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

 나는 평상시 형식이나 의식 등 격식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나를 아는 한 선배는 “김 선생은 외모는 오리지널 ‘토종’인데 삶의 스타일은 전혀 아니야, 아마 미국에서 살면 딱 맞을 것 같애.” 하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한국같이 체면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나는 용케도 이 지긋지긋한 겉치레를 의도적으로라도 벗어던져 버리려고 몸부림쳐 왔다. 그러다보니까 어떤 때는 맞지 않은 옷을 입었을 때처럼 삶이 어색했던 때도 참으로 많았다. 지금은 그래도 얼마나 좋은가! 나의 개성시대에 나만의 라이프 스타일이 인정되고 내 소신대로 살아도 아무도 간섭하려 하거나 빈정거리는 사람이 없다.

 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먼 이국땅에서 고등학교 동문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푸른 초원에 가든파티를 열고 모인 동문들은 직업도 다양하였고 미국에 건너온 사연도 다양하였다. 그런데 미국이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눈치 안 보고 소신껏 살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자연히 나의 신앙생활도 남과 달랐다. 예배에도 의식을 싫어하고 삶이 예배라는 생각으로 예배를 꼭 교회에서만 드려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가진 적이 많았다.

 예배에는 시간이나 장소 혹은 목적에 따라 여러 종류의 예배가 있을 수 있겠으나 예배에 대한 인식이 바뀐 계기가 있었다. 워싱턴의 웰링턴 국립묘지에서 한국참전 기념비를 참배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은 하나뿐인 목숨을 이국(異國)의 형제를 위하여 고귀한 희생의 피를 흘려 준 미국인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란 아무런 대가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비문에 새겨진 글귀는 나를 더욱 숙연하게 만들었다. 아! 그렇다. 인생에 있어서는 매듭이 중요하고 역사에 있어서는 기념이 중요하며 그 기념물이나 기념비가 잊혀져가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게 하는구나 하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인생에 있어서 의식(儀式)의 중요성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되고 예배에도 의식(儀式)이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2. 예배의 본질

 예배는 인간이 찬양과 경배로 구원의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거룩한 행위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배에는 거룩함 곧 구별함이 있어야 한다. 구별함이란 일상적 삶과의 분리를 의미한다.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타당한 말이지만 삶이 예배란 말은 결코 옳지 않다. 구약시대의 예배를 깊이 살펴보면 하나님은 구별된 곳에서 예배를 통하여 자기의 백성을 만나셨다.


가) 장소의 구별

 하나님이 만나시는 장소는 일상생활 속의 공간이긴 하나 반드시 하나님이 그곳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셨음을 볼 수 있다. 제단을 쌓고 주위에 도랑을 깊이 파고 물을 도랑에 붓도록 명하셨다.(왕상18:30∼36) 이스라엘 민족은 초기 족장시대로부터 광야의 성막시대를 거쳐 가나안 정복 이후의 성전시대에 이르기까지 예배하는 민족으로 살아왔다. 가나안 정복 후 왕정시대를 맞은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은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던 성전 신앙에서 차츰 벗어나 삶의 현장에서 가까운 곳마다 산당을 지어놓고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시작하면서 급속히 타락하여 갔다. 이 산당 신앙은 편의주의요 세속주의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하나님은 이를 격노하셨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가장 잘못된 신앙 사상이 편의주의라 할 수 있다. 이 사상은 주일 성수를 약화시키고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 모범을 거부한다. 이는 사악한 사탄의 궤계(詭計)임을 밝히 알아야 한다. 혹자(或者)는 이렇게 강변한다. 성전 예배를 강조하는 것은 구약 시대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하면서 지금은 신약 시대라고 자기들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말씀하시고 내 집을 너희가 도둑이나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도다(막11:17)” 라고 책망하신 기록을 보라. 물론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는 어떤 건물을 의미하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교회는 총회 또는 회중이라는 개념으로 헬라어 에컬레시아의 어원은 (세상 밖으로) 불러낸 무리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를 정의하면 교회는 거룩한 무리인 성도들의 공동체라는 뜻이다. 그러나 주님이 교회를 창시하셨고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거룩한 무리가 모이는 구별된 장소 즉 교회당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지배하는 곳으로 그곳을 주님이 중요시했었고 주님도 성전을 인정하셨다. 따라서 예배의 공간은 성령이 임재하도록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교회당이 가장 적합한 예배의 장소라고 확신한다. 그것을 쉽게 증명할 수 있는 간단한 사례를 들어 보자. 우리는 어떤 때 심령이 답답하여 기도하고픈 욕망이 찾아올 때를 느낀다. 그때 우리는 산 기도를 가거나 기도원을 찾아간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기도가 잘 되지 않고 두려움이 엄습하여 오거나 잡생각이 들어 짜증이 날 때가 있다. 이것은 악령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기도가 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 눈이 이곳을 향하고 내 마음이 이곳이 머물리니 네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이곳에서 너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리라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이 향하여 계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머물러 계시는 곳에서 기도하여야 한다. 물론 전능자 하나님은 우주의 어느 곳에도 편만(遍滿)하시지만 예배의 장소로는 성령이 임재하여 계시는 교회당이 가장 적합하다.


나) 예물(제물)의 구별

 예배에는 반드시 드림이 있다. 마음의 드림, 몸의 드림, 시간의 드림, 예물(물질)의 드림 네 가지가 있을 것인데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신령과 진정으로 마음을 드려야 하고 내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하고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구별하여 드림이 바람직하겠다. 그러면 제물은 어떠한가? 구약 시대에는 제물로 드려지는 짐승은 저는 것, 눈 먼 것, 얼룩진 것, 병든 것은 제물에서 제외되었다. 반드시 온전한 것이어야 하였고 굽이 갈라진 것, 되새김질하는 짐승 곧 분리된다(구별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소, 양, 염소가 제물의 대상이었다. 그러기에 예물도 즐거운 마음으로 구별하여 정성껏 드려야 할 것이다. 액수의 과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성이 문제라고 본다. 

 

3. 예배의 3요소

 예배에는 찬양과 설교와 기도가 있다. 예배를 지상(地上) 예배와 천상(天上) 예배의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천상예배에는 찬양만 있다 하겠다. 이렇게 보면 예배의 하이라이트는 찬양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배에서 설교를 가장 중요시하고 찬양을 등한시할 때가 굉장히 많이 있다.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유교의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엄숙함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유교는 죽은 조상을 추모하고 조상신을 부르는 초혼(招魂)적 의식 행위이다. 이와 결부된 초기 기독교 예배는 필연적으로 정적(靜的)이며 엄숙하였다. 예배의 역동성(力動性)이 없는 죽은 예배가 되어 버렸다 하겠다. 설교는 구약 시대의 성경 강론에 해당한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말씀은 생명이요 능력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선포될 때 생명이 살아나고 치유와 회복의 능력이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설교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찬양 또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은 반드시 찬양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찬양에는 노래와 춤이 있어 몸으로 드리는 몸 찬양을 흔히 워십이라 부른다.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조의 찬양은 춤이다. 사무엘상 6장 16절 이하를 보면 오벳에돔의 집에 머물던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왕이 자기의 성(城) 다윗 성에 모셔올 때의 기록이 나온다. “궤가 성으로 들어올 때에 왕이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춤춘지라” 이때에 왕의 아내 미갈이 이를 업신여기다가 저주를 받아 일생 동안 자식을 낳지 못한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示唆)하는가? 이로 보아 예배에서의 찬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할 것이다.


4. 예배와 내려놓음

 나는 2007년 8월에 삼십삼 년 간 근무해왔던 정든 학교 교정을 등지고 명예퇴직을 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좇아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있던 나에게 아내가 이렇게 제안하였다. “여보, 내가 동역하고 있는 선교회에 와서 먼저 예배부터 몇 개월 드려보는 게 어떻겠어요?” 나는 이에 선뜻 응하기로 하고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로부터 일 년 육 개월 동안 나는 한 주도 빠짐없이 예배 훈련을 받았다. 내가 참석한 선교단체는 생수 은혜 선교회라 이름하는 국내 선교단체로서 예배 회복을 위하여 설립된 단체이다. 매주 전국을 순회하면서 1년 52주를 월요일 밤부터 목요일 저녁까지 모두 열 번의 집회를 갖는 모임으로서 예배의 회복을 통하여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교회와 사회를 살리고 회복하는 일을 사명으로 7년째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선교회의 예배 성격은 아주 길다는 것이다. 한 번의 예배가 평균 세 시간 이상이다. 나는 이곳의 예배에서 정말 놀라운 체험과 변화를 겪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현대교회가 예배 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대형교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예배의 시작부터 마침까지 한 시간 내외라고 보면 된다 나는 단언컨대 예배의 시간과 내려놓음은 정비례한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왜 내려놓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짐을 내게 맡기라” 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시며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시지만 정작 내려놓고 쉼을 얻는 자는 드물다. 왜일까? 생각의 충돌 때문에 내려놓지 못한다. 생각의 충돌이란 무엇인가? 나의 생각, 지식, 교만, 자존심, 고정관념, 옳음(신념) 등과 하나님의 생각의 충돌이다. 이 충돌은 결국 대형 사고를 일으킨다. 갈등과 번민은 분노로 증폭되고 급기야는 나를 온통 불살라 버리기까지 한다. 이 생각의 충돌에서 해결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예배를 통하여 젖어져야 한다. 발목만 적시면 안 된다. 무릎으로 발목을 거쳐 허리에까지 물이 차오르게 맡겨야 한다. 물이 나를 완전히 삼키어 내가 물속에서 헤엄을 칠 수밖에 없을 때까지 나는 물속에서 젖어져야 한다.  물속에서 나는 죽고 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살기까지 나는 젖음의 훈련을 하여야 한다. 젖어짐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면 젖게 되고 젖어지면 벗게 되어 있다. 내가 그렇게도 내려놓기 싫어했던 것들, 벗어버리기를 거부했던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엔가 저절로 내려지고 벗어지게 된다. 이것이 예배의 기적이다. 나는 이 훈련을 통하여 나의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웠다. 나의 소원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당신이 계시하시는(열어 주시는) 하늘의 비밀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을 주시며 간절히 자기를 찾는 자에게 만나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하셨으니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 내가 예배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받기 원하시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만능(萬能)이다. 아직까지 마스터키를 갖지 못했는가? 창세기(35:1∼5)에서 그 해답을 찾고 하나님의 만능키를 가지라.


5. 주인을 바꾸라 

 예배의 훈련은 궁극적으로 주인을 바꾸는 작업이다. 지금까지는 내가 나의 주인이었으나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그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나의 주인은 나를 창조하신 그분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인은 나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착각도 자유라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야 어찌하겠는가. 문제는 기독교인들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진정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모르기에 진정한 누림의 자유를 즐기지 못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말씀은 우리를 죄악의 종에서 해방시킨 감격의 메시지다. 그러면 진리가 무엇인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하신 이가 누구인가? 곧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진리이시니 예수 안에서 생명을 소유하라.


6. 나의 벧엘은 어디인가

 아버지로부터 기어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낸 야곱이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밧담아람으로 도망갈 때에 광야에서 그를 만나 주신 하나님, “네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말씀하신 이가 지금도 나를 벧엘로 부르신다. 나의 벧엘은 어디인가? 나는 나의 축복의 통로인 벧엘에서 예배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나는 세 가지의 질문을 하고 싶다.  

맺힌 것이 있는가  /  예배에서 풀어라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는가  /  예배부터 드려라

응답받을 일이 있는가  /  예배에서 승부를 걸어라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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