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비전 2015. 10. 6. 12:11 |

 반가운 단비가 내린 캠퍼스는 방금 목욕한 아기같이 해맑다..가을 햇살에 주홍으로 물들어가는 싱그러운 잎사귀들이 너무 고와 눈부시다. 보도 위를 걷는 젊음의 물결이 짙은 초록의 나뭇잎들과 잘 배합되어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린다. 정말 부럽다. 나에게도 이런 날들이 있었던가. 오랜만에 시립대학 캠퍼스를 찾아 깊어가는 가을을 맛본다. 이제 멀지 않아 나무들은 겨울을 준비하며 자기 몸을 잔뜩 움츠리겠지? 그리고 또 얼마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분신들을 허공에 날려 보내야 하겠지? 그러면 이 캠퍼스는 온통 낙엽으로 뒤덮일 것이고 숲속 연못에는 잎의 잔해들로 물이 탁해지겠지? 문득 하늘을 본다. 높고 푸른 가을하늘을 보며 잠시 우울해진 나의 마음을 날려 버린다. 그리고 발걸음도 가볍게 젊음의 대열 속으로 합류한다.


 올해는 대한민국이 광복 칠십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나는 1945년 해방둥이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감회가 더욱 새롭다. 나와 같은 동년배의 삶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해방둥이들은 치열한 삶을 살았다 할 것이다. 나는 빈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에 한국 전란이 일어나자 부모님을 따라 마산으로 피난하여 그곳 피난지 마산에서 아홉 살에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마산은 전쟁 통에도 적화되지 않은 몇 안 되는 도시였기에 토착민 반, 피난민 반으로 전쟁고아의 천지였다. 그러기에 1학년 한 반의 정원이 칠십명을 넘었다. 게 중에는 코 밑에 제법 시커먼 솜털이 난 형님들도 있었다. 작게는 일곱 살부터 열 살 넘는 아이까지 천막 수업을 받았으니 낭만은 그야말로 외계인의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대학 캠퍼스를 자주 찾는 것은 나의 학창시절, 초등에서 대학까지 맛보지 못했던 낭만을 이제라도 보상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캠퍼스를 거닐면서 젊음을 보고, 그들의 꿈을 보며 나의 낭만과 꿈을 확인할 때 나는 무한한 희열과 행복을 맛본다.

 

  그런데 지금 이 낭만의 캠퍼스가 고민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중심에 서야 할 그들이 아파하고 있다. 혹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도 하지만 살면서 한 번쯤 아파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 아픔이 생명을 죽이는 병의 인자가 아니라면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그 아픔은 나의 삶을 풍요하게 하는 더 좋은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나의 청춘 시절, 우리는 삼류 영화관에서 영화 자이안트를 보면서 꿈을 키워갔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텍사스의 광활한 평원을 질주하는 자동차 대열을 보면서, 메마른 황야에서 석유 시추에 목숨을 거는 제임스•딘의 구리 빛 얼굴에서 희망을 보았다. “친구야, 우리 미국 땅에 도전하자.” 그날 그 자리에서 함께 다짐했던 나의 고교 벗 다섯 중에 셋이 지금 미국에 둥지를 틀었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지금 생명을 서서히 옥조여오는 죽음의 인자와 고된 싸움을 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내가 읽은 어느 철학자의 책이 생각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암이나 에이즈가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육체를 파괴하고 정신을 피폐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이나 영혼을 파괴할 수는 없다. 그 반증으로 이러한 무서운 질병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면서도 위대한 저서를 남기거나 불후의 명곡을 남긴 작가나 작곡가가 많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면 가장 무서운 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절망이라는 병이다. 문화 인류학에서는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라 정의한다. 이는 인간은 희망을 가진 동물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명백하다. 인간에게만 유일하게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희망을 선물로 주었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요 인간만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니니 평강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느니라(렘29:11)"

 

 어떤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일까? 행복에도 여러 가지 갈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것도 다분히 주관적이라 생각하기에 나의 행복이 남에게는 행복이 아닐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사례는 주위에서 얼마든 찾아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악(邪惡)하다. 그러기에 인간은 저마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가 하는 문제는 인간(person)을 페르소나(persona)라 하는 다른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페르소나는 원래 탈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정체는 언제나 가리어져 있다. 탈 뒤에 숨겨진 실체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자신의 실체를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할 수 있다. 인간들이 그렇게나 추구하는 행복은 대부분 본질적 행복이 아니라 현상적 행복일 뿐이기에 그 현상이 사라지면 행복감도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첫째는 아직까지 건강하여 일할 수 있는 기쁨이요, 둘째는 아직까지 나에게 일할 데가 있다는 기쁨이며 셋째는 나룰 믿고 나를 기다려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행복은 돈이나 명예 따위의 현상적 행복과는 무관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나의 하나님, 하루를 설레며 기대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주위의 사람에게 행복을 주게 하소서” 조용히 기도해 본다.


 삼포세대니 오포세대니 심지어 N포세대니 하는 말이 언론매체나 방송매체를 통하여 요사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음을 본다. 영어로 n은 무한대를 뜻하는 말이니까 요즈음 젊은 세대 중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자들이 많다는 말이 아닌가? 일부 언론이나 방송, 잡지들에서 빈정대듯 내뱉는 무책임한 이런 말들이 얼마나 많은 청춘들을 더 많이 아프게 하는가? 대안 없는 말만 무성하면 열매 없는 잎만 무성한 나무와 무엇이 다른가? 세 가지는 포기할 수 있다 치자.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연애나 결혼 출산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연애나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사는 자들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고 믿기에 스스로 연애, 결혼을 포기한 자들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러나 희망이나 꿈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 이것을 포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포기하는 일이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제일 행복해 보일까? 자기 일에 열정(熱情)을 가지는 사람일 것이다. 바로 그 열정의 동력(動力)은 무엇인가? 꿈이요 희망이다. 꿈이 있는 사람은 상황 앞에 주저앉지 않는다.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길은 보이는 법! 길이 없으면 내가 길을 만들면 된다. 내가 가면 길이 된다. 인생 후반기에 조국을 떠나 라오스의 오지에서 육년 만에 커피농장을 일군 장한 한국인이 있음을 본다.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눈을 들어 멀리 보자. 세계가 나의 시장이요 나의 삶의 터전이 아닌가? 젊은이여 블루오션의 꿈을!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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