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이 예약해 준 무궁화 열차를 타기 위해 부산역으로 나오는 중이다. KTX나 최소한 새마을이라도 예약해야겠다는 딸의 고집을 무참히 꺾고 굳이 무궁화를 고집하였던 두 가지의 이유가 나에게는 있었다. 우선 딸애에게 거금 오만 원의 짐을 지워주고 싶지 않았고 다음으론 차창가로 흐르는 풍광을 보며 여유로운 여행을 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딸애의 마음엔 자기 아빠가 퍽이나 안쓰러운가 보다.

 
 6․25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나의 가정은 마산으로 이주를 했었다. 그때 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난생 처음 기차를 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시절은 무임승차가 많아서 역무원이 열차 안에서 수시로 승차권을 검사하는 일이 있었다. 나도 초등학교 때 방학을 맞아 고향을 오가며 몇 번이나 무임승차를 한 기억이 있다. 역무원을 피해서 객차 화장실에 숨거나 승객 좌석 밑에 숨기도 하였다. 그 당시엔 기차의 등급도 특급열차, 급행, 완행의 세 등급뿐이었다. 서울행 통일호 특급열차는 모두에게 꿈의 열차였다. “나는 언제나 통일호를 한번 타 보나” 하면서 어린 마음에 꿈을 키워 보기도 했지만 초등학교를 끝내고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나에게 돌아오는 몫은 언제나 완행뿐이었다. 세간에서는 완행을 십이열차라 불렀다. 자랑스런 그 명성 그대로 서울행 십이열차가 용산역에 도착하는데는 꼭 열두 시간이 걸렸다.

 
 꿈은 이루어진다더니 나에게도 한양을 구경할 기회가 왔다. 1966년 1월 초순, 대학입시를 위해 청운의 꿈을 품고 아침 8시 서울행 십이열차(승객 칸 열두 량을 달고 가는 열차)에 몸을 실은 적이 있었다. 열차는 숨차게 북으로 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십이열차는 그 정체성(正體性)을 확인이나 하려는 듯 간이역도 빼놓지 않고 인사를 꼬박꼬박하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부산을 출발한지 꼭 여섯 시간만에 열차가 대전역 플랫폼에 미끄러지듯 들어가기가 무섭게 “대전~, 대전~. 광주, 목포 방면으로 여행하실 분은 여기서 호남선으로 바꾸어 타시길 바랍니다. 열차가 많이 연착되오니 가급적 역구내에서 기다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목쉰 소리의 역무원 안내 방송이 잠든 승객을 깨운다. 좌석에 앉은 사람, 통로에 서거나 그냥 퍼질러앉은 사람, 정말 열차 안은 조선 팔도의 군상들로 메뉴가 다양하다. 그래서 가장 인간적이다. 객차는 승객들을 꾸역꾸역 밖으로 토해낸다. 빈 배를 채울 기세로 사람들은 우루루 통로 쪽으로 몰려나간다. 플랫폼에 판자촌처럼 엉성하게 꾸며진 가락국수집 좌판은 갑자기 촌 장터같이 붐비기 시작한다. 대전을 출발한 열차가 상당히 북쪽으로 올라왔는가 싶었는데 이제 겨우 천안이다. 얼마 전 대전에서 통일호와 급행열차를 대피해 무한정 역구내에 눌러 앉았는데 열차는 천안에서 또 늑장을 부린다. 목과 손등에 때가 꾀죄죄하게 낀 소년들이 열차 안으로 들어와 호도과자를 팔고 있다. ‘천안 호도과자 사려―’ 길게 끄는 소년의 변성음에 충청도의 밤은 깊어만 가고 철마는 또 종착역을 향하여 달려간다.

 
 밀레니엄 시대인 지금은 무궁화가 완행이다. 이제 나도 시속 300키로의 초특급을 타도 될 만큼 넉넉해졌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물질의 복도 아주 넉넉히 받았다. 그런데도 굳이 완행을 고집하는 이유는 뭔가? 나는 완행을 타야 마음이 편하다. 특급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어색하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만 잘 살면 되는가 하는 마음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빚 진 자다. 모두에게 빚 진 자다. 그것을 갚아야 한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사치가 어울리지 않는다. 언제나 구수한 된장국이 좋고 어머니의 품 속 같은 조국의 산천이 좋다. 나는 지금 34평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런데 자꾸만 미안한 생각이 든다. 너무 잘 사는 것이 아니냐고. 나는 정말 부지런히 살아 왔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그에 가깝게 살려고 노력해 왔다. 나의 아내는 무지기도 주기를 좋아한다. 이걸 보면 나와 아내는 하나님이 짝지어 준 천생 연분임이 틀림없다. 나의 어머니가 그랬다. 어린 시절 농촌에서 경험한 일이다. 암탉이 알을 낳으면 모아지는 대로 교회의 전도사님 댁에 가져가는 것이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이 생기면 교회로 가져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 어머니가 광신자(狂信者)로만 보였다. 모전여전(母傳女傳)이라더니 나의 장모가 그렇고 나의 어머니가 그랬다. 그러니 모두 한 통속이다. 이제는 나의 딸, 아들이 그러하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주어 본 자만이 주는 자의 기쁨을 안다. 나는 이 기쁨은 누리면서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한 평생 부지런히 그리고 성실하게 살면서 분외의 욕심을 부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남의 말을 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내 앞도 다 가리지 못하면서 왜 남의 말을 하나?” 하셨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정직을 배웠고 나의 어머니에게서 베품의 행복을 배웠다.

 
 나는 이번에 나의 생의 반려자인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경복궁을 둘러보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딸, 아들과 함께 근정전 앞에서 역대 왕들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고 역사의 허망함도 느꼈다. 사람은 가고 역사는 남는다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어떻게 남은 삶을 살아야 할까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의 아들과 딸들에게는 무엇을 남기고 가야 할까를 묵상해 보면서 하나님의 싸인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나의 딸과 아들이 한없이 자랑스럽다. 여보, 사랑해. 아들아, 딸들아, 사랑한다. 나의 하나님, 언제나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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