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파리인가

비전 2018. 1. 6. 19:18 |

 여행은 가슴 떨릴 때하고 다리 떨릴 때하지 말라는 미국속담을 이제 두 번째 실천한다.

한 번은 2년 전 연말, 스페인여행 때이고 이번은 지난 연말 파리여행 때이다. 두 번 다 자유여행으로 딸과 함께였다. 패키지여행이 아니니 마음의 여유도 있고 시간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어서 좋고, 현지인의 삶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어 더욱 좋다. 그러나 자유여행에는 가이드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행전문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영어에 어느 정도 능숙하고 한두 번의 외국여행 경험이 있으며 컴퓨터검색에 능한 센스 있는 젊은이와 동행하면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항공권 예매부터 현지숙소 예매를 비롯하여 여행에 필요한 제반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함께하는 딸이 이 모든 것을 담당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아내와 함께 단지 여행을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지난 연말 12월 21일 새벽 일찍, 눈이 내려 노면도 살짝 얼어붙은 아파트길가에서 두 대의 택시를 놓치고 가까스로 세 번째 택시를 집어타고 공항버스정류소로 향하는 우리부부는 이번 여행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즐겁게 여행을 시작했다. 여느 해보다 추운 혹한에 장거리여행을 하는 것이 부담이 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더 늦기 전에 가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딸애의 주선이 너무나 고마웠다. 아빠, 엄마와 함께하고파하는 딸의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가!  



 인천공항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다. 아침 7시밖에 안되었지만 수많은 여행객으로 공항은 몸살을 앓을 정도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사람들은 둘 중 한 사람 꼴로 외국을 더녀왔다는 통계가 나왔으니까 이천오백만이 외국여행을 다녀왔다는 말이다. OECD국가 중 여행증가율이 우리나라가 으뜸이다. 중국은 인구대비 10%인 1억 2천만, 일본은 인구대비 10%인 1천 2백만이 작년에 외국여행을 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외국을 잘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볼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꿈을 잃어버린 것인지 모르지만 자만이나 절망은 둘 다 망하는 지름길임이 틀림없다. 우리나라사람들이 외국으로 많이 나가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우리가 남들보다 월등이 잘 살아서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그러기에 꿈을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더 많이 살피고 더 많이 힘써야 한다. 어려울수록 더욱 도전해야 한다. 주저앉으면 죽는다. 인천공항을 오가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나는 우리의 밝은 미래를 본다.



 비행기는 한 시간 반을 연착해서 12시 30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물론 외국계 항공기인 폴란드항공이다. 우리는 바르샤바 공항에서 두 시간 정도 머물고 다시 폴란드 항공의 다른 비행기를 갈아타고 피리로 들어가야 한다. 인천에서 바르샤바까지는 열 시간을 날아가야 한다. 기내에서의 열 시간이 가장 고역이다. 나는 아예 잠으로 이 시간을 짖뭉게버릴 심산이다. 집에서 준비해 온 안대로 잠을 청하자 다행히 단잠이 나를 평안으로 인도한다. 기내에서는 두 번의 서비스가 있다. 식사와 간식으로 밥과 빵, 음료를 제공한다. 기내식도 우리의 음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이 여행대국으로 올라선 지 오래다. 인천공항으로 들어오는 외국계 항공이 국적항공을 포함해 백 개국에 이른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자고 먹고 하다가 바르샤바공항에 도착했다. 세계도처에서 자행되는 테러 때문인지 공항 검문검색은 몹시 까다로웠다. 검색대원은 공항수비대 소속의 현역군인들이다. 무표정한 모습에 겁이 났다. 여기서부터 유럽이니까 유럽의 관문인 셈이다. 그러니까 더욱 그렇다. 검문이 철저할 수밖에 없다. 한번 보이콧당하면 그만이다. 한국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자연히 긴장이 된다. 다행이 우리 셋은 잘 통과되었다.


 다시 파리 비행이다. 바르샤바에서 파리까지는 두 시간 남짓이다. 잠시 눈을 붙인 듯한데 파리의 드골공항이다. 새벽녘의 공항은 한산하다. 무사히 게이트를 통과하여 택시정유장으로 와 차를 타고 숙소로 향한다. 택시비는 유로화로 50불이다. 한 시간 반 정도를 부지런히 달려 와 숙소에 이르렀다. 숙소는 파리 2번구에 있었다. 딸애가 서울에서 미리 예약한 현지인의 아파트다. 오층 건물이 ㅁ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4층에 우리 숙소가 있었다. 엘리베이트는 삼인용이라 아주 미니였다. 그러나 건물이 백년은 족히 된 건물이라 놀라울 수밖에 없다. 숙소는 아주 잘 정돈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구조와는 사뭇 다른 세로형 구조다. 거실, 주방, 화장실, 안방이 일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그네들의 라이프스타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여튼 여행객을 배려해서 모든 게 다 갖추어져 있다. 우리는 서울에서 미리 준비해 온 것을 내려놓는다. 햇반 30개, 누룽지, 김을 비롯하여 캔 반찬 등을 완벽히 준비했기에 아침, 저녁은 너끈히 우리식으로 먹을 수 있다. 유럽에서도 슈퍼는 아주 싸다. 과일이 더욱 그렇다. 스페인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파리에서의 외식은 돈이 많이 든다. 물가가 서울보다 조금 비싸다. 특히 레스토랑요금이 비싼 편이다.



 파리에서의 아침을 햇반으로 맛있게 해결하고 본격적으로 파리투어를 시작한다. 파리는 세계 최고의 관광지다. 역사와 문화예술, 쇼핑으로 전 세계인이 연중 몰려든다. 가장 한가한 계절이 겨울이라니 좀 조용히 돌아볼 것 같기도 하다. 숙소가 시내 중심가에 있어 여간한 곳은 도보로 20분 거리다. 루브르박물관, 오세르 미술관, 콩코드 광장, 세느강, 개선문이 오늘의 코스다. 루브르까지는 도보로 15분 거리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걸으며 중세기의 건물들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비가 간헐적으로 찔끔거리지만 대부분의 파리장들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 기온은 서울보다 따뜻해서 영상을 유지한다. 오가는 사람들도 정말 다양하다. 백인, 중동인, 아시아인, 흑인, 정말 인종 전시장 같다. 그 중에 흑인이 많다. 프랑스가 오랜 동안 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특히 북아프리카계가 많다고 한다. 아시아계도 적지 않으니 이는 베트남을 비롯해 동남아가 한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딸애의 말로는 파리에서는 인종차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단다.



 루브르, 말이 필요 없다. 와서 봐야 한다. 그 규모나 웅장함이 가히 세계의 압권이다. 12세기 후반에 필립 2세에 의하여 착공되었지만 본래는 궁이었다. 그 후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궁을 지어 옮긴 후 왕실의 유물을 전시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증축 중이다. 박물관 옆으로는 세느강이 흐르고 강을 건너 맞은편은 오세르 미술관이 위치해 있다. 우리일행은 6일간의 파리 무지움 패스권을 사서 삼각 피라미드를 통과한다. 여기서도 검문검색은 철저하다. 궁으로 착공되었던 기초석을 비롯하여 궁의 석벽이 지하 3층에 아직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곳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소중한 것들을 남겨 놓으려하는 선조들의 정신은 후세를 풍족하게 한다. 루브르에서의 모나리자는 단연 관광객들에게는 최대의 볼거리다. 모나리자 앞에서 인증샷을 하고 무진장한 유물 속으로 역사의 여행을 시작한다.



 루브르에서 나와 세느강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의 한 정치 망명가를 생각한다.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파리의 속살을 실감 있게 전해 준 정치평론가, 우리의 아픈 현대사와 함께한 초로의 신사를 떠올리며 콩코드 광장을 걸어 올라간다. 루브르와 개선문 간의 거리는 걸어서 40분 정도 되는 것 같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현장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뮤지컬로 상영된 적이 있는 ‘레미제라블’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다. 드디어 개선문에 도착했다. 콩코드 광장에서 곧장 걸어 올라오면 지하로 개선문에 이르게 되어 있다. 여기서도 역시 무지움 패스로 검문소를 통과하여 개선문 내부 통로 계단을 거쳐 5층 높이의 개선문 전망대에 오르니 에펠탑이 잿빛 하늘 아래 나타난다. 파리가 완전한 계획도시임을 여기 전망대에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개선문에서 열두 거리가 펼쳐진다. 열두 거리의 노폭도 거의 일정하고 일직으로 뻗은 모양이 개선문이 원의 중심점이다. 건물의 높이도 철저히 제한되어 있어 높아야 육칠층 정도다. 우리나라처럼 우후죽순 솟아올라 스카이라인을 다 가려버린 도시와는 사뭇 달랐다.



 파리에서의 둘째날은 오르세 미술관, 셋째날은 몽마르트 언덕과 에펠탑, 넷째날은 노트르담 대성전, 다섯째날은 피카소 미술관과 로댕 미술관, 여섯째날은 베르사이유궁전, 일곱째날과 여덟 번째날은 시내투어, 마지막날은 고흐마을 방문, 이렇게 파리여행 계획을 잡았다.



 오늘은 베르사이유궁을 보러가는 날이다. 베르사이유는 파리 교외에 위치해 파리전철을 이용해야 한다. 아침 9시경, 숙소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파리는 지하철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목적지를 찾아가기도 쉽다. 스마트폰에 구글지도를 앱으로 다운받아 놓으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다. 여행객에게 구글지도와 번역기는 필수다. 역에서 교외로 나가는 전철을 타고 목적지로 향한다. 베르사이유로 가는 관광객이 많다. 전철은 아주 깨끗하며 시트도 아주 편안하다.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단다. 차창밖으로 내다보니 교외로 나갈수록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다. 고층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있고 더러는 지금 공사 진행 중이다. 타워 크레인이 분주하게 자재를 나르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한 시간 후 전철역에서 내려 베르사이유궁 앞 광장에 다다르니 선착객들이 벌써 줄을 서 있다. 비가 내리고 상당히 추운 날이었지만 상당수는 우산도 쓰지 않고 있다. 말로만 듣던 곳, 실제 와 보니 그 규모가 실로 대단하다. 궁의 철제 정문은 황금색 왕관으로 장식되어 있고 H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 궁들은 모두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다. 한 시간 가량 줄을 서 기다린 후에 무지움 패스로 들어간 궁 안의 실상은 문짜 그대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화려한 궁은 결코 없으리라는 확신이 왔다. 루이 14세 때 착공하여 루이 16세 때까지 지었으니 공사 기간도 길었지만 궁에 소요된 경비로 나라의 재산이 거덜났다는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볼 수 있었다. 루이 16세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하여 지은 궁을 오고 오는 세대에 수많은 관람객은 와서 무엇을 보는가? 그 화려함인가? 아니면 화려함의 미인가? 그것도 아니면 화려함의 뒤에 감추인 인간의 사악함인가? 궁을 돌아본 우리일행은 궁 앞으로 펼쳐진 정원으로 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 조성된 인공정원을 보면서 여기에 동원된 노역꾼이 얼마일까 생각해 본다. 정원 사이로 난 넓은 길을 따라 한 시간 정도 내려오니 숲 속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별궁이 나타난다. 이 별궁은 본궁과는 달리 아주 검소하다. 소위 마리 앙투아네트의 영지라 불리운다. 수많은 농노들을 거느리며 농사도 지었다니 앙투아네트는 누릴 것은 다 누린 사람이다. 루이 16세나 안투아네트는 결국 프랑스 대혁명으로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이것이 역사의 진실 아니겠는가 싶다. 혁명의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만 했을까를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가 입헌 군주국을 고집하지 않고 온전한 공화정의 길로 나아갔던 것을 볼 때 후세인들에게 시사해 준 교훈이 너무나 크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파리는 피카소와 로댕과 고흐를 사랑하며 베르사이유를 가지고 있는 도시다. 나는 아내와 함께 나의 사랑하는 딸의 안내를 받으며 고흐마을까지 돌아보고 왔다. 한 사람이 무엇을 남기고 갔으며 어떻게 살다 가야 할지를 나에게 가르쳐 준 파리였다. 왜 파리인가 다시 생각해 본다. 파리야, 고맙다. 언제 다시 오려나?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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