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난 행복'에 해당되는 글 51건

  1. 2013.01.07 이렇게 쉬울 줄이야
  2. 2012.12.13 2012 겨울, 펭귄의 서울생활 8
  3. 2012.10.10 가을, 책 그리고 캠퍼스
  4. 2012.09.13 소통 1
  5. 2012.07.11 우연인가 필연인가
  6. 2012.05.23 인생을 공유하라
  7. 2012.04.18 약속2
  8. 2012.03.07 아름다운 동행
  9. 2012.02.02 약속
  10. 2011.11.24 과정과 낭만 1

이렇게 쉬울 줄이야

묵상 2013. 1. 7. 14:42 |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승강구 좌우편에 이런 광고가 종종 붙어 있음을 보게 된다. “×× 대학병원에서 고혈압 임상실험에 참가하실 분을 모집합니다” 질병에는 임상실험이 있는데 삶에는 왜 임상실험이 없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참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께나 먹고 세상을 살만치 산 내가 인생은 단 한 번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라는 것을 모르다니 말이다.

 

 

 나는 오늘 이 글에서 일반 독자들을 상대로 하기보다는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인생의 난제(難題)를 던져보려 한다. 한자어의 갈등을 어원적으로 풀이해 보면 칡 갈(葛)자와 등나무 등(藤)자의 합성어가 갈등(葛藤)이다. 칡과 등나무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꼬면서 올라간다. 그러기에 칡과 등나무가 만나면 그 꼬임이 결코 풀리지 않는다. 우리의 삶에서 너무나 답답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질병의 경우처럼 임상실험이라도 한번 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때가 종종 있지만 인생은 그럴 수 없는 게 운명이다. 그만큼 고민도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에 쓰려하는 글은 또한 나의 블로그에 이미 올린 ‘약속1,2’에서 따져 본 주제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 연장이라 보아도 좋겠다. 인생을 살아갈 적에 답이 둘이어서 답답할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에 어떻게 하는가? 세상 사람들이야 점괘도 보고 사주관상도 보고 각종 운명서적도 뒤적이면서 용하다는 사람 다 찾아가면서 별별 짓 다해 보겠지만 우리 크리스천은 어떻게 하는가? 성경에 정작 답이 있음에도 얼마나 많은 세월을 죽여가면서 허둥대고 있는가? 칡과 등나무가 서로 엇갈려 꼬인 것처럼 내 인생은 더욱 더 꼬여만 가는가?

 

 

 나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인 지난 12월 30일 주일 아침, 예배에서 불현듯 이 사실을 깨달았다. 15분 정도 먼저, 교회 예배실에 도착하여 ‘나의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아들이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하고 묵상기도를 하고 ‘내가 여호와의 계시는 집과 여호와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라는 시편의 다윗의 시를 읊조리면서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날 예배의 주제는 역대상(29:10-19)절을 중심으로 다윗의 삶을 최종 결산하는 ‘비전의 삶과 믿음과 감사의 삶’이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중에 너무나 또렷하게 성령의 감동이 나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나의 입에서 나온 세 마디의 말, ‘이렇게 쉬울 줄이야’

 

 

 예배를 드리고 교회 문을 나서는 나의 발걸음은 새털같이 가벼웠다. 이 비밀을 먼저 나의 자녀들에게 알려 주어야지 하면서 집으로 달려온 나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나와 내 자녀만이 아니라 믿음의 동역자들과 나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크리스천 독자님들과 함께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 동안 인생의 난제(難題) 앞에서 얼마나 좌절하고 절망해 왔는가? 그리고 혼자 가슴앓이 하면서 날밤을 지새운 날이 그 얼마이던가? 명색이 집사요 장로며 몇십 년 믿었다는 경륜은 있지만 그것들이 정작 문제의 해답이 되었던가? 못 되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성경 창세기 18장 10절 이하에는 한 여자가 등장하는데 이름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사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는 약속을 하신다. 그때 사라가 장막 문에서 듣고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엿고 내 주인도 늙었거늘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이때 하나님이 사라에게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하시니

 

 

 성경 누가복음 1장 11절 이하에는 또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한 여자는 마리아요 한 남자는 제사장 사가랴이다. 아느 날 하나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하시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가랴는 그가 자기 아들의 태어남을 볼 때까지 벙어리가 되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이 일이 이루리라’

 

 

 한편 사가랴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가 육개월 후에 마리아에게 나타나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연이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니 마리아가 대답하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하매

 

 

 창세기의 사라와 누가복음의 마리아와 사가랴의 기록을 통하여 살펴볼 때 인생의 난제들에 대한 모든 해답이 바로 성경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다. 사라와 마리아에게 공통적으로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라는 질문이다. 그러면 지금 나에게 요구되는 믿음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 라는 믿음이다. 바로 창세기 1장 1절의 믿음이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다. 창세기 21장 1절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기록이 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쎄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여기에서 ‘말씀대로’ 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거듭 나온다. 그렇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민수기 23장 19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라기 이후 400년 간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지만 때가 되니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 구주로 오셨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되 온전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했다.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물으시는 그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의 얄팍한 지식을 믿었고 돈을 믿거나 철밥통을 믿어왔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이외는 다 가 버린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나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뢰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라고 말씀하셨으니 나의 길을 하나님께 맡긴다. 그리하면 말씀대로 일은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이루신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다. 그러니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신다. 말씀대로, 말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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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서운 한파가 살 속으로 파고들어 온 몸이 저려온다. 하필이면 이때에 어금니를 뺄 게 뭐람, “선생님, 무조건 빼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안 되겠는데요.” 제자의 말을 입 속으로 반추하면서 나는 을지로 입구, 지하철 게이트로 터덜터덜 내려온다. 이쯤 되면 나도 이제 영락없는 영감인가? 머지않아 고희를 바라보는 나를 아내는 그래도 만년 청춘이란다. 그래, 나에게도 청춘은 있었지, 나에게 펭귄이란 닉네임을 붙여 준 제자들 덕분에 나는 남극의 신사처럼 올곧고 멋지게 청춘을 보낸 적이 있었지.

 

 

 그 펭귄에게도 어김없이 겨울은 찾아오고 또 한 해가 저물려 하고 있다. 온 세상을 용광로같이 달구던 여름의 태양은 어디로 숨어 버렸는가? 베란다의 아침 햇살은 어찌 그리 인색한지 두 손을 내밀고 맞으려면 어느 새 숨어 버린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베란다 절반도 찾아 주지 않는다. 동향 아파트는 그래서 서럽다. 그러나 어찌하랴, 절반의 은택에도 감사할밖에. 쪽방 촌에 사는 독거노인이 얼마며 이 겨울에 동사하는 노숙자가 얼마인가.

 

  

 12월의 세상은 온통 선거물결로 쓰나미다. 공영방송뿐 아니라 지상파 방송은 모두 선거로 도배를 했다. 무슨 세상에 애국자는 그렇게 많은지, 말말이 애국이요 나라 살리는 비책이란다. 그러나 대부분은 구라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임을 국민은 안다. 그런데 정작 정치인은 모른다. 이게 바로 역설(逆說)이다. 기막힌 역설!

 

 

 광화문 광장은 시차를 두고 진분홍, 연녹색 머플러의 물결로 넘쳐난다. 왕의 남자들, 천하의 말꾼들은 다 모였다. 군중 뒤에 점잖이 않으신 세종대왕이 빙긋이 웃고 있다. “말꾼들아, 너희가 어린 백성의 마음을 아는가?” 세종대왕이 대갈일성을 하실 것 같다. 바로 앞 시청광장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구세군 자선냄비가 들어섰다. 어느 독지가가 일억을 기부하였다 하여 장안의 화제다. 기부자에 정치가는 없는 것 같다.

 

 

 오늘은 펭귄이 서울도서관으로 출근한다. 며칠 전에 도서관 회원증을 발급받았다. 나도 이제 당당한 서울시민이다. 왜냐하면 서울시민이 아니면 회원증을 발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산지도 벌써 삼 년이 넘었다. 그러나 언제나 이방인 같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르다. 인구 천만의 서울시민 중의 한 사람이다. 옛 서울시청 청사가 도서관으로 개조되었다. 내부시설을 완전히 개조해서 서울시민을 위한 지식의 산실로 만든 서울시에 정말 감사한다. 국제 열람실을 비롯하여 열람실에는 주니어뿐 아니라 시니어를 배려하여 연령에 관계없이 서로 간 대화가 가능한 공간을 마련하여 단절을 넘어 소통을 도모한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어 너무나 좋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세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도서관은 신대륙에 도전하는 젊은이의 타이타닉이다. 도서관에는 열람할 책도 많고 검색할 정보도 많다. 나는 도서관에서 나의 무료함을 떨쳐 버린다. 책들을 열람하고 책표지의 신선한 유혹에 흠뻑 취하다 보면 나는 어느 새 젊은이가 된다. 생물학적 젊은이가 아니라 생각의 젊은이로 거듭난다. 지금 우리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처럼 더 높이, 더 멀리 날개를 쳐야 한다. 그리하여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함께 울고 함께 웃어 주어야 한다. 공감과 소통을 위하여.

 

 

 서울 도서관 오른쪽 건너편에는 덕수궁이 눌러앉아 있고 궁을 안고 도는 돌담길을 돌아 조금 올라가면 서울시립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는 천경자홀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관람료는 기획전시를 제외하고는 무료이므로 부담이 없다. 서울에서 사는 쏠쏠한 재미는 미술품을 많이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볼 때마다 화가가 그 시대의 아픔을 체화(體化:몸으로 느끼면서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작업)한 모습을 보기에 다른 어떤 예술보다 좋아한다. 서울의 변천사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서울사진전도 기획전으로 전시되어 있어 이 또한 분외의 복이다. 개화기 서울의 모습으로부터 현재의 서울의 모습까지를 천개천 천변풍경을 비롯하여 서울의 중심거리의 변천사를 아울러 볼 수 있어 좋다. 이 사진전을 보고 있노라면 서울이 정말 인고와 환희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속에서 나는 나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갑자기 며칠 전에 본 TV의 어느 연예프로가 생각난다. MC가 예닐곱의 남녀 대담자들을 상대로 이혼을 주제로 대담을 벌이고 있었다. 이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한 갑론을박으로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MC가 뜬금없이 대담자들 가운데 앉은 한 원로 여성 연예인에게 주제와는 상관없는 질문을 했다. “OO 선배님, 남녀 간에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이때 이분, 대뜸 동문서답 같기도 하고 질문자에게 무안을 주는 것 같기도 한 말 한 마디를 내뱉는데 그 표정이 정말 너무나 진지해서 TV를 보는 나에게는 너무나 아픔으로 다가왔다. “사랑은 무슨? 빌어먹을, 다 주는 거야. 받으려면 상처만 남아.” 이 말 속에 담긴 뜻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나의 아내와 만나고 사십여 년만에야 알았다.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로 오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가난한 자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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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책 그리고 캠퍼스

묵상 2012. 10. 10. 16:13 |

“선생님, 김철입니다. 댁으로 몇 번 전화 드렸더니 소식이 없어 외국 나가셨나 했습니다”

언제나 들으면 반갑고 다정한 그 때 그 목소리의 제자 음성이다. 가을과 함께 묻어오는 추억의 목소리들, 올해 가을은 나에게는 유난하다. 아내의 육순을 맞는 가을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내를 만난 것도 가을이며 밤나무 아래에서 가슴조리며 기다린 것도 역시 그해 가을이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내가 즐겨 찾는 여기 시립대학교 캠퍼스엔 서서히 가을이 오고 있다. 학생들의 옷맵시가 사뭇 달라졌다. 남자야 뭐 늘 그렇지만 여자는 패션에서 계절을 읽을 수 있다. 소매가 길어지고 셔츠 위에는 가벼운 니트가 걸쳐지면 이제 가을이다. 옛날에는 두툼한 대학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도서관을 맴도는 것이 캠퍼스의 낭만이었는데 이제는 삼삼오오 교정의 비치파라솔 밑에 앉아서 스마트폰 조작으로 바쁘다. 님은 먼 곳에 있는 걸까?

 

 

 나는 오늘이 행복하다. 오늘 내가 대학의 캠퍼스를 거닐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 여기 대학은 젊음이 있고 꿈이 있고 낭만이 있어서 좋다. 나는 이곳에서 새로이 태어난다. 지난 사십여 년 전의 나의 대학생활은 정말 각박하였다. 나에게서의 대학 사년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고 낭만이 아닌 사실(寫實)이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나는 낭만을 그리워하고 아직도 꿈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고호와 고갱이 좋고 르느와르의 욕녀(浴女)가 좋다.

 

 

 캠퍼스의 한쪽켠에 자리잡고 있는 연못은 꽤나 고풍스럽다. 연못가는 이끼 낀 돌들이 어깨동무하며 주위를 감싸고, 물 위에는 부레옥잠이 무리지어 떠다닌다. 연못 위를 가로지른 반달 모양의 나무다리 위에서 수십 마리의 참붕어 새끼들이 어미를 따라 원을 그리며 물속을 유영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그대로 동양화 한 폭이다. 그러나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다른 한 손에는 아메리카노 커피잔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옛적의 우리 선조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니 말하자면 퓨전이라 할까?

 

 

 가을 단풍의 왕자는 단연 능수버들이다. 단풍이 꽃보다 배승(倍勝)하다는 것은 물론 정비석의 ‘산정무한’에서 알았지만 능수버들의 단풍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정말 몰랐다. 연못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여기 능수버들은 실실이 황금색깔을 띠었다. 꼭 페르시아의 황금빛 카펫 같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 스마트폰에 담아보지만 영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래, 아름다운 것은 그대로 두고 보아야지, 꺾어서야 되는가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한다. 캠퍼스에 찾아올 때마다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에 고마워하고 많은 것을 보려 한다. 왜냐하면 이것도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인생 이모작의 시기에 대학 캠퍼스를 찾을 수 있고 한 권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참 열심히 살아온 결과로 얻어진 행복이라 생각되기에 더욱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첫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아내에게 고맙다. 아내를 만난 지 사십사 년 동안 많이도 싸워 왔지만 아내는 내 인생의 아름다운 동반자요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또한 나는 자녀들에게 감사한다. 다들 잘 자라왔으니까. ]

 

 

 캠퍼스에 소리들이 몰려오고 있다. 나는 캠퍼스를 가로지르며 뻗어있는 넓은 보도 위에서 이 소리들을 맞고 있다. 캠퍼스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소음이 아니다. 나뭇잎 부딪는 소리, 낙엽 갈리는 소리, 보도 위로 굴러가는 젊음의 구두소리는 아름다운 화음이다. 나는 지금 가을 햇살을 가리는 파라솔 밑의 벤치에 앉아 이 화음을 즐기면서 책을 읽고 있다, <미술관 옆 인문학>이라는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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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묵상 2012. 9. 13. 22:13 |

 한여름날 서울의 기온이 35도를 웃도는 날이 열흘째 계속되고 있다. 18년만의 기상 이변이란다. 한밤중에도 열대야로 잠을 설친다. 강변이든 다리 밑이든 열기를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초만원이다. 꼭 죽을 것만 같다. 오늘은 또 어디로 피신을 해야 하나? 이제까지 즐겨 찾던 근린공원 정자 밑도 시원할 것 같지 않다. 청량리 롯데 백화점으로나 가 볼까? 거기는 백화점과 플라자, 마트가 한곳에 몰려있어 눈치 보지 않아도 좋다. 또한 고객이 왕이라는데 배짱 한번 부려보면 어떨까? 지하철에서 내려 자연스레 들어가기도 좋아 정말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그런지 요사이는 백화점 1층 로비는 연일 초만원을 이룬다. 볼거리도 많다. 연중세일 이벤트로부터 각종 문화행사까지 정말 고객을 위한 맞춤복 마케팅이다. 이래서 롯데는 글로벌 유통망을 세계로 내리 깔았는가? 참 재주도 좋다.

 

 

 인간 만사 막히면 답답하다. 부부간이 그렇고 부자간이 그렇다. 어찌 이뿐이랴. 세상은 종과 횡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해와 득실로 얽히고 영욕과 빈부귀천으로 얽힌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반목과 질시로 진흙탕 싸움이다. 세상 어디에 시원하게 뚫어줄 자 없는가? 항간에서 탈출 모티브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빠삐용은 그래서 대중의 우상이다. 쇼생크 탈출이 시원하고 도망자 시리즈가 대중을 매료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 막힌 것을 뚫어주고 가진 자의 승자 독식을 시원하게 날려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자녀들이 어릴 때의 이야기다. “얘들아, 오늘 아빠하고 대화 좀 하자.” 해 놓고 가족회의를 하면 언제나 똑 같다. “아빠, 이게 뭐 가족회의야? 아빠 혼자 실컷 아빠 말만 다 해 놓고, 우리는 듣기만 했잖아, 다시는 이런 가족회의 안 한다.” 뭐 이런 식이다. 그러니 우리 집에는 애시당초 아빠나 남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폭군 한 사람만 있을 뿐 도대체 소통이 없다.

 

 

 올해 여름 우리나라의 하늘이 왜 이렇게 달구어졌는가? 자연의 질서가 깨뜨려졌기 때문이다. 자연도 막히면 광분한다. 사람들은 다를까? 우리나라는 G7에는 들지 못해도 G20에는 든 국민소득 2만 불의 선진국이다. 그런데도 7년째 세계에서 자살률 1위의 나라다. 하루에 42명꼴로 매일 죽는다. 원인이 무엇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후진국의 여러 나라와 비교해 보아도 상당히 낮은 편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돈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한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나다. 60년대 이후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는 산업화 과정에서 돈의 위력을 최대로 맛본 나와 같은 기성세대다. 멀리는 못 보더라도 내 자식에게라도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할 어른세대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치지 못한 책임이 재앙으로 되돌아온 결과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돈을 섬기는 물신주의에 빠져 모든 가치관을 유물적(唯物的) 사고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한국사회는 돈이 양반이다.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을 읽어 보라. 양반이면 안 되는 게 없다. 오늘날이 그렇다. 그러기에 돈으로 부부간을 막아 버리고 부모와 자식 사이를 막아 버린다. 한강은 유유히 흐르지만 돈이 남북으로 갈라놓는다.

 

 

 대안은 없는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돈이라면 최고라는 잘못된 외길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돌이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가? 자녀를 낳으면 일류 대학에 입학시켜야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생각이 복잡하다. 그래서 1차, 2차 5개년 계획들을 세운다. 왜 일류 대학인가? 바로 돈이다. 일류 대학 나오면 돈 많이 받는 대기업이나 사(士)자가 보장되는 라이선스를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녀들을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이라 생각하고 감사하지 않는다. 자녀들의 능력이나 취미, 적성 등을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은 다반사고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는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내 자식만 생각하는 지극한 이기주의가 날로 팽배해져 이제는 소위 사회 지도자층에서도 더불어 사는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사회화 훈련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진정 이 사회에 황희와 같은 청백리는 없는가? 이 시대는 청빈(淸貧)을 요구할 수 있는 전제군주 시대가 아니다. 자유와 경쟁이 가치로 자리 잡은 민주자본주의 시대다. 그러기에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와 같은 청부(淸富)가 미덕이요, 그러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더욱 그리워진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기성세대의 잘못된 가치관으로 도처에서 체증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멀지 않아 추석 귀성길 고속도로는 자동차로 뒤범벅이 될 것이다. 도로야 막히면 뚫으면 되지만 내 안에 막힌 답답함은 어쩌노? 남편과 아내가 생각이 달라 끊임없이 평행선을 달리고 부모와 자식이 평행선을 달려만 가니 누가 뚫어줄꼬? 나만 옳다는 생각으로 아무리 달려가도 평행선일 뿐이다. 만나는 접점(接點)은 없다. 이제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내려놓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되돌아보는 것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절대시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상대화하는 것이다. 내 것만이 옳고 네 것은 틀리다는 혹백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치관과 인생관은 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잘못된 가치관과 인생관의 관성에서 벗어나리란 쉽지 않다. 그러기에 대단한 결단이 필요하다. 내가 잘못된 가치관으로 나의 자녀들을 강요하고 있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다. 나보다 나의 자녀들은 살 날이 많다. 나의 사랑스런 자녀들의 앞날의 행복을 위하여 이것쯤은 해 줘야 되지 않겠나.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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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가 필연인가

묵상 2012. 7. 11. 14:33 |

 오늘은 참으로 즐겁고 설레는 날이다. 사돈댁에서 나들이를 함께하자는 제안이 왔기 때문이다. 나는 사돈 내외와 모처럼 동승하여 바깥사돈이 직접 모는 승용차 안에서 한여름의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차는 서울 시내를 빠져나와 경부고속도로 위를 질주한다. 일요일 늦은 오후이니 주말도 막판인데 차는 왜 이리 많은지, 톨게이트까지가 한 시간 남짓 걸린다. 참 세월도 많이 변했다. 처음 경부고속도로가 뚫렸을 때는 차라고 해 봐야 고속버스나 트럭 몇 대 정도가 고작이었으니까.

 

 고속도로 위를 달려보면 나라의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 특히 화장실이 그러하다. 세계에서 우리나라 고속도로 화장실이 최고다. 뉴욕이나 파리를 여행하는 관광객이라면 한번쯤은 화장실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2000년 여름이다. 내가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스카이 라운지에 올라갔을 때의 일이다. 전망대에서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는데 화장실가야 할 일이 생겼다. 화장실 앞에는 남녀가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때 화장실 때문에 겪었던 너무나 난감한 일을 지금도 뇌리에서 지울 수 없다. 우리나라가 제 1회 국제 화장실대회를 개최한 주최국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고속도로 화장실이 바뀐 하나의 사건이 우리나라를 문화의 선진국으로 끌어올린 근본적 계기가 되었다 주장한다면 이는 지나칠까?

 

 세상에는 우연이란 없다. 고속도로 화장실 대변혁의 원인을 나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한 전직 군사령관 출신의 도로공사 사장이 취임한 이후 제일 먼저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을 개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신선하고 충격적인 일인가! 옛날 우리네 조상들은 화장실을 뒷간이라 부르면서 멀리 두기를 좋아했다. 냄새나고 불결한 곳이니까 당연히 집 뒤 으쓱한 곳에 두어야 했으리라. 우리속담에도 뒷간과 처가는 멀수록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한 최고경영자의 발상의 전환으로 화장실을 나의 안방같이 가꾸고 나의 가장 가까이하는 친근한 곳으로 바꾼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아니고 무엇인가.

 

 차는 경부고속도로에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로 진로를 바꾸고 얼마 후 논산에서는 다시 호남고속도로를 갈아타고 달리다가 다시 장수익산간 고속도로로 진입하여 달리더니 이번에는 광양익산간 고속도로 위를 바꿔타고 쾌주하기 시작한다. 이 좁은 나라에 왜 이리 고속도로가 많은지 국도나 지방도를 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진짜 행복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어디 우연이 있는가? 이 많은 고속도로를 누가 만들었는가? 비로 우리네 산업역군들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나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으면 우연으로 돌려 버린다. 심지어 나의 나고 죽음까지도 말이다.

 

 과연 나는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그리고 우연히 죽어 가는가? 과학자들은 인과론을 절대시한다. 그런데도 유독 우주생성은 우연이라 주장한다. 이 얼마나 기막힌 자기모순인가. 나는 산이나 들판에 나갔다가 개미떼들을 보면 생각에 잠길 때가 많다. 만약 내가 저놈들을 밟아 짓뭉개 버리면 저놈들은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죽어갈까? 재수가 없어 여기서 죽는다고 말할까? 아니면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죽는다고 말할까? 그들이 뭐라고 말하고 죽는다 하더라도 그를 죽인 자는 분명 나요 나의 구둣발임이 분명하다.

 

 얼마 전에 나는 집 근처의 공원에 나갔다가 나와 연배가 비슷하게 보이는 한 남자분을 만났다. 나는 공원으로 나갈 때면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한다. “주님, 오늘도 복음을 전할 한 영혼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날따라 저녁때가 되어 그런지 공원은 고즈넉하였다. 벤치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에 내장된 성경을 읽고 있는데 맞은편에 한 남자분이 앉아 있다. 얼핏 보니 퍽 쓸쓸해 보인다. 내 마음속에서 자꾸 가까이 가 보라는 사인이 온다. 나는 속으로 성령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인이라 생각하면서 그분 곁으로 다가가 말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그분 역시 은퇴자였다. 오랜 공직 생활을 끝내고 낯선 서울로 올라와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오랜 먹물 생활이 몸에 배어 있어서 그런지 자신을 쉽게 오픈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그와 대화를 나눈 지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선생님은 세상에 우연이 있다고 믿습니까?” 그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을 찾아 보여 주면서 확고하고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나를 지으셨습니다.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나고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필연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합리적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연으로 돌리지만 창조물에는 그것을 지은 창조자가 있고 그 창조물에는 창조자의 목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많은 혼란을 겪는 것 같았다. 생각의 충돌이 일어날 때면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나는 어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른은 생각이 많고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고정관념이 많다. 이 고정관념이 철옹성이다. 그래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 오늘은 여수엑스포 가는 날이다. 아침을 먹고 바깥사돈과 가벼운 마음오로 차에 오른다. 1992년 대전 엑스포 이후 20년 만이다. 그때는 아이들과 함께 갈 것이라고 날짜까지 잡아놓고 있었는데 폭풍우가 몰아쳐 우리가족의 엑스포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내 평생에 엑스포 관람은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차는 조금 후 이순신대교로 오른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광양여수간 소요 시간이 80분이 걸렸단다. 그런데 이제는 10분이면 족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현수교로 길이가 2260m다. 더욱 자랑스러운 것은 주탑높이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발 270m. 참으로 장관이다. 한국의 토목공학 기술이 이 정도인가 생각하니 정말 감개무량하다. 여수 앞바다는 해수의 유속이 굉장히 빠르다. 바다위로 교각을 세우기가 결코 쉽지 않을 터인데 63빌딩보다 높은 교각을 세우고 지구를 두 바퀴나 돌 양의 강선을 엮어 케이블을 만들고 양 교각을 케이블로 연결한 현수교는 필연(必然)의 결정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온통 에메랄드빛이다. 건너편 광양항의 컨테이너부두에서는 연신 화물들을 하역하고 있다. 1976년, 내가 처음으로 여수를 방문했을 때는 여수는 정말 조용한 어항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공단의 화학단지를 지나면서 우리민족의 위대함을 실감한다. 원유정제공장 간에 거미줄같이 엉겨있는 가스관과 원유관이 우리나라의 에너지 심장부가 여기임을 확인하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여행의 둘째 날, 오늘은 정말 내 개인에게는 의미 있는 날이다. 왜냐하면 내 신앙의 뿌리를 찾아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는 백여 년밖에 안 된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와 호주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기독교 선교에 힘썼지만 주로 미국과 캐나다, 호주 세 나라 선교사가 우리나라를 지역별로 분할하여 선교하였다고 들었다. 그런데 호남지방으로 들어온 선교사가 가장 먼저 들어온 지역이 바로 순천지역이다. 지금도 순천과 그 인근지역은 기독교 인구가 많음을 이번에 확인하게 되었다. 내가 이틀 동안 묵은 지역은 순천 인근 지역인데 일찍이 백여 년 전에 미국의 선교사가 들어와 교회를 설립한 곳으로 주민의 70%가 교인이라 한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교사가 들어와 마을에서 최초로 교회를 세운 곳에 지금도 교회가 그대로 남아있다.

 

 바깥사돈이 이번에 나를 인도한 곳은 기독교 선교 백주년 기념관이다. 이곳은 깊은 산 속에 위치해 있었다. 선교사가 직접 교회를 세우고 마을 사람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전한 그 자리에 전라남도 기독교 연합회에서 헌금을 모금하여 기념관을 세워놓았다. 나는 이곳을 방문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정말 감사하였다. 이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을까 생각하니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너무나 고마워진다. 나는 이들에게 빚진 자다. 그러기에 나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세 분의 순교비도 세워져 있었다. 나는 이곳을 방문하면서 초기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아왔는지를 생생히 느껴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였겠지만 차츰 박해를 받았을 것이고 그 박해를 피하여 산 속으로 산 속으로 은신하여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 복음을 전하여 현지인 사역자를 양성하였을 것이고 복음의 사명에 불타는 현지사역자가 마을로 돌아와 가정교회를 열고 교회를 시작하였을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 선교사역의 역사다.

 

 여러분은 짱뚱어란 고기를 아시나요? 이놈은 남해안 개펄에서 사는 정말 못난 놈입니다. 몸통은 개펄처럼 시커멓고 아구(입)가 커서 정말 못생긴 놈입니다. 옛날에는 어민들조차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벌교나 순천지방에서는 별미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순천의 생태공원, 얼마 전까지도 순천 갈대숲이라 불렸던 곳을 방문했다. 바로 이곳에서 짱뚱어를 만났다. 물이 빠진 개펄로 여러 놈이 기어올라 한여름의 선팅을 즐기고 있다. 말 그대로 못난이다, 참 시대를 잘 만났다. 옛날이면 어디 고기축에도 들었을까? 그러나 지금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짱뚱어탕 한 그릇에 자그마치 사만 원이다. 엄청 비싸다.

 

 세상만사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다시 한번 만사가 필연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자연의 일이 그렇고 인간의 일이 그러하다. 결과에는 원인이 반드시 있다.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 여러 사례에서도 지적하였듯이 결과와 원인이 가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결과와 원인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람이 그 둘을 동시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를 한다. 요사이 우리나라에는 남녀노소, 식불식(識不識) 간에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자가 많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일들을 보면 내 속에서 분노가 일어난다.

 

 나는 우연히 와서 우연히 가는 존재가 아니다. 태어난 목적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리고 가야 할 곳이 확실히 있다. 태어남이 필연이요 죽음이 필연이며 죽음 이후의 가야 할 곳이 어디임을 성경은 밝히 말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우연적 삶을 살지 않는다. 당당히 필연적 삶을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창조되었으며 나를 창조한 분이 누구이며 나는 죽음 이후에 어디로 가는가를 알고 살기 때문에 나의 삶이 자조적(自嘲的)이거나 절망적(絶望的)이지 않다. 오히려 소망적(所望的)이요 환희(歡喜)의 삶이다. 절망적인 사람의 삶의 특징은 자기방치 내지는 자기방기(自己放棄)다. 자기를 아무렇게나 내버리는 삶이다. 자기를 방치하지 않는 삶은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따르는 삶이다.

 

 “나의 하나님, 나를 지으시고 나의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시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오늘도 나의 앞에 행복하고 가슴 벅찬 일을 준비하실 당신을 기대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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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공유하라

묵상 2012. 5. 23. 17:55 |

 어제 한 일간지를 보다가 참 마음이 흐뭇했다. 우리나라 한 대기업의 등기임원 평균 연봉이 100억원을 넘어섰다는 기사다. 이날은 또한 2011-2 유럽 챔피언십에서 첼시가 우승컵을 거머쥐었다는 소식으로 안방이 떠들썩한 밤이기도 하였다. 나는 첼시가 그라운드를 누빌 때면 꼭 대한민국이 세계를 누비고 있는 환상에 젖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수들의 가슴에 새겨진 낯익은 로고 때문이다. 한 기업이 세계적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과 어려움이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며 우선 그 기업에 찬사를 보낸다. 세계적인 두뇌들을 스카웃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을 것이며 연구개발과 생산, 판매를 위하여 밤을 새워야 했던 임원, 근로자들의 노고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CEO와 임원 그리고 근로자들의 진정성이 곧 최고의 경쟁력이요 최고의 브랜드임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된 계기가 되어 이 한 밤이 마냥 즐거운 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밤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낸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자는 별로 많지 않다. 나도 최근에야 모 일간지 기사를 통해 알았으니까. 기부금이 우리 돈으로 8000억원이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건립기금 600억원을 선뜻 기부하고도 마냥 부끄러워하는 이분의 모습에서 “어린(어리석은) 백성이 니르고져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이 있는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라” 하신 세종대왕의 애민(愛民) 정신을 보는 듯했다. 나는 이분의 다음 말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내가 기업인이기에 돈 버는 데는 남 다른 재주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을 더 벌면 재벌밖에 더 되겠습니까?” 이 말을 들어보면 이분은 분명 재벌은 아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최고의 멋쟁이로 느껴진다. 멋이 무엇인가?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권리를 나에게만 쓰지 않고 남과 더불어 나누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이렇게 멋지게 한번 살고 싶지 않은가?

 

 나는 재벌을 맹목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나는 이번의 기사를 통하여 한 재벌기업의 임원연봉 1년치가 2조원이 넘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조원이면 천문학적 금액이다. 재벌이 임원연봉 1년치만 열악한 대학의 기초 과학 연구에 기부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인재를 배출할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철의 왕국 포항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흥해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영일만의 바닷가 한적한 야산 한 자락 끝에 자리한 한동 대학교, 이 대학에는 정말 많은 석학들이 와 있다. 돈으로 따지면 연봉이 최소 백억은 다 넘는 분들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오로지 사명 하나로 왔다. 돈의 위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지만 돈이 사람을 돌게 만들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 초연해진 사람이 있다. 나는 한동대학에서 이런 분들을 만나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이분들 중 상당수는 미국에서 연구하던 과학자들이다. 이분들이 한동대학의 설립목적을 알고 이 대학에 동참했던 것이다. 내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이 대학의 총장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렇다. 바로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이 학교는 학교 운영의 상당부분을 이 대학을 졸업한 동문들의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가슴이 뭉클하였다. 정신은 정신을 낳고 인재는 인재를 낳는다는 말은 언제나 진리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가? 이제는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을 따져 보아야 할 때다. 하잘 것 없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며 바둥거리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부부가 싸우다 싸우다 결론이 나지 않으면 한마디 내뱉는 말, “그래, 너 잘났다.” 우리는 도처에서 서로 잘난 것 때문에 싸운다. 수탉 두 마리가 암탉을 사이에 두고 왜 싸우는가? 내 잘났다고 싸우는 게 아닌가? 인간 사회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돈으로 경쟁하고 자리로 경쟁하고 미모로 경쟁하고 하다 보니 싸움할 일만 남는다.

 

 대학 입시에 논술이 등장하고 난 이후 우리나라에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한 권 있다. 그게 바로⟨논리야 놀자⟩라는 책이다. 나는 이 책으로 많은 학생들에게 논술 지도를 해 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논리적 오류는 무엇인가? 흑백논리의 오류이다. 흑백논리의 오류에 빠진 자는 내편이 아니면 모두 나에게는 적이다. 내가 선이면 상대는 악이기에 뭉개 버려야 하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기에 공감이 없고 공존이 없다. 가정에서는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가 그렇고 회사에서는 상관과 부하 사이가 그렇다. 학교는 어떤가? 내 자식이 최고니까 내 자식을 훈계하면 안 된다. 교사는 교원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지식을 파는 자일뿐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교단생활 삼십삼 년 동안 참 많이도 매질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잊지 못한다. 자신이 스스로 깍지 못하는 제 머리를 내가 깎아 주었으니까.

 

 요사이 부모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신세대부모라 부르면서 편을 가른다. 그러나 부모의 개념 속에는 신세대 구세대가 없다. 왜냐하면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꼭 같기 때문이다. 소위 자신들이 신세대라 스스로 일컫는 자들은 농사법을 모른다. 그들이 언제 밭에 나가 씨를 뿌려 본 적이 있는가? 내 자식 무서운 아이로 키우고 싶지 않거든 오늘 당장 주말 농장을 한 밭떼기 마련해 보라 권고해 보고 싶다. 그리고 그 밭에 씨 뿌리고 기다려 보라. 씨 뿌린 밭에 무엇이 함께 나는가를 보라. 내가 뿌리지도 않은 잡초씨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잡초는 새싹보다 훨씬 더 많다. 그 잡초가 나중에 곡식의 새싹을 자라지 못하게 하고 감아 올려서 온통 잡초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자식 농사도 매 한가지다. 고운 자식일수록 더 엄하게 키워야 한다. 여기서 엄하게란 말은 ‘절제 있게’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 나만이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겸손을 배워야 한다. 겸손을 가르치는 최고의 스승은 자연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명이 긴 나무는 양평 용문사에 있는 일천오백 년 된 은행나무란다. 나무박사의 말이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이상은 살지 못한다. 삶이 그렇고 앎이 그러하다. CEO를 넘어 재벌을 꿈꾸는 젊은이여, 꿈을 꾸며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꿈을 꼭 이루기를 바란다. 그러나 다음 말을 마음에 새기며 자신에게 되물어보기를 바란다, “재벌 되고 난 다음에는 무엇 할래? 그 돈으로”

 

 돈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영원은 안 된다. 영원은 결코 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그 많은 돈 움켜쥐고 놓으려 하지 않는 어른은 마치 양 손에 과자를 잔뜩 쥐고도 더 달라고 때 쓰는 어린애 같다고나 할까? 어른들이여 제발 철 좀 들게. 철들자 죽는다더니 일찍이나 철들면 할 일 좀 하고 가지. 그러면 돈 없으면 할 일도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나 같이 돈이 없어도 글재주가 있지 않은가? 나에게 없는 것을 탓하지 말고 있는 것을 찾아보자. 찾아보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많다. 있는 것으로 나누면 된다. 이것이 인생을 공유하는 것이다.

 

 요사이 재능 나누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홈스쿨에서는 여러 가정의 부모들이 자기의 전공과 재능을 살려 학생들의 훌륭한 교사가 되고 있다. 문제는 내 것을 내놓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내 것을 공개하면 경쟁에서 뒤진다는 생각이 우리를 늘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놓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는 것이다. 요사이 취업을 앞둔 젊은이에게 중압감을 주는 말이 무엇인가? 스팩이란 말이다. 그래서 스팩을 쌓기 위하여 학원에 다니거나 해외연수를 다녀오기도 한다. 그 흔한 자격증 몇 개쯤은 기본으로 따 두어야 면접시험에서 낙방하지 않을 테니까. 요사이는 남보다 차별화 된 그 무엇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이다. 블루오션 이론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차별화된 전략이다. 인생의 성공조건에 차별화 전략이 필요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나는 그래서 이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물구나무서서 세상 바라보기는 생각의 틀을 바꾸라든지 고정관념을 깨라든지 하는 발상의 전환을 위한 한 교육 프로그램의 일종이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공한 연후에 그 성공의 과일을 독식하지 말자는 말이다. 과식하면 설사하고 오히려 손해를 보듯이 돈도 재능도 가질 만큼 가진 자들은 이제 자기가 취할 만큼 취하고 나누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하나도 아닌 두 아들을 세계적 명문대학에 나란히 교수가 되게 하는 영광을 얻은 가정을 소개한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다. 두 아들을 기른 아버지의 말씀 왈(曰) “50%는 너 자신을 위해 살고 나머지 50%는 나라와 세계를 위해 살아라” 이 친구들 이제는 정작 자기를 위해 사는 데는 자신의 열매의 오분의 일로도 족하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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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2

묵상 2012. 4. 18. 12:04 |

 지구 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해수온도가 상승하자 북극권의 대기온도가 올라갔다는군요. 그게 뭐 대수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숩니다. 왜 그러냐구요? 봄이 오지 않습니다. 예년 같으면 벌써 봄꽃이 지고 신록을 준비해야 할 때인데도 4월의 중순도 훨씬 지난 지금에야 겨우 벚꽃을 서울에서 보게 되네요. 왠 줄 아십니까? 북극권이 더워져 찬 공기를 북극권이붙잡아 두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쟎아요.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러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타고, 더 많이 움켜쥐고픈 나의 욕심이 지구로 발광(發狂)나게 하는 것입니다. 열대우림이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한다는군요. 얼마 전 영상으로 세계의 3대 폭포를 보았습니다. 그 중에 둘은 열대우림 한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세 개 나라와 경계를 하고 있는 남미의 이과수 폭포는 내가 가 본 나이아가라 폭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나를 압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장관도 얼마나 더 불 수 있을지 미지수랍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한 무분별한 벌채(伐採)는 열대우림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행복을 꿈꾸세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나에게 행복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면서 기대하십시오. 기대하는 자에게는 설렘이 있습니다. 설레며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서 베란다의 창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다가 맞은 편 산자락 위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일출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저층이라 불평했고, 동향이라 불평했던 나에게 아침 일출을 선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새삼 감사했습니다. 연한 새싹을 이제 막 내민 나뭇가지 사이로 솟아오른 새빨간 태양은 늦가을 감홍시보다도 더 붉었습니다. 이 어찌 동향의 저층에 사는 나만의 분복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가지는 알맞은 욕심이 잘못일까요? 아닙니다. 알맞은 욕심은 당연한 욕구(欲求)입니다. 그러기에 알맞은 욕심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선물을 감사하게 받는 것은 순리(順理)입니다. 순리를 지키지 않으면 유기체와 그 유기체가 속한 가정과 사회는 도태되고 마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고 최선의 지혜와 최선의 노력으로 수확을 얻으려 노력하는 행위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따르는 거룩한 행위인 것입니다. 생업(生業)은 성직(聖職)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탐심(貪心)입니까? 성경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탐심은 바로 죄를 낳는 욕심입니다. 인간 최초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내가 먼저의 글 ‘약속’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약속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이요 선언적인 것이라면 인간의 그것은 쌍방적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인간은 그가 지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인간에게 행복하게 살 권리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권세와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은 자기의 주권적 선언이신 약속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2장 16∼17절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선언적 약속을 인간에게 주셨을까요? 바로 인간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인간으로 하여금 확실히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첫째, 인간은 피조물(被造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해 아래서 새것은 없나니’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둘째. 인간은 흙이라는 것입니다. 그 코에서 영이 떠나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찾아온 거짓의 아비 사탄은 이브에게 무어라고 꾀고 있습니까? 창세기 3장 4∼5절을 보십시오.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말합니다. 이브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리고 창세기 3장 6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인간의 비극인 죽음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한 인간의 죽음이 여기에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바로 나의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죽음은 나를 죄와 심판과 지옥으로 끌어가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신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뿐 아니라 나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나도 죄와 사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좀 더 깊이 살펴볼까요? 이브는 왜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을까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탐심이 내면 깊숙이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탐심은 우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상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마음이 가 있는 그것이 우상입니다. 이브는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자기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탐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 자기 오만 바꾸어 말하면 자기가 곧 하나님이라는 망령된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비극입니다. 이 오만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을 불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필연 불순종으로 귀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얼마나 분명합니까.

 

 탐심에 사로잡힌 자의 특징을 보십시오. 욕심이 자기를 삼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합니다. 돈에 미치면 돈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합니다. 명예, 지위, 여자,… 다 마찬가지입니다. 탐심에 사로잡힌 자는 오만합니다. 그것만 가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하는 미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얻기 위해 그것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돈을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영혼을 파는 것입니다. 영혼을 누구에게 팔까요? 사탄에게 파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와서는 지식이 우상이 된 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상대적 가치 그 이상은 결코 천착(穿鑿)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깊이 파고 들어가도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유(萬有) 속에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만유를 지으신 자시요 만유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더할수록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증명할 뿐입니다.

 

 인간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탐심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의 주로 영접하는 길 이외에는 없습니다. 죄는 주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을 주인으로 삼아 사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한 피흘림만이 나의 모든 죄를 깨끗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요19:30)

 

 나는 여기서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사적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을 낙원에서 쫓아내신 하나님이 다시 택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브라함입니다. 이를 성경은 밝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系譜)라”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가나안(지금의 팔레스타인)이 아닌 갈대아 우르(지금의 이락)에서 살았습니다. 아담의 아들 셋의 후손이지만 아버지는 우상을 만드는 자라는 기록으로 보아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부르셔서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명령하셨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순종하여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살펴보면 기복(起伏)이 많았지만 최종 결론을 내리면 믿음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됩니다.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을 때도,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을 때도 한결같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4:18) 하나님이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오고 오는 세대에 경고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탐심의 대상이 되거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짧습니다. 참으로 순간이지요.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모든 것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갔는지를. 그러나 나에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다시 내가 시작해야 할 세상이 있습니다. 그 세상은 영원합니다. 그 영원한 세상에서의 행복한 보장을 성경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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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행

묵상 2012. 3. 7. 11:58 |

 오래 전 일이다. 겨울 철새들이 보고 싶어 주남 저수지에 간 일이 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저수지의 전망대에 오르니 철새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대략 십만 마리 정도에 이른다 한다. 고니, 재두루미, 청둥오리, 기러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이 두 발로 물살을 차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군무(群舞)를 볼라 치면 정말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그래서 언젠가 나는 또 한번 금강 하구언을 찾은 적이 있다. 덩치가 큰 고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은 꼭 보잉 747기가 활주로를 이륙하는 것 같다. 두 발을 가지런히 뒤로하고는 물살을 차고 하늘로 15도 각도로 날아오른다. 내려앉을 때도 너무나 닮았다. 비행기가 랜딩 기어를 내리고 활주로를 미끄러져 내리듯 두 발을 나란히 앞쪽으로 모으고 스키를 타듯이 물위로 내려앉는 것이다.

 
오늘 나는 중양천 둑 위에서 겨울 철새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놈들은 갈 길도 바쁠 터인데 아직까지 미그적거리고 있다. 언제쯤 북쪽으로 떠날려나 궁금하다. 몽골이나 시베리아가 지척이 아닌데 제대로 주린 배나 채웠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참 재미가 있다. 꼭 두 마리씩이다. 조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암컷과 수컷을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수컷은 목에 흰 테두리를 하고 있다. 한 놈이 자맥질을 하다가 짝을 놓칠라 치면 잽싸게 다시 자기 짝에게로 돌아온다. 어떤 놈은 배불리 먹었는지 물 밖으로 나온다. 한 놈이 나오면 꼭 나머지 한 놈도 따라 나온다. 몸통에 비해서 유달리 두 다리가 가늘다. 필연 뒤뚱거리기 일쑤다. 저러다가 짓궂은 개에게라도 물리면 어쩌노… 걱정이 된다. 참 창조의 질서와 오묘함이 고마워진다. 저들에게 날개가 없었다면 아마 지상에서 기러기류(類)는 제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늘의 나의 이 들여다보는 즐거움도 없었으리라.

 
나이 오십을 넘긴 사람이라면 아마 미국쯤은 한 번 정도는 가 봤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미국은 새삼스러운 나라도 아니다. 그러나 ‘미국의 트러커’에 관하여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대형 트럭을 모는 운전기사들이다. 나는 어느 지상파 방송에서 미국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한국교포의 트러커 생활을 취재하여 소개한 기사를 보면서 참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기사를 재구성해서 소개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두 가지의 보물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름다운 동행이요 나머지 하나는 치열함이다.

 
미국에서 대륙을 횡단하며 미국 전역을 누비거나 아니면 멀리 캐나다 동 서부까지 뛰는 장거리 트러커는 약 오만 명이 되고 있단다. 게 중에 한국인은 겨우 1%인 오백 명이다. 이들 대부분의 생활은 도로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것도 끝없이 펼쳐진 하이웨이 위에서다. 어쩌다가 도로 위에서 멀리 지평선 너머로 내려앉는 낙조를 볼 때면 정말 행운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맡겨진 화물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제 시간에 맞추어 배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에겐 시간을 마냥 즐기거나 자연의 풍광(風光)에 취할 여유가 없다.

 여기 한 커플로 소개된 한국교포 한 쌍은 정말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나는 지금도 이 한 쌍의 행복이 계속되길 빌어본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 이들과 이들의 가족을 축복하소서. 나는 이들 부부를 통하여 행복을 배웠습니다.” 이 부부는 언제나 둘이지만 하나였다.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운전석 뒷좌석을 아름답게 꾸며 주었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디스크자키를 자청한다. 그리하여 언제나 함께 간다. 정말 아름다운 동행이다. 집에는 보름에 한 번 정도이다. 부부가 함께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가 좋다. 서로가 배려하는 모습은 정말 눈물 나도록 아름답다. “여보, 오늘은 휴게소에서 뭘 먹을까? 저녁은 내가 쏜다. 당신 먹고 싶은 것 다 먹어” 아내가 남편의 기(氣)를 채운다. 보약 중에 제일 좋은 보약은 배려와 인정이다.

 
오백 명의 한국 트러커 중에는 대부분이 혼자이다. 어떤 이들은 고가 도로 위에서 보내는 나날의 고독을 사진으로 달래거나 책읽기 내지 글쓰기로 자기를 달래며 가족에의 그리움을 대신하고 있다. 사진이나 책읽기 등 여가는 이들에겐 사치다. 그러나 이 사치를 치열(熾烈)함이 극복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라. 이들이 트러커인 자신에게 사진이나 글쓰기가 가당한 일이냐고 냉소하며 그 일들을 버렸다면 트러커의 생업도 조만간 끝내고 말았음이 틀림없다. 이들이 핸들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이러했다. “나 같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체험을 할 수 있어요? 나는 행운아지요. 나는 하이웨이 작가입니다.” 바로 이것이 트러커로서의 자부심의 동력(動力)이다.

 
이들에게는 삶의 치열함이 삶의 매너리즘으로부터 이들을 구했다. 삶의 치열함은 썩음을 방지한다. 바닷물은 썩지 않는다. 바닷물에 소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3%다. 3이 나머지 97의 썩음을 방지한다. 우리의 삶에서 치열함이 있다면 개인이 살고 그 개인이 소속되어 있는 가족이 행복해지고 나라가 행복해진다.

 
바닷물을 바닷물되게 하는 요소가 3%의 소금이라면 내 삶의 치열함의 요소는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순수(純粹)라 말하고 싶다. 순수가 없는 치열함은 가식(假飾)이다. 예를 들어 보자. 한 사람이 자기의 짝을 두고 다른 이에게 사랑의 치열함을 보였다 하자. 그 치열함은 결국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가식이요 자기기만(自己欺瞞)이다. 순수가 전제되지 아니하는 치열함은 썩음을 방지하기는커녕 썩음을 더욱 부채질하게 된다. 사회에는 종종 잘못된 열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는 일들을 볼 수 있다. 잘못된 인간의 야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 왔는가?

 
나는 길거리를 가다가 인도 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휴지조각을 보게 되면 줍게 된다. 언젠가는 주운 휴지를 버릴 통이 없어 한참 동안이나 들고 다닌 적이 있다. 나의 치열함으로 인하여 행복해 하는 이웃이 있다면 이 또한 얼마나 행복한가!

 
“인생에 남는 것은 자식과 여행뿐이다” 라는 말이 있다. 서양 사람들은 돈을 모으는 목적이 여행을 하고자 함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말대로 서양 사람들은 여행에 목숨을 거는 것 같았다. 일정액이 모이면 다니던 직장에도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여행을 떠나는 모습도 보았다. 정말 나에게는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방송 프로에 ‘그곳에 가고 싶다’는 프로가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즐겨 보곤 하였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드물다. 일생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을 가보고 포토나 영상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싶은 것도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알프스, 눈 덮인 킬리만자로, 만연설의 알래스카 빙하, 루레이 동굴 등, 시간과 돈이 허락된다면 소중한 분들과 훌쩍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분명 좋은 일이라 생각된다.

 
용산에 있는 국립 박물관의 전시실은 조도가 굉장히 낮아서 나에게는 불만이 많다. 시원히 밝아서 잔글씨도 잘 보이면 좋을 텐데 왜 그리 어둡게 해 놓았는지 용을 써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죽고 먼 훗날 내 삶을 들여다볼 자들이 있을까를 생각하며 나는 살아야 한다. 세상에는 자기 자식들도 자기 부모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는 삶을 살아가는 부모들이 많다. 말하자면 이들은 막살기 삶을 사는 자들이다. 왜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가? 구린내가 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삶이 자식들에게 구역질나는 삶으로 각인되어 있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나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렇게 기억한다. ‘우록어른은 법 없이도 살 사람, 청도댁은 시골교회의 새벽종치는 박 집사’ 로.

 
먼 훗날, “얘들아, 오늘은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하며 아이들을 재촉하는 나의 아들과 딸들을 상상하며 나는 오늘도 나의 작품을 열심히 만들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선포와 복음 전파를 위하여.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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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묵상 2012. 2. 2. 11:04 |

 새해 첫 달의 마지막 날 밤에 함박눈이 하얗게 내리고 있다. 대도회지에서 맞이하는 눈꽃들의 환희에 함께해 보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솜털같이 가벼운 눈송이가 내 어깨 위에 사뿐사뿐 내려앉는다. 정말 기분 좋은 밤이다. 한겨울의 눈꽃만큼 소년을 설레게 하는 사건은 없다. 소년은 눈 내리는 논두렁 밭두렁을 삽살개와 함께 내달린다. 그 소년이 이제 고희를 바라보며 서울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성스러운 눈송이를 두 손 모아 맞고 있다.

 
이 밤에 나는 조용히 생각해 본다. 아름다운 삶은 무엇일까? 자연은 약속을 지켜 작년에 내린 눈이 올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와 긴 겨울밤이 새하얀 눈송이로 이불을 덮는데 인간 사회에는 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까? 정계가 그렇고 재계가 그렇고 교육계도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어디에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면 인간 사회에는 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까?

 
인간에게 있어서의 약속은 일방적이 아니다. 언제나 쌍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파기권(破棄權)이 약속한 주체에게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약속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다. 쉽게 약속하고 쉽게 그 약속을 깨뜨려 버린다. 약속을 쉽게 깨뜨리는 사람의 내면을 살펴보면 사악한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자신만이 목적이요 가치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약속이 상대에 대한 나의 전인적(全人的) 존중이요 또한 나의 전인적(全人的) 담보임을 인식하지 않는다.

 
인간사에 약속의 허망(虛妄)함을 비꼬는 말로 “인간은 믿을 존재가 아니다. 다만 사랑해 주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요사이 TV 패러디 물에 ‘내 남자는 나의 팻’이란 프로가 있다. 이 프로를 제작하는 PD가 팻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나 이외의 남이 나에게 애완견이 될 수는 없다.

 
아름다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할 것이다. 하나는 현상적 아름다움이요 다른 하나는 내면적인 아름다움이라 할 것이다.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 꽃의 아름다움은 한시적(限時的)일 뿐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였듯이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 눈으로 덮인 세계는 성지(聖地)같이 아름답다. 그러나 눈이 녹는 세상은 녹슬고 일그러진 추한 모습일 뿐이다. 참으로 아름다움은 내면적인 그것이다. 아기를 품에 품은 어머니의 모습이 왜 아름다운가? 그 품 안의 자녀에 대한 엄마의 약속과 그 약속을 지키려는 믿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 밤에 나는 깊은 묵상을 하게 된다. 요사이 나는 모세 오경을 다시 읽으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읽으면서 그 동안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니 너무나 감사하다. 창세기부터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모세 오경을 토라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 토라를 가장 중요시한다. 이 토라는 율법서이다. 기독교인이 지키고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기 때문에 기독교인에게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 중에 나에게는 레위기가 잘 읽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주로 제사의식에 관한 것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루한 레위기의 제사의식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나로 알게 하셨다.

 
창세기에서부터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일관되게 제사를 원하신다. 그것도 반드시 피의 제사를 원하신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 이어 출애굽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왜 그렇게 피의 제사를 원하셨을까? 우리가 모세 오경을 읽어가노라면 제사의 종류와 제사의식이 얼마나 복잡하고 번거로운가에 놀라게 되고 또한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제물이 되어 죽어갔는가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러면 이 제사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약속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인격체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요 우리는 그의 지으신 바 된 피조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이다. 일방적이라 함은 약속의 주체가 객체(상대)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셨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약속한 동기는 무엇이며 약속한 내용은 무엇인가? 동기는 인간에 대한 사랑(엡2:4/요3:15)이며 내용은 아들을 제물로 내어놀았다(창3:15)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사43:21)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송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지도 아니하고 주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의 종이 되어 버렸기에 하나님 앞에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엡2:3)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죄와 사망에서 나를 해방하여 영생을 주시려고 당신의 아들 예수를 구원의 주로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 그 증표로 제사에 일관되게 제물을 요구하셨다는 것이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히9:22) 하였으니 제단에 드려지는 제물로서의 소나 양의 피는 곧 당신의 아들이 저주의 십자가 위에서 나를 위해 흘리시는 대속의 피를 말하는 것이니 이는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줄기차게 죄인된 나에게 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사랑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한다. 너를 위해서 내 아들을 너의 죄의 댓가로 제물로 내어놓았다. 너를 위한 나의 사랑을 제발 좀 알아 주렴” 하고 호소하는 것이다.

 
아담 이후 창세기의 족장들은 아직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자기네의 조상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드리는 피의 제사를 보아 왔으며 이 피의 제사에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을 믿고 자기들도 피의 제사를 믿음으로 드렸음을 볼 수 있다. 보지 못하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갈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 하였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11:6) 하였다.

 
결국 구원의 길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다. 오직 예수, 오직 구원. 이 구원을 무엇으로 받을 수 있는가? 바로 믿음이다. 창세기 6장 9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 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라고 하였는데 노아의 행위가 완전하여 의인이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님과 동행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를 당대의 의인으로 보아 주신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피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노아는 홍수가 그치고 방주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 앞에 정결한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린 일(창8:20)이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를 알고 보지 못하나 보는 것같이 믿고 살아갔음을 보여 준다.

 
나로 하여금 모세 오경의 제사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도움에 깊이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선물로 주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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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과 낭만

묵상 2011. 11. 24. 11:42 |

 굽이돌아 흐르는 낙동강 물 위로 낙조가 아름답다. 때 이른 겨울 철새들의 비상(飛翔)을 느긋하게 즐기며 포근한 시트 속에 피곤한 몸을 파묻고 모처럼의 객기(客氣)를 즐기는 나에게 아이들은 난리다. 아빠는 왜 KTX를 타지 않고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말이다.

 
제자들의 과분한 대접을 받으며 부산을 떠나 귀경길에 오른 내가 굳이 새마을을 고집한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이란 놈을 내가 좀 요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사야 빠르면 좋고, 많으면 좋은 게 아닌가. 그러나 왠지 이번 귀경길은 확 한번 뒤집어 보고 싶었다. 시간이란 놈의 목을 조여주고 싶었다. 시간이란 놈은 괴력을 가진 존재다. 자기 앞에 모든 것을 꿀리고야 만다. 재물, 지위, 명예, 미모 등등 어느 하나 시간을 이기는 절대 강자는 없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시간 앞에 비굴해진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새마을은 좋은 열차였다. 이것만 타면 어깨가 으쓱해지고 무언가 헛기침이 나오면서 갑자기 신분 상승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부끄럽다. 새마을 타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쉽사리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나는 내가 앉은 시트를 자세히 살펴본다. KTX와 비교해 보면 시트의 안락함도 그만 못하지 않고 시트 간 간격도 KTX보다 더욱 넉넉하여 오히려 편안하다. 다만 목적지에 도착시간이 배로 길어질 뿐이다. 그런데 묘하게 이 배(倍)의 시간이 나를 졸지에 2등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오늘 2등 인간으로 서울로 귀향한다. 차창 밖으로는 늦가을의 정취가 참으로 그림 같다. 시골 담장 밖으로 벋은 감나무 가지 끝에 발갛게 익은 감들이 아직도 대롱대롱 매달려 까치를 기다리고 곡식을 거둔 들녘에는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열치가 낙동강 철교를 건너고 있다. 정다운 쌍둥이 철교가 교각을 강물 위로 반쯤 드러내며 나란히 버티고 서 있다. 하나는 부산행이요 다른 하나는 마산행이다. 열차가 아마 삼랑진역으로 진입하려는 모양이다. 삼랑진역은 나에게 참으로 한(恨)이 서린 역이다. 이 역에서 부산과 마산으로 갈린다. 옛날에는 대구에서 마산을 가려면 삼랑진역에서 환승을 해야 했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청도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마산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나는 방학이면 청도 외가로 놀러가곤 했었다. 외가로 갈 때든 집으로 돌아올 때든 나는 반드시 삼람진역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삼랑진에서 마산가는 열차는 도대체 없는지… 아침에 내려와도 밤중, 오후에 내려와도 밤중에만 열차가 있었다. 그러니 청도에서 마산을 가려면 하루가 꼬박 걸리는 거리였다. 그렇게도 멀던지 마냥 역 대합실에서 기다리기만 하던 지난 어린 시절의 삼랑진역으로 나의 열차가 지금 진입하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열차 안을 한번 휘 둘러본다. 커튼을 열고 차창 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왜 사람들은 차창 밖을 내다보려 하지 않는가? 삶에 지쳐 모든 것이 귀찮아진 것인가? 아니면 바깥세상이 두려운 것인가?

 
인생의 삶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들 말한다. 과정적 삶과 결과적 삶이다. 많은 사람들은 결과적 삶을 택한다. 나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어릴 적 시절을 굉장히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러기에 가난은 나에게 반드시 퇴치해야 할 가장 잔인한 적이었다. 결혼한 이후 나는 꼭 십 년 동안 이 가난과 싸워왔다. 나는 결코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 후 오 년 만에 나는 동료가 부러워하는 ‘나의 집’을 가졌고 경제적 안정도 되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결과적 삶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무엇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띵해지면서 갑자기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다 잃어버리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의 주위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돌이켜 보니 나는 나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주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의 아내, 나의 자녀들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데 나는 끊임없이 그들에게 생채기를 내면서도 이것을 몰랐다. 오직 결과만을 이루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너무 많이 나가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깨어진 사발 맞추기식이었다. 후회막급이었다. 이미 아내는 나의 독화살에 상처를 입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독선과 아집, 자만과 고집으로 점철된 나의 괴팍한 삶은 전혀 아내에 대한 배려와 존경이 없었다. 사랑도 일방적이요 대화도 일방적이니 이건 뭐 소통이란 게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삭막한 모래언덕뿐이니 오아시스는커녕 샘물 하나 없었다. 나의 가정에 낭만(浪漫)은 어느 구석에도 없었다.

 
아! 나의 무지(無知)여, 이러고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는가? 내가 문학도라 할 수 있는가? 인생을 모르고야 어찌 문학을 논할 수 있는가? 결과만 추구하는 인생은 결국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시는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내가 이 말씀을 일찍 좀 알았다면 시행착오적 삶을 빨리 끝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앞선다. 하나님의 만드신 삼라만상에는 그 하나하나에 당신의 창조의 목적이 숨어 있다. 그러기에 그 어느 하나도 인간인 나에게 수단이 될 수 없다. 나의 이기적 수단으로 부려먹을 종이나 도구가 아니다. 심지어 풀 한 포기, 돌 하나도 나의 사악한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이용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일들을 찬양하는 것이기에 경이(驚異)의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보이는 모든 것과 들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걸작인데 어찌 우리가 경탄하고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정적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부합하는 삶이다. 과정적 삶은 과정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삶이다. 그러기에 한 순간 한 순 간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소중하고 나에게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깨닫다 보면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소중할 뿐이다. 가족이 소중하고 이웃이 소중하다. 따라서 나에게는 오늘이 소중하고 오늘에의 기대로 가슴이 부풀게 된다.

 
더글러스 태프트 전 코카콜라 회장은 2000년 신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테리며 오늘은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재를 선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 오늘이 없는 내일은 무의미할 뿐이다. 나는 오늘도 감사와 환희로 내 삶의 바구니를 채운다.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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