장 환경이 서로 다르기에 성격과 취미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게 마련이다. 맞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성격 차는 필연적인 것이다. 어떤 부부는 싸우자고 만난 듯이 집요하게 싸운다. 더 싸울 일이 남았는가? 이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라. 이것이 최선이다. 다 큰 사람 내 것으로 만들려 하지 말라. 내 것으로 만들려 하는 그 자체가 문제다. 극도의 이기심을 버리고 다름을 아름다움으로 보아주는 너그러움을 가질 때다. 너그러움은 관용(寬容)이다. 관용은 배려와 존경으로 통한다. 최고의 사랑은 배려와 존경이다. 나는 오늘도 앞치마를 두르고 싱크대 앞에서 아내를 사랑한다. 


 ‘얄궂은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우리나라의 흘러간 가요의 가사 한 구절이다. 참으로 명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 버리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무어라 말씀하는가?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2:11)” 그러기에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전9:9).” 성경 말씀대로 해 아래서 헛된 날에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분복인 부부간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나에게 돈이 조금 없어도 좋다. 돈은 없으면 조금 불편할 뿐이다. 왜냐하면 돈으로 영원을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명예나 지위가 없어도 좋다. 없는 것을 아쉬워하지 말고 현재 나에게 있는 것을 세어보라. 눈으로 사랑하는 나의 가족을 볼 수 있는가? 귀로 내게 속삭이는 아름다운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함께 하고픈 가족이 내 곁에 있는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가! 세상사 모든 일을 훌훌 털어버리고 지금 수도권 전철을 타 보라. 그리고 인천으로, 안산으로 훌쩍 떠나보라. 거기에는 바다가 있다. 짓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 건너 먼 나라를 꿈꾸어 보라. 꿈꾸는 자는 행복하다. 그리고 돌아와서 아내를 데리고 다시 한 번 가보라. 나는 당신이 있으므로 행복했노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으리라.


 아! 봄날은 내 곁으로 살그머니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봄의 천국을 준비하신다. 이곳저곳이 봄의 천지다. 산에도 들에도 강에도 바다에도 봄의 환희로 넘쳐난다. 이번 주말에는 경춘선 열차를 한번 타 볼까? 그리고 아내와 함께 한류열풍의 젊음 속으로 들어가 볼까? 며칠 전 주일 저녁에 거실에서 내가 KBS의 7080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딸애가 불쑥 제안을 한다. “아빠, 내가 방청권 신청해 볼까, 가 볼래?” 한다. 나는 한쪽켠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아내의 옆얼굴을 살짝 훔쳐보면서 ‘좋은 사람, 나 만나서 참 고생 많이 했어. 나, 당신에게 잘 해 줄게’ 속으로 조용히 되뇌면서 참으로 함께함의 행복을 느꼈다. 있을 때 잘해!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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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믿음이 바른 복음에 근거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복음에 근거하고 있는가


1. 들어가는 말

 

 안녕하십니까? 힛데겔입니다. 오늘 이렇게 저의 블로그를 통하여 여러분을 다시 만나 뵙게 되니 너무나 반갑습니다. 저의 블로그에 앞서 올린 글 ‘복음의 능력’에 이어 오늘은 오랜 동안 교회를 통하여 신앙생활을 해 오신 여러분들을 위하여 이 글을 쓰려고 합니다. 지난 글은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분들을 위하여 쓴 글이라 한다면 이번 글은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어떤 분들에게는 충격적인 글일 수도 있고 상당 기간 아주 혼란한 경우의 글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을 지금 쓰고 있는 저도 굉장히 혼란한 번민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글을 집필하면서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선한 양심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좇아 성경에서 밝히 말하고 있는 대로 정직하게 믿음의 본질에 관하여 썼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믿음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얻음이라(벧전1:9)” 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믿음이 성경적으로 바른 복음에 근거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한번쯤은 반드시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잘못되면 나는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믿음이 잘못되면 그 믿음으로는 지옥갈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 이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일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나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 보는 일은 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일 수 있으며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나의 믿음이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믿음이라 한다면 지금껏 믿은 나의 믿음은 모두 헛것이요 지옥 갈 수밖에 없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 라고 성경은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었는지를 알지도 못합니다. 내 속에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나는 버림받은 자입니다. 그러면 언제 내 속에 성령이 들어와 계십니까? 내가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할 때 내 속에 성령께서 들어와 계시지요. 다시 말하면 성경적인 바른 믿음을 가졌을 때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무언지 모르게 답답하고 찜찜하여 시원하지 못하고 늘 허전한 경우를 경험해 보지 못하셨나요? 이것은 내 속에 있는 영의 소원을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영의 소원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으니 어찌 내 영이 갈급해 하지 않겠습니까?


2. 다른 복음


 여러분은 다른 복음에 대하여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이 말이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성경에서 다른 복음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곳은 갈라디아서(갈1:6-9)와 고린도후서(고후11:4)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했으나 그가 떠난 이후에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는 유대주의자들 곧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가만히 들어와 바른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 즉 율법과 할례도 함께 행하여야 구원을 받는다고 전하였습니다. 이에 이방인이었던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교훈에 현혹되어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기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았습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더러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다른 예수란 성경에서 밝히 드러내고 있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온전히 속죄하신 나의 구원자이시며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분(빌2:6-10)을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만으로는 구원을 온전히 얻을 수 없으니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혼합주의 신앙, 율법주의 신앙 속의 불완전한 구원주인 예수를 다른 예수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단호히 말하건대 다른 복음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3. 우리들의 현주소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대교회에서는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자와 다른 복음을 좇아가는 무리는 없는 것일까요? 몇 가지 문답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여러분은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 있습니까? / 아니오.

   왜 못가는 겁니까? / 해 놓은 게 있어야지요

 

 어떻습니까? 굉장히 겸손한 대답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답 속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성경의 어디에도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로마서에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풀어보면 이렇게 되겠지요. 하나님의 의가 복음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믿음으로 나는 구원을 얻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선물을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나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구원은 결코 내가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번에 얻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도다(히10:10)” 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영원한 속죄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죄가 믿어지십니까? 히브리서 9-10장을 깊이 읽으면서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여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님이 깨닫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 맞다.’ 하고 감탄할 때가 올 것입니다. 저도 히브리서를 읽고 또 읽으면서 묵상하다가 어느 날 아침에 9-10장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영원한 속죄를 깨닫고 날아갈 듯한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  말씀하신 의미를 비로소 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빌립보서 2장 12절을 오해합니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라는 말씀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내가 이루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내가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그의 긍휼사심을 좇아’ 라는 구절입니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긍휼) 때문에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면 빌립보서 2장 12절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나요?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을 거듭남 또는 중생이라 하지요. 새 생명은 자라가야 합니다. 아기가 모유와 이유식으로 차츰 자라듯이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끊임없이 성장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길입니다. 그리하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 많은 칭찬과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반드시 결산할 날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심판으로, 믿는 자는 상급으로 결산을 보아야 하지요, 심판주인 주님 앞에서. 우리는 빌립보서 2장 12절을 그리스인이 받을 상급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4)”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은사가 구원의 보증 수표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나는 내 주위에서 은사자가 자기의 의(義)를 내려놓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은사가 구원의 보증 수표인 양 은사를 받지 못한 자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모습을 보아 왔습니다. 은사가 구원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큰 착각이요 자기체면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은사가 없었나요? 사도행전 19장 12절에 보면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라는 기록을 보면 사도 바울은 큰 은사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환상 중에 셋째 하늘을 보았다(고후12:2)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서신 어디에도 셋째 하늘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 만을 자랑해 왔습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로 보건데 은사를 자랑함은 ‘나의 의로운 행위’를 자랑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에게 은사는 왜 주시는 것일까요? 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의 근거를 누가복음 10장에서 보겠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칠십 인을 세우사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과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왜 이런 능력을 주셨을까요? 그 정답이 10장 17절 이하에 있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말하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하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영혼 구원을 위해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의 근거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찾겠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신령한 은사를 받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문제도 많았던 교회입니다. 은사를 주신 두 번째 이유의 정답이 12장 7절에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은사)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는 바울의 권고를 보면 개인과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덕(德)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은사가 자기 의(義)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은사를 받은 자는 더욱 큰 은사 곧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더욱 겸손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른 복음을 좇지 않고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과 그들이 주장하는 행위 구원에 현혹되어 자기의 어떤 행위로 구원을 얻겠다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모두 다른 복음을 좇는 자들입니다. 다른 복음을 좇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라고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도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상투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게 믿어 천국가겠어?” 어떻게 들으면 굉장히 믿음이 있는 자의 질타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질타 속에는 사탄의 무서운 흉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니까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은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라고 한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하는 자는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구원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에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가 행위 구원을 주장하면 교회가 부흥할까요? 교회 부흥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른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의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담대히 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고 하거늘(행2:37).”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많은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회 지도자가 행위 구원을 주장할수록 사림들의 지침 현상은 가중되어갈 뿐입니다. 사람들은 진정 죄사함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율법의 중압감에 짓눌려 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갖거나 끝내는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복음이 분명하여야 하고 사람들에게 바른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끊임없이 율법(행위)의 짐을 지울 것인가 아니면 바른 복음으로 죄의 짐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갖도록 할 것인가는 선택입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선택한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한 지도자는 마태복음 7장의 거짓 선지자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2-23)”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이 저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나요? 저들은 애초부터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있어서의 ‘주’는 ‘다른 예수’입니다. 저들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유혹을 받아 ‘다른 영’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초 위에 세워지지 않은 믿음은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다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나는 이렇게 믿음의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구원주요 나의 왕이요 나의 주인이십니다.” 라고.


 나는 나의 의로운 행위가 구원을 받는데 조건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전도한 것이 얼마인데, 헌금을 얼마나 드렸는데,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많은 은사를 체험했는데 내가 구원을 못 받았을라고… 말도 안 되지 내가 천국 못 가면 누가 가나.” 조용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7장의 거짓 선지자와 내가 무엇이 다릅니까? 꼭 같지 않습니까? 오랜 신앙생활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나의 구원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과 헌신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구원 받은 자가 그 은혜에 감격하여 몸과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 드려 나의 구원자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돌아보며 열방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찌 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모든 드림(헌신)을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드림은 다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되돌아올 상급으로 하나님의 곳간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저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찬물 한 그릇 대접한 것도 그 상급을 내가 결코 잊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말입니다.     


 저와 함께 우리는 모두 지금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라고 하시는 주님의 선포 앞에서, 또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하시는 말씀 앞에서 내가 나의 구원자가 되었던 자리에서 과감히 내려와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복음은 허상입니다. 지금껏 좇아온 다른 복음을 버리고 이제 성경에서 밝히 말하는 바른 복음으로 돌아와 구원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예수, 주님만이 나의 삶의 이유!"  이보다 더 주님이 기뻐하시는 고백이 있을까요?    .  


2) 여러분은 어떤 죄를 큰 죄라 생각하나요? 그리고 큰 죄 지으면 받은 구원도 잃어버리나요?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저가 앞서 쓴 글 ‘복음의 능력’에서 저는 성경에서 말하는 죄를 정확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먼 것같이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다르다(사55:8-9)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기에 나의 생각으로 죄를 정의하려 하여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사람들 가운데서도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로마서(1:28-32)를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죄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죄의 경중(輕重)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의 유무(有無)만 있을 뿐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죄의 대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롬6:23)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이 죄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저주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그 죄의 대가를 다 지불하시고(요19:30) 나를 의롭다 칭하여 주시고 나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사(히10:10) 나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큰 죄라고 여기는 죄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지 못할 죄는 절대로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한번 죄사함 받은 구원은 결코 취소되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 받은 구원이 어떤 큰 죄로 인하여 취소된다고 믿는다면 이는 바른 복음에 근거하지 않은 다른 복음이요 사탄이 교묘히 속인 위장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며 성경에서 보장하는 믿음이 아니므로 구원 받을 수 없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는 지옥갈 수밖에 없습니다


3) 날마다 짓는 죄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가나요? 그리고 앞으로 지을지도 모르는 죄는 어떻게 해결하나요?

 

 이 물음에 많은 분들이 ‘날마다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간다’ 라고 응답하였으며 앞으로 지을지도 모르는 죄에 대하여는 모르겠다고 답한 분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 지도자는 날마다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하면서 자기 교인들을 닦달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은 어떠했을까요? 회개의 중압감 때문에 잠자고 눈뜨기가 두렵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회개를 과소평가하거나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한 온전한 속죄, 영원한 속죄를 믿지 않는 잘못된 복음에 관하여 지적하고자 합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다른 복음에 기초를 둔 믿음이라면 이 역시 구원 받지 못할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는 지옥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명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히10:12)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4) /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10:17) /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는니라(히10:18).” 


 우리가 회개하지 않아서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지 않기 때문에 지옥가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지을지도 모르는 죄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용서해 놓았습니다. 궁극적으로 따져들어가 보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긍휼)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원 받은 자가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0장에서 예수님의 온전한 속죄에 관하여 말씀하고 난 연후에 12장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징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은 자가 그 이후 죄를 짓는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지옥가는 것은 아니지만(롬8:1-2) 죄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된 나 사이에 관계를 불편케 만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가 범죄하였을 때 징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자녀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보다 감히 비교할 수 없도룩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가 진정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신10:13). 죄를 지으면 삶이 고달파지고 행복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삶을 마감하고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상급이 없습니다.  


 저가 블로그에 올린 글 ‘교회는 진정 자살을 방지할 대안이 있는가’ 라는 글에서 자살의 성경적 정의와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에 나의 생각을 꺾고 하나님의 기준에 나의 생각을 맞추지 못한다면 이 또한 분명 잘못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이 글을 맺으며


 참 저는 행복한 족속인가 봅니다. 아마도 너무 못나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많이 받는가 봅니다. 자식도 키워보면 무언가 모자라고 못난 자식에게 연민(憐憫)이 많이 가거든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성경에 근거한 바른 복음에 나의 믿음을 두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고정 관념을 내려놓지 못하여 거기에 사로잡혀 바른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데 웬 은혜로 바른 복음을 깨달아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큽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만남의 복을 받은 것 같습니다. 지뢰밭 같은 세상에 좋은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서 안전하게 신앙생활 잘 하여온 것 너무나 감사하고 때마다 좋은 믿음의 멘토를 만나서 더 깊은 신앙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 분외의 복인 것 같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서울로 잠시 거처를 옮긴 후 저가 자주 출석하는 교회(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목사님으로부터 바른 복음을 듣게 되어 너무나 감사합니다. 내 곁에 복음이 분명한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오늘날 바른 복음이 희석(稀釋:물타기)되고 걷잡을 수 없이 세속화되는 이 시대에 새벽을 깨우는 바른 신앙의 지도자가 이 땅에 아직도 많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 명의 참 하나님의 사람들을 남겨놓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새삼 깨닫습니다.

 저의 작은 소원이 있다면 나만 이 구원의 바른 복음을 깨닫고 말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 친지, 이웃,  더 나아가서는 열방을 향하여 전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6"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두려움없이 담대히 나아가 하교하는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공원에서 여가를 즐기는 어르신들에게 정중히 다가가 복음을 전하였더니 들을 자를 성령님이 붙여 주시고 구원받을 자를 성령님이 미리 준비하시고 계신 것을 저는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은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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