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칙하고 무거웠던 온갖 잡내의 무게를 홀가분히 털어내고 기어이 가을은 성큼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한낮의 가을 공원풍경은 참으로 눈부시다. 우거진 숲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가을 햇살은 마법사의 지팡이로 한바탕 자연의 진수성찬을 차려 놓는다. 빛의 깊이와 각도에 따라 나뭇잎의 색상은 모두 조금씩 달라진다. 모양이 다르고 색상이 다르니 잎만으로도 훌륭한 앙상블을 이룬다. 가을바람이라도 한번 불라 치면 숲속은 여지없는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 베토벤의 <전원>을 여기에 견주랴?

 

 중국 발 미세먼지와 사드의 보복으로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지루하고 답답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름의 무더위와 칙칙함을 견딤이 없다면 가을의 풍성함도 없을 것이다. 한 개인의 삶도 그러하고 한 나라의 장래도 그러하다. 짓누르는 무거움 속에서 내일을 생각해야 하고 내일의 소망 속에서 알참을 준비해야 한다. 준비가 없고 치열한 노력과 기다림이 없으면 어찌 탐스러운 열매가 있으랴?

 

 가을은 생각의 계절인가? 요즘 부쩍 생각이 많아진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걸작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보면 생각이 없는 인간은 투명인간이 아닌가?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고 생각을 발전시켜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이 자기를 갉아먹는 해악(害惡)으로 변질되어 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요사이 생각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생각이 걱정이나 근심으로 나를 몰아넣지는 못한다. 문제없는 인생은 없다. 나는 삶의 거의 태반을 문제를 보고 그 문제에 매몰되어 살아왔지만 이제는 문제를 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보지 않으려 한다. 문제 너머에 계시는 문제를 주시는 그분의 의도를 보려한다. 내 힘으로 문제를 풀지 못하면 전능자 하나님에게 그 문제를 맡겨 버린다. 그러기에 생각하며 살아가는 특권을 누리면서 그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맛보며 산다.

 

 이 가을에 소중한 나의 깨달음 하나, 함께 나누고 싶다. 얼마 전에 나의 소중한 벗을 한번 만났다. 못 만난 지 오륙년 되었으니 참 반가웠다. 그러나 함께 오래 머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인생이 그런 게 아닐까? 그리워하면서도 아니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니 인생은 언제나 미완성이다. 벗이 나에게 이렇게 말해요, “요사이 당신도 잘 아는 그 사람 있잖아, 거의 매일 나를 불러내어서 귀찮아 죽겠어, 만나면 자기 자랑인데, 집이 칠십 몇 평이라느니, 자기 아들은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의 치과를 나와서 수하에 네 명의 부원장을 거느리고 있다느니… 하면서 자랑하는데 듣기 싫어 죽을 지경이야, 그런데 그 친구, 벗들을 위해 밥 한 끼는 절대 내지 않아” 이 말을 다 듣고 난 나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벗님, 버리십시오” 버림이 정답이다.

 

 시간이 지나도 결코 쇠퇴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 그게 바로 자랑이다. 시간이 지나면 쇠퇴하거나 어쩔 수 없이 놓아 버려야 할 것들이 많다. 건강도 그러하고 돈도 명예도 지위도 다 놓아야 한다. 그러나 자랑만은 절대 놓지 않는다. 자랑에는 끝이 없다, 외모, 힘, 건강, 자식, 배우자, 돈, 명예, 지식, 지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자랑할 것이 없으면 ‘내 이웃에 그 부자, 그 사람 살았잖아’ 이 식이다. 그래서 호가호위(狐假虎威)란 말이 생기지 않았을까?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 한다. 나의 중학교 2학년 때 에피소드이다. 옆의 친구가 쉬는 시간만 되면 무엇을 꾹꾹 씹는다. 육이오 한국 전란이 끝나고 오륙년쯤 지났으니 껌도 귀한 시절이었으니까 껌을 씹는 줄로만 알고 ‘야, 같이 씹자’ 했다. 그 시절엔 친구가 씹던 껌도 받아 씹었으니까. 그런데 이 친구,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더니 조그맣고 바짝 마른 무엇을 주는 것이다. 뭔고 보니, 하얗게 생긴 도라지 같은 뿌리였다, 먹어 보니 약간 쓴 맛이 나면서 아주 딱딱했다. ‘이거 뭔데?’ 물은즉, ‘인삼이다, 이 바보야’ 나는 졸지에 바보가 되어 버렸다. 이 친구는 자기 엄마가 시내의 약방주인이었기에 늘 인삼을 가지고 와서 먹었으니 키도 크고 얼굴도 달덩이같이 함지박얼굴이었다. 이때 나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옆의 한 친구가 끼어드는 장면 한번 보소, “ 우리 엄마는 다섯 명이다, 나의 엄마는 그 중에 넷째다, 한 번씩 우리 큰엄마한테 가면 바나나 실컷 먹는다, 우리 큰엄마, 나에게 엄청 잘 해 준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큰엄마 자랑한 그 친구네집, 엄청 복잡합디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랑하는 혀를 끊어 버리신다 하였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극단적인 말씀을 하셨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도 그저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 이제 와서야 깨닫게 하시다니, 신문기사의 한 토막이지만 어느 영국 의학전문 잡지에 실린 연구결과를 보니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말 속담이 사실이었다. 임상통계에 의하면 사촌이 논 샀다는 말을 듣고 실제 배가 아픈 자들이 대부분이었단다. 아담 이후, 타락한 사람이란 존재는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보아 준다. 그래서 남이 자랑하는 것을 들으면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시기심과 질투가 솟아나고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나며 심하면 상대방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랑은 듣는 자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 이를 잘 아시고 자랑하는 혀를 끊어 버리시겠다고 하셨다. 정말 자랑하고 싶으면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라, 바울처럼.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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