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묵상 2009. 1. 3. 16:56 |
 

  봄은 더디 오더니 가을은 신속히 오고 있다. 신혼시절 한 지붕 세 가족의 슬레이트집 아래에서 아내와 등을 서로 붙이며 잔인한 겨울밤을 견뎌야 했던 나는 생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두메산골 소녀처럼 봄을 기다려 오곤 했다. 나에게 봄을 기다리던 추억이 유별나다면 가을은 또 어떨까?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은 나의 곁에 성큼 다가와 눈부시리 만큼 현란한 자태로 다가온다. 학교 뒤 사색의 뜰에는 울긋불긋 오색의 색동저고리로 차려입은 나무들이 마치 품평회를 벌이듯 자신들을 뽐내고 있다. 이쯤 되면 뒤뜰로 나가보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하던 일을 잠시 접고 나는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뒤뜰로 나가게 된다. 하늘은 심해처럼 짙푸르고 맑다. 뜰은 바야흐로 단풍의 축제가 막 시작되고 있다. 주인을 기다리는 벤치 옆의 느티목은 차츰 원색의 옷으로 곱게 갈아입기 시작한다. 올해는 유난히도 단풍의 색깔이 곱다. 해마다 여름이면 찾아오는 짓궂은 태풍도 올해는 이웃나라 일본이나 대만으로 비켜가고 일조일이 유난히도 길었던 탓인지 여느 해보다 곱게 물들었다. 단풍은 가지 끝에서부터 서서히 안쪽으로 물들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직 다 붉어지지 않은 탓인지 나무 전체가 꼭 대웅전의 단청 같다. 대자연의 위대함에 릴케의 시가 아니라도 나 자신 숙연해지지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얼마나 내적으로 성숙해져 있는 걸까?

 
 한국의 가을만큼 화려하고 요란한 경우가 있을까? 지난해 가을은 나에게는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 학교에 부임한 지 서른 해만에 3학년 담임 십여 명과 가을 나들이를 할 수 있는 특혜를 누렸기 때문이다. 11월 6일, 수능시험을 치른 이튿날 우리 일행은 지리산으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우리는 노고단 산장에 다다랐다. 단풍은 거의 끝무렵이라 별로였지만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더 넓은 평원에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은 억새였다. 주위가 온통 억새의 바다였다. 가을의 정취는 차라리 군무를 이루는 억새밭을 거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억새꽃이 하늘거리는 계곡에 서면 나도 솜털을 달고 어디론가 하늘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다음날의 내장산과 백양산 단풍은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라더니 이에서 더할 수 없으리 만큼 화려함의 극치였다.

 
  이제 가을은 더 깊어갈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외투깃은 한층 올라갈 것이고 가로수길 위로는 낙엽이 뒹굴 것이다  몇 달 후면 우리네 제자들도 교정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한 학교에서 나의 사명을 시작하여 한 학교에서 그 사명을 마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교사로서의 첫발을 들여놓고 지금까지 나의 소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곧 나의 의식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요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대지를 정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니 기쁘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이뇨?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그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뇨.” 이 말씀은 구약 성경 미가서에 있는 말씀이다. 나는 오늘도 조용히 반문해 본다.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는 세상은 어디일까? 이 지상에서 그곳이 과연 있기나 할 것인가?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 나의 중심에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그곳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얼마나 교만해져야 만족할 것인가? 교만과 패역이 가득한 세상에 비움과 낮아짐으로 섬기다가 갈 뿐이다. 나의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에 약속으로 보장된 천국에 나는 갈 뿐이다.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이 기쁜 복음의 소식을 주고 싶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보장은 없다.

 
 자연에는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 그 겨울이 가면 또 봄은 찾아오겠지만 인간 세상에 태어난 나에게는 자연의 순환 같은 것은 없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이후에는 심판이 있을 뿐이다. 깊어가는 이 가을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심판을 면하고 영생을 선물로 받자.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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