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택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다. 지난 날 나는 강단에서 감수성 많은 제자들과 함께 이 시를 감상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생은 선택이다. 하나를 빼 놓고는 모두가 선택이다. 다만 부모는 예외다.” 그렇다. 세상에 그 누구도 부모를 자기가 스스로 선택하는 자는 없다. 세상 밖으로 고고의 울음을 울고 나오고 보니 나의 부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기에 부모와의 만남은 숙명이다. 그 이외에 선택이 아닌 것이 있었던가? 심지어 자기가 태어날 나라도 오늘날은 선택하지 않는가! 물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난센스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살 만큼 살고 난 지금 돌이켜 보면 선택 아닌 것은 없는 것 같다. 물론 선택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어릴 적 집 밖으로 나가 놀 짝지의 선택으로부터 시작해서 학교, 학과, 직업, 배우자 등등 모두가 선택이다.
우리의 주변에서 보면 누구를 선택하고 무엇을 선택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또 선택했어야 할 순간에 선택의 기회를 놓쳤거나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선택했으므로 인생의 운명이 바뀌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선택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할 것이다. 프로스트의 시에서처럼 젊을 때는 하고 싶은 것도 많다. 나의 앞에 펼쳐진 신천지가 모두다 경이(驚異)요 새로움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선택할 수는 없다. 어차피 한 길을 선택하여 갈 수밖에 없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선택이 어렵기 때문에 인생이 어려운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스승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희들의 삶에 의미가 있으려거든 세 가지를 잘 선택하라. 첫째는 벗 둘째는 책 마지막은 배우자다.” 나는 그때 ‘의미 있는 인생’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그날 이후 벗들과 이 세 가지 문제를 가지고 많이도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지금, 그때의 벗들 중에 스승의 말을 새겨듣고 인생에 있어서 이 세 가지를 잘 선택한 벗들은 정말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선택에는 멘토가 필요하다. 한 권의 책이 나에게 선택을 위한 멘토가 되어도 좋고 한 사람이 멘토가 되어도 좋다. 물론 나에게 멘토만 있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멘토가 될 수 있는 자격은 나보다 월등히 나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로 하여금 나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멘토의 쓴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낸 후에 ‘야, 너는 괜찮은 놈이야, 너 멋있어’ 라고 자기 자신과 당당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한번쯤 자식이나 아내로부터 ‘아빠가 자랑스러워’ 라거나 ‘당신 이제 보니 정말 멋있는 남자야’ 라는 말을 내가 선택한 멘토 덕분에 듣게 된다면 최소한 나는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
성경은 내 인생에 최고의 멘토다. 성경에서 선택을 잘한 사람을 두어 사람만 든다면 나는 아브라함과 룻을 들고 싶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선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할 자유 의지가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분명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믿음과 그렇기 때문에 좋으신 하나님이 나에게 결국은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믿음과 선택은 굉장히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많은 환란과 인고의 세월을 보냈지만 하나님을 선택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끝까지 좋게 하셨고 결국에는 믿음의 조상이요 믿음의 통로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보면 믿음의 선택은 하나님이 보장하는 선택이요 가장 확실한 선택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또 한 인물을 든다면 모압 여인 룻이다. 성경 룻기를 읽어보면 한 이방 여인 룻이 어떻게 살아와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게 되는 큰 축복을 받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그의 성공은 전적으로 선택에 있다 하겠다. 룻기는 그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여인의 기구한 삶을 다룬 세계 명작을 꼽는다면 무수히 많겠지만 ‘주홍글씨’와 ‘테스’가 아닐까 싶다. 이 두 작품에서의 여인들보다 더 기구한 삶을 산 여인이 룻이다. 룻은 이방 여인인 시어미 나오미를 모시고 남편도 없이 살아가는 처지이다. 그런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 리가 없다. 다만 시어미 나오미로부터 하나님이 어떤 신이시며 그 신은 시어미와 그들의 조상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었는가를 단지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들음에서 믿음이 생겼고 그 신에 대한 온전한 신뢰(信賴)가 자신으로 하여금 시어미와 시어미의 신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선택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선택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룻에게는 선택이 곧 삶과 죽음인 것이다. 그러기에 삶과 죽음을 담보로 룻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이시다. 결코 실언을 하지 않으신다. 룻기를 읽어보면 룻이 하나님을 선택한 후 하나님 당신이 직접 연출을 맡으셔서 룻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족보의 주인공으로 사용하시는지 잘 볼 수 있다. 남편이 될 보아서와 만나서 혼약을 맺기까지의 과정은 정말 절묘하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룻에게 후히 흔들어 넘치게 갚아 주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선택한 자에게는 결코 후회함이 없으리라고 나는 성경을 두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아직 주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 바로 하나님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2. 결단
우리가 인생을 살아 갈 적에 선택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면 결단일 것이다. 이 결단이 왜 어려운가 하면 구습(舊習)을 벗어 던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 습관과 관습에 따라 살아가게 마련이다. 새로운 변화에는 익숙하지 않고 두려움을 가지기에 자기에게 익숙한 길을 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옛 조상들은 시작이 반이라 하였고,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 하면서 첫 삽을 과감히 뜨기를 강조해 왔다. 포항제철을 견학해 본 자들이 있는가? 포항은 196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조그만 어항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불모지에 철을 위한 첫 삽을 뜬 그 순간 미래의 포스코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우물쭈물하다가 좋은 인생 다 간다고. 아무리 선택이 좋아도 그 선택에 따르는 결단이 없으면 인생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결단의 사례를 하나 들라면 나는 단연코 다니엘의 결단을 들고 싶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1:8)” 여기에서 뜻을 정했다는 말은 결단을 말하고 있으며 환관장에게 구했다는 말은 죽음을 담보로 했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절대 왕권국가인 바벨론으로 잡혀간 포로의 신세였다. 왕의 명령은 곧 법이요 불복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다는 뜻의 세움 곧 결단은 하나님이 자기의 삶의 전부인 자가 아니고는 결코 할 수 없는 결단인 것이다. 다니엘의 결단에 하나님이 어떻게 갚아 주셨는가를 보면서 나에게도 아직까지 결단을 못하여 발목 잡혀 있는 일이 있다면 이 차제에 나에게도 다니엘의 결단을 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여 봄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