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오는 가로수 길을 걸어 본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늦가을이 성큼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온통 오색으로 채색한 듯 요란스런 단풍 길을 혼자 걸어 본다. 사십여 년 살아오던 정다운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지도 어언 2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이 도시는 언제나 나에게는 낯이 설다.
며칠 전 나는 제자에게서 다정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삼십 년 전의 제자이다. 고교 졸업 삼십 주년을 기념하는 홈커밍데이를 가진다는 것이다. 정말 반가운 전화다. 그들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제자들이다. 내가 브니엘에 몸담은 것이 1974년 시월 말이다. 그때 나는 시간 강사로 잠깐 그곳에 머물렀다. 나는 그곳을 내 삶의 징금다리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에게는 그곳이 내 삶의 고갱이인 이곳으로 바뀌게 되어 버렸다. 나의 이곳은 나에게는 내 생애 노른자위였다. 이곳 브니엘에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 교사로서, 신실한 한 기독교인으로서 제자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다.
내가 브니엘에 부임하여 강단에 처음 선 날을 나는 잊을 수 없다. 2학년 어느 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윤동주의 ‘서시’를 강의하고 난 후 학생들에게 짤막한 과제를 부여하고 나는 교실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교실 뒤켠에 가서 앞을 보니까 교실 정면 칠판 위 한 가운데는 태극기가 걸려 있고 조금 낮은 위치에 칠판 양옆으로 교훈과 급훈이 걸려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이상하게 교훈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나는 조금 자세히 볼 양으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가 그 교훈을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동공이 커지면서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그 교훈이 나를 이 브니엘에 붙박아 놓아 버렸다. 그 후 33년 동안.
교훈
1. 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려는 사람이 되련다.
2. 나는 마음껏 공부하고 마음껏 뛰노는 사람이 되련다.
3. 나는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사람이 되련다.
4. 나는 조국과 민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좋은 교훈이 없노라고. 나는 이 교훈을 제자들에게 체질화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다. 어떤 때는 제자와 밤을 새며 무릎을 맞대고 고민한 적도 있었다. 매질도 많이 하였다. 어찌 나뿐이랴. 나의 동료 선후배 선생님들이 이렇게 제자들을 사랑했다. 그러기에 우리 브니엘은 대학 진학에 있어서 전국 최상위 10위권 안을 유지하는 확실한 명문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남다른 자부심도 갖게 되었다.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이라 확신한다.
나는 지금도 조용히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 정말 브니엘은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시는 학교라는 것을 말이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브니엘을 졸업한 제자들은 이 교훈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긴다. 그리하여 언제 어디에 있건 간에 '반드시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브니엘맨들은 언제나 자기의 정체성(正體性)을 잊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서 자기 몫을 감당한다.
오늘 그 현장을 나는 서울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제자들 칠팔 명과 조촐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삼십 년 전의 그때의 그 얼굴들을 대면하니, “사제(師弟) 간의 정담은 이래서 좋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3학년 9반은 학급 정원이 65명이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콩나물 시루였다. 복교실(복도를 사이에 두고 두 교실이 마주보고 있는 시스템)에 수많은 학생들로 붐비는 우리 학교는 교실 환경이 최악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복도는 자갈치 시장보다 더 요란했다. 그런데도 우리 졸업생들은 모교를 왜 잊지 못하는가? 바로 학생 저들 사이의 참으로 끈끈한 우정과 선생님들의 남다른 사랑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되어진다. 오늘 졸업 30주년을 맞아 나이 오십이 되는 이들은 참으로 자랑스런 나의 제자들이며 시대정신을 갖고 새벽을 일깨우는 이 땅의 진정한 동량지재(棟梁之材)들이다.
고등학교 시절은 꿈이 가장 활발하게 내면적 동기를 충동질할 때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할 보금자리를 준비할 때이기도 하다. 이러한 때에 만난 진정한 한 친구는 나의 삶에 고향과도 같다. 고향은 언제나 나에게 푸근함을 주듯이 친구는 그런 존재다. “얘들아, 친구란 말의 정다움을 너희들은 아는가?”
며칠 뒤면 스승과 친구들을 만나러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싣겠지. 너희들은 콧노래를 불러라. 해운대, 송정 백사장에서 봄 소풍 때 담임선생님을 들어 차가운 봄 바다에 헹가래치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우리, 그날 밤 해운대 티파니21 유람선 위에서 만나자. 사랑한다, 제자들아.
나의 좋으신 하나님이 너희들을 축복하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을 만난 행복'에 해당되는 글 51건
- 2011.11.04 홈커밍데이 1
- 2011.09.21 선택과 결단
- 2011.04.13 빛과 그림자
- 2011.03.03 봄의 천국
- 2011.02.08 바른 복음과 다른 복음 1
- 2011.02.05 복음의 능력 1
- 2011.02.05 교회는 진정 자살을 방지할 대안이 있는가
- 2011.01.15 아버지의 마음 2
- 2010.11.15 나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 2010.02.12 백 육십분의 일
1. 선택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다. 지난 날 나는 강단에서 감수성 많은 제자들과 함께 이 시를 감상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생은 선택이다. 하나를 빼 놓고는 모두가 선택이다. 다만 부모는 예외다.” 그렇다. 세상에 그 누구도 부모를 자기가 스스로 선택하는 자는 없다. 세상 밖으로 고고의 울음을 울고 나오고 보니 나의 부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기에 부모와의 만남은 숙명이다. 그 이외에 선택이 아닌 것이 있었던가? 심지어 자기가 태어날 나라도 오늘날은 선택하지 않는가! 물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난센스이기는 하지만. 세상을 살 만큼 살고 난 지금 돌이켜 보면 선택 아닌 것은 없는 것 같다. 물론 선택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어릴 적 집 밖으로 나가 놀 짝지의 선택으로부터 시작해서 학교, 학과, 직업, 배우자 등등 모두가 선택이다.
우리의 주변에서 보면 누구를 선택하고 무엇을 선택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또 선택했어야 할 순간에 선택의 기회를 놓쳤거나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선택했으므로 인생의 운명이 바뀌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선택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할 것이다. 프로스트의 시에서처럼 젊을 때는 하고 싶은 것도 많다. 나의 앞에 펼쳐진 신천지가 모두다 경이(驚異)요 새로움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선택할 수는 없다. 어차피 한 길을 선택하여 갈 수밖에 없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선택이 어렵기 때문에 인생이 어려운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스승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희들의 삶에 의미가 있으려거든 세 가지를 잘 선택하라. 첫째는 벗 둘째는 책 마지막은 배우자다.” 나는 그때 ‘의미 있는 인생’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그날 이후 벗들과 이 세 가지 문제를 가지고 많이도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지금, 그때의 벗들 중에 스승의 말을 새겨듣고 인생에 있어서 이 세 가지를 잘 선택한 벗들은 정말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선택에는 멘토가 필요하다. 한 권의 책이 나에게 선택을 위한 멘토가 되어도 좋고 한 사람이 멘토가 되어도 좋다. 물론 나에게 멘토만 있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멘토가 될 수 있는 자격은 나보다 월등히 나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로 하여금 나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멘토의 쓴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낸 후에 ‘야, 너는 괜찮은 놈이야, 너 멋있어’ 라고 자기 자신과 당당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한번쯤 자식이나 아내로부터 ‘아빠가 자랑스러워’ 라거나 ‘당신 이제 보니 정말 멋있는 남자야’ 라는 말을 내가 선택한 멘토 덕분에 듣게 된다면 최소한 나는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
성경은 내 인생에 최고의 멘토다. 성경에서 선택을 잘한 사람을 두어 사람만 든다면 나는 아브라함과 룻을 들고 싶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선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할 자유 의지가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가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분명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믿음과 그렇기 때문에 좋으신 하나님이 나에게 결국은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믿음과 선택은 굉장히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많은 환란과 인고의 세월을 보냈지만 하나님을 선택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끝까지 좋게 하셨고 결국에는 믿음의 조상이요 믿음의 통로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보면 믿음의 선택은 하나님이 보장하는 선택이요 가장 확실한 선택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또 한 인물을 든다면 모압 여인 룻이다. 성경 룻기를 읽어보면 한 이방 여인 룻이 어떻게 살아와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게 되는 큰 축복을 받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그의 성공은 전적으로 선택에 있다 하겠다. 룻기는 그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여인의 기구한 삶을 다룬 세계 명작을 꼽는다면 무수히 많겠지만 ‘주홍글씨’와 ‘테스’가 아닐까 싶다. 이 두 작품에서의 여인들보다 더 기구한 삶을 산 여인이 룻이다. 룻은 이방 여인인 시어미 나오미를 모시고 남편도 없이 살아가는 처지이다. 그런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 리가 없다. 다만 시어미 나오미로부터 하나님이 어떤 신이시며 그 신은 시어미와 그들의 조상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었는가를 단지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들음에서 믿음이 생겼고 그 신에 대한 온전한 신뢰(信賴)가 자신으로 하여금 시어미와 시어미의 신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선택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선택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룻에게는 선택이 곧 삶과 죽음인 것이다. 그러기에 삶과 죽음을 담보로 룻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이시다. 결코 실언을 하지 않으신다. 룻기를 읽어보면 룻이 하나님을 선택한 후 하나님 당신이 직접 연출을 맡으셔서 룻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족보의 주인공으로 사용하시는지 잘 볼 수 있다. 남편이 될 보아서와 만나서 혼약을 맺기까지의 과정은 정말 절묘하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룻에게 후히 흔들어 넘치게 갚아 주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선택한 자에게는 결코 후회함이 없으리라고 나는 성경을 두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아직 주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 바로 하나님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2. 결단
우리가 인생을 살아 갈 적에 선택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면 결단일 것이다. 이 결단이 왜 어려운가 하면 구습(舊習)을 벗어 던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 습관과 관습에 따라 살아가게 마련이다. 새로운 변화에는 익숙하지 않고 두려움을 가지기에 자기에게 익숙한 길을 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옛 조상들은 시작이 반이라 하였고,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 하면서 첫 삽을 과감히 뜨기를 강조해 왔다. 포항제철을 견학해 본 자들이 있는가? 포항은 196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조그만 어항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불모지에 철을 위한 첫 삽을 뜬 그 순간 미래의 포스코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우물쭈물하다가 좋은 인생 다 간다고. 아무리 선택이 좋아도 그 선택에 따르는 결단이 없으면 인생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 결단의 사례를 하나 들라면 나는 단연코 다니엘의 결단을 들고 싶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1:8)” 여기에서 뜻을 정했다는 말은 결단을 말하고 있으며 환관장에게 구했다는 말은 죽음을 담보로 했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절대 왕권국가인 바벨론으로 잡혀간 포로의 신세였다. 왕의 명령은 곧 법이요 불복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다는 뜻의 세움 곧 결단은 하나님이 자기의 삶의 전부인 자가 아니고는 결코 할 수 없는 결단인 것이다. 다니엘의 결단에 하나님이 어떻게 갚아 주셨는가를 보면서 나에게도 아직까지 결단을 못하여 발목 잡혀 있는 일이 있다면 이 차제에 나에게도 다니엘의 결단을 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여 봄이 어떨까?
1. 들어가는 말
지난 3월 6일 내가 출석하는 동안교회 주일 3부예배 설교에 초대된 워싱턴 한인교회 김영봉 목사님의 말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는 미주 한인교회 목회자들이 최근에 한국을 방문하고 느끼는 감회를 이렇게 전하셨다. “한국은 돈과 건강과 외모에 미친 것 같다” 정말 이 말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대학교수가 연구비를 횡령하고 본부에서 내사가 들어가자 자살하고, 또 한 대학교수가 학생에게 돌아가야 할 장학금을 횡령하고 동료끼리 내분이 일어나자 치고받고 다투다가 자살하는 사건을 볼 때 막가는 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여기서 김 목사님의 전한 말을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돈과 건강과 외모에 대한 집착이 우리 민족에게 미칠 빛과 그림자에 관하여 생각해 보려 한다.
2. 빛
얼마 전 어느 일간지에 “아시아는 韓版(한반)에 열광한다” 하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아시아 각국에 주재하는 특파원들로부터의 르포로서 일본, 홍콩, 중국은 물론이고 동남아 전역에 ‘한국 닮기’가 한창이라는 기사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는 미래의 성장 동력산업으로 3대 산업을 제시했다. 즉, IT, 기계항공, 생명공학 산업에 나라의 온 힘을 쏟는다고 선언했다. 그 후 20년이 채 못 되어 우리나라는 이 분야에서 세계가 주목할 성장을 일구어 내었다. 남다른 근면성과 성부 근성, 높은 지능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교육열이 복합되어 만들어낸 걸작이다.
거기에다가 2002년 1월 KBS 2TV에 방영된 드라마 ‘겨울 연가’가 일본 NHK에서 방송되어 일본을 기점으로 ‘한류’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주연으로 출연한 배용준, 최지우는 일본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게 되어 일본 열도에 ‘한류 신드롬’을 일으켰고 드라마의 무대가 된 춘천의 남이섬은 일본인 팬들의 관광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한국의 드라마는 아시아 각국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끊임없는 ‘제2의 욘사마’를 배출시켰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의 외형문화가 아시아 여성들을 사로잡는다”
이는 아시아에 주재하는 특파원들의 공통된 입말이다. 한국여성들보다 아름다운 얼굴과 희고 고운 피부, 가지런한 이를 가진 여성은 없다. 외국을 여행해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느끼는 감정이다. 인종의 전시장이라는 뉴욕에서 가이드로부터 들은 내용이다. “아침에 다운타운에 나와 보면 한국여성, 일본 여성, 중국 여성은 단번에 알 수 있어요. 한국여성은 세련된 몸매에 꼭 명품 하나는 지니지요. 그리고 일본 여성은 치아가 고르지 못해요. 중국 여성은 머리가 더부룩해요.” 중국 사람은 아침에 머리를 감으면 그날 운수가 사납다고 머리를 감지 않는다고 살짝 귀띔도 해 주었다.
성형, 미용, 패션 등은 정말 세계 수준이다. 아니, 이제는 세계를 선도한다. 우리나라 여성은 선천적으로 미적 감각이 탁월하다. 옛날에는 때마다 유행이란 게 있었다. 주로 유행은 서구 몇몇 선진국이 독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가 곧 유행’이다. 각자가 유행을 창조한다. 소비자의 욕구가 끈임 없이 상승한다. 그러기에 아름다움과 관련된 산업은 기술의 축적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성형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르고 영상, 음악을 중심으로 한류문화가 세계로 확산된다. 앞으로는 먹거리, 레저 문화도 세계에 주목을 받게 될 것이 확실시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의 문화가 기폭제가 되어 한국 문화를 세계에 수출하고 이를 자본화하여 막대한 부(富)를 축적한다면 무한 경쟁시대인 글로벌 사회에서 한국이 세계 일류 국가가 되는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문화산업을 어떻게 개발하며 수출할 것인가는 이제부터 생각해야 할 때다.
결론적으로 볼 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의 외형문화가 한국을 살리고 더 나아가서는 풍요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엄청난 자본이 된다는 것은 한국의 미래에 분명 밝은 빛이라 할 수 있다.
3. 그림자
인간은 물탐(物貪)의 야수
지난 4월11일자 어느 일간지에 실린 서로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종류의 기사를 읽고 난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들이 살아가는 이 땅,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물려준 이 땅에서 언제까지나 나의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는데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는 “우리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바르게 사는 길인가?” 하는 심각한 고민으로 긴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매스컴의 PD들은 전국을 샅샅이 누비며 생활의 달인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정작 삶의 달인을 찾아 나서는 자는 없다. 여기 기사를 간단히 요약하여 옮겨 싣는다.
1) 두 형제가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여 단시일에 떼돈을 벌었다는 기사다.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의 내사가 들어오자 기미를 눈치체고 번 돈 170억 원 중 111억 원을 5만 원 권으로 묶어 플라스틱 김치통에 넣어 마늘밭에 묻었다가 나중에 발각되어 돈은 국고로 환수되고 쪽박 차고 수갑도 차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김제의 마늘밭 화수분’ 이야기다. 집에 두려니 불안하고 은행에 맡기자니 추적당할 것 같고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아 전에 사 놓은 마늘 밭 300평에 새벽과 한밤에 몰래몰래 나가 몰래몰래 묻어놓고 그것도 불안하여 아예 집을 떠나 컨테이너 박스를 밭가에 옮기고 거기에서 기숙하며 날마다 돈다발 밭 위에서 김매고 거름 주며 밭가를 맴돌다가 인생도 맴돌아 버리다.
2) 역외 탈세로 4101억 원을 국세청으로부터 추징당한 A회장, 그는 ‘유령인간’이었다. 모든 계좌는 차명, 160여 척 선박도 해외 조세 피난처 등록. 십조 원이 넘는 재산가였지만 서울에서 그가 사는 집의 임대차 계약서는 친인척 명의로 허위 작성됐다. 회장님으로 불렸지만 회사의 대표 이사를 맡은 적이 없고 경영활동은 휴대폰 저장장치(USB)나 구두 지시 등을 통해 은밀히 이뤄졌다. 일체의 공개 활동을 피했고 세무 컨설팅도 해외 회계법인을 이용했다. 유령인간 생활의 목적은 단 하나, 바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4. 대안
너희가 청부(淸富)를 아는가
한국계 일본인 손정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는 현재 소프트뱅크 대표회장이다. 지난 3월 11일 일본에 사상 최악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각계각층에서 온정의 손길을 보냈다. 이때 그는 일본인과 아픔을 같이 했다. 일본에서 가장 많은 1000억 원을 내놓았다.
빌게이츠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드니 올림픽 때이다. 내가 개회식을 TV로 보다가 깜짝 놀랐다. 빌게이츠가 관중석에 앉아 열심히 자국선수들의 입장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앉은 자리가 VIP석이 아니라 일반석이었던 것이다. 물론 경호원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그때 나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만약 빌게이츠였다면 나는 일반석에 앉았을까? 그는 지금 빌게이츠 재단을 만들어 세계 빈곤 퇴치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청부(淸富)는 돈과 자신을 분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돈이 나 자신과 붙어 있으면 그 돈이 결국 나를 삼켜 버린다. 돈의 위력은 굉장하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돈이 너무 크게 보이면 그때부터 나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손정의와 빌게이츠는 어떤가? 그들은 진정 청부(淸富)의 대가이다.
역시 지난 4월 11일자 신문에 실린 기사다. 정말 신선하다. 그대로 소개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달인’을 만날 수 있어 기쁘다.
한 달 40만 원으로 멋지게 사는 법
내가 살고 있는 대관령, 산골 마을은 청정 강릉에서도 상수원 구역입니다. 우리 마을 유기농 채소 같은 할머니 한 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름은 최종옥, 나이는 82세이지만 멋도 부리십니다. 봄이면 화사한 머플러를 두르고 가을이면 프랑스 모델 같은 갈색 모자를 쓰고 마을도서관에 오십니다. 화분이 놓인 창가에 앉아 천천히 녹차 한 잔을 들며 은테 안경을 쓰고 책 읽는 모습이 꼭, 헬렌 켈러 박사 같습니다.
할머니는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영세민 생활보조금 40만원 남짓한 돈으로 살아가지만 가끔 비슷한 처지의 이웃 노인들이 몸이 아플 때면, 조그만 전기밥솥에다 약밥을 찌거나 팥죽을 쒀 선물로 가져갑니다. 할머니! 그러면 생활비가 부족하지 않나요? 묻는 제가 금방 부끄러워집니다. 살아보니 부족한 것은 항상 마음이지 돈이나 재료가 아니더라, 40여만 원으로도 충분히 문화생활을 하면서 잘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매일 마을도서관에 오셔서 차를 마시며 한두 시간씩 책을 읽고, 일주일에 하루는 배낭에 책 한 권 넣고 강릉 민속시장에 가서 맛있는 것도 사 드시고 밤에는 찜질방에 가서 뜨끈뜨끈한 물로 목욕한 다음 가져간 책을 읽으며 느긋하게 하룻밤을 지내고, 그 다음 날 돌아옵니다. 1박2일 여행인 셈이지요. 여행 경비는 왕복 시내버스비, 식비, 찜질방비, 합해서 약 2만 원 정도라 합니다. 그렇게 멋지게 살아도 생활비가 좀 남아서, 돌아가신 뒤에 장례를 치러줄 고마운 이들에게 수고비로 주려고 조금은 저금도 해 두었다고 합니다.
유금옥(2011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당선자)
봄이 찾아오는 소리가 조용하게 들려온다. 땅 밑에서 새싹이 꼬물꼬물 용틀임을 한다. 조금 있으면 딱딱한 땅껍질을 헤집고 연한 새순을 쏘옥 바깥세상으로 내밀겠지.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지. '나, 안 죽었걸랑.‘ 맞아. 우리는 모두 안 죽었지. 잠시 매서운 겨울 추위에 조금 움츠린 것뿐어거든. 얼음장 밑에서 조용히 숨죽이며 기다리던 미나리가 새파란 새순을 물 위로 밀어올리며 봄을 부르고 온 산과 들이 봄을 맞을 준비에 바쁘니 계곡의 잔설(殘雪)도 슬그머니 뒷걸음쳐 물러난다.
요즘 세상 정말 번거롭다. 처처에 재난과 전쟁이 쉴 새 없다. 일본의 화산 폭발과 대 지진, 호주의 대 홍수, 뉴질랜드의 지진에 이어 세계 곳곳에서 민중의 민주화 요구는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이집트의 민주화 요구가 도미노가 되어 종교와 이념으로 민중을 교묘히 묶어두었던 리비아 카다피 42년 독재가 무너져 내리고 이웃 중동의 여러 나라로 번질 태세다. 중국도 걱정이고 북한도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겠는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런 혼란한 세상일수록 정도(正道)를 따라가야 한다.
문화 상대주의라는 미명(美名) 아래 우리는 진리의 절대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만드신 일부일처제를 버리고 지구촌 곳곳은 일처다부제나 일부다처제를 정당화한다. 인간의 욕정에 끝이 있는가? 돈이 있으면 다음에 갖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 인간의 잔인한 이기주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가? 이제 우리는 겸허히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하여야 가정을 지킬 수 있고 사회도 지킬 수 있다. 나는 나를 지켜주는 성경 구절 하나를 생명처럼 간직하고 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制御)하라(벧전2:11)” 이 얼마나 귀중한 말씀인가. 이 구절 속에는 참으로 중요한 진리가 숨어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고 우리는 잠시 이곳에서 머무르다 저곳 본향으로 가야하는 존재이며 육체의 정욕을 가진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으니 성령의 도움으로 정욕을 다스리지 못하면 나로 말미암아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내 아내, 자녀부터 상처를 입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경고라 할 수 있다.
요즈음은 가정도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마약의 안전지대라 하는 우리나라도 가정주부가 마약에 중독되는 사례를 보고 경악을 금할 수 없다. 현대인이 왜 마약에 쉽게 유혹을 받는가? 향락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쾌락주의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옛적의 우리 조상들은 오늘날의 우리와 달랐다. 옛적에는 지덕(知德)을 겸비한 사람을 ‘선비’라 불렀다. 아무리 지식이 높아도 덕을 지니지 못하면 존경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회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돈이면 최고다. 돈이 지순지고(至純至高)의 가치다. 그러기에 지식과 덕이 따로 논다. 우리 사회에 그럴듯한 지식을 갖춘 소위 전문 지식인이 행동을 개차반 같이 하는 일을 얼마나 많이 보는가. 이들은 한마디로 양심이 화인(火印) 받은 자이다.
요즈음은 이혼도 아주 쉽게 한다. 그러기에 백년해로(百年偕老)라는 말은 아예 없어져 버렸다. 결혼식장에 가 보면 주례자가 이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볼 수 없다. 그러면 왜 이혼을 하는가? 대부분은 성격차를 이혼 사유로 든다. 그러나 엄격히 따져보면 이것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부부는 본래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만나는 법이다. 성장 환경이 서로 다르기에 성격과 취미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게 마련이다. 맞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성격 차는 필연적인 것이다. 어떤 부부는 싸우자고 만난 듯이 집요하게 싸운다. 더 싸울 일이 남았는가? 이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라. 이것이 최선이다. 다 큰 사람 내 것으로 만들려 하지 말라. 내 것으로 만들려 하는 그 자체가 문제다. 극도의 이기심을 버리고 다름을 아름다움으로 보아주는 너그러움을 가질 때다. 너그러움은 관용(寬容)이다. 관용은 배려와 존경으로 통한다. 최고의 사랑은 배려와 존경이다. 나는 오늘도 앞치마를 두르고 싱크대 앞에서 아내를 사랑한다.
‘얄궂은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우리나라의 흘러간 가요의 가사 한 구절이다. 참으로 명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 버리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무어라 말씀하는가?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2:11)” 그러기에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전9:9).” 성경 말씀대로 해 아래서 헛된 날에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분복인 부부간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나에게 돈이 조금 없어도 좋다. 돈은 없으면 조금 불편할 뿐이다. 왜냐하면 돈으로 영원을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명예나 지위가 없어도 좋다. 없는 것을 아쉬워하지 말고 현재 나에게 있는 것을 세어보라. 눈으로 사랑하는 나의 가족을 볼 수 있는가? 귀로 내게 속삭이는 아름다운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함께 하고픈 가족이 내 곁에 있는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가! 세상사 모든 일을 훌훌 털어버리고 지금 수도권 전철을 타 보라. 그리고 인천으로, 안산으로 훌쩍 떠나보라. 거기에는 바다가 있다. 짓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 건너 먼 나라를 꿈꾸어 보라. 꿈꾸는 자는 행복하다. 그리고 돌아와서 아내를 데리고 다시 한 번 가보라. 나는 당신이 있으므로 행복했노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으리라.
아! 봄날은 내 곁으로 살그머니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봄의 천국을 준비하신다. 이곳저곳이 봄의 천지다. 산에도 들에도 강에도 바다에도 봄의 환희로 넘쳐난다. 이번 주말에는 경춘선 열차를 한번 타 볼까? 그리고 아내와 함께 한류열풍의 젊음 속으로 들어가 볼까? 며칠 전 주일 저녁에 거실에서 내가 KBS의 7080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딸애가 불쑥 제안을 한다. “아빠, 내가 방청권 신청해 볼까, 가 볼래?” 한다. 나는 한쪽켠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 아내의 옆얼굴을 살짝 훔쳐보면서 ‘좋은 사람, 나 만나서 참 고생 많이 했어. 나, 당신에게 잘 해 줄게’ 속으로 조용히 되뇌면서 참으로 함께함의 행복을 느꼈다. 있을 때 잘해!
바른 복음과 다른 복음
묵상 2011. 2. 8. 21:25 |—나의 믿음이 바른 복음에 근거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복음에 근거하고 있는가
1. 들어가는 말
안녕하십니까? 힛데겔입니다. 오늘 이렇게 저의 블로그를 통하여 여러분을 다시 만나 뵙게 되니 너무나 반갑습니다. 저의 블로그에 앞서 올린 글 ‘복음의 능력’에 이어 오늘은 오랜 동안 교회를 통하여 신앙생활을 해 오신 여러분들을 위하여 이 글을 쓰려고 합니다. 지난 글은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분들을 위하여 쓴 글이라 한다면 이번 글은 성격이 아주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어떤 분들에게는 충격적인 글일 수도 있고 상당 기간 아주 혼란한 경우의 글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을 지금 쓰고 있는 저도 굉장히 혼란한 번민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글을 집필하면서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선한 양심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좇아 성경에서 밝히 말하고 있는 대로 정직하게 믿음의 본질에 관하여 썼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믿음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얻음이라(벧전1:9)” 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믿음이 성경적으로 바른 복음에 근거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한번쯤은 반드시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잘못되면 나는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믿음이 잘못되면 그 믿음으로는 지옥갈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 이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일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나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 보는 일은 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일 수 있으며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나의 믿음이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믿음이라 한다면 지금껏 믿은 나의 믿음은 모두 헛것이요 지옥 갈 수밖에 없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 라고 성경은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었는지를 알지도 못합니다. 내 속에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나는 버림받은 자입니다. 그러면 언제 내 속에 성령이 들어와 계십니까? 내가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할 때 내 속에 성령께서 들어와 계시지요. 다시 말하면 성경적인 바른 믿음을 가졌을 때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무언지 모르게 답답하고 찜찜하여 시원하지 못하고 늘 허전한 경우를 경험해 보지 못하셨나요? 이것은 내 속에 있는 영의 소원을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영의 소원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성령이 계시지 않으니 어찌 내 영이 갈급해 하지 않겠습니까?
2. 다른 복음
여러분은 다른 복음에 대하여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이 말이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성경에서 다른 복음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곳은 갈라디아서(갈1:6-9)와 고린도후서(고후11:4)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했으나 그가 떠난 이후에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는 유대주의자들 곧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가만히 들어와 바른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 즉 율법과 할례도 함께 행하여야 구원을 받는다고 전하였습니다. 이에 이방인이었던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교훈에 현혹되어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기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았습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더러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 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다른 예수란 성경에서 밝히 드러내고 있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온전히 속죄하신 나의 구원자이시며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분(빌2:6-10)을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만으로는 구원을 온전히 얻을 수 없으니 모세의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혼합주의 신앙, 율법주의 신앙 속의 불완전한 구원주인 예수를 다른 예수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단호히 말하건대 다른 복음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3. 우리들의 현주소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대교회에서는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자와 다른 복음을 좇아가는 무리는 없는 것일까요? 몇 가지 문답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여러분은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 있습니까? / 아니오.
왜 못가는 겁니까? / 해 놓은 게 있어야지요
어떻습니까? 굉장히 겸손한 대답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답 속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성경의 어디에도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로마서에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풀어보면 이렇게 되겠지요. 하나님의 의가 복음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믿음으로 나는 구원을 얻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선물을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나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구원은 결코 내가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번에 얻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도다(히10:10)” 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영원한 속죄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죄가 믿어지십니까? 히브리서 9-10장을 깊이 읽으면서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여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님이 깨닫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 맞다.’ 하고 감탄할 때가 올 것입니다. 저도 히브리서를 읽고 또 읽으면서 묵상하다가 어느 날 아침에 9-10장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영원한 속죄를 깨닫고 날아갈 듯한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 말씀하신 의미를 비로소 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빌립보서 2장 12절을 오해합니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라는 말씀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내가 이루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내가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그의 긍휼사심을 좇아’ 라는 구절입니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긍휼) 때문에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면 빌립보서 2장 12절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나요?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을 거듭남 또는 중생이라 하지요. 새 생명은 자라가야 합니다. 아기가 모유와 이유식으로 차츰 자라듯이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끊임없이 성장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길입니다. 그리하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서 많은 칭찬과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반드시 결산할 날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심판으로, 믿는 자는 상급으로 결산을 보아야 하지요, 심판주인 주님 앞에서. 우리는 빌립보서 2장 12절을 그리스인이 받을 상급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4)”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은사가 구원의 보증 수표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나는 내 주위에서 은사자가 자기의 의(義)를 내려놓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은사가 구원의 보증 수표인 양 은사를 받지 못한 자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모습을 보아 왔습니다. 은사가 구원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큰 착각이요 자기체면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은사가 없었나요? 사도행전 19장 12절에 보면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라는 기록을 보면 사도 바울은 큰 은사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환상 중에 셋째 하늘을 보았다(고후12:2)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서신 어디에도 셋째 하늘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 만을 자랑해 왔습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로 보건데 은사를 자랑함은 ‘나의 의로운 행위’를 자랑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에게 은사는 왜 주시는 것일까요? 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의 근거를 누가복음 10장에서 보겠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칠십 인을 세우사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과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왜 이런 능력을 주셨을까요? 그 정답이 10장 17절 이하에 있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말하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하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영혼 구원을 위해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의 근거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찾겠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신령한 은사를 받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문제도 많았던 교회입니다. 은사를 주신 두 번째 이유의 정답이 12장 7절에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은사)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는 바울의 권고를 보면 개인과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덕(德)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은사가 자기 의(義)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은사를 받은 자는 더욱 큰 은사 곧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더욱 겸손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른 복음을 좇지 않고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과 그들이 주장하는 행위 구원에 현혹되어 자기의 어떤 행위로 구원을 얻겠다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모두 다른 복음을 좇는 자들입니다. 다른 복음을 좇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라고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도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상투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게 믿어 천국가겠어?” 어떻게 들으면 굉장히 믿음이 있는 자의 질타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질타 속에는 사탄의 무서운 흉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니까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은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라고 한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하는 자는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구원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에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가 행위 구원을 주장하면 교회가 부흥할까요? 교회 부흥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른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의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담대히 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고 하거늘(행2:37).”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많은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회 지도자가 행위 구원을 주장할수록 사림들의 지침 현상은 가중되어갈 뿐입니다. 사람들은 진정 죄사함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율법의 중압감에 짓눌려 심한 피로감을 느끼고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갖거나 끝내는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복음이 분명하여야 하고 사람들에게 바른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끊임없이 율법(행위)의 짐을 지울 것인가 아니면 바른 복음으로 죄의 짐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갖도록 할 것인가는 선택입니다.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선택한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한 지도자는 마태복음 7장의 거짓 선지자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2-23)”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이 저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나요? 저들은 애초부터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있어서의 ‘주’는 ‘다른 예수’입니다. 저들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유혹을 받아 ‘다른 영’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초 위에 세워지지 않은 믿음은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다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나는 이렇게 믿음의 고백을 하여야 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구원주요 나의 왕이요 나의 주인이십니다.” 라고.
나는 나의 의로운 행위가 구원을 받는데 조건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전도한 것이 얼마인데, 헌금을 얼마나 드렸는데,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많은 은사를 체험했는데 내가 구원을 못 받았을라고… 말도 안 되지 내가 천국 못 가면 누가 가나.” 조용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7장의 거짓 선지자와 내가 무엇이 다릅니까? 꼭 같지 않습니까? 오랜 신앙생활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나의 구원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과 헌신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구원 받은 자가 그 은혜에 감격하여 몸과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 드려 나의 구원자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돌아보며 열방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찌 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모든 드림(헌신)을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드림은 다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되돌아올 상급으로 하나님의 곳간에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저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찬물 한 그릇 대접한 것도 그 상급을 내가 결코 잊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말입니다.
저와 함께 우리는 모두 지금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라고 하시는 주님의 선포 앞에서, 또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하시는 말씀 앞에서 내가 나의 구원자가 되었던 자리에서 과감히 내려와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복음은 허상입니다. 지금껏 좇아온 다른 복음을 버리고 이제 성경에서 밝히 말하는 바른 복음으로 돌아와 구원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예수, 주님만이 나의 삶의 이유!" 이보다 더 주님이 기뻐하시는 고백이 있을까요? .
2) 여러분은 어떤 죄를 큰 죄라 생각하나요? 그리고 큰 죄 지으면 받은 구원도 잃어버리나요?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저가 앞서 쓴 글 ‘복음의 능력’에서 저는 성경에서 말하는 죄를 정확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먼 것같이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다르다(사55:8-9)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기에 나의 생각으로 죄를 정의하려 하여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사람들 가운데서도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로마서(1:28-32)를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죄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죄의 경중(輕重)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의 유무(有無)만 있을 뿐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죄의 대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롬6:23)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이 죄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저주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그 죄의 대가를 다 지불하시고(요19:30) 나를 의롭다 칭하여 주시고 나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사(히10:10) 나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큰 죄라고 여기는 죄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지 못할 죄는 절대로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한번 죄사함 받은 구원은 결코 취소되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 받은 구원이 어떤 큰 죄로 인하여 취소된다고 믿는다면 이는 바른 복음에 근거하지 않은 다른 복음이요 사탄이 교묘히 속인 위장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며 성경에서 보장하는 믿음이 아니므로 구원 받을 수 없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는 지옥갈 수밖에 없습니다
3) 날마다 짓는 죄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가나요? 그리고 앞으로 지을지도 모르는 죄는 어떻게 해결하나요?
이 물음에 많은 분들이 ‘날마다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간다’ 라고 응답하였으며 앞으로 지을지도 모르는 죄에 대하여는 모르겠다고 답한 분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 지도자는 날마다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하면서 자기 교인들을 닦달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은 어떠했을까요? 회개의 중압감 때문에 잠자고 눈뜨기가 두렵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회개를 과소평가하거나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한 온전한 속죄, 영원한 속죄를 믿지 않는 잘못된 복음에 관하여 지적하고자 합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다른 복음에 기초를 둔 믿음이라면 이 역시 구원 받지 못할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는 지옥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명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히10:12)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4) /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10:17) /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는니라(히10:18).”
우리가 회개하지 않아서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지 않기 때문에 지옥가게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지을지도 모르는 죄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용서해 놓았습니다. 궁극적으로 따져들어가 보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긍휼)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원 받은 자가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0장에서 예수님의 온전한 속죄에 관하여 말씀하고 난 연후에 12장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징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은 자가 그 이후 죄를 짓는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지옥가는 것은 아니지만(롬8:1-2) 죄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된 나 사이에 관계를 불편케 만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가 범죄하였을 때 징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자녀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보다 감히 비교할 수 없도룩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가 진정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신10:13). 죄를 지으면 삶이 고달파지고 행복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삶을 마감하고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상급이 없습니다.
저가 블로그에 올린 글 ‘교회는 진정 자살을 방지할 대안이 있는가’ 라는 글에서 자살의 성경적 정의와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에 나의 생각을 꺾고 하나님의 기준에 나의 생각을 맞추지 못한다면 이 또한 분명 잘못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이 글을 맺으며
참 저는 행복한 족속인가 봅니다. 아마도 너무 못나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많이 받는가 봅니다. 자식도 키워보면 무언가 모자라고 못난 자식에게 연민(憐憫)이 많이 가거든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성경에 근거한 바른 복음에 나의 믿음을 두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고정 관념을 내려놓지 못하여 거기에 사로잡혀 바른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데 웬 은혜로 바른 복음을 깨달아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큽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만남의 복을 받은 것 같습니다. 지뢰밭 같은 세상에 좋은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서 안전하게 신앙생활 잘 하여온 것 너무나 감사하고 때마다 좋은 믿음의 멘토를 만나서 더 깊은 신앙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 분외의 복인 것 같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서울로 잠시 거처를 옮긴 후 저가 자주 출석하는 교회(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목사님으로부터 바른 복음을 듣게 되어 너무나 감사합니다. 내 곁에 복음이 분명한 교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오늘날 바른 복음이 희석(稀釋:물타기)되고 걷잡을 수 없이 세속화되는 이 시대에 새벽을 깨우는 바른 신앙의 지도자가 이 땅에 아직도 많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 명의 참 하나님의 사람들을 남겨놓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새삼 깨닫습니다.
저의 작은 소원이 있다면 나만 이 구원의 바른 복음을 깨닫고 말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 친지, 이웃, 더 나아가서는 열방을 향하여 전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6"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두려움없이 담대히 나아가 하교하는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공원에서 여가를 즐기는 어르신들에게 정중히 다가가 복음을 전하였더니 들을 자를 성령님이 붙여 주시고 구원받을 자를 성령님이 미리 준비하시고 계신 것을 저는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은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1. 블랙홀
사람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삶과 죽음은 인생에 있어서 풀리지 않는 숙제요 영원한 테마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가진 재산이 몽땅 잿더미나 되지 않을까? 사랑하는 아내가 나를 배신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날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죽음이 두려워 눈을 감기가 무섭다는 사람의 고민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종교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종교가 우리를 이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종교에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없을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만고만한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구도자의 길을 걷고자 고행이나 끝없는 수행의 길을 떠나 보지만 본래 길이 없으니 어찌합니까? 이 두려움은 인생에 있어서 블랙홀과 같습니다. 그 누구든 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빠져나올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생에게 희망은 전혀 없는 건가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삼백 육십 다섯 번을 ‘두려워 말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두려워하고 있는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사41:10)” 하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전능자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그분만이 인간을 가장 잘 아시며 인간의 고민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2. 복음의 능력
1) 죄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를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니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이 진화의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고등동물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기독교에 입문도 하지 못한 자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고정 관념을 내려놓고 성경에서 말하는 죄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경청하여 보십시오.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어느 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과일은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6-17).”
그런데 어느 날 사탄이 이브에게 찾아와 이렇게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과일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하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 하셨을까요? 이것은 창조주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한 선언이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언한 메세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재권(主宰權)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밝히 말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그러나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창조된 목적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불신(不信)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정녕 죽으리라(창2:17)” 하셨으나 인간은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3:3)”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죄입니다(요16:9).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던 사탄의 달콤한 유혹과는 달리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에 자기의 벌거벗은 몸을 발견하고 부끄러워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으며 그 잎으로 치부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주재권에 도전하려던 사탄의 꾐에 빠져 그 선악과를 따 먹게 되고 그 댓가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켰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詐欺)는 무엇일까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하는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인간을 속인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꾐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담 이후 죄를 지은 모든 인간은 “정녕 죽으리라” 하는 하나님의 선언대로 모두가 죽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근본 원인은 죄인 것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롬1:28)고 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리고(렘2:13) 사탄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죄라고 성경은 밝히 말합니다.
2) 죄의 삯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3:23)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입니다. 우리는 흔히 거짓말하는 죄, 속이는 죄, 도둑질하는 죄 등을 죄라 생각하지만 이것들은 죄의 현상일 뿐입니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죄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하나님을 버린 것이 죄입니다. 화살이 과녁의 정곡(正鵠)을 벗어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벗어난 모든 생각과 행위가 죄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고민하게 됩니다. 죄의 고통으로 인하여 뼈가 상하게 되는 번민을 해 보셨나요? 사도 바울은 죄로 인한 번민을 이렇게 토로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롬7:24)” 하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죄악의 사슬에서 해방되는 길은 없을까요? 아닙니다. 길이 있습니다.
3) 심판에 대하여
성경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 라고 말합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보아 왔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있으며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 반드시 심판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합니다. 이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영접하지 않은 자는 심판의 부활로 그분 앞에 서야 합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거기는 불도 꺼지지 않고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이요 불로 소금 치듯 하는 곳(막9:48-49)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16장에는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 사건을 들어 천국과 지옥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지옥의 실상(實狀)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실상을 잠깐 소개하면 이러합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를 베푸는데 그 이름을 나사로라 하는 한 거지가 헌데를 핥으며 그 부자의 대문 앞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 저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말하되 /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천국은 위로받는 곳이요 지옥은 밤낮으로 고민하는 곳입니다. 이제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영원을 좌우할 것입니다. 성경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심판을 피하리요(히2:3)” 라고.
4) 행위 거절
성경 마가복음 10장 17절에 보면 한 청년이 예수를 찾아와 질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질문은 아주 본질적 질문이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없는 무서운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무슨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모두 죄인입니다. 이 사실을 철저히 인식하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하지만 “인간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 옷과 같다(사64:6)” 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언젠가 어느 교회를 방문하여 아주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한 청년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는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 있습니까?” “예” / “누구의 은혜로 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갈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정확한 정답입니까. 교회를 오래 다닌 성도들 중에도 상당수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성도는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 있습니까?” 하고 질문해 보면 “해 놓은 게 있어야지요, 그러니 아직은…” 하면서 자신 없는 대답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하고 성경은 분명히 못을 박아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왜 자신이 없습니까?
성경은 또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갈3:10) /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라고.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로운 행위를 구원의 수단으로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라고 말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라고 말하면서 구원이 인간의 의로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를 찾아온 청년은 영생을 얻었을까요? 결국 얻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이 떠난 후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6-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은 인간의 아떤 의로운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요 하나님의 주재권(主宰權)이란 것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긍휼)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이 구원을 위하여 한 몫 거들려하는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교만이요 가장 큰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5)하나님의 요구
죄를 지은 자는 정녕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公義)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그들의 벗은 몸을 가리기 위하여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입혔습니다. 한 마리의 짐승이 대신 죽어 그 피흘림의 댓가로 그들은 치부(恥部)를 가리게 되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 레위기 17장 11절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너를 속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피흘림과 죄사함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기 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명령한 한 규례(規例)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상징성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 사건입니다. 그것은 출애굽하기 바로 전날 밤, 양이나 염소룰 잡고 그 피를 그 집의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고 그 집 안에 있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피가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발린 집은 그 집 안에 어떤 자들이 있든지 관계없이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치지 않고 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이 피는 결국 무엇을 상징하며 제물로 사용된 양이나 염소는 누구를 상징합니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요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인을 속죄하기 위하여 흘리시는 보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한마디로 요약한 가장 중요한 한 구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들이 죄로 말미암아 이미 죽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되어 있을 때 하나님 당신이 먼저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저주의 십자가 위에 높이 달아 죽이시고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당신은 당신 아들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저주의 죽음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시면서 당신의 거룩한 사랑으로 당신의 공의를 덮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롬5:8)”
6) 구원의 방법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누구입니까? 성경 빌립보서 2장에서 그를 밝히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은 하나님이며 또한 그의 아들입니다.
나는 지금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나는 나의 죄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라는 처절한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죄인임을 철저히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세주라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라고 했습니다.
인종과 신분에 관계없습니다. 미모나 재산과도 관계없습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아직도 주저하십니까? 기회는 그리 자주 오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아마 내 생애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성경 마가복음 10장에는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기록이 나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바디매오의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가 자기가 구걸하는 곳으로 지난다는 소식을 듣자 수많은 군중들의 소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군중들의 핀잔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수많은 병들을 고친 소식, 눈 먼 자를 눈 뜨게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다시는 내 곁을 지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눈은 이때에 떠야 한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더욱 소리를 높여 부르짖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경 바디매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눈을 뜨고 더 큰 구원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를 반드시 돌아보아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구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이보다 더 확실하고 명료한 복음의 소식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 곧 아들을 대속 제물로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서울행 KTX 기차표를 예매했으면 언제든 서울에는 갈 수 있으니 이미 서울에 가 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또한 최후의 심판도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었기 때문에 면제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육신은 세상에 살아 있지만 나는 영생의 티킷을 얻었으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입니다.
7) 온전한 속죄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온전히 속죄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말씀하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여기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몇 가지의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수에 관하여 예언한 서른여덟 가지의 모든 예언들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가 있고 둘째는 육백열세 가지의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의미요 셋째는 모든 인류의 죄와 나의 모든 죄를 온전히 사(赦)하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온전한 속죄를 이렇게 명쾌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10:10-12)”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하였습니다.
8) 하나님의 영원한 보장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이 온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을 뿐 아니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4)”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되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赦)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10:16-18)” 하고 말씀하십니다.
9) 복음의 능력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고전15:3-4)’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능력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라고 말입니다. 바울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사명자들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였기에 이 복음전파에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습니다.
10) 영접
이 글을 읽고 있는 형제자매 여러분, 정말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1:9)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가산(家産)을 탕진한 탕자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흉악한 행악자도 돌아올 때 구원을 얻었습니다. 돌아오십시오. 돌아오는 것은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나의 주인이 사탄이었다면 나는 사탄의 종이었으나 이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로 살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을 후사(後嗣)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영접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한 사람이라는 단순한 지적 동의(知的同意)는 영접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의 허다한 사람들도 예수가 위대한 인물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은 자는 아닙니다. 성경은 이렿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하였습니다.
형제자매님은 지금 예수님을 내 마음에 나의 구원의 주로 믿고 그를 구원의 주로 영접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 모으고 꿇어앉아 보십시오.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큰 소리로 따라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 내 마음 속에 왕으로, 주인으로,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지금 들어오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1) 확신
이제 형제자매님은 확실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삶을 살아가다가 내 속에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자꾸만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여 번민하는 날이 찾아오더라도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내 구원이 혹시 취소되지나 않는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 곧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이 새로이 태어났으니 당신의 구원은 결코 취소될 수 없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라고 성경은 확실히 못박고 있습니다.
성경은 단호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8:33-34)”
성경은 이렇게 확정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이제 하나님이 형제자매님의 구원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12) 구원받은 증거
그러면 내가 과연 구원을 받았는지의 자기 진단은 어떻게 하나요? 그 근거가 성경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요일5:10)고 말씀하십니다. 그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5:11)고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라고 말씀하셨으니 내 속에 하나님의 아들 곧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분이 나의 주인으로 계심을 성령의 감동으로 날마다 확인할 수 있다면 형제자매 여러분께서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자녀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13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려진 자니라"
또 하나의 증거는 구원받은 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게 되며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내적 욕구가 일어나고 결국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수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라고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성령이 내 속에 임재하여 계시므로 자연스럽게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교회는 진정 자살을 방지할 대안이 있는가
묵상 2011. 2. 5. 09:10 |1. 현대사회의 병리현상
한국의 발전상은 가히 눈부실 정도다. 가난과 패배의식 속에서 절망의 날들을 지새우면서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해방둥이인 나로서는 조국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나는 나의 조국이 한없이 자랑스럽다. 나의 아들과 딸들은 이제 더 이상 패배의식에 젖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이 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많은 이방나라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어 강좌로 몰려드는 젊은이들을 보며 참으로 크나큰 격세지감을 갖는다. 우리는 이제 당당하다. 우리는 오랜 동안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바뀌었지 않는가.
그런데도 유독 이해할 수 없는 병리현상 중의 하나가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하루에 삼십오 명꼴로 죽는다. 그것도 젊은이가 대부분이다. 인터넷 사이트에는 자살 사이트가 횡행하고 젊은이의 자살을 미화하며 부추기는 글들이 버젓이 올라와 있음을 보게 된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시절인 60년대는 참으로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격동의 시기였다. 아마 젊은이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기에 참 어려웠던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나의 자취방에서 벗들과 함께 시대와 사회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주고받은 적이 많았지만 우리의 대화 속에서 자살을 소재나 주제로 다룬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내가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다.’ 하는 삶에 대한 치열(熾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뭐 생명의 존엄성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때 그런 사치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몸으로 열심히 살면서 고민했을 뿐이다.
지금 우리는 풍요 속에서 빈곤의 갈등을 겪고 있다. 물질적 풍요, 문화적 풍요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적응(適應)과 안착(安着)을 갈구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이 사회에 연착륙(軟着陸)할 것인가는 개인에게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도 그것이 쉽지 않다는 데에 고민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의 속도 속에서 살고 있다. 내가 그 시간의 속도 속에서 나의 좌표를 찍기도 전에 시간은 아득히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만다. 그러기에 나는 그 시간 속에서 무력해지고 절망하게 된다.
근자에 우리는 신문 지상이나 방송 매체를 통하여 유명세를 타는 배우나 탤런트들이 자살하는 일들을 접하게 된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때마다 한국 기독교계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자살을 막을 것인가?
2. 자살을 방지할 수 있는 대안은 있는가
자살을 막아야 한다는 대안은 수 없이 많이 쏟아진다. 그런데도 효과가 별로 없다는 데에 고민이 있다. 자살을 방지하고자 하는 기독교적 대안 중에 가장 많이 제시되는 안이 바로 이것이다.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 하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은 이것이 성경적이라 보고 있으며 자살을 방지하는 최선의 길이라 보고 있다. 그러면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에 자살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곳은 없다. 성경에서 살인을 어떻게 보는가를 살펴보면서 자살에 관한 성경적 이해를 돕고자 한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 말씀하시면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니(마15:19)’ 라고 규정하셨다. 이는 죄가 곧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며 행위에 근거하지 않음을 명백히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 요한도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3:15)’ 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보건데 우리가 설령 행동으로 간음하지 않았고 행동으로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간음한 자요 살인한 자로서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살인의 동기가 남을 미워함이라면 자살의 동기는 자기를 미워함이다. 야고보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라고 하였으니 남에 대한 미움이 증폭되면 살인을 낳고 나에 대한 미움이 증폭되면 절망에 이르고 결국 자신이 자신의 생명을 끊는 일이 일어난다 할 수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나는 나를 미워한 적이 없어.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 절망해 본 적이 없어’ 라고 말할 사람이 과연 있는가?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그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면서도 한 번도 자살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젊은이들이 쉽게 자신의 생명을 끊는 일을 보고 내심 분개해 왔다. 그러나 이 얼마나 가소로운가! 나는 나 자신 나를 미워한 적이 수없이 많았으며 나에게 절망한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볼 때 나는 무수히 자살 죄를 지어왔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구원을 받았더라도 자살하면 받았던 그 구원이 취소된다’ 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버리시면서 ‘다 이루었다(요19:30)’ 말씀하셨으니 이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완벽하게 씻어주시고 용서하셨다는 말씀이다. 또한 히브리서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히10:12)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4)’ 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보아 한번 받은 구원이 그 후의 어떤 죄로 인하여도 취소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벽하고 온전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성경 몇 구절에서 살펴보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12:31)’ 라고 말씀하시면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9:6)’ 하셨으니 주님은 나를 포함한 사람이 지은 모든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시다.
이 모든 성경말씀을 종합해 보건데 주님의 십자가 죽음 다시 말해서 보혈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함이 명백하다. 따라서 자살 죄로 인하여 이미 받은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음도 명백하다. 왜냐하면 구원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남이니 한번 생명으로 태어나면 그 생명은 취소될 수 없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인 새 생명을 받았으니 그 생명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살하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주장은 잘못된 믿음이요 비 복음적 독소라 할 수 있다. 이 주제에 대하여는 총신대학원 교수의 글이나 침례회 신학대학원 교수의 글에서도 이미 확인한 바 있고 구원관이 확실하고 바른 성경관을 갖고 있는 많은 목회자들의 설교에서도 확인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비 복음적인 말로 성도들을 혼란케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둘째로 상당수의 목회자들과 많은 성도들이 생각하고 있는 자살에 관한 비 복음적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 즉 구원받은 자들은 자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은 절대 주권자인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피조물인 인간에겐 자살할 권리가 없다. 자실하면 이는 하나님의 주재권에 도전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그 근거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든다. 나도 지난날 이러한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묵상해 보면 생명을 끊는 행위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불순종이 하나님의 주재권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최초의 범죄인 아담의 불순종부터 하나님의 주재권에 도전한 행위였기에 그 대가로 인간에게 죽음이 오지 않았는가.
살인죄를 지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살인죄는 내가 남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이다. 내가 남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가 과연 내게 있는가? 내가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가 나에게 없다면 더더욱 내가 남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생명을 빼앗는 죄는 하나님의 주재권에 도전함으로 보지 않고 유독 나의 생명을 빼앗는 일만 하나님의 주재권에 도전하는 일로 본다면 이는 나와 남의 생명을 동일시하지 않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사악한 죄성(罪性)의 발상이라 할 수밖에 없다. 나와 남을 가릴 것 없이 생명은 귀한 것이다. 따라서 살인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자살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리 없다.
셋째로 상당수의 목회자들과 일반 성도들이 가지는 자살에 관한 비 복음적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른 죄는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자살 죄는 회개할 기회가 없기에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하는 주장이다. 이에 관하여는 나의 글 ‘복음의 능력’에서 회개에 관하여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회개는 기독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5:17)’ 라고 말씀하셨다. 이때의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구원의 주로 영접하여 영생 얻는 회개를 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생명 얻는 회개(행11:18)’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요1:12). 그러기에 우리가 생활 속에서 죄를 짓는다면 우리는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잘못을 자복해야 한다.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1:9)’ 라고 밝히고 있기에 회개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성령의 일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회개가 구원의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만약 회개해서 구원받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 내 죄를 다 기억하는 자도 없고 기억하고 있다고 다 회개하는 자도 없으며 죄에 대한 관점과 기준이 나와 하나님 사이에 다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관점에서 보자. 만일 구원받은 신자가 삶 속에서 죄를 지었다가 회개하지 못하고 죽어서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면, 사고나 질병으로 갑자기 죽는 모든 신자는 다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이 되므로 아주 잘못된 주장이 된다. 평소 신앙생활을 잘 하던 신자가 치매에 걸리거나 우울증이 심해져 자살한 경우 구원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구원은 회개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롬10:9-10).
따라서 어떤 사람이 절망 가운데서 고민하다가 비록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할지라도 그 자신이 생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나의 구원의 주’로 영접하고 믿음의 확신을 가진 자라면 자살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이미 받은 그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넷째로 자살에 관한 또 다른 비 복음적 주장을 살펴보면 ‘자살은 마귀로부터 끈임 없이 자살의 유혹을 받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한다.’ 라는 견해다. 자살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유혹이 마귀로부터 오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도 결국 마귀의 유혹에서 왔음을 창세기 3장 1절에서 분명히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주장은 자살을 방지하는 복음적 대안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의 산물이라 할 수밖에 없다.
3. 자살을 방지할 수 있는 대안
그렇다면 구원받은 기독교인이 자살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 첫째는 기독교인에게는 산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모든 소망을 둔다. 돈과 명예, 지식과 미모에 집착한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돈은 돌고 돌아 남에게 가 버릴 것이기에 그야말로 돈이다. 명예와 지위도 영원히 내 것이 아니다. 지식도 지나면 낡아 쓸모가 없어진다. 더더욱 미모는 시간이 갈수록 추해진다. 늙은이가 왜 사진을 찍기 싫어하는가? 자기의 늙어가는 추한 모습을 보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소망은 한시적이다. 영원하지 않다. 그러기에 필연적으로 허무요 절망이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나라 저 본향에 소망을 둔다. 이것이 산 소망이다. 산 소망을 가진 자는 자신을 절망 속으로 송두리째 내던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최선을 다해서 산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 절망하고 좌절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 소망을 주는 것이 자살을 예방하는 대안이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고 사명을 깨달은 후에 어느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을 살았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라고 말한 것을 보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사명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그 해답이 여기에 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그렇다. 하나님의 영광이 종착점이다.
자살은 사명을 망각하고 하나님 앞에 망령된 행동을 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참 기독교인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결산할 날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벌(永罰)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永生)으로,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상급으로 결산을 받아야 할 날이 있는 것이다. 그때 나의 주인 되신 주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는 칭찬을 받을 것을 소망하면서 그리스인으로서의 사명을 잊지 않고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이 자살을 예방하는 대안이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의 피조물이다. 그러기에 생명을 주신 자의 거룩한 뜻에 따라 생명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날마다 일마다 감사와 찬송으로 당신의 거룩한 일을 성취하려 하면서 최선을 살아가야 할 뿐이다, 부르심에 합당한 일을 하며. 할렐루야
겨울의 차가움이 목덜미 속으로 깊숙히 파고든다. 낯선 서울에서 겨울 맛을 톡톡이 보게 되나보다. 말없이 흘러가는 중양천은 오늘 밤도 철새들을 맞을 준비로 바쁘다. 발원지를 알 수 없는 이 강물은 백여리를 남쪽으로 돌고 돌아 한강 본류와 합쳐져서 서해 바다로 흘러든다. 중양천은 참 많은 것도 남쪽으로 실어 나른다. 인라인 스케이팅을 즐기는 사람, 쉼 없이 페달을 밟아대는 사이클링 족, 다정한 연인들, 그리고 천리 밖을 서성대는 영원한 이방인인 나.
내가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온 지도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간다. 내 주위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또 많은 것들이 변했다. 나는 나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이렇게 내가 변했을까 하고 스스로 놀라게 된다. 물론 환경적인 변화도 있었지만 그건 별게 아니다. 사람은 환경적 동물 아닌가. 환경을 초월하고 살 수는 없다. 그러기에 하루가 끝나면 고달픈 육체야 거저 침대 위에 얹고 쉬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내 영혼이다. 내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 나는 자기 진단을 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은 편치 못하였다. 영혼의 쉼이 없이는 참된 쉼은 없다. 그러기에 주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짊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하지 않았는가. 내 영혼이 진정 주 안에서 안식할 수 있다면 환경이야 어떠하든 기쁨과 감격으로 하루를 맞을 수 있을 텐데 진정 내 영혼에 쉼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자신이 없다. 가만히 묵상해 보면 내 영혼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나와 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임을 말씀하려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말씀하시려 한 비유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종종 이 부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둘째 아들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첫째와 둘째가 다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탕자다.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기에 탕자요 영과 육이 아울러 곤고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의 독백을 들어보자.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는구나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아들의 고백은 이러하였지만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반응은 어떠한가?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성경 구절 속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까지 나는 너무나 먼 길을 돌아온 탕자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까지 육십여 년이나 걸린 것이다. 육신으로는 나는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또 세 자녀를 낳아 길러왔던 한 아버지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신분으로 살아보면서도 정작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지금 곰곰 생각해 본다.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아마 육신의 정욕으로 인하여 나의 영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나는 나의 자녀들에게는 그렇게 집착했지만 정작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는 하지 않았다. 세월이 물같이 흐르고 이제 하나님 앞에서 정리하는 시간이 가까워오니 나도 철이 드나보다. 자식들을 돌아보며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보니 내 영안이 열리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자식을 바라보는 마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측은히 여김’이다.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의 이야기다. 시골에 계시는 노부모님을 뵈려 한 달에 한 번씩 고향집을 방문할 때면 늘상 어머니가 하시는 말, “얘야, 너거 아부지 너희들 온다고 일주일 전부터 매일 동구 밖 버스 정류장에 나가셨다.” 하신 말이 생각난다. 그럴 때면 매번 나는 어머니에게 핀잔을 주었다. “엄마, 뭣땜에 그래요? 올 시간에 나가보면 되지 번거롭게” 하면 어머니는 “나도 모른다. 영감이 왜 그런지”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아들과 딸들이 측은히 여겨진다. 아들과 딸들이 사는 곳에 불쑥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런 마음을 아들과 딸들이 핀잔을 주겠지. 나는 요사이 인천과 부산에 떨어져 사는 아들과 딸에게 한 번씩 전화를 걸어본다. 아들과 딸의 답전은 매번 시큰둥하다. 그래도 자식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좋다. 언젠가 TV 광고에 이런 장면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느 재벌 그룹의 큰 사무실에서 한 젊은이가 열심히 제 업무에 몰두하고 있는데 옆의 동료가 와서 전하는 말, “박 대리, 로비에 나가 봐, 자네 아버지가 와 있어.” 전갈을 받은 젊은이가 헐레벌떡 로비로 나간다. 거기에는 머리가 반백이 된 노신사 한 분이 창밖을 내가보고 있다. “아버지, 이 시간에 어떻게 오셨어요, 집에 무슨 일이 있어요?” “예야, 일이 있어야만 오니? 너 얼굴 한번 보고 싶어 왔다. 얘, 아버지 간다.” 하고 밖으로 사라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젊은이의 모습이 클로즙되면서 동구 밖에서 기다리던 나의 아버지가 눈에 선하다.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신자들에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성경속의 하나님일 뿐이다. 왜 그럴까?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이 떡을 달라할 때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할 때 뱀을 주는 부모가 있겠느냐 세상의 악한 부모도 그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그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나의 하나님은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 내가 내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고 언제나 나의 자식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듯이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일로 아버지를 만나기를 원하는 첫째는 왜 탕자인가? 그는 아버지의 속을 끓게 한 적도,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도,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적도 없었던 소위 모범생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15:31)” 라는 아버지의 말을 깊이 묵상해 보면 첫째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진정 알지 못했기 때문에 탕자다.
아버지 하나님은 나의 전부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삶에 하나님이 전부이었기에 롯에게 선택권을 먼저 줄 수 있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창13:9)” 하는 이 구절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양떼를 치는 이들에게는 물과 푸른 목초지는 가히 삶의 전부나 다름없다. 척박하고 메마른 가나안 땅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빼고는 양떼를 칠 만한 적절한 곳은 없다. “소돔과 고모라는 여호와께서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13:10)” 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곳이 얼마나 비옥하고 풍요한 땅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롯의 양떼들도 본래는 다 아브라함의 재산이다. 애굽 왕을 통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선물로 주신 것들이다. 그러기에 마땅히 아브라함이 먼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조카 롯에게 양보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요 전부였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내가 예배하는 교회에서 존경하는 목사님으로부터 이 설교를 들었다. 아브라함이 피자 네 쪽 중에서 한 쪽을 때내어 롯에게 준 것이 아니라 전부를 포기하고 전부를 선택했다는 말씀을 듣고 나의 영안이 번쩍 열림을 깨달았다. 그렇다. 하나님은 내 삶의 전부이다. 하나님을 선택하면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동서남북 전부를 얻는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당신을 언제 어디서나 내 삶의 전부로 환영합니다.
oh Lord, anytime anywhere welcome
나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묵상 2010. 11. 15. 16:48 |부메랑, 이것은 호주 서부 및 중앙부의 원주민이 사냥에 사용하던 무기의 하나로 마치 활등처럼 굽은 나무의 막대기인데, 목표물을 향하여 던지면 회전하면서 날아가고 만약 그것에 맞지 않으면 되돌아온다. 후세 사람들이 이것을 자기 글에 인용하여 주로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여 왔다. 그러나 본래는 긍정적으로 쓰인 만큼 나는 이것을 긍정적 의미로 내 경우에 적용해 보려 한다.
본래 이가 튼튼하지 못하여 고생을 많이 하여 왔던 나였기에 식후의 주전부리는 거의 하여 오지 않던 내가 그날따라 무엇이 먹고 싶어졌는지 냉장고를 뒤적거리다가 견과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하나 입에 넣고 한 번 힘차게 깨물어 보았다, 그런데 얼마나 단단하였던지 꼭 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냉동실에 넣어 두었으니 돌일 수밖에. 나는 먹기를 포기하고 옆에 놓아두고 조금 녹기를 기다렸다. 견과 하나가 나의 인내를 시험해 보려는 듯 입 안에서 자꾸 군침이 돌았다. 나는 조급해진 마음에 옆에 놓아두었던 견과를 집어 입 안에 넣고 두 번째 시도를 해 보았다. 역시 돌이었다. 나는 그것을 깨물어 앞니로 재껴야겠다고 생각하고 힘껏 앞으로 재끼는 순간 무엇이 ‘우직’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순간 나는 앞니 하나가 부러진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더니 후회막심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
손바닥에 얹혀있는 부러진 반쪽 이를 멍하니 내려다보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이 낯선 서울 바닥에서 어느 치과로 가야 할지, 비용은 또 얼마나 들지, 정말 막막하였다. 치과는 아무 곳이나 가는 것이 아님은 상식이다. 이튿날 주일 아침에 인근에 있는 교회에서 1부 예배를 드리고 다급한 마음에 집 근처 치과에 가 보았더니 X-ray 촬영 후 담당 의사가 하는 말, “선생님은 치근이 아주 좋습니다. 임플란트 하십시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였다. 내 치근이 약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요 비용도 만만찮다는 것을 아는 터라 나는 발걸음도 무겁게 치과 문을 밀치고 나와 버렸다.
정말 멍한 주일 오후였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너에게 제자들이 지 않느냐는 성령의 감동이 들려왔다. 감동과 동시에 제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물론 부산에서 치과개업하고 있는 제자다. 저녁 9시가 되었을까, 나는 제자에게 전화를 연결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이때부터 일사천리! 하나님은 나의 마음속의 걱정을 다 아시고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과분하게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다.
그 제자가 그 밤에 서울로 자기 동기에게 연락하고 그 동기는 또 치과의사인 자기 동기를 찾아 그 밤에 나에게 전화하는 일이 일어났으니, “선생님, 88년에 졸업한 24기 졸업생 OO입니다. 선생님께서 서울로 오셨다구요, 저는 내과의사라 안 되고 내 동기 중에 치과의사하는 XX가 있습니다. 선생님도 기억나시죠? 그 친구는 밤에는 휴대폰을 꺼 놓기 때문에 저가 문자를 보냈습니다. 내일 아침에 그 친구로부터 연락 올 것입니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튿날 아침 9시경 제자인 치과의사로부터 다정한 전화 한 통이 왔다.
그 후 나는 제자의 치과에서 꼭 한 달 간 치료를 받았다. 물론 임플란트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부러진 이의 그루터기를 살려서 그 위에 덮씌우는 어려운 시술을 받았다.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한지, ‘나에게 이런 제자가 있었다니, 나는 정말 행복한 족속이구나’ 생각하면서 제자가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치료를 받으며 나는 제자에게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얘, 너 나에게 수업 받았나?” 하고 말이다. 물론 삼 년 동안 한 번은 받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이 없다. 전 학년 서른여섯 학급에 국어 선생 열, 한 학년에 세 명씩 담당이다. 현대문과 고전 작문 문법을 나누어 가르친다. 나는 물론 삼 학년을 거의 전담했다. 그러나 주로 문과를 맡았기 때문에 이과인 학생과는 만남이 적었다. 그런데도 22년 전에 졸업한 이들이 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만히 지난 한 달을 되돌아 생각해 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만 나올 뿐이다. 이 작고 미련한 나를 기억하여 주시는 나의 하나님이 고마울 뿐이다. 나는 지난 삼십삼 년 동안 한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쳐왔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 밤을 새워 교재를 연구하고 목젖이 내려앉을 정도로 열강을 하여왔다. 때로는 무릎을 맞대고 앉아 제자들의 고민을 들어주며 내 인생의 노른자위를 학교에서 다 보냈다. 그것이 22년 만에 아름다운 보상의 선물로 나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이름하여 ‘기억하여 줌’의 부메랑으로.
하나님이 나를 왜 기억하고 계실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나 이외에도 많다. 내가 세상일에 열심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늘 그래왔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제자들과 만나 상담한 연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복음의 소식을 전한 이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복음보다 귀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복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자신에게 되물어보곤 한다. “나 같은 자도 하나님이 기억하실까?” 하고 말이다. “나 같은 자는 기억하시지 않을 거야.” 하면서 절망하고 좌절하면서 쉽사리 포기하고 만다.
열왕기상 17장에는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왕상 17장을 읽다가 갑자기 사르밧 과부를 주목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배역한 패역한 아합 왕 시대에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참 사람들이 없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은 엘리야를 불러 시돈 땅 사르밧 과부에게 가라고 명령하셨는가? 그리고 그 기막힌 명령을 당신의 종으로 하여금 하게 하셨는가?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의 믿음을 미리 아시고 그녀를 기억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녀를 기억하고 계셨다는 증거가 있으니 왕상 17장 9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결국 하나님은 삼년 육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핍박한 땅에서 그녀의 생명을 구원하고 그녀 아들의 생명까지 덤으로 구원해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자신을 되돌아보며 절망할 때가 많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보지 않고 사람의 관점에서 나를 보기 때문이다, 사람은 힘 있는 자의 요구나 소원을 쉽사리 들어준다. 세상에서는 재력, 권력, 가문, 학벌, 심지어 외모까지도 다른 이와 비교하여 우위에 있을 때 그만큼 대우를 받는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신다. 사르밧 과부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정말 힘없는 작은 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큰 자다. 그녀는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자라 할 수 있다.
사르밧 과부는 얼마나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패역한 조국을 안타까워하며 하나님께 얼마나 중보기도를 했을까, 그 신앙의 깊이와 순수성의 열정이, 아득한 시∙ 공간을 넘어 지금 내 가슴에 와 닿음을 느끼게 된다. 그 믿음의 깊이와 간절함이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을 순종으로 이끌어 낸 비결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 과연 그러하다.
폐일언(蔽一言)하고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하나님이 어떤 자를 기억하시는가를.
나는 2월 7일 주일오후 예배를 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집트에서 사역하는 허OO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간증이 하루 뒤 나에게 일어난 한 사건과 연관되어 나를 일깨우는 하나님의 중요한 메시지로 들려옴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허 선교사의 사역과 간증을 잠깐 소개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허 선교사의 신앙 간증
나는 27세의 청년 시절에 교회에서 어느 선교사의 선교 보고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보고를 진지하게 듣고 있던 중 갑자기 그 선교사님은 청중들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전혀 엉뚱한 한 가지 제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인생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내 인생의 백 육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분은 손을 드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내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면서 누가 손을 드나 다들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만 하였지 정작 손을 드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내 생애에 육 개월 정도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오른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이게 내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이후 나는 남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2년간 단기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끝내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으로 지금 나는 18년째 아라비아 반도의 한가운데 위치한 시나이 광야에서 베두인 족속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시나이 광야는 모세가 40년간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한 곳입니다. 베두인 족속은 3500년 동안 이 황무지 같은 불모의 사막에서 양떼를 따라 유랑하며 알라신을 섬기는 이슬람 종족 중의 한 소수민족입니다. 이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자들이 아직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체구가 비교적 큰 나는 지금 콧수염을 기르기까지 해서 타반을 쓰고 그들과 섞여있기만 하면 영락없는 베두인입니다. 낮 기온이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덕에 그 많던 머리 숯이 다 빠지고 이제는 반 대머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꼭 알맞은 심부름을 시킵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잘 마치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베두인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심부름을 시켰거든요. 우리 모두 심부름 잘 합시다.
나는 허 선교사의 신앙 간증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이 감동과 하루 뒤 나에게 일어난 사건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나는 지금 말하려 하는 것이다.
2월 8일 오후 1시 30분에 나는 전라북도 익산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고 있었다. 그날따라 남해 고속도로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안개도 짙게 끼었다. 나와 아내, 목사님 한 분 이렇게 세 사람이 동행하여 예배의 처소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내가 모는 승합차가 남강 휴게소를 지나고 얼마를 더 달렸을까, 갑자기 우리 차의 측면을 들이받는 ‘꽝’하는 굉음과 함께 우리 차는 심히 좌우로 흔들렸고 나는 졸고 있던 조수석에서 눈을 번쩍 뜨게 되었다. 우리 차를 바짝 뒤따라오던 승용차 한 대가 졸음운전으로 우리 차를 들이받은 것이다. 그때 우리 차는 1차선을 달리고 있었다. 차는 십여 초 만에 정말 기적적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충돌의 충격으로 만약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았다면 우리 셋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아도 소름이 끼친다. 아내가 핸들을 놓치지 않은 건 전적으로 하나님이 핸들을 잡아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그 순간을 분명히 목격하였으니 나는 그 사건의 생생한 증언자다.
나는 지난주에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본다. 익산에서 예배를 마치고 함께 귀가하던 동료 몇 명이 예배 시간에 들은 십일조에 관한 일을 차 안에서 주고받으며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온전한 십일조에 관한 논쟁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나는 마음이 차츰 불쾌해지면서 심사가 뒤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화를 벌컥 내면서 ‘제발 그만들 두어’ 하면서 소리를 꽥 질러 버렸다. 장내는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지면서 분위기가 다운되기 시작했다.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 말씀을 주제로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가는 자들에게 나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고 말았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이번 주의 사고와 지난주의 차 안에서의 화냄이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인을 계속 기다려 왔다. 그런데 사고 이틀 후 새벽에 하나님이 나에게 무서운 책망을 하셨다. “너는 내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느니라” 하고 말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명기 32장 51절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모세가 패역한 자기 백성 앞에서 반석을 두 번 치면서 화를 낸 행위가 그렇게 큰 죄였던가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었는데 이제야 시원히 풀리는 것 같다. “왜 너를 살려두었는지 너는 아는가? 나의 심부름 잘 하라고 너를 살려 놓았다“ 하는 하나님 당신의 책망이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다. 아버지 하나님, 내가 당신 앞에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의 사랑으로 진노를 거두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나를 용서하옵소서. 신실한 하나님의 사역자요 나의 동반자인 사랑하는 아내와 우리 차에 함께 동승했던 강 목사님 덕분에 나는 덤으로 살아났다. 아브라함 때문에 롯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으며 두 사람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보낸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심부름 잘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