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 위로 잠길 듯 말 듯 삐죽 솟아오른 주먹 바위 끝에 외다리로 서서 목을 빼고 물속을 한없이 들여다보고 있는 황새 한 마리가 마냥 시간을 붙들어 매고 있다. 팔월 말의 저녁 햇살이 아직도 따갑기만 한데 진부에서 발원한 평창강은 오늘도 유유히 세월이란 화물을 부지런히 바다로 실어가고 있다. 강물 위로 갑자기 한 줌의 금가루가 뿌려진다. 눈이 부시다. 구름에 가리었던 해가 얼굴을 내밀면서 산 아래로 잠겨든다. 강원도는 언제나 찾아와도 정겹다. 산이 있고 강이 있고 또한 바다가 있어 좋다.
내가 지금 찾아온 이곳 평창은 우리나라에서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스키장이 많고 겨울은 외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현지인들 말로는 전국에서 펜션이 가장 많단다. 동계 올림픽을 대비해 지어놓았지만 올림픽 유치가 무산되면서 빚만 늘었다고 한숨들이 보통이 아니다. 평창에 바위 공원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외지인인 나에게 자연의 진수라 할 수 있는 돌의 품평회에 초대받는 행운을 선사한 지인에게 감사한다. 나는 바위 공원에 전시된 자연석들을 둘러보며 태고의 신비를 맛본다. 참으로 하나님의 창조함이 위대하다. 금강산 만물상을 축소한 듯한 갖가지 형상의 만물바위, 어머니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모자바위, 그 외 수 없이 많은 바위들이 떼를 이루어 한 자리에 누워 있는 모습이 퍽 인상 깊다.
여름밤은 깊어만 간다. 도회지 같으면 열대야로 밤잠을 설칠 시간인데도 여기 평창은 몸이 땀으로 끈적거리는 느낌이 없이 쾌적하다. 오염되지 않은 일급수의 에메랄드빛 강물과 싱그러운 숲이 군무를 이루어 풍부한 오존을 공급하는 탓인지 몸이 가뿐해지며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나는 오늘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천리 길을 허우적거리며 달려왔다. 밤을 새워 예배를 드리는 우리 일행들에게는 이에서 더한 축복은 없다. 밤하늘의 별자리가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대나무 장대에 조래기를 매어 가지고 감 따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별을 하나 따서 나의 방에 걸어보고 싶다.
주여, 이 밤도 당신을 찬송하며 한 영혼을 사랑하게 하소서. 한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그리고 한 영혼을 찾아가게 하소서. 오만과 편견으로 얼룩진 이 땅에서 나를 내려놓고 내가 먼저 손 내밀게 하소서. 내가 먼저 나의 몫을 포기하게 하소서. 욕심과 자만으로 오염된 이 땅에서 나로 하여 가족과 이웃이 편안하게 하소서. 존경과 배려로 섬기며 살게 하소서. 이 땅이 옥토(沃土) 되는 토양을 만드는데 나로 하여 한 줌의 부토(腐土)가 되게 하소서. 예배는 비움이요 섬김의 훈련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배설하는 천국 예배에 나로 시중들게 하소서. 나의 가족을, 나의 이웃을 그리고 열방의 뭇 영혼들을 당신이 초대할 때 나도 거기 있게 하소서.
주여, 당신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십니다. 나로 한 영혼을 깨우는 파수꾼이 되게 하소서. 세상에는 나보다 잘난 사람도 많습니다. 개중에 어떤 이는 너무 잘나서 현란(絢爛)한 필치와 난삽(難澁)한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하면서 영혼을 도둑질하는 악역을 맡은 자도 있지만 나로 영혼을 미혹케 하는데 쓰임 받지 않고 영혼을 살리고 세우는데 사용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배우는 감독이 맡겨준 배역에만 충실할 뿐이니 악역을 맡기시지 않은 감독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달리는 열차는 종착역이 있고 항해하는 배는 귀항지가 있다. 세상일에는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 간단한 진리를 모르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끝없이 집착하고 끝없이 거머쥐려 한다. 시기와 질투는 분노를 낳고 분노는 다시 분노로 증폭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무엇으로 끊어야 할지? 대안은 없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주님, 진리 안에서 참자유룰 주시는 당신만이 유일한 대안입니다.
세상은 만만치 않다. 그리고 인생이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저 배 바다를 산보하고 / 난 여기 파도 흉흉한 육지를 항행한다” 중국의 시인 지센의 ‘배’란 시의 한 구절이다. 수많은 시를 읽고 또 교단에서 그것을 가르쳐 왔지만 이보다 더 인생을 깊이 함축하고 있는 작품을 발견하지 못했다. 인생을 얼마나 역설적으로 묘사해 놓았는가. 배가 바다를 항해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나의 고등학교 동창 중에 해양대학 항해학과 출신이 있다, 그는 반평생 배를 탔다. 그것도 그리스 선적의 유조선을 탔다. 평상시에는 선장인 자기가 키를 잡는 일이 거의 없다 하였다. 선장이 키를 잡을 때는 가장 위험한 때 즉, 태풍이 불거나 갑자기 돌풍이 불어 수십만 톤이나 되는 그 거선(巨船)이 가랑잎처럼 파도 위에 들어 얹혔을 때라고 했다. 한 순간의 판단을 잘못하면 배와 함께 모든 승무원은 물귀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은 만만한가? 이 시인은 인생이 세상을 헤쳐 가는 일이 배의 항해보다 더 어렵다고 본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을 배의 항해에 유추한 것이다.
우리의 선장(船長)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길이며 생명이시니 나의 일생을 온전히 그분께 다 맡겨 버려도 좋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16:3)”하였으니 나는 나의 무거운 짐을 그분께 맡기고 그분이 주시는 평강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기만 하면 된다. 인생은 남의 불행에 함께 하며 울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해결해 줄 능력이 없다. 그것이 인생의 한계(限界)이다. 나는 나의 삶을 살아오면서 이 냉엄한 사실을 참으로 많이 경험해 왔다.
나의 문제를 참으로 시원히 해결해 줄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를 지어셨기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전능하신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다. 신문의 사회면에 흉악범이 경찰에 쫒기다가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숨어드는 기사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때 자기를 찾아온 아들을 어머니가 신고한 경우를 우리는 거의 찾아보지 못한다. 이를 두고 그 어머니를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도 별로 없다. 왜일까? 어머니의 사랑이 그 자식의 죄를 덮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죄로 고민하고 절망하며 끝없이 좌절하는가? 숨을 곳을 찾지 못해 애태우는가? 예수께로 돌아오라. 돌아오기만 하면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돌아오기를 주저할 때 나보다 먼저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돌아오는 한 영혼을 사랑하며 두 팔로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리고 자기의 피로 나의 죄를 덮어 주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