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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5.10.06 열정
  3. 2014.05.13 정의와 탐욕2
  4. 2011.02.05 복음의 능력 1
  5. 2009.05.01 도전은 아름답다
  6. 2009.02.03 섭리
  7. 2009.01.31 또 하나의 사실을 확인하며
  8. 2009.01.17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9. 2009.01.17 만남과 변화
  10. 2009.01.13 예수, 그는 누구인가

왜 파리인가

비전 2018. 1. 6. 19:18 |

 여행은 가슴 떨릴 때하고 다리 떨릴 때하지 말라는 미국속담을 이제 두 번째 실천한다.

한 번은 2년 전 연말, 스페인여행 때이고 이번은 지난 연말 파리여행 때이다. 두 번 다 자유여행으로 딸과 함께였다. 패키지여행이 아니니 마음의 여유도 있고 시간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어서 좋고, 현지인의 삶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어 더욱 좋다. 그러나 자유여행에는 가이드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행전문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영어에 어느 정도 능숙하고 한두 번의 외국여행 경험이 있으며 컴퓨터검색에 능한 센스 있는 젊은이와 동행하면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항공권 예매부터 현지숙소 예매를 비롯하여 여행에 필요한 제반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함께하는 딸이 이 모든 것을 담당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아내와 함께 단지 여행을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지난 연말 12월 21일 새벽 일찍, 눈이 내려 노면도 살짝 얼어붙은 아파트길가에서 두 대의 택시를 놓치고 가까스로 세 번째 택시를 집어타고 공항버스정류소로 향하는 우리부부는 이번 여행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즐겁게 여행을 시작했다. 여느 해보다 추운 혹한에 장거리여행을 하는 것이 부담이 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더 늦기 전에 가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딸애의 주선이 너무나 고마웠다. 아빠, 엄마와 함께하고파하는 딸의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가!  



 인천공항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다. 아침 7시밖에 안되었지만 수많은 여행객으로 공항은 몸살을 앓을 정도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사람들은 둘 중 한 사람 꼴로 외국을 더녀왔다는 통계가 나왔으니까 이천오백만이 외국여행을 다녀왔다는 말이다. OECD국가 중 여행증가율이 우리나라가 으뜸이다. 중국은 인구대비 10%인 1억 2천만, 일본은 인구대비 10%인 1천 2백만이 작년에 외국여행을 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외국을 잘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볼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꿈을 잃어버린 것인지 모르지만 자만이나 절망은 둘 다 망하는 지름길임이 틀림없다. 우리나라사람들이 외국으로 많이 나가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우리가 남들보다 월등이 잘 살아서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그러기에 꿈을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더 많이 살피고 더 많이 힘써야 한다. 어려울수록 더욱 도전해야 한다. 주저앉으면 죽는다. 인천공항을 오가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나는 우리의 밝은 미래를 본다.



 비행기는 한 시간 반을 연착해서 12시 30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물론 외국계 항공기인 폴란드항공이다. 우리는 바르샤바 공항에서 두 시간 정도 머물고 다시 폴란드 항공의 다른 비행기를 갈아타고 피리로 들어가야 한다. 인천에서 바르샤바까지는 열 시간을 날아가야 한다. 기내에서의 열 시간이 가장 고역이다. 나는 아예 잠으로 이 시간을 짖뭉게버릴 심산이다. 집에서 준비해 온 안대로 잠을 청하자 다행히 단잠이 나를 평안으로 인도한다. 기내에서는 두 번의 서비스가 있다. 식사와 간식으로 밥과 빵, 음료를 제공한다. 기내식도 우리의 음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이 여행대국으로 올라선 지 오래다. 인천공항으로 들어오는 외국계 항공이 국적항공을 포함해 백 개국에 이른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자고 먹고 하다가 바르샤바공항에 도착했다. 세계도처에서 자행되는 테러 때문인지 공항 검문검색은 몹시 까다로웠다. 검색대원은 공항수비대 소속의 현역군인들이다. 무표정한 모습에 겁이 났다. 여기서부터 유럽이니까 유럽의 관문인 셈이다. 그러니까 더욱 그렇다. 검문이 철저할 수밖에 없다. 한번 보이콧당하면 그만이다. 한국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자연히 긴장이 된다. 다행이 우리 셋은 잘 통과되었다.


 다시 파리 비행이다. 바르샤바에서 파리까지는 두 시간 남짓이다. 잠시 눈을 붙인 듯한데 파리의 드골공항이다. 새벽녘의 공항은 한산하다. 무사히 게이트를 통과하여 택시정유장으로 와 차를 타고 숙소로 향한다. 택시비는 유로화로 50불이다. 한 시간 반 정도를 부지런히 달려 와 숙소에 이르렀다. 숙소는 파리 2번구에 있었다. 딸애가 서울에서 미리 예약한 현지인의 아파트다. 오층 건물이 ㅁ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4층에 우리 숙소가 있었다. 엘리베이트는 삼인용이라 아주 미니였다. 그러나 건물이 백년은 족히 된 건물이라 놀라울 수밖에 없다. 숙소는 아주 잘 정돈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구조와는 사뭇 다른 세로형 구조다. 거실, 주방, 화장실, 안방이 일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그네들의 라이프스타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여튼 여행객을 배려해서 모든 게 다 갖추어져 있다. 우리는 서울에서 미리 준비해 온 것을 내려놓는다. 햇반 30개, 누룽지, 김을 비롯하여 캔 반찬 등을 완벽히 준비했기에 아침, 저녁은 너끈히 우리식으로 먹을 수 있다. 유럽에서도 슈퍼는 아주 싸다. 과일이 더욱 그렇다. 스페인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파리에서의 외식은 돈이 많이 든다. 물가가 서울보다 조금 비싸다. 특히 레스토랑요금이 비싼 편이다.



 파리에서의 아침을 햇반으로 맛있게 해결하고 본격적으로 파리투어를 시작한다. 파리는 세계 최고의 관광지다. 역사와 문화예술, 쇼핑으로 전 세계인이 연중 몰려든다. 가장 한가한 계절이 겨울이라니 좀 조용히 돌아볼 것 같기도 하다. 숙소가 시내 중심가에 있어 여간한 곳은 도보로 20분 거리다. 루브르박물관, 오세르 미술관, 콩코드 광장, 세느강, 개선문이 오늘의 코스다. 루브르까지는 도보로 15분 거리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걸으며 중세기의 건물들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비가 간헐적으로 찔끔거리지만 대부분의 파리장들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 기온은 서울보다 따뜻해서 영상을 유지한다. 오가는 사람들도 정말 다양하다. 백인, 중동인, 아시아인, 흑인, 정말 인종 전시장 같다. 그 중에 흑인이 많다. 프랑스가 오랜 동안 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특히 북아프리카계가 많다고 한다. 아시아계도 적지 않으니 이는 베트남을 비롯해 동남아가 한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딸애의 말로는 파리에서는 인종차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단다.



 루브르, 말이 필요 없다. 와서 봐야 한다. 그 규모나 웅장함이 가히 세계의 압권이다. 12세기 후반에 필립 2세에 의하여 착공되었지만 본래는 궁이었다. 그 후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궁을 지어 옮긴 후 왕실의 유물을 전시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증축 중이다. 박물관 옆으로는 세느강이 흐르고 강을 건너 맞은편은 오세르 미술관이 위치해 있다. 우리일행은 6일간의 파리 무지움 패스권을 사서 삼각 피라미드를 통과한다. 여기서도 검문검색은 철저하다. 궁으로 착공되었던 기초석을 비롯하여 궁의 석벽이 지하 3층에 아직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곳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소중한 것들을 남겨 놓으려하는 선조들의 정신은 후세를 풍족하게 한다. 루브르에서의 모나리자는 단연 관광객들에게는 최대의 볼거리다. 모나리자 앞에서 인증샷을 하고 무진장한 유물 속으로 역사의 여행을 시작한다.



 루브르에서 나와 세느강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의 한 정치 망명가를 생각한다.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파리의 속살을 실감 있게 전해 준 정치평론가, 우리의 아픈 현대사와 함께한 초로의 신사를 떠올리며 콩코드 광장을 걸어 올라간다. 루브르와 개선문 간의 거리는 걸어서 40분 정도 되는 것 같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현장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뮤지컬로 상영된 적이 있는 ‘레미제라블’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다. 드디어 개선문에 도착했다. 콩코드 광장에서 곧장 걸어 올라오면 지하로 개선문에 이르게 되어 있다. 여기서도 역시 무지움 패스로 검문소를 통과하여 개선문 내부 통로 계단을 거쳐 5층 높이의 개선문 전망대에 오르니 에펠탑이 잿빛 하늘 아래 나타난다. 파리가 완전한 계획도시임을 여기 전망대에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개선문에서 열두 거리가 펼쳐진다. 열두 거리의 노폭도 거의 일정하고 일직으로 뻗은 모양이 개선문이 원의 중심점이다. 건물의 높이도 철저히 제한되어 있어 높아야 육칠층 정도다. 우리나라처럼 우후죽순 솟아올라 스카이라인을 다 가려버린 도시와는 사뭇 달랐다.



 파리에서의 둘째날은 오르세 미술관, 셋째날은 몽마르트 언덕과 에펠탑, 넷째날은 노트르담 대성전, 다섯째날은 피카소 미술관과 로댕 미술관, 여섯째날은 베르사이유궁전, 일곱째날과 여덟 번째날은 시내투어, 마지막날은 고흐마을 방문, 이렇게 파리여행 계획을 잡았다.



 오늘은 베르사이유궁을 보러가는 날이다. 베르사이유는 파리 교외에 위치해 파리전철을 이용해야 한다. 아침 9시경, 숙소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파리는 지하철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목적지를 찾아가기도 쉽다. 스마트폰에 구글지도를 앱으로 다운받아 놓으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다. 여행객에게 구글지도와 번역기는 필수다. 역에서 교외로 나가는 전철을 타고 목적지로 향한다. 베르사이유로 가는 관광객이 많다. 전철은 아주 깨끗하며 시트도 아주 편안하다.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단다. 차창밖으로 내다보니 교외로 나갈수록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다. 고층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있고 더러는 지금 공사 진행 중이다. 타워 크레인이 분주하게 자재를 나르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한 시간 후 전철역에서 내려 베르사이유궁 앞 광장에 다다르니 선착객들이 벌써 줄을 서 있다. 비가 내리고 상당히 추운 날이었지만 상당수는 우산도 쓰지 않고 있다. 말로만 듣던 곳, 실제 와 보니 그 규모가 실로 대단하다. 궁의 철제 정문은 황금색 왕관으로 장식되어 있고 H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 궁들은 모두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다. 한 시간 가량 줄을 서 기다린 후에 무지움 패스로 들어간 궁 안의 실상은 문짜 그대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화려한 궁은 결코 없으리라는 확신이 왔다. 루이 14세 때 착공하여 루이 16세 때까지 지었으니 공사 기간도 길었지만 궁에 소요된 경비로 나라의 재산이 거덜났다는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볼 수 있었다. 루이 16세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하여 지은 궁을 오고 오는 세대에 수많은 관람객은 와서 무엇을 보는가? 그 화려함인가? 아니면 화려함의 미인가? 그것도 아니면 화려함의 뒤에 감추인 인간의 사악함인가? 궁을 돌아본 우리일행은 궁 앞으로 펼쳐진 정원으로 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 조성된 인공정원을 보면서 여기에 동원된 노역꾼이 얼마일까 생각해 본다. 정원 사이로 난 넓은 길을 따라 한 시간 정도 내려오니 숲 속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별궁이 나타난다. 이 별궁은 본궁과는 달리 아주 검소하다. 소위 마리 앙투아네트의 영지라 불리운다. 수많은 농노들을 거느리며 농사도 지었다니 앙투아네트는 누릴 것은 다 누린 사람이다. 루이 16세나 안투아네트는 결국 프랑스 대혁명으로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이것이 역사의 진실 아니겠는가 싶다. 혁명의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만 했을까를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가 입헌 군주국을 고집하지 않고 온전한 공화정의 길로 나아갔던 것을 볼 때 후세인들에게 시사해 준 교훈이 너무나 크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파리는 피카소와 로댕과 고흐를 사랑하며 베르사이유를 가지고 있는 도시다. 나는 아내와 함께 나의 사랑하는 딸의 안내를 받으며 고흐마을까지 돌아보고 왔다. 한 사람이 무엇을 남기고 갔으며 어떻게 살다 가야 할지를 나에게 가르쳐 준 파리였다. 왜 파리인가 다시 생각해 본다. 파리야, 고맙다. 언제 다시 오려나?    

Posted by 힛데겔
:

열정

비전 2015. 10. 6. 12:11 |

 반가운 단비가 내린 캠퍼스는 방금 목욕한 아기같이 해맑다..가을 햇살에 주홍으로 물들어가는 싱그러운 잎사귀들이 너무 고와 눈부시다. 보도 위를 걷는 젊음의 물결이 짙은 초록의 나뭇잎들과 잘 배합되어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린다. 정말 부럽다. 나에게도 이런 날들이 있었던가. 오랜만에 시립대학 캠퍼스를 찾아 깊어가는 가을을 맛본다. 이제 멀지 않아 나무들은 겨울을 준비하며 자기 몸을 잔뜩 움츠리겠지? 그리고 또 얼마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분신들을 허공에 날려 보내야 하겠지? 그러면 이 캠퍼스는 온통 낙엽으로 뒤덮일 것이고 숲속 연못에는 잎의 잔해들로 물이 탁해지겠지? 문득 하늘을 본다. 높고 푸른 가을하늘을 보며 잠시 우울해진 나의 마음을 날려 버린다. 그리고 발걸음도 가볍게 젊음의 대열 속으로 합류한다.


 올해는 대한민국이 광복 칠십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나는 1945년 해방둥이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감회가 더욱 새롭다. 나와 같은 동년배의 삶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해방둥이들은 치열한 삶을 살았다 할 것이다. 나는 빈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에 한국 전란이 일어나자 부모님을 따라 마산으로 피난하여 그곳 피난지 마산에서 아홉 살에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마산은 전쟁 통에도 적화되지 않은 몇 안 되는 도시였기에 토착민 반, 피난민 반으로 전쟁고아의 천지였다. 그러기에 1학년 한 반의 정원이 칠십명을 넘었다. 게 중에는 코 밑에 제법 시커먼 솜털이 난 형님들도 있었다. 작게는 일곱 살부터 열 살 넘는 아이까지 천막 수업을 받았으니 낭만은 그야말로 외계인의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대학 캠퍼스를 자주 찾는 것은 나의 학창시절, 초등에서 대학까지 맛보지 못했던 낭만을 이제라도 보상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캠퍼스를 거닐면서 젊음을 보고, 그들의 꿈을 보며 나의 낭만과 꿈을 확인할 때 나는 무한한 희열과 행복을 맛본다.

 

  그런데 지금 이 낭만의 캠퍼스가 고민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중심에 서야 할 그들이 아파하고 있다. 혹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도 하지만 살면서 한 번쯤 아파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 아픔이 생명을 죽이는 병의 인자가 아니라면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그 아픔은 나의 삶을 풍요하게 하는 더 좋은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나의 청춘 시절, 우리는 삼류 영화관에서 영화 자이안트를 보면서 꿈을 키워갔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텍사스의 광활한 평원을 질주하는 자동차 대열을 보면서, 메마른 황야에서 석유 시추에 목숨을 거는 제임스•딘의 구리 빛 얼굴에서 희망을 보았다. “친구야, 우리 미국 땅에 도전하자.” 그날 그 자리에서 함께 다짐했던 나의 고교 벗 다섯 중에 셋이 지금 미국에 둥지를 틀었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지금 생명을 서서히 옥조여오는 죽음의 인자와 고된 싸움을 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내가 읽은 어느 철학자의 책이 생각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암이나 에이즈가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육체를 파괴하고 정신을 피폐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이나 영혼을 파괴할 수는 없다. 그 반증으로 이러한 무서운 질병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면서도 위대한 저서를 남기거나 불후의 명곡을 남긴 작가나 작곡가가 많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면 가장 무서운 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절망이라는 병이다. 문화 인류학에서는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라 정의한다. 이는 인간은 희망을 가진 동물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명백하다. 인간에게만 유일하게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희망을 선물로 주었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요 인간만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니니 평강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느니라(렘29:11)"

 

 어떤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일까? 행복에도 여러 가지 갈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것도 다분히 주관적이라 생각하기에 나의 행복이 남에게는 행복이 아닐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사례는 주위에서 얼마든 찾아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악(邪惡)하다. 그러기에 인간은 저마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가 하는 문제는 인간(person)을 페르소나(persona)라 하는 다른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페르소나는 원래 탈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정체는 언제나 가리어져 있다. 탈 뒤에 숨겨진 실체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자신의 실체를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할 수 있다. 인간들이 그렇게나 추구하는 행복은 대부분 본질적 행복이 아니라 현상적 행복일 뿐이기에 그 현상이 사라지면 행복감도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첫째는 아직까지 건강하여 일할 수 있는 기쁨이요, 둘째는 아직까지 나에게 일할 데가 있다는 기쁨이며 셋째는 나룰 믿고 나를 기다려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행복은 돈이나 명예 따위의 현상적 행복과는 무관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나의 하나님, 하루를 설레며 기대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주위의 사람에게 행복을 주게 하소서” 조용히 기도해 본다.


 삼포세대니 오포세대니 심지어 N포세대니 하는 말이 언론매체나 방송매체를 통하여 요사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음을 본다. 영어로 n은 무한대를 뜻하는 말이니까 요즈음 젊은 세대 중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자들이 많다는 말이 아닌가? 일부 언론이나 방송, 잡지들에서 빈정대듯 내뱉는 무책임한 이런 말들이 얼마나 많은 청춘들을 더 많이 아프게 하는가? 대안 없는 말만 무성하면 열매 없는 잎만 무성한 나무와 무엇이 다른가? 세 가지는 포기할 수 있다 치자.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연애나 결혼 출산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연애나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사는 자들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고 믿기에 스스로 연애, 결혼을 포기한 자들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러나 희망이나 꿈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 이것을 포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포기하는 일이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제일 행복해 보일까? 자기 일에 열정(熱情)을 가지는 사람일 것이다. 바로 그 열정의 동력(動力)은 무엇인가? 꿈이요 희망이다. 꿈이 있는 사람은 상황 앞에 주저앉지 않는다.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길은 보이는 법! 길이 없으면 내가 길을 만들면 된다. 내가 가면 길이 된다. 인생 후반기에 조국을 떠나 라오스의 오지에서 육년 만에 커피농장을 일군 장한 한국인이 있음을 본다.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눈을 들어 멀리 보자. 세계가 나의 시장이요 나의 삶의 터전이 아닌가? 젊은이여 블루오션의 꿈을!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정의와 탐욕2

비전 2014. 5. 13. 09:08 |

 싱그러운 신록의 숲 사이로 아침햇살이 눈부시다. 참 오랜 동안 기다려온 봄비였기에 더욱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어젯밤부터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나는 잠을 설쳤다. 어젯밤에는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좋아서 나는 창문을 열고 기린처럼 목을 길게 늘이고 뺨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차가운 감촉을 즐기면서 모처럼 마음이 한가로웠다.



 4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이던가! 딱딱한 땅껍질을 헤집고 나오는 새순의 반란(反亂)을 보며 영국의 한 시인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하였다던데, 껍질이 깨어지는 아픔 뒤에 봄이 온다면 4월은 잔인하여도 좋지 않은가. 그러나 이 땅에는 지금 새로운 대지(大地)의 봄은 오지 않고 있다. 깊고 푸른 바다가 이 땅의 봄을 묶어 버린 채 우리네 소중한 아들과 딸들을 삼켜 버리고 한 마디 말이 없다.



 그렇게 잔인한 4월이 가고 5월의 봄비가 대지를 흠뻑 적셨지만 봄은 여전히 겨울에 묶인 채 시청 앞 광장 한 모퉁이에 분노로 맴돌고 있다. 합동분향소엔 아직도 조문객들이 끈이지 않는다. 깃대에 매달린 노오란 리본들과 광장 잔디밭 위의 노오란 종이배들만이 저 깊고 푸른 바다를 향하여 저 마다의 사연을 토해내고 있다. 나는 얼마 전 이곳 분향소를 찾았을 때 어른이 된 나의 모습이 이때처럼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내 뒤로는 대부분 젊은이들이 도열하여 있었기에 자꾸만 뒤통수에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손등으로 거기를 가리고 서 있을 수도 없고…이날처럼 모자를 쓰고 오지 않음을 후회한 날도 없다 .왜냐면 내 머리 중 흰머리가 뒤통수에 가장 많았기에. 조문객들이 정렬해 서 있는 머리 위에는 따가운 햇살을 가리기 위해 차일이 쳐져 있고 천정에는 수많은 글귀들을 쓴 종이들이 펄럭이는데 하필이면 ‘어른들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글귀는 왜 그렇게도 선명하고 크던지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미국에서는 십만 부가 팔렸다고 하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백만 부 이상이나 팔라는 밀리언셀러가 되었다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의에 목말라 하는가? 시중의 서점가에는 정의와 관련된 책자는 넘쳐나는데 홍수 때는 정작 먹을 물이 없다더니 정의로운 사회는 왜 아직도 요원한가? 홍수 때 생명을 살리는 물이 될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번 세월호 참사를 통하여 인간이 얼마나 탐욕적인 존재인가를 알게 되면서 나 지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소름이 끼쳤다. 인간의 탐욕의 끝은 어디인가? 내가 어릴 때는 할머니와 손자가 깊어가는 밤에 수수께끼를 할 때가 많았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묻기를, ‘이 산, 저 산 다 잡아 먹고 아가리 쩍 벌린 게 뭐게? ’ 그러면 손자는, ‘아궁이’ 한다. 할머니가 반색하며 대답 왈, ‘그래, 맞다’ 탐욕적 인간은 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도 부족하여 아가리 쩍 벌린다.



 어쩌다 광화문 광장에 나갈 때면 나는 세종대왕 동상을 무관심하게 지나치거나 아니면 곁눈질로 흘깃 보고 지나치는 게 일쑤다. 삼십여 년 동안 훈민정음으로 먹고 살았으니 나보다 세종대왕을 더 잘 아는 자 없으리라는 오만과 편견의 소치(所致)리라. 그러나 이 자만은 곧 무식의 소치요 오만의 발로에서 시작된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인데 모르면서 안다고 하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지 않은가. 세월호의 침몰은 총체적 부실 때문이다. 선장과 선원, 선사(船社)와 감독기관, 그 어느 곳에도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존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나는 이번의 대 참사를 통하여 세종대왕을 조금 알 것 같다. 조선 오백 년 동안 많은 왕들이 있었지만 유독 세종과 정조가 후세인의 사랑을 받는다. 왜일까? 역대 어떤 왕들도 못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일까? 바로 서얼(庶孼)을 관리로 등용한 일이다. 서얼들을 관리로 등용한다는 일은 당시에는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못할 일이다. 사람은 신분에 관계없이 존엄하다는 사상으로 무장된 애민정신(愛民精神) 말이다.



 요사이 우리나라에는 오바마의 열풍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산업화세대나 그 이전세대는 대부분이 미국을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경향이 있지만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고 대단히 합리적이다. 그들이 오바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바마 대통령이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점도 다소 있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미국 역사상 백 년 동안 끌어왔던 숙제를 오바마 대통령이 풀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건강보험 개혁안이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하므로 삼천 이백만 명의 서민층이 새로이 의료혜택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서민을 사랑하는 마음은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동일하다. 오바마는 미국에서 상대적 소수계층인 흑인, 아시아계 이민층이나 히스패닉계 이민층을 사랑하여 그들을 위하여,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공화당과 싸우면서 마침내 이 법안을 상․하 양원에서 통과시키는 승리를 얻어냈다.



 나는 이번 국가적 대 재난을 겪으면서 나 자신을 겸허히 반성해 본다. 그리고 나의 남은 삶을 어떻게 정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 아주 오랜 일이 생각난다. 나의 교사 초년생 시절의 일이다. 고 2학년 담임을 맡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우리 반 학생 중 한 명의 아버지가 사업에 부도를 내고 전 가족이 종적을 감추어 버린 해괴한 사건이 있었다. 갑자기 천애의 고아가 되어 버린 제자를 바라보며 나는 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아내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제자를 나의 집으로 데려오고 말았다. 오륙 개월 후 누나라 하는 자가 학교로 찾아와 그 학생을 데려가기까지 나는 귀여운 딸아이와 함께 아내와 넷이서 방 둘 딸린 13평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다. 아내는 그때 둘째를 임신 중이었지만 내가 저지른 일을 원망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아내에게 미안하고 한없이 고맙기 그지없다.

 


 이제 자판 앞을 떠나려 한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그래서 성경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 한다. 성경(갈5:14)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이로 보건데 정의(正義)는 곧 이웃사랑이다.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정의인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정의(正義)다. 크리스천이면 응당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사랑하여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는 일이다. 세상에는 항상 가난한 자가 있을 것이니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네가 구제할 수 있을 때 구제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겸손히 귀를 기울여 나에게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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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능력

비전 2011. 2. 5. 09:13 |
 

1. 블랙홀 


 사람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삶과 죽음은 인생에 있어서 풀리지 않는 숙제요 영원한 테마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가진 재산이 몽땅 잿더미나 되지 않을까? 사랑하는 아내가 나를 배신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날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죽음이 두려워 눈을 감기가 무섭다는 사람의 고민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종교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종교가 우리를 이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종교에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없을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만고만한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구도자의 길을 걷고자 고행이나 끝없는 수행의 길을 떠나 보지만 본래 길이 없으니 어찌합니까? 이 두려움은 인생에 있어서 블랙홀과 같습니다. 그 누구든 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빠져나올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생에게 희망은 전혀 없는 건가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삼백 육십 다섯 번을 ‘두려워 말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두려워하고 있는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사41:10)” 하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전능자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그분만이 인간을 가장 잘 아시며 인간의 고민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2. 복음의 능력


1) 죄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를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니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이 진화의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고등동물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기독교에 입문도 하지 못한 자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고정 관념을 내려놓고 성경에서 말하는 죄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경청하여 보십시오.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어느 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과일은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 
 
 그런데 어느 날 사탄이 이브에게 찾아와 이렇게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과일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하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 하셨을까요? 이것은 창조주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한 선언이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언한 메세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재권(主宰權)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밝히 말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그러나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창조된 목적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불신(不信)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정녕 죽으리라(창2:17)” 하셨으나 인간은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3:3)”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죄입니다(요16:9).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던 사탄의 달콤한 유혹과는 달리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에 자기의 벌거벗은 몸을 발견하고 부끄러워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으며 그 잎으로 치부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주재권에 도전하려던 사탄의 꾐에 빠져 그 선악과를 따 먹게 되고 그 댓가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켰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詐欺)는 무엇일까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하는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인간을 속인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꾐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담 이후 죄를 지은 모든 인간은 “정녕 죽으리라” 하는 하나님의 선언대로 모두가 죽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근본 원인은 죄인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롬1:28)고 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리고(렘2:13) 사탄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죄라고 성경은 밝히 말합니다.


2) 죄의 삯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3:23)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입니다. 우리는 흔히 거짓말하는 죄, 속이는 죄, 도둑질하는 죄 등을 죄라 생각하지만 이것들은 죄의 현상일 뿐입니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죄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하나님을 버린 것이 죄입니다. 화살이 과녁의 정곡(正鵠)을 벗어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벗어난 모든 생각과 행위가 죄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고민하게 됩니다. 죄의 고통으로 인하여 뼈가 상하게 되는 번민을 해 보셨나요? 사도 바울은 죄로 인한 번민을 이렇게 토로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롬7:24)” 하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죄악의 사슬에서 해방되는 길은 없을까요? 아닙니다. 길이 있습니다.


3) 심판에 대하여

 성경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 라고 말합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보아 왔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으며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 반드시 심판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합니다. 이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영접하지 않은 자는 심판의 부활로 그분 앞에 서야 합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거기는 불도 꺼지지 않고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이요 불로 소금 치듯 하는 곳(막9:48-49)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16장에는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 사건을 들어 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지옥의 실상(實狀)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실상을 잠깐 소개하면 이러합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를 베푸는데 그 이름을 나사로라 하는 한 거지가 헌데를 핥으며 그 부자의 대문 앞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 저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말하되 /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천국은 위로받는 곳이요 지옥은 밤낮으로 고민하는 곳입니다. 이제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영원을 좌우할 것입니다. 성경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심판을 피하리요(히2:3)” 라고.


4) 행위 거절

 성경 마가복음 10장 17절에 보면 한 청년이 예수를 찾아와 질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질문은 아주 본질적 질문이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없는 무서운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무슨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모두 죄인입니다. 이 사실을 철저히 인식하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하지만 “인간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 옷과 같다(사64:6)”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언젠가 어느 교회를 방문하여 아주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한 청년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는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 있습니까?” “예” /  “누구의 은혜로 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갈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정확한 정답입니까.  교회를 오래 다닌 성도들 중에도 상당수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성도는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 있습니까?” 하고 질문해 보면 “해 놓은 게 있어야지요, 그러니 아직은…” 하면서 자신 없는 대답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하고 성경은 분명히 못을 박아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왜 자신이 없습니까?

 
 
 성경은 또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갈3:10) /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라고.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로운 행위를 구원의 수단으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라고 말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라고 말하면서 구원이 인간의 의로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를 찾아온 청년은 영생을 얻었을까요? 결국 얻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이 떠난 후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6-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은 인간의 아떤 의로운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요 하나님의 주재권(主宰權)이란 것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긍휼)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이 구원을 위하여 한 몫 거들려하는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교만이요 가장 큰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5)하나님의 요구

 죄를 지은 자는 정녕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公義)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그들의 벗은 몸을 가리기 위하여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입혔습니다. 한 마리의 짐승이 대신 죽어 그 피흘림의 댓가로 그들은 치부(恥部)를 가리게 되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 레위기 17장 11절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너를 속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피흘림과 죄사함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기 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명령한 한 규례(規例)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상징성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 사건입니다. 그것은 출애굽하기 바로 전날 밤, 양이나 염소룰 잡고 그 피를 그 집의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그 집 안에 있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피가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발린 집은 그 집 안에 어떤 자들이 있든지 관계없이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치지 않고 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이 피는 결국 무엇을 상징하며 제물로 사용된 양이나 염소는 누구를 상징합니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요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인을 속죄하기 위하여 흘리시는 보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한마디로 요약한 가장 중요한 한 구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들이 죄로 말미암아 이미 죽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되어 있을 때 하나님 당신이 먼저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저주의 십자가 위에 높이 달아 죽이시고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당신은 당신 아들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저주의 죽음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시면서 당신의 거룩한 사랑으로 당신의 공의를 덮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롬5:8)”


6) 구원의 방법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누구입니까? 성경 빌립보서 2장에서 그를 밝히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또한 그의 아들입니다.

 
 나는 지금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나는 나의 죄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라는 처절한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죄인임을 철저히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세주라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라고 했습니다.

 
 인종과 신분에 관계없습니다. 미모나 재산과도 관계없습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아직도 주저하십니까? 기회는 그리 자주 오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아마 내 생애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성경 마가복음 10장에는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기록이 나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바디매오의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가 자기가 구걸하는 곳으로 지난다는 소식을 듣자 수많은 군중들의 소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군중들의 핀잔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수많은 병들을 고친 소식, 눈 먼 자를 눈 뜨게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다시는 내 곁을 지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눈은 이때에 떠야 한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더욱 소리를 높여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경 바디매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눈을 뜨고 더 큰 구원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를 반드시 돌아보아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구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이보다 더 확실하고 명료한 복음의 소식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 곧 아들을 대속 제물로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서울행 KTX 기차표를 예매했으면 언제든 서울에는 갈 수 있으니 이미 서울에 가 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또한 최후의 심판도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었기 때문에 면제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육신은 세상에 살아 있지만 나는 영생의 티킷을 얻었으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입니다. 


7) 온전한 속죄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온전히 속죄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말씀하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여기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몇 가지의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수에 관하여 예언한 서른여덟 가지의 모든 예언들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가 있고 둘째는 육백열세 가지의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요 셋째는 모든 인류의 죄와 나의 모든 죄를 온전히 사(赦)하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온전한 속죄를 이렇게 명쾌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10:10-12)”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하였습니다.


8) 하나님의 영원한 보장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이 온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을 뿐 아니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4)”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되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赦)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10:16-18)” 하고 말씀하십니다. 


9) 복음의 능력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고전15:3-4)’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라고 말입니다. 바울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사명자들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였기에 이 복음전파에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습니다.


10) 영접

 이 글을 읽고 있는 형제자매 여러분, 정말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1:9)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가산(家産)을 탕진한 탕자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흉악한 행악자도 돌아올 때 구원을 얻었습니다. 돌아오십시오. 돌아오는 것은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나의 주인이 사탄이었다면 나는 사탄의 종이었으나 이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로 살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을 후사(後嗣)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영접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한 사람이라는 단순한 지적 동의(知的同意)는 영접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의 허다한 사람들도 예수가 위대한 인물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은 자는 아닙니다. 성경은 이렿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하였습니다.

 
 형제자매님은 지금 예수님을 내 마음에 나의 구원의 주로 믿고 그를 구원의 주로 영접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 모으고 꿇어앉아 보십시오.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큰 소리로 따라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 내 마음 속에 왕으로, 주인으로,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지금 들어오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11) 확신

 이제 형제자매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삶을 살아가다가 내 속에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자꾸만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여 번민하는 날이 찾아오더라도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내 구원이 혹시 취소되지나 않는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 곧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이 새로이 태어났으니 당신의 구원은 결코 취소될 수 없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라고 성경은 확실히 못박고 있습니다.
 
 성경은 단호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8:33-34)” 

 성경은 이렇게 확정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이제 하나님이 형제자매님의 구원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12) 구원받은 증거

 그러면 내가 과연 구원을 받았는지의 자기 진단은 어떻게 하나요? 그 근거가 성경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요일5:10)고 말씀하십니다. 그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5:11)고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라고 말씀하셨으니 내 속에 하나님의 아들 곧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분이 나의 주인으로 계심을 성령의 감동으로 날마다 확인할 수 있다면 형제자매 여러분께서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자녀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13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려진 자니라"  
 
 또 하나의 증거는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게 되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내적 욕구가 일어나고 결국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수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라고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성령이 내 속에 임재하여 계시므로 자연스럽게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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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은 아름답다

비전 2009. 5. 1. 13:40 |
 

1. 나의 도전

 이사를 하려고 서재를 정리하던 중 나의 눈에 띄는 조그만 책자의 표지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나는 1%의 가능성에 도전한다’ 는 책자였다. 나는 갑자기 얼굴이 상기되면서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용암처럼 분출하는 것을 느끼면서 이 책자가 어떻게 내 서재에 있게 되었는지를 더듬기를 시작했다. 꽤나 오래 전인가 보다. 졸업한 어느 제자가 나에게 건네 준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는 봉투채로 준 서류 속에 묻혀 있었기에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 얼마나 나를 설레게 하는 말인가. 나에게 도전이란 말만큼 나를 고동치게 하는 말은 없다.

 내가 살던 고향은 마을 앞으로는 더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는 실개천이 휘돌아 흐르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 뒤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있고 그 산자락 끝에는 어느 문중의 무덤인지 모르는 능 같은 무덤들이 즐비하게 엎드려 있었다. 우리들의 놀이터인 이곳에서 나는 마을 밖으로 멀리 벋어나간 길을 따라 상상의 날개를 펼쳐볼 때가 많았다. 저 길 끝에는 또 어떤 세상이 있을까 하고. 그러다가 나는 항구가 있는 도시로 옮겨가게 되고 초등학교 시절 항구로 들어오는 외항선들을 보면서 바다 끝에 있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무척이나 동경하게 되었다. 나는 뱃고동소리를 참 좋아한다. 그래서 항구를 좋아하고 항구가 있는 도시에 내 인생의 닻을 내리고 내리 사십 년 이상을 살아왔다. 수평선 너머로 배들이 사라져가고 수평선을 넘어 배가 항구를 찾아든다.

 계절의 여왕 5월이 오고 있다. 아카시아 꽃이 휘들어지게 피고 꿀벌들이 윙윙거리는 신록의 계절이 오면 나는 꼭 생각나는 게 있다. 그때 그 벗들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몇몇 벗들과 함께 영화 ‘자이언트’를 보러 갔다. 영화 속의 텍사스는 무한제로 넓어 보였다. 푸른 초원에서 풀을 뜯는 소떼들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들 중 누군가가 갑자기 옆 친구의 어깨를 툭 치면서 이렇게 외치는 것이 아닌가, “야, 우리들도 언젠가 반드시 미국 간다. 알았지?” 그때 그 벗들 중에 태반이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다.

 나는 그 후 결국 미국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도 아련한 미련은 남는다. 나는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나의 제자들에게 심어주려 하였다. 그것도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심어주려 애써 왔다. 지금은 제자들이 사회 각개 각층에 나아가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내가 근무한 학교의 교훈은 아마 학교 교훈 중에는 가장 길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지금도 이 교훈을 생생히 기억하면서, 나의 열강(熱講)탓에 자기 앞으로 튀어가는 침 세례를 맞아가면서 내 앞에서 수업을 받던 제자들을 추억한다. “1.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련다. 2.나는 마음껏 뛰놀고 마음껏 공부하는 사람이 되련다. 3.나는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웃는 자가 되련다. 4.나는 조국과 민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 내가 처음 이 학교에 부임하여 수업에 들어갔을 때 교실 한쪽 켠에 걸린 액자 속에서 발견한 이 글귀가 나를 온통 사로잡았다.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면서 내가 올 인해야 할 곳이 바로 여기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나의 삶은 열정 그 자체였다. 주당 서른 시간 가까운 살인적인 수업이 고달프지 않았다. 정규 수업, 보충수업, 연이어 계속되는 서울 연 고대 특별반 특강 등들 마치면 밤 9시가 넘어서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일과가 끝난 게 아니다. 다시 제자들과 개인 상담이 시작된다. 일과를 다 마치고 귀가하면 자정이 가깝다. 나는 나의 자녀들을 거의 돌보지 못했다. 자녀 교육은 매번 아내의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자녀들은 정말 훌륭히 자랐다. 이게 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나의 아내의 헌신적 수고의 덕분이다. 나의 아내는 오로지 믿음과 기도로 자녀들을 양육하였다. 한없이 자녀들에게 베풀기만 하였다. 결국에는 나의 하나님이 나와 아내에게 다 갚아 주셨다. 아내에게는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하나님 당신의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시간과 건강을 허락하셨고 나에게도 갚아 주셔서 나의 분야에 최고가 되게 하시고 지금도 나의 달란트를 사용하시어 집필과 특강으로 청소년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나를 사용하시는 공평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2. 믿음의 파이를 키우라

 오늘의 젊은이들의 병폐(病弊)는 너무 쉽게 포기하고 좌절한다는 것이다. 내가 열정을 가지고 가르치던 7,80년대의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나의 제자들 중에는 기막힌 어려움에 처한 학생도 많았지만 적절한 동기 부여를 하였더니 역경을 거뜬히 이기고 자립하는 것을 보아 왔다. 자생력이 약한 원인 중의 하나가 저(低) 출산 시대의 자녀에 대한 과잉보호가 아닌가 생각한다. 실천적 교육방법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시행착오(施行錯誤)의 방법이다. 자녀들은 자기 스스로 자라가는 방법을 터득하여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열정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 이 열정과 의지를 끊임없이 부모가 먼저 실천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 자녀를 하나님이 걸작품으로 만들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 당신이 만들었다면 만든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또한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 내 자녀를 어디에 쓰기를 원하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부모님이 있다면 아마 최고의 부모가 아닐까?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 단연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使命)을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일에 도전(挑戰)하는 일이다. 그 일이 곧 천직(天職)이다. 천직을 발견한 사람은 믿음을 가진다. 전능자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맡겼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전능자가 맡겼으면 그 끝은 전능자 당신이 책임진다는 믿음을 또한 갖는 것이다. 그러기에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너의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였다. 한 젊은이가 이 말씀에 목숨을 걸었더니 오늘날 세계 최고의 명문인 옥스퍼드 대학이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전능자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지난여름 어느 날 휴전선 북쪽에 위치한 신도시 일산의 종합 운동장 한 쪽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서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는 창세기 18장 14절의 말씀이 내면의 책망으로 들려오면서 성령이 강력하게 나에게 감동을 주시었다. 나는 소스라쳐 놀라며 나도 모르게 “주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나이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 비로소 믿음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 순간을 잊지 못한다. 말씀은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며 사건이다. 천지를 창조한 것도 사실이며 동정녀 탄생도 사실이다. 말씀을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잃어버린다. 믿음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을 의미한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하신 주님의 말씀의 참 의미를 아는가?  전능자가 나를 통하여 일하시겠다는데 왜 나는 응답하지 못하는가?  


3. 믿음의 씨앗을 말로 심으라.

 말은 나를 지배한다. 독일의 언어 철학자 헤르더는 말은 인간의 이성뿐만 아니라 여타 모든 정신적 기능까지 지배한다고 말하였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품고 있던 잡다한 생각들은 말로 표현하기 전에는 유동적이다. 그 유동적인 생각들이 말로 표출될 때 비로소 확정된다.

청세기 1장에서 선언의 원리를 배우라.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 이 얼마나 드라매틱한 천지 창조의 역사인가! 말은 한 사람의 전(全) 인격이다. 그러기에 좋은 말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 좋은 말은 자신의 삶을 궁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말을 의미한다. 긍정적인 말을 심으라. 그리고 적극적인 말을 심으라. 나는 날마다 잘 된다고 자신에게 말하라. 말은 사람의 습관까지도 바꾸어 버릴 수 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잡다한 책들은 충고하기를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생각을 바꾸라고 말하지만 이는 옳지 않은 이론이다. 말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 말은 생각을 지배한다. 이를 증명하는 성경적 근거를 민수기 14장 28절에서 찾아보자.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시행하리니” 라는 이 말씀보다 더 명쾌한 해답이 어디에 있는가?  말대로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언하신 진리이다.


4. 열정를 가지라

 열정은 노력과 자기 관리의 원동력이다. 아무리 훌륭한 도전 정신을 가졌어도 열정이 없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언젠가 신문에서 가수 페티 김의 기사를 읽었다. 그는 1928년생이다. 만 70세에 ‘노래하는 인생 50주년’ 기념 공연을 세종 문화회관에서 거행하고 연이어 전국 투어에 나서 하루 2회(1회 2시간)를 거뜬히 소화해 내며 청중을 사로잡았다는 기사는 나에게 정말 큰 도전이었다. 나는 아직 그보다 다섯이나 젊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멋있는 사람 하나를 들라면 나는 갈렙을 들고 싶다. 그는 여호수아와 동격이다. 그러나 자기의 권위와 권리를 내세운 적이 한 번도 없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갈렙은 나이 85세에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요청한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지치지 않는 열정을 가진 갈렙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생의 사표(師表)가 아닌가.


5. 나의 도전은 계속된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롯데 그룹 신격호 회장은 올해 87세다. 그가 지금 한국의 디즈니랜드를 꿈꾸고 있다. 잠실에 제2 롯데월드를 짓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 원래는 중국 상하이나 베이징에 지을 계획이었지만 중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굳이 한국을 고집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란다. 롯데 그룹 기획 담당 간부와 기자의 대담 내용을 들어 보자.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자금이 얼마나 소요됩니까?”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아마 천문학적일 것입니다.”

“이윤 창출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이윤은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입니다. 굳이 한국을 택한 이유가 있다면 회장님은 오늘의 롯데가 있게 한 조국에 보답하려는 의미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멋있는 사람도 많다. 나는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훗날 나의 자녀들이 “아빠는 참 멋있는 삶을 살았어” 라는 말을 듣고 싶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네게 더 큰 일을  맡기리라. 내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까지 나의 도전은 계속된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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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

비전 2009. 2. 3. 15:00 |

 

  지루한 칠월의 장마가 보름째다. 오늘은 영도교회 중고등부 수련회에 특강을 해 주기로 약속이 된 날이다.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아침녘에는 폭우가 되어 퍼붓기 시작한다. 나를 특강 장소에까지 바래다주기로 되어 있는 영도교회 중고등부 부장 집사님을 만나러 나는 지금 지정된 장소로 가는 중이다.

 

 나를 태운 차는 언양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지방 국도를 타고 이십여 분쯤 더 북쪽으로 올라가더니 산길을 더위잡아 오르기 시작한다.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빠져 나갈 수 있을 듯한 시골길이다. 시멘트 포장은 되어 있어나 곳곳이 패어 장마비로 웅덩이가 되어 있다. 그러나 나를 픽업해 가고 있는 집사님은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영과 영은 통하는 법, 집사님을 통하여 주님의 흔적을 보게 되니 정말 기쁘다. 주님의 일에 내가 동참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감격을 이 베스트 드라이브를 통해 읽고 있으니 정말 흐뭇해진다. 길은 두 산의 계곡을 따라 산 중허리로 뻗어 있다. 장마비로 계곡은 물의 천지다. 빗소리와 물소리로 계곡은 지금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중이다. 짙푸른 녹음이 싱그럽다 못해 그 짙고 검푸른 녹색 물로 우리를 삼켜 버릴 듯이 달려든다. 칠월의 장마비와 소란스런 계곡물, 싱그러운 녹음과 빼어난 산세(山勢). 정말 기막힌 자연의 궁합이요 오묘한 하나님의 창조 신비다. 우리는 매양 하나님의 축복 속에 당신이 차려 준 진수성찬을 먹으면서도 날마다 투정하고 살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수양관의 식당은 먼저 온 교회의 도우미 여집사님들의 손길로 바쁘다. 부장 집사님과 나를  반갑게 맞아 준다. 모두의 얼굴에는 기쁨과 감사의 웃음이 활짝 피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여기서 보는 것 같다. 영도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흐뭇하다.

 

 청소년들의 여름 수련회는 언제나 마음 설레는 집회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에게는 일생일대의 회심(回心)의 계기가 되는 추억이 한 번쯤은 있다. 그런데 그 기회는 대개 청소년기의 여름 수련회일 때가 많다. 그러기에 이 여름 수련회는 더욱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신앙생활에 굴곡은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을 향한 질펀한 감격과 환희의 눈물이 있었다면 메마른 사막과 같은 절망과 좌절의 모래언덕도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때 지난날의 첫사랑을 추억할 일이다. 주님과의 첫사랑을 기억할 일이다. 이 추억을 우리 청소년이 오늘 여기 이 집회에서 만들어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내가 여기에 왔다는 거룩한 사명을 깨닫는다.

 

 해맑은 청소년들의 얼굴을 바라보니 나의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 사십여 년 전 신마산 교회에서의 중․고등부 시절,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우리는 한 달 내내 교회에서 죽치고 살았었다. 밤마다 남녀 학생들이 교회당에 모여 연극을 준비하였고 여름 수련회 때는 많이도 울었던 기억이 새로워진다. 우리를 그렇게도 울렸던 강사 목사님의 목쉰 소리 속에 녹아 있던 그 ‘예수’. 그분이 지금도 나의 용광로가 되어 나를 활활 불태운다.

 

 오늘 여기 모인 젊은이들이여, 예수의 불로 나를 태우고 소명(召命)의 불로 나를 담금질하여 나로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꾸게 하소서. 양치기 목자의 손 안에 있는 마른 지팡이가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로 바뀌게 하소서.

“주여, 나는 이제 더 이상 실망과 좌절의 미디안 광야 모세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명자입니다. 오, 주여, 나를 사용하소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옵소서.”

 

 나는 오늘 이 젊은이들을 통하여 미래의 영도 교회를 보며 미래의 한국을 보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 또한 미래의 젊은이를 키우는 영도 교회의 열정적인 교사들을 보게 되니 더욱 기쁘다.

 

 우리의 만남에 우연은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다.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하고 나의 하나님을 자랑하면서 나는 살아 갈 것이다. 영도교회의 청소년들과의 아름다운 만남을 예비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2006. 0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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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4:12~16)

 멀리 교회의 종탑이 하얀 눈송이를 뒤집어쓰고 있는 12월의 칼렌다 그림 한 장이 나를 갑자기 반세기로 되돌려 놓는다. 나의 유년부 시절은 6․25 직후인 마산의 신마산 교회로부터 시작된다. 눈 덮인 교회는 언제나 나의 유년 시절이요 나의 천국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눈이 좋고 눈 덮인 교회가 좋다. 매년 12월 성탄절이 되면 나의 모 교회인 신마산 교회는 나를 비롯한 고아들에게 생 대구국과 먹음직한 흰 쌀밥을 배가 터지도록 먹여 주었으니 말이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도 유달리 별났다. 성탄절 전야제를 위한 모든 프로그램을 고등부가 도맡아 했으니까. 연극과 찬양, 실내 장식 등 정말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들은 12월 한 달을 거의 교회에서 살았다. 여학생들은 아예 교회에 재봉틀을 가져다 놓고 크리스마스 장식을 위한 준비물을 만들었고 남학생들은 그림 그리기에 분주하였다. 우리들은 연극과 찬양 연습으로 12월 한 달을 교회에서 죽치고 살았다. 밤이 깊으면 교회의 어머니들이 나와서 새참으로 떡국을 끓여 주기도 하고 고구마도 삶아 주었다. 우리들은 장작불이 벌겋게 타오르는 난롯가에서 주님의 밤을 준비하곤 하였다. 그렇게 12월의 밤은 깊어만 갔다.   매년 한해가 가고 또 한해가 오건마는 올해는 나에게는 유난스럽다고 해도 좋을 만큼 의미 있는 해인 것 같다. 내가 이 세상에 와서 나이 예순이 되었고 새로운 사명을 확인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브니엘에 온 지도 벌써 31년이 되었다. 이제 2년이 지나면 나는 이 정든 교정을 떠나게 된다. 내가 브니엘과 인연을 처음 맺을 때는 이곳이 나의 선교의 사명지란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여느 다른 이들과 같이 거저 내 생계의 현장이요 내 삶의 든든한 말뚝이었을 뿐이었다. 돌이켜 보면 브니엘을 향한 나의 자부심과 정열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나는 브니엘을 향하여 나의 최선을 다하여 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밤을 새워 교재를 연구하였고 누구보다 많이 제자들을 명문 대학으로 진학시켰고 제자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겨 그들과 눈물을 같이 하였지만 감히 나의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럽다. 때때로 제자들에게 복음을 담대히 전하기도 하고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제자들과 신앙 상담을 한 적도 있었고 억지로라도 교회로 인도한 한 기억도 있지만 감히 주의 제자로서 사명을 감당해 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이제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중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주님은 고향을 떠나서 사역하셨고 아브라함도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났다. 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이제 응답하려 한다. 내가 하나님의 사역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는 연한은 그렇게 많지 않다. 많아야 육 칠 년이다. 하나님은 사명을 가진 자를 지켜 주신다.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 나는 가끔 이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그러나 내가 주의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리라 확신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명자를 도구로 사용하여 친히 당신의 일을 하신다.

나에게는 이 믿음이 있다. 하나님이 하신다. 할렐루야, 아멘 (2005.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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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사이 나는 하루가 정말 즐겁다. 새벽에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고 눈을 뜨자마자 새벽하늘에 걸려 있는 조각달을 보는 것도 분주한 도회의 생활에서 분외의 복이려니와 별이 빛나는 밤을 날마다 기대하며 소년처럼 마음 설레는 것이 어찌 축복이라 할 수 있지 아니하랴.

“장로님 내외분, 정말 축하합니다. 그렇게도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시더니 이제 만년에 하나님이 장로님 내외분께 갚아 주시는군요.  정말 심은 대로 거둡니다.”

며칠 전 나의 새 아파트를 방문했던 동료 몇몇이 우리 부부에게 던져주고 간 말이다. 

 
 정말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다. 브니엘 고등학교에 부임한 지 삼십 이 년, 나는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학교와 교회만을 오가며 제자를 가르쳤고 가정과 지역사회에 최선을 다해왔다. 아내는 자녀를 기르며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부지런히 씨를 뿌려왔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아내에게 빚진 자다. 그 많은 세월 동안 아내에게 얼마나 많은 고뇌와 번민을 하게 했던가. 나의 편협한 아집과 탐욕이 아내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어 가고 있을 때 아내는 한나처럼 교회로 달려가곤 하였다. 하나님은 아내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남편이 주지 못했던 참된 평화와 안식을 주시었다. 아내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었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이었다. 장애인 교회인 백합교회에서 삼 년 동안 봉사했던 일, 선교단체 인터콥에서의 헌신 등은 나의 가정 역사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요 진국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아름다운 삶’을 꿈꾸며 살아간다.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아내와 왕자같이 살아가기를 꿈꾸는가 하면 초고층 아파트의 옥상위에 펜터 하우스를 짓고 중세의 성주처럼 호령하며 세상을 움켜쥐고 싶은 자도 있다. 꿈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 그러기에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희망적 동물)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 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망하며 좌절하는가.

 
 나는 정말 행복한 족속이다. 모로 누워 생각해도 행복하고 엎드려 누워 생각해도 행복하고 벌렁 누워 생각해도 행복하다. 너무 행복해서 몸살이 날 지경이다. 왜냐고 묻는 이가 없는 것이 이상하여 스스로 그 해답을 줄 수밖에 없다.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게 한없이 행복하다. 이건 기적 중의 기적이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하나님의 우주 창조보다 더 신비로운 비밀이다. 매일 밤 나는 하늘의 별을 헤아려본다. 별은 빛나고 우주는 운행한다. 그 운행 속에 내가 있다. 순간의 선택이 우주의 운행 속에 나를 참여시킨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역사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소망을 알고 있는 자는 극히 드물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 당신의 마음을 알려 주신다. 불 가운데에서도 아니요 우레 가운데서도 아니요 물 가운데서도 아니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코자 하는 자에게 당신은 세밀(細密)한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민족 지도자 모세의 기록을 출애굽기 4장 2절 이하에서 보라. 애굽의 모든 지식과 권력으로도 자기 민족을 구원하지 못하고 미디안 광야로 쫓겨 간 모세, 그는 이제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실의와 절망 속에서 패배의 쓴 뿌리를 질겅질겅 씹고 있던 모세, 그의 손에는 양떼를 치는 마른 막대기 하나뿐, 민족을 구원하지 못한 자책감과 나약한 자신의 무능에 대한 자괴감(自塊感)으로 한 없이 절망하고 있는 모세. 그는 한낱 양치기였을 뿐이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은 찾아오셨다. 이날도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모세는 단순히 풀을 좇아가는 양떼를 따라 갔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불 붓는 가시떨기에서 그를 기다리고 계셨다. 거기에서 모세를 만나 주셨다. 그리고 사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셨다.   

 
 이제  우리 함께 출애굽기 4장 20절을 보자. 나는 이 구절을 보면서 온 몸이 떨려 옴을 느낀다. 아니, 천체의 감시자가 망원경 속에서 새로운 별을 발견하듯이 환희와 감사의 눈물이  흐른다.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어제의 마른 막대기가 오늘에는 ‘하나님의 지팡이’로 바뀐 사실, 이것이 기적이다. 기적은 하나님을 만날 때 이루어진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묻고 계신다. 하나님은 나에게도 일할 수 있는 두 팔과 기도할 수 있는 두 무릎을 주셨다. 나는 이제 나에게 무엇이 있는가를 헤아려 볼 것이다. 아직 건강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열정이  있다. “나의 건강과 시간과 재능은 하나님의 것이옵니다. 하나님, 이것을 하나님의 지팡이로 만들어 주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하여 일하기 원하옵니다.” 아멘  (2006.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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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과 변화

비전 2009. 1. 17. 14:01 |
 

 —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아침채플 시간에 5분 설교를 하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브니엘의 자랑스런 젊은이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꿈꾸는 자는 행복합니다. 꿈이 있는 자는 지치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에 성경 요엘서 2장 28절, 29절을 통하여 귀중한 만남과 변화에 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자 합니다.

지난 2005년 12월에 나는 어깨 통증치료를 위하여 어느 병원에 들렀습니다. 그 병원은 여러분에게는 대 선배가 되고 나에게는 참으로 아끼는 제자가 되는 우리 브니엘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한 젊은이가 운영하는 연산 로타리에 있는 통증클리닉입니다. 그 제자가 나를 진료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저가 어떤 사유로 크리스챤이 된지 아십니까?

저가 삼 학년에 진급한지 약 한 달쯤 되었을까요, 담임 선생님이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너, 오늘 저녁시간에 나와 상담을 좀 하자. 그러니까 저녁 먹고 교무실로 와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며 초조함과 두려움으로 하루를 완전히 설쳤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80년 그때만 해도 교무실 분위기가 어떠했습니까. 교무실에 한 번 갔다 하면 거의 반 초죽음이 되어 나오던 때가 아닙니까. 그리고 담임이 또 누굽니까? 악명도 높은 ‘개뼈’로 소문난 분 아닙니까. 저는 고 3 당시 공부는 저희 반 65명 중 겨우 반타작 정도에 머물렀고 장난기가 심해 반 분위기를 많이 흐려놓고 있었거든요. 하루를 불안과 공포 속에 보내고 저녁 시간에 교무실에 간 나를 만난 담임 선생님은 나를 보시더니 너무나 인자한 얼굴로 나의 부모님과 중학교 때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묻고는 브니엘에서의 2년 간의 학창 생활을 물어 보시더니 갑자기 나의 손을 덥썩 잡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두렵고 떨리면서도 그 순간 형언 못할 감동이 온 몸에 전류가 되어 흐르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무섭게 변해 갔습니다. 공부가 재미있기 시작하면서 정말 수업이 꿀같이 달았습니다. 저는 수업에 얼마나 집중하였던지 시험을 치기 위하여 공부를 하면 그 과목 선생님이 수업 중에 하셨던 조크나 유머까지 완전히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성적은 가히 폭발적이었다고 할 까요. 저는 그 해 말에 당당히 자연계 전교 성적 20등에 진입하여 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브니엘이 베푼 은혜를 잊지 않고 있으며 브니엘의 하나님은 나의 삶의 전부이며 나의 삶의 포커스라 당당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이 학창시절에 정말 정열적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셨죠. 저희들은 언제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

 
 현재 여러분의 자랑스런 선배는 부산 의대와 인제 의대에 겸임 교수로 출강하면서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너무나 귀중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 분은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감사합니다.(2006.02,23)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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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는 누구인가

비전 2009. 1. 13. 18:59 |
 


사자봉 산등성이 위로 하얀 억새꽃이 피고 하늘바람이 온 대지를 휘저으면서 벌써 강원도 산간에는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겨울을 재촉하고 있다. 정말 가을이 가고 있다. 인도 위를 걷고 있는 연인들의 코트 깃이 한껏 올라가고 낙엽이 가로수 위로 어지러이 뒹구는 깊어 가는 이 가을을 맞아 사랑하는 제자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길 기도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제자들의 졸업 20주년 home coming day 초청장이 날아오고 그때마다 그 날의 제자들이 생각난다. 그 날의 제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젊은 패기와 큰 꿈을 가지고 더 넓은 세계로 달려 나간 그 많은 제자들은 지금…?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만난 제자는? 멀리 캐나다의 산간에서 만난 그 다정다감하던 제자는 다들 잘 있을까?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의 새끼들을 기를 일이다.’ 이럴 때 미당의 이 시 한 구절이 얼마나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가. 아마 나의 제자들도 열심히 자기의 자식들을 기르고 있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이 가을에 나의 제자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 본다.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되겠다는 내 마음의 깊숙한 곳으로부터의 외침을 들으면서 말이야.  이 순간 내 마음은 뛰놀기 시작한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 내외(內外)는 하나님의 자녀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말이다. 우리 부부가 자네 내외를 만난 이후 나는 자네 가정을 위하여 쉼 없이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은 지금 자네 내외를 만나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리고 자네 내외를 사랑하고 계신다. 또한 하나님은 자네 가족 하나하나를 축복하기를 원하신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나는 얼마나 가슴 벅찰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내어놓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우리를 영원한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다. 

“사람이 한번 죽는 정한 이치요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하고 성경은 밝히 말한다. 우리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지만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심판은 엄연히 있고 이 심판을 피할 수 없음도 엄연한 현실임을 어찌하나. 삶에는 우선순위가 있지 않은가. 가장 근원적인 것이 우선 순위의 ㅇ순위가 되어야 하리라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겠지. 이 세상에는 영속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져야 하고 영원히 내 곁에 두고 싶은 것도 언젠가는 두고 가야 한다. 그렇다면 영속하지 못하는 것은 우선 순위의 ㅇ순위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해지지 않았나.


죄로 말미암아 영속하지 못하는 우리 인생이 영생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 사망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사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기적이요 그것은 그저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복된 소식이지.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고 말이야.


우리는 아무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나그네라 했거든. 일찍이 당나라의 이백(李白)은 춘야연 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부 천지자는 만물지역여요, 광음자는 백대지과객이라(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 이 부생이 약몽하니 위환이 기하오(而浮生若夢, 爲歡幾何)라 하면서 인생을 꿰뚫어보는 혜안(慧眼)을 가지고 우리를 마음껏 희롱했지 않나.  그래서 이 싯구가 지금도 인구에 회자(膾炙)되지 않나 생각해.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지.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그렇다. 우리는 나그네요 풀잎 위의 이슬이며 아침 안개에 지나지 않아. 나그네인 우리의 본향(本鄕)은 천국이다.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소풍 온 것이라 할까. 나그네인 인생은 궁극적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밝히 말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말하고 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 했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게.  


자네는 자녀의 손을 잡고 해운대 백사장으로 나가 본 적이 없나? 백사장에는 많은 아이들이 나와 놀고 있다. 조개 껍데기를 줍는 아이, 종이배를 접어 한바다로 보내는 아이, 모래로 성을 쌓는 아이….   

“아빠, 나 저 배 사 줘.”

물거품을 일으키며 바다를 가르는 모터보트를 바라보며 소년은 아빠를 조른다.

“아빠, 나 저 비행기도 사 줘.”

바다 축제를 축하하여 백사장 위를 선회하는 헬리콥터를 바라보던 소년은 또 아빠를 막무가내로 조른다.  그러나 차츰 소년은 청년이 되어 가면서 아빠를 조르지 않는다. 왜냐고? 아빠는 나의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성으로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지.

 
  사랑하는 나의 제자 내외는 이제 하나님을 찾아라. 그리고 부르짖으라. 반드시 만나 주신다. 나를 낳아준 아버지는 나의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 없지만 하나님은 영생 그 자체요 우주의 창조자이심으로 능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걸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일컫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고 말이다.

 
 자네는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 나의 등뒤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분의 선한 오른손이 나를 도우신다. 나를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하여 참 자유를 주시고 나에게 평안과 안식을 주시는 그분은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 예수를 믿으면 너-무 좋다. 나는 자네 내외를 위하여 계속 기도하겠다. 오늘 자네 내외가 동산교회를 방문해 준 것을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하신다 그리고 우리 교회와 우리 부부가 뜨겁게 환영한다. 이 귀한 발걸음이 복된 발걸음이 되고 천국을 선물로 받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 편지를 자네가 가장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자네의 아내에게도 꼭 읽어 주었으면 좋겠어.  다음 주에 교회에서 다시 만나자. 사랑한다, 안녕.    스승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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