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에 해당되는 글 36건

  1. 2009.02.02 두려워 말라
  2. 2009.01.13 인간 시장과 하나님의 나라
  3. 2009.01.03 가을에
  4. 2008.12.14 심은 대로 거두리라
  5. 2008.12.14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6. 2008.12.14 나도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두려워 말라

묵상 2009. 2. 2. 21:47 |
 

                                                 
 주말이면 어머니의 품속처럼 그립고 따스한 나의 집으로 돌아와 집 근처의 목욕탕으로 가는 것이 나의 즐거운 일과 중 하나가 되어 버린 지도 어언 일 년이 넘었다. 따뜻한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앉아 있으면 여기가 바로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오늘도 세상사 잡다한 걱정거리를 다 씻어 버리고 빈 마음으로 돌아오고자 가벼운 마음으로 목욕탕으로 간다.

 

 탕 밖으로 나와 휴게실 소파에 앉은 나의 시야에 모 유력 일간지의 경제면 톱기사가 들어온다. ‘한국 경제, 성장 동력이 멈추는가’ 라는 기사다. 각종 경제지표가 1997년 12월의 IMF 모라토리움 때보다 더 악화되어 나타나 40년 이래 최악이라느니 30년 이래 최저라느니 하는 어두운 기사로 신문의 둘째 면을 도배하고 있다. 세계 경제 위기의 먹구름이 한국 하늘을 뒤덮고 있어 어디에도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죽는다고 아우성이다.

 

 요사이 들어 내 주변에는 마음 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믿음의 선•후배들, 그리고 나와 마음을 같이 했던 지인(知人)들 중에 유달리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우울증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여보지 않았다. 그런데 예사롭지 않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 중엔 상당한 식자(識者)들도 많다. 지식과 인격이 이 병을 이길 저항력이 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은 엄밀히 따지고 보면 대부분 우울증에 대한 잠재적 보균자라 할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내일은 미스테리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현대인에게는 이기기 힘든 골리앗이라 할 수 있다. 직장, 재산, 지위, 명예 등 자기를 든든히 지켜준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를 외면해 버리거나 매몰차게 자기를 떠나가 버렸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한다. 자기가 목숨걸고 있던 것을 갑자기 잃어버리거나 빼앗겼을 때 받는 충격은 가히 죽음과 맞먹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때 사람들은 심한 박탈감을 느끼고 분노의 감정을 갖게 되며 결국에는 자학(自虐)과 칩거(蟄居)의 상태로 들어가거나 사람들을 기피하게 된다.

 

 나는 현대의학에 문외한이지만 현대인의 우울증의 원인은 두려움에서 온다고 나는 단언하고 싶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통을 호소하거나 소화불량이나 근육무력증으로 고통을 당하며 심한 정서 장애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보아왔다. 결혼한 부부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배신으로 상대가 심한 우울증을 앓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성경에서는 두려움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근본 원인은 관계의 단절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전능자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자이시다. 그러기에 그분에게 원인을 물어야 한다.  서양의 어떤 철학자는 인간 존재를 피투체(被投體) 즉, 허공에 던져진 존재라 하였다는데(물론 이 철학자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임) 절대 고독의 존재는 바로 하나님을 떠난 존재가 아닐까 싶다. 하나님을 떠난 존재는 근본적으로 불안하다. 에덴에도 찾아왔던 사탄은 이때에도 찾아온다. 그리고 백설 공주를 찾아온 마귀할멈이 주고 간 사과처럼 우리를 죽이고 파괴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끌고 가는 두려움을 주고 간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려하지만 사탄의 계략에 휘말려들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결재가 나지 않고는 절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참새 한 마리도, 들의 풀꽃 한 송이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거나 시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또 이렇게도 말씀하신다. “까닭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잠26:2) 하고 말이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라. 내 모습 이대로 돌아가라. 그분은 나보다 먼저 동구밖에 나와 당신께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이제 그 먼 방황의 세월을 끝내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보라.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께 나를 맡기어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하는 말씀 속에 모든 해결책이 다 들어 있다. 나는 이 말씀을 하루에도 십여 번씩 암송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나를 두려움으로부터 지켜주기 때문이다. 사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두려움을 주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셨다. “강하고 담대하라”

 

 사탄(마귀)을 대적하라. 하나님은 말씀을 가지고 사탄을 대적하라고 하셨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러기에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사탄을 대적할 수 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자 하나님이시요 나의 간구(懇求)를 들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임을 믿어야 할 것이다.

 

 믿음의 말을 구사하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말을 하고 절망 중에도 소망의 말을 하라. 말대로 된다. 하나님이 나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기를 원하는가? 긍정의 말을 심으라. 긍정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                                               2009년 1월 31일  토요일 씀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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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거리의 풍경 스케치

   
  일산의 지하철 대화역 광장 벤치에서(2008년 6월 25일, 저녁 무렵)


 1) 한 남자와 한 여자

 남자는 30대 여자는 40대로 보이는데 여자는 남자 옆에서 두 다리를 꼬고 앉아 부지런히 줄담배를 피우면서 쉴 새 없이 지끌이며 남자를 힐긋거리고 있고 남자는 여자에게는 도대체 관심이 없다는 듯 맞은 편 건물의 미인 클럽 간판에만 초점이 맞춰있다. 두 사람이 분명히 나란히 앉았는데 주고받는 말솜씨가 부부 같아 보이지는 않고 그렇다고 남매는 더욱 아닌 것 같다. 여자의 얼굴은 어디를 뜯어보아도 자연산은 아닌 것 같다. 보톡스의 덕을 톡톡히 본 것 같다. 볼기짝이 탐스런 유방 같다. 흰 블라우스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온통 우유빛으로 현란할 정도이다. “야, 내일 또 만날 수 있니?” 여자가 남자에게 추궁하듯 내뱉는 한 마디가 열 걸음 밖의 벤치에 앉아 있는 나의 뇌리를 어지럽혀 버린다. 둘은 압침에 엉덩이가 찔린 듯 반사적으로 벤치에서 몸을 발딱 일으키더니 여자는 남서울 좌석버스로, 남자는 문산행 좌석버스로 몸을 숨겨 버린다.

 
2) 한 남자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갈머리 없는 대머리 남자가 내 옆 벤치에 앉아서 김밥천국의 은박지에 싸인 원조김밥(어제까지도 한 줄에 1000원 했는데 오늘 50%나 올랐다) 한 줄을 왼손에 움켜쥔 채 한 입에 쑤셔넣고 질근질근 씹고 있다. 오른손에는 250ml 서울우유 팩이 하나 쥐어져 있다. 얼굴과 반소매 아래의 양팔이 온통 구리빛이다. 나의 손목시계는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니 이 남자에게는 저녁 성찬(?)인 모양이다. 맞은편 건물 옥상에 앉아 있던 한 무리의 비둘기들이 광장에 내려앉는다. 개중에는 외다리로 걷는 놈도 있다.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 상이용사가 있단 말인가! 왠지 이 남자에게서 고독이 묻어난다. 


2. 인간 시장 

 
 '인간 시장'하면 작가 김홍신을 잊을 수 없다. 그 이전은 베스트셀러라 하더라도 10만부에 불과했던 우리 출판계에서 80년대 초에 이 작품이 출판되면서 최초의 밀리언셀러로 기록을 갱신하게 되었다. 그만큼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김홍신의 작품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동시대를 단지 인간 시장이라고 규정하고 싶을 뿐이다. 인류발달의 변천사를 세 시기로 나누어보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다시 지식∙정보사회로 발전해 왔다고들 한다. 다시 어떤 사회로 발전해 갈 것인가는 두고 볼 일이다. 문제는 인류사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변천해가든 그 사회가 나에게는 불확실하며 그 사회가 나에게는 너무나 거대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 불안하다. 인류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나 치세보다 난세가 더 많았다. 지금은 분명 난세다. 미국은 1930년대 경제공황 이래 가장 처절한 삶을 맞고 있다. 어제 저녁 CNN방송은 미국이 지금 2차 대전 이후 가장 암울하고 긴 터널에 들어섰다는 절망적인 보드를 쏟아놓고 있었다. 나는 시카고에 계시는 형님에게 장거리 전화로 근황을 물어 보았다. 나의 형님 내외는 조카 셋을 거느리고 29년 전에 이민을 갔기 때문이다. 미국발 서브 프라임 모기지 투자은행들의 금융부실 위기가 급기야 세계 금융위기를 가져오고 그 여파로 세계의 경제가 빙하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은 지금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시장에는 잡다한 것들이 있다. 사람과 상품, 선전과 매매, 여흥과 만남 등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나는 시골 태생의 해방둥이다. 그러기에 면소재지를 돌며 5일마다 서는 장날에 대한 추억은 남다르다. 어쩌다 어머니를 따라 장터에 가게 되면 나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국화빵이 있고 고무신이 있으며 꽈배기 과자도 있고 야바위꾼도 있다. 어른들의 사타구니 사이로 들여다보는 야바위꾼의 화투솜씨에 넋이 나가 있을라치면 아이들은 저리 가라는 어른들의 호통소리에 밀려나 어머니의 손에 끌려 집으로 오면 그날은 정말 온세상이 내 것이 된 기분이다. 우리네 조상들은 장터에서 사돈을 만나고 시집 간 딸애의 소식을 듣는다. 외손자는 잘 자라는지 사위는 내 딸에게 고맙게 하는지 조심스레 물어 보면서 장터국밥으로 사돈끼리 신뢰(信賴)를 보탠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재래시장을 좋아한다. 거기에는 인정이 있고 나눔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시장은 어떤가? 나는 몇 년 전 미국 여행 중에 월마트를 구경한 적이 있다. 정말 그 규모가 대단하였다. 이제는 우리나라의 시장도 거대하다. 차로 쇼핑을 하고 신용카드로 결재한다. 그 어디에도 나의 어린 시절의 시장은 없다. 거기에는 편리함과 화려함, 풍요함이 있을 뿐이다. 현대의 시장은 자본주의의 꽃이다. 자본주의는 시장원리가 지배한다. 그러기에 경쟁이 미덕이요 최고의 선이다. 패배자에게는 자비가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인간 밀림이다. 인간 밀림 속에서 타잔이 되는 것은 최선이다. 그러나 아무나 타잔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연적으로 인간 시장 속에서 수많은 인간은 좌절하고 절망한다.


3. 한국 사회를 조망하며

 
 나에게는 하나의 큰 자부심이 있다. 나는 수업 중에 어쩌다가 제자들을 향하여  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하면 대부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개중에 어떤 당돌한 놈은 선생님이 뭐 대단하다고 그렇게 당당하냐는 듯 못 마땅해 하며 냉소적인 태도를 취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이성을 잃어버리고 나의 말의 당위성을 설명하느라 한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리기 일쑤일 때가 많다. 나는 해방되던 해에 태어나 여섯 살에 6∙25를 맞았다. 전쟁이 낫지만 우리 마을은 전쟁의 피해를 직접 입지는 않았다. 그래서 피난이래야 몇 번 집을 비우고 마을 아래 강변에서 노숙을 한 것이 고작이다. 그때 기억으로는 어머니가 보리를 볶아서 만든 미숫가루를 먹어 본 것이 전부다. 그렇지만 마을은 좌익 사상으로 무장한 빨지산 무리들로 인하여 밤이면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리 마을은 아랫마을과 합하여 상당히 큰 부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꼭 몇 집은 불이 나고 밤중에 마을 앞 당나무 아래에서는 만세소리가 나며 어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옆집으로 피신하곤 하였다. 아침이면 어느 집 어르신이 불길에 던져져서 새까만 숯덩이가 되었다는 불길한 소식이 전해지곤 하던 일도 있었다.

 
 나의 집은 빈농이었다. 나의 선친은 일제 강점기에 만주를 두 번이나 갔다 오신 분이다. 무슨 역마살이 끼어서 간 것이 아니라 가난이 죄였다고 할 수 있다. 나라가 해방되고 전쟁이 끝나고도 우리 집에는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우리 집은 마산으로 이주를 하였다. 마산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몇 안 되는 도시였기에 피난민과 고아들로 넘쳐났다. 고아의 도시, 마산. 나의 소년 시절의 절반은 이렇게 여기 마산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아홉 살에야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인생의 스타트 라인에서 2년을 늦게 출발한 셈이다. 전후(戰後)의 학교라 그런지 한 학급의 인원은 70명도 넘는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였다. 더더욱 학급생의 절반은 고아 같았다. 내가 열다섯 살 되던 해(1960년) 중학교 1학년 때 3∙15 의거가 터졌다. 부산에서 고등학생 형님들이 마산까지 데모 원정을 왔다. 우리는 뭣도(아무것) 모르고 형님들을 따라다니며 구호를 외쳐댔다. 학교는 한 달 동안 휴교를 했고 4월 중순에야 개교를 했다. 나는 나의 파란 만장한 젊은 시절을 구태여 들추어내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서 묵묵히 행동하며 치켜보아 왔다고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한국은 60년대를 거쳐 이후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지나 밀레니엄 시대를 통과하고 2010년대를 바라보며 힘차게 달려왔다. 사회는 발전해 가야하고 우리나라도 끊임없이 발전해 가야한다. 이것이 대명제다. 나는 보릿고개를 체험한 세대다. 정말 가난을 저주할 만큼 가난을 싫어하는 사람 중의 하나다. 현대인들은 웰빙 음식이라 하여 보리밥을 먹겠다고 보리밥집을 찾아다닌다지만 나는 지금도 보리밥을 먹지 않는다. 눈물에 젖은 빵조각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한 서양 속담이 아니라도 가난은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이요 슬픔이라고 나는 감히 단정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가난과 싸워오면서 내 인생의 절반을 소비해 버렸다. 그렇다고 나는 헛되게 세월만 축낸 것은 결코 아니다. 가난에 내 인생을 저당잡혀 아무것도 못하고 허둥대다 인생의 패배자가 되지는 않았다. 누구보다 당당하게 이 땅에 두 발을 엉버티고 살아오면서 비굴하지 않게 교만하지 않게 언제나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왔다.

 
 지금의 한국을 이루기까지 우리의 선배들은 많은 대가를 치러왔다. 머나먼 정글에서 고귀한 생명을 바쳤고 열사의 사막에서 땀 흘려 고국으로 송금하였으며 이국땅 지하 갱도에서 막장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도 잘 살아보세 라고 외치면서 “빨리빨리‘의 닉 내임을 만든 나라. 콧대 높은 양키의 눈에서조차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한국인이 몰려온다‘ 라는 표지 기사의 주인공이 되었던 나라. 땀과 눈물의 열매는 고귀하여 이제는 우리도 가난을 퇴치하고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으로 당당하게 진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아직도 진정한 행복이 없는가? 많은 젊은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 이혼율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가? 이게 모두 과부하(過負荷)가 실렸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과부하가 실리면 지치게 마련이다. 이제 조용히 되돌아볼 때이다. 나의 좌표를 확인해야 할 때이다. 내가 어디쯤 와 있으며 나는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진정한 행복은 개인도 행복하고 사회도 행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난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거저 행복해지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 동안 한국 사회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여기까지 달려왔다. 우리는 한 번쯤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공과 과를 싸잡아 부정적으로 매도하는 단순세포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 부정은 부정을 낳고 비난은 비난을 낳는다. 인정하고 칭찬할 것은 인정하고 칭찬해야 한다. 칭찬을 아끼지 말라는 것은 행동 발달 심리학의 기본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불의와 타협하라는 말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불의와 타협하여서도 안 되지만 형제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할 것이다. 우리의 주위에는 남의 잘못을 도무지 용서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자나 결벽증 환자가 의외로 많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 독불장군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 우리 한국 사회는 칭찬에 인색하다. 이제는 자신에 너그러워져서 자신을 향하여 스스로 칭찬하고 다음으로 이웃을 칭찬하자. 잘 한 것만 가지고 칭찬하지 말고 잘 할 가능성을 보고 미리 칭찬하자. 한국 사회는 앞으로도 수많은 과제를 안고 고민하면서 가야 할 것이다. 이때 그 사회 구성원 중의 한 사람인 나 자신이 방관자가 되어 있거나 대안 없는 비판자가 되어 있지 않나 항상 살펴볼 필요가 있다.


4.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한 말씀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라는 말씀이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다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인이시요 그분이 통치하시는 곳이다. 그러기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지상에 존재하는 어느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였듯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느 공간(히11:16)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활하여 가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세상이다.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이 세상에 하나님 자신을 필요로 하셨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기자는 이 사실을 명쾌하게 말하였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기에 죽으심이라(빌2:6-8)”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은 죄의 대가로 낙원을 잃어 버렸다. 낙원을 잃어버린 인간에게는 행복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의 회복이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술과 마약으로 일시적 행복을 찾으려하나 그것은 사이비 행복이요 위장된 행복일 뿐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선악과를 잘못 인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왜 만들어 놓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 유혹을 받게 했느냐…등등. 선악과에 대한 오해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선악과는 분명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정립이다. 선악과는 하나님 당신은 창조주(創造主)이시요 인간은 당신의 피조물(被造物)임을 분명히 규정하여 당신의 주재권(主宰權)을 선포한 사건이다. 

 
 행복 상실의 궁극적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인간의 교만과 탐욕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과연 있는가? 혹자(或者)는 무소유(無所有)를 주장하지만 무소유가 능사(能事)일까? 무소유를 주장한다고 무소유가 되는가? 무소유가 되었다고 교만이 사라진 진공상태가 되는가? 결코 아니다. 오직 전능자 하나님,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그분에게 돌아가는 길뿐이다. 그리하여 내 영혼이 쉼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부활 후에 갈릴리 바닷가로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면서 다정하게 다가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만이 나에게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찾아올 뿐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두 가지 지상명령(至上命令)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다. 그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하라 하는 것이요 둘째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감사와 예배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먼저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아가고 밖으로 이웃을 향하여 사랑과 복음을 나누어 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여 나아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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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묵상 2009. 1. 3. 16:56 |
 

  봄은 더디 오더니 가을은 신속히 오고 있다. 신혼시절 한 지붕 세 가족의 슬레이트집 아래에서 아내와 등을 서로 붙이며 잔인한 겨울밤을 견뎌야 했던 나는 생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두메산골 소녀처럼 봄을 기다려 오곤 했다. 나에게 봄을 기다리던 추억이 유별나다면 가을은 또 어떨까?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은 나의 곁에 성큼 다가와 눈부시리 만큼 현란한 자태로 다가온다. 학교 뒤 사색의 뜰에는 울긋불긋 오색의 색동저고리로 차려입은 나무들이 마치 품평회를 벌이듯 자신들을 뽐내고 있다. 이쯤 되면 뒤뜰로 나가보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하던 일을 잠시 접고 나는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뒤뜰로 나가게 된다. 하늘은 심해처럼 짙푸르고 맑다. 뜰은 바야흐로 단풍의 축제가 막 시작되고 있다. 주인을 기다리는 벤치 옆의 느티목은 차츰 원색의 옷으로 곱게 갈아입기 시작한다. 올해는 유난히도 단풍의 색깔이 곱다. 해마다 여름이면 찾아오는 짓궂은 태풍도 올해는 이웃나라 일본이나 대만으로 비켜가고 일조일이 유난히도 길었던 탓인지 여느 해보다 곱게 물들었다. 단풍은 가지 끝에서부터 서서히 안쪽으로 물들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직 다 붉어지지 않은 탓인지 나무 전체가 꼭 대웅전의 단청 같다. 대자연의 위대함에 릴케의 시가 아니라도 나 자신 숙연해지지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얼마나 내적으로 성숙해져 있는 걸까?

 
 한국의 가을만큼 화려하고 요란한 경우가 있을까? 지난해 가을은 나에게는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 학교에 부임한 지 서른 해만에 3학년 담임 십여 명과 가을 나들이를 할 수 있는 특혜를 누렸기 때문이다. 11월 6일, 수능시험을 치른 이튿날 우리 일행은 지리산으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우리는 노고단 산장에 다다랐다. 단풍은 거의 끝무렵이라 별로였지만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더 넓은 평원에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은 억새였다. 주위가 온통 억새의 바다였다. 가을의 정취는 차라리 군무를 이루는 억새밭을 거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억새꽃이 하늘거리는 계곡에 서면 나도 솜털을 달고 어디론가 하늘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다음날의 내장산과 백양산 단풍은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라더니 이에서 더할 수 없으리 만큼 화려함의 극치였다.

 
  이제 가을은 더 깊어갈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외투깃은 한층 올라갈 것이고 가로수길 위로는 낙엽이 뒹굴 것이다  몇 달 후면 우리네 제자들도 교정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한 학교에서 나의 사명을 시작하여 한 학교에서 그 사명을 마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교사로서의 첫발을 들여놓고 지금까지 나의 소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곧 나의 의식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요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대지를 정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니 기쁘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이뇨?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그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뇨.” 이 말씀은 구약 성경 미가서에 있는 말씀이다. 나는 오늘도 조용히 반문해 본다.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는 세상은 어디일까? 이 지상에서 그곳이 과연 있기나 할 것인가?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 나의 중심에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그곳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얼마나 교만해져야 만족할 것인가? 교만과 패역이 가득한 세상에 비움과 낮아짐으로 섬기다가 갈 뿐이다. 나의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에 약속으로 보장된 천국에 나는 갈 뿐이다.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이 기쁜 복음의 소식을 주고 싶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보장은 없다.

 
 자연에는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 그 겨울이 가면 또 봄은 찾아오겠지만 인간 세상에 태어난 나에게는 자연의 순환 같은 것은 없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이후에는 심판이 있을 뿐이다. 깊어가는 이 가을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심판을 면하고 영생을 선물로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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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 대로 거두리라

묵상 2008. 12. 14. 23:41 |
 

1.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

 
 아내를 만난 지 40년, 토요일 오후 3시경 아내가 갑자기 바닷가로 나가자고 불쑥 제안을 한다. 아내와 근간 다소 간의 갈등이 있어 미안하기고 했었는데 오랜만에 아내와 오붓한 나들이가 될 것 같아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아내가 모는 우리의 애마에 지친 몸을 실은 채 해운대 달맞이 고개를 돌아 오르기 시작했다. 가을은 바야흐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도로 양쪽으로 열병하듯 늘어선 벚나무는 모두붉은 단풍으로 아름답게 갈아입어 4월의 무리지어 흐드러지게 피던 꽃망울보다 승(勝)하다. 나는 잠시 고갯마루 위의 전망대인 팔각정 옆에 차를 세우게 하고 혼자만이 내려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맞은편 3시 방향의 시야에 들어오는 오륙도를 건너다보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바위섬들이 다섯인지 여섯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나는 자리를 옮겨 각도를 달리해서 다시 섬들을 헤아려 보았지만 여전히 확실치가 않다. 정말 기막힌 이름이다. 오륙도! 얼마나 멋진 작명인가. 6시 방향 쪽으로는 나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함께 나오곤 했던 해운대비치가 고즈넉하게 드러누워 있다. 참으로 아름답다. 동백섬 끝자락에는 누리마루가 얼씨년스럽게 송이버섯 모양을 하고 들어앉아 있다. 옛날에는 그 자리에 인어상이 있었고 바닷가를 찾아온 연인들이 널퍼짐한 바위 위에 서로의 다리를 꼬고 앉아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깔갈대기도 하면서 비바리들이 바다 밑을 자맥질해 낚아 올린 해삼이나 전복들을 시식해 보던 낭만어린 추억의 장소였었지만 이제는 AFEC 정상들이 다녀간 글로벌 명소로 탈바꿈해 버렸다. 아내는 여전히 차에서 내리지 않는다. 마음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참으로 나에게는 소중하고 좋은 아내, 저렇게 착하고 지혜로운 아내를 나는 많이도 괴롭혔지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나로 인해 아내의 마음은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을까…
“여보, 미안해.” 

 
 차는 다시 굽이진 고갯길을 돌아 송정 바닷가 끝자락에 멈춰 섰다. 가을을 재촉하듯 바닷바람이 차갑다. 전봇대 위의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있는 네댓 마리의 갈매기 떼가 배설물을 쏟아놓는다. 그 아래로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의 버넷트 위로 배설믈이 떨어진다. 파도가 쉼 없이 몰려온다. 저 파도들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파도는 절대로 중간에 소멸되는 일은 없단다. 한번 만들어진 파도는 그것이 심해(深海)의 것이든, 근해近海)의 것이든 관계없이 한 방향으로 끝까지 밀려온다는 것이다. 나는 파도를 바라보며 순간 소름이 끼치는 오싹함을 느꼈다. 파도가 나를 일깨운다. 그렇다. 만사(萬事) 심은 대로 거두는 법.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그 씨앗은 언젠가 반드시 싹이 난다. 싹은 푸른 잎을 내고 자란다. 가지가 번지고 무성하여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이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간사의 이치를 모르는 자는 얼마나 많은지…나는 나의 주변에서 인생의 태반을 송두리째 놓쳐버리고 후회하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사람들이 죽기 전에는 ‘-걸,’‘-걸’하며 죽는단다. 진실하게 살 걸, 베풀며 살 걸 등등.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인생은 한번밖에 없다. 시행착오((施行錯誤)를 되풀이하기엔 시간이 너무나 짧다.

 
 세상사 일반인들이야 그렇다 치고 소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하는 사람들 중에도 정말 한심한 자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삶의 모델로 삼아왔다. 나의 아버지는 참으로 정직하셨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의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감히 말할 수 없다. 다만 당신을 흠모하면서 당신의 모습을 닮아가려 할 뿐이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삶의 좌우명은 성경의 이 한 구절이다. 나는 이 구절에 목숨을 걸면서 매사에 최선을 다해왔다. 얼마 전에 어느 모임에서 나를 곁에서 오랜 동안 보아왔던 한 지인(知人)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로님은 내가 만난 무수한 사람들 중에 정말 정통적으로 산 사람 같습니다.”라고 말이다. 나는 그 순간 빙긋이 웃으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나의 나 된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를 언제나 지켜 주시고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어찌 지금의 내가 있었겠는가. 언제나 자랑스러운 눈으로 나를 믿어 주신 아버지, 자식을 위하여 기도로 한 평생을 살아오신 나의 어머니, 그리고 기도와 이해로 나를 감싸 준 나의 아내, 아빠를 존경하며 따라 준 나의 자랑스런 딸 선미, 경미, 아들 희원이.“나의 아들과 딸들아, 고맙다. 그리고 여보, 당신에게는 따따블로 고마워.”

 
 크리스챤들이여, 하나님께 무엇이든 구하면 다 들어준다고 생각하지 말라. 성경 야고보서 1장 13∼17절의 말씀을 읽어 보고 깊이 묵상해 보라. 거기에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사람이 시혐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迷惑)됨이니” 라고 하셨다. 정말 우리가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다. 성경에는 또 이런 구절이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하였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점검해 볼 일은 나의 의(義) 곧 욕심(慾心)을 위해서 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義)를 위해서 구하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동기를 보신다. 동기가 불순하면 결코 들어 주시지 않는다. 성경에 너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情慾)으로 구함이니라 한 말을 잊었는가? 일 터지고 울고불고하지 말고 대형사고 터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 그러기에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셨다.


2. 하나님의 마음을 알자

 
  나는 나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의 자녀들과 지상(紙上)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規例)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3)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이 말씀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서 그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낸다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된다. 아무리 얽히고설킨 인생의 난제(難題)도 한방에 해결된다.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구약 시대에 호세아 선지자가 살았다는 기록을 우리는 호세아서를 통하여 알게 된다. 그는 이사야와 동시대의 인물로서 남유다 왕 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와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세가 통치하던 기간에 예언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영적∙사회적으로 가장 타락하였다. 즉, 그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망각한 채 율법을 무시하고 음란하게 우상을 섬겼으며 이웃에게 불의를 자행하는 타락과 부패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에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알려하는 자를 두루 찾고 있었다는 것을 호세아서 2장 2절에서 알게 된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에게 말씀하시니라 하는 말씀 중의 ‘비로소’에서 그 패역(悖逆)한 시대에 당신의 마음을 아는 자가 호세아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기막힌 명령을 내리신다.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명령이다. 단 한번밖에 없는 인생에서 누가 이 명령을 따를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음란한 여인과 같이 타락하여 참신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는 당신의 자녀 이스라엘 민족을 그래도 결코 버릴 수 없는 당신 자신의 마음을 호세아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호세아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하나님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여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녀를 낳았고 6장 1∼3절에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호소할 수 있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3.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라

 
 선(善)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였다. 부지런히 좋은 것을 심어야 한다. 특히 젊을 때에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것을 심어야 한다. 심지 않고 거두는 것은 잡초뿐이다. 

 
 그러면 선(善)은 고사하고 이미 많은 악(惡)의 씨를 뿌린 자는 어떻게 하여야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한 인물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바로 다윗 왕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나의 마음에 합한 자라 하셨다.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는 간음죄를 짓고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서 죽게 하는 살인죄의 씨를 심을 때는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말 죄의 열매는 너무나 쓰리고 괴로웠다. 시편32편 3∼4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처절하게 절규(絶叫)한다. 내가 토설(吐說)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상하고 진액(津液)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다고 부르짖는다. 백주(白晝)에 아들이 어머니를 범하는 근친상간의 치욕(恥辱)이 자행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배반하는 사건과 형제간의 살육 사건이 모두 다윗을 중심축으로 전개되는 하나님의 징계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다윗의 절규는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가장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다윗의 범죄를 통하여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우리를 교훈하시면서 또한 다윗같이 하나님의 긍휼함을 구할 것을 명령하신다. 다윗은 하나님께 철저히 죄를 회개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했다. 그리하여 용서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게 다윗의 기도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다윗같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내 모습 이대로 오면 된다. 하나님은 돌아오는 자기 자녀를 결코 내치지 않으신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좋으신 나의 하나님, 내가 당신께 돌아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받아 주소서. 할렐루야, 아멘.”  (200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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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묵상 2008. 12. 14. 23:29 |
 

    지난 토요일 오후 5시쯤이다. 이날따라 유달리 몸이 노근하여 침대로 가 두어 시간을 자고 일어나는데 아내가 나의 손을 끌면서 거실로 데려간다. 거실 TV의 CTS화면에는 마침 미국의 레이크 우드 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와 그의 원형 교회가 클로즙되고 있었다. 미국에서 매머드 교회로 5만 3천명이 출석한다는 미국 최대의 교회다. 우선 그 규모에 주눅이 들었다. 나는 소파에 엉덩이를 엉거추춤 붙이며 예배장면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조엘 목사의 베스트셀러 <긍정의 힘>을 내가 소속된 선교회에서 북•스터디한 터라 별로 낯설지 않았다. 그의 설교는 미국의 여타 목사의 설교처럼 그리 격정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나 자신이 그 영상 설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인의 설교로는 상당히 길었다. 약 30분 이상 계속되는 것 같았다. 조엘 목사는 차분하면서도 진실하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쉼 없이 쏟아내는 화제는 가히 천부적 재질을 타고난 듯하였다. 일관성 있는 메시지와 그에 적합한 예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설교는 계속되어 갔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강한 성령의 역사였다. 그 거대한 원형 교회당 안의 좌석에 빽빽이 들어앉은 교인들은 한결같이 밝은 미소와 신뢰를 설교자에게로 보내고 있었다. 설교자와 성도들 간의 영적 교감을 나는 온 몸에 전율이 오도록 느낄 수 있었다. 흑과 백이 조화를 이루며 다정히 앉아 예배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설교의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이 설교 속의 진리를 깨닫는데 한 평생이 걸렸다. 그런데 조엘 목사는 40대 중반이니 나보다 20년 젊어 깨우쳤다 생각하니 정말 그가 부러웠다. 하나님의 뜻을 일찍 깨닫는 그만큼 하나님께 더 쓰임을 받는다.

 
 행복은 어느 누구가 그저 가져다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에게 행복하게 살 권리와 조건을 완벽하게 주셨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훨씬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은 환경적 동물이다. 환경을 떠나서 살 수는 없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대개 나보다 버거운 대상이다. 내가 극복하기에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나는 나의 불행의 원인을 언제나 환경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환경이 바뀌기를 바란다. 회사에서는 상사나 동료가, 교회에서는 형제자매가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상대가 바뀌기를 끊임없이 요구하며 기대한다. 내가 바라는 수준까지 변해 주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상대나 환경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이제 우리에게는 발상의 대 전환이 필요하다.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감사와 기쁨으로 나를 무장해야 한다. 아내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고난과 역경의 환경을 통하여 나를 단련하고자 하시는 전능자의 섭리에 감사해야 한다. 불평과 불만으로 세월을 죽이는 자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 낙조의 순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또한 얼마나 짧은지……

 
 우리에게는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영원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그리고 사랑과 배려로 상대방의 약점이나 추한 모습도 그대로 받아들이라. 사랑과 배려보다 더 나은 묘약(妙藥)은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어 버리니까. 다음으로 날마다 오늘을 기뻐하며 감사하라. 새 아침의 밝아오는 개벽(開闢)에 감격하고 들녘을 감싸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기뻐하라. 황금물결로 일렁이는 들판의 벼이삭을 보라. 하나님이 창조한 대자연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장 큰 불행은 불평과 원망의 덫에 걸려 이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때가 되면 환경과 상대방을 바꾸어 주신다.  

 
 하나님의 기적은 누구에게 일어나는가?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로 기다리며 감사하는 자에게 당신은 합력선(合力善)으로 은혜(恩惠)를 베푸시며 나를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여 주신다(시107:30). 우리는 공의와 진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환경을 바꾸고 상대방을 주님의 나라에 초대하여야 한다. 그러나 내 마음의 관리가 최우선(最優先)이다. 겸손과 온유로 쉼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마11:29) 나 자신이 먼저 변할 때만이 나와 너와 행복한 삶은 보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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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베이징 올림픽이 소문만큼이나 요란하게 개막되더니 폐막식도 유난히 요란하게 막을 내렸다. 4년마다 돌아오는 올림픽이지만 이번 올림픽은 한국인들에게는 남달리 기억되는 그런 것이었다. 왜냐하면 역대 올림픽 중 가장 많은 금메달(13개)로 세계 7위에 우뚝 섰으며 스포츠 강국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올림픽과 월드컵을 유치하는 경험도 가졌고 경제적으로는 GDP 대비 세계 11위까지 진입한 적도 있지만 서구 열강이나 북미지역 몇몇 나라들은 아직도 우리를 선진국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 우리로 하여금 묵은 체증을 시원히 뚫어주는, 아니 우리로 하여금 확실한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해 주는 일이 바로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대박으로 터져 나왔다. 그게 바로 야구경기다. 야구하면 미국이요 야구는 선진국의 상징이다. 다시 말해 세계 최강 미국의 상징이 야구이기에 우리가 미국을 이긴 것이 더욱 값지다. 그러기에 일본은 야구에 목숨을 거는 나라다. 2차 대전에 패전국인 일본은 미국에 대하여는 강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은 대개 영어에 약하다. 일본을 여행하는 관광객에게 가이드가 귀띔해주는 말을 새겨들으면 크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일본에서는 영어를 쓰라. 그러면 존경을 받는다.’는 말이다. 일본인은 한국에 대하여 그릇된 편견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36년 간 저네들이 우리를 지배했다는 우월의식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일본에서 일어를 쓰면 더욱 멸시를 받는다. 나는 몇 년 전에 일본의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이것을 실감 있게 체험했다. 나의 유창한(?) 영어실력이 돋보였다. 나의 거침없는 영어실력에 일본인이 주눅들어하는 모습을 내 옆의 아내가 확인하며 나를 존경스런 모습으로 쳐다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때보다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이번 올림픽에서 아주 극적인 경기가 있었다면 단연 일본과의 준결승과 쿠바와의 결승전인 야구경기였다. 우리는 9전 전승으로 결승전에 올라왔다. 제1회 WBC(world baseball classic)경기에서 우리는 일본에게 쓴 패배를 맛보았다. 이때 일본의 야구영웅 이치로는 앞으로 30년 동안 한국이 일본을 넘볼 수 없게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런데 1년 후 우리는 올림픽의 예선과 준결승에서 일본을 호쾌히 이겨 버렸다. 그것도 모두 역전 드라마로 말이다, 결승에서의 우리의 상대는 역대 올림픽 최강팀 쿠바였다. 정작 극적 드라마는 9회 말에서 일어났다. 간략히 경기개요를 말하면 이렇다. 한국과 쿠바가 3:2의 스코어로 쿠바의 마지막 공격을 맞은 1死 후 만루의 9회 말 상황이었다. 우리에게는 작전의 여지가 없었다. 유일한 작전이 있다면 유격수나 2루수 쪽으로 굴러가는 병살타를 유도하여 3:2의 스코어를 지키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상대에게서 이것을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바보가 아닌 바에야 이 상황에서 상대방 감독이 병살 타자를 내놓겠는가. 상대방의 작전은 무궁무진이다. 홈런은 아니라도 큰 것 한방이면 상대방에게 역전의 승리로 돌아간다. 외야 플라이나 스퀴즈 번트 하나면 최소한 동점이다. 그러면 연장전이다. 그런데 기막힌 사건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상대타자가 병살타를 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상대타자가 병살타를 친 것은 확률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기적이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일들 두고 복이나 운으로 돌린다. 세상에서는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때 흔히 운이나 우연으로 돌려버린다. 그러나 세상에 우연은 없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다. 우리민족이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받은 것이다. 이 은혜가 누구에게 찾아오는가?


 구약 성경 에스라書(1:1∼4)에서 나는 이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패망과 회복을 통하여 세계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모든 주재권(主宰權)은 하나님 당신에게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일찍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당신 앞에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의 적국에 패망할 것과 포로생활 할 것을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줄기차게 경고하여 왔다. 그러나 목이 곧은 이스라엘 민족은 이를 거부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추종하고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를 핍박하여 그를 땅 속에 묻기까지 하였다. 하나님께 배역한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망하고 말았다.(렘52:12∼16)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길고 긴 포로생활의 질고(疾苦) 속에서 소망 없는 나날을 살아가고 있었다. 적대국 바벨론에서의 70 년의 노예생활은 계속되어 갔지만 그 어디에도 해방의 소식은 없었다. 치욕(恥辱)과 모멸(侮蔑)의 나날은 더욱 목을 옥조여오고 한탄과 절망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생활은 여전히 계속되어갔다.      


 그러나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어 당신의 주관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굴러가서 예정된 시간에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하나님은 준비하고 계시었다. 마침내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패망하게 된 것이다. 제국 페르시아를 세운 고레스왕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민족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불을 숭상하는 조로아스트교의 신봉자다. 그가 하나님을 알 리가 없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선포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로만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가 될 것이며 포로생활 70년 만에 해방되어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을(렘29:10)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고레스를 감동시킨 것이다.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말씀을 좇아간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보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을 기억하신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어디를 가든지 가장 먼저 그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흔히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기도 하고 복음의 통로라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 잠시 찾아보자. 창세기 12장 4절에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라는 기록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좇아간 사람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너의 친척 아비의 집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명(命)하셨을 때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말씀을 좇아갔다고 히브리書 기자는 그를 평하였다. 그는 또한 예배를 최우선 순위에 둔 사람이다. 창세기 12장 7∼8절에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라는 기록이 있다.


 나도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라. 은혜란 곧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입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은혜를 주시는가? 겸손과 온유함으로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간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나는 나의 자녀들이 복음의 통로가 되기를 항상 기도하고 있다. 그러기에 말씀을 좇아가고 예배에 목숨 걸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예배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훈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민족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당신의 은혜를 받기를 소원한다. 그리하여 열방을 향하여 전능자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나누고 베푸는 풍요한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기적을 맛보면서 감사와 환희의 삶을 살기를.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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