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에로스를 아느냐
묵상 2009. 3. 7. 23:07 |1. 문학 작품 속의 에로스
이 탑의 코니스 위에는 기다란 깃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들의 눈길은 이 깃대로 쏠렸다.
시계가 여덟 시를 친 지 몇 분 뒤에 무엇인지
깃대 위로 느릿느릿 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검정 깃발이었다.
※ 검정 깃발:사형을 집행했다는 표지
위의 지문은 19세기 말 영국 작가 토마스 하디의 소설〈테스〉290쪽에 나오는 글귀이다.
이 소설로 인하여 작가는 붓을 꺾을 수밖에 없었지만 시•공간을 초월하여 21세기를 살고 있는 이방인인 나에게도 영원히 불멸의 감동으로 다가오기에 여기 나의 글의 서두에 잠깐 인용하게 되었다.〈테스〉는 당시의 영국 사회의 도덕적 편견과 사회적 인습, 인간의 운명 등 아주 복합적 주제를 작품의 배면(拜面)에 깔고 씌어진 작품이지만 내가 이 글에서 가장 주목하고자 하는 이슈는 한 남자의 에고이즘에 희생된 한 여인의 삶의 역정이다.
2. 어느 노교수의 강연
나의 둘째 딸이 대학 입학 OT에 다녀와서 나에게 들려 준 말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대학 새내기가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대학 강당에 집결하여 있는 젊은이들에게 한 노교수가 등단하더란다. 사회자의 멘트에 의하면 이 학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기 교수라는데 등단하여 내뱉는 몇 마디가 심상치 않다.
“여러분은 이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다음의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에 목숨을 거십시오. 반드시 가치가 있습니다.”
“첫째, 후회 없이 마음껏 노십시오.”
“둘째, 후회 없이 마음껏 사랑하십시오.”
“셋째, 후회 없이 마음껏 공부하십시오.”
나는 지금도 이 노교수의 말을 마음에 두고 있다. 그 당시 나의 딸의 말을 들었을 때는 이 사람이 젊은 후학(後學)들에게 시의적절하지 않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나 하고 마음속에 이상야릇한 분노가 일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기막힌 강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는 사랑에 목숨을 거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 아픔과 분노로 밤을 지새우는 자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이혼율 1위의 불명예 국가이다. 이대로 두어도 좋은가? 이혼율을 낮출 만한 방안은 없는가? 가을이면 낙엽은 어디서나 지천(至賤)으로 많다. 그러기에 그 낙엽이 있을 곳에 있을 때 빛을 발한다. 내장산 단풍은 가을의 진수성찬이다. 그러나 미화원 아저씨의 빗자루에 쓸려 가는 낙엽은 피로의 퇴적물(堆積物)일 뿐이다. 이 세상에는 온통 사랑으로 넘쳐난다. 그러나 빛을 발하는 사랑은 얼마나 되는가? 나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랑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 나의 사랑은 여전히 빛을 발하는가?
3. 에로스의 본질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랑을 네 가지로 나누었다고 한다. 아가페, 스톨게, 필레오, 에로스.
이 분류를 보면 에로스는 사랑 중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한다. 나는 최근에 참으로 존경하는 벗을 잃었다. 언제나 믿음의 상담자요 인생의 동반자로, 만나지 않아도 기억만 하면 즐거운 벗이었다. 오랜 동안 투병 생활을 하다가 얼마 전 두 아들의 간을 받아 이식 수술을 하였지만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버지를 위하여 자기의 귀중한 장기를 드린 두 아들의 섬김을 보면서 스톨게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 장한 두 아들을 통하여 나의 벗을 생각하게 된다.
에로스는 조건적 사랑이다. 그러기에 사랑을 준 자는 준만큼 받기를 원한다. 무조건적이라는 말은 에로스에는 적합하지 않다. 하나님의 무한 사랑, 어버이의 주는 사랑, 형제간의 나누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에로스에 있어서의 사랑과 증오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에로스의 또 다른 측면일 뿐이다. 내가 상대에게 베푼 만큼 나도 상대로부터 받기를 기대하는 것이 에로스의 속성이다, 몫이 돌아오지 않으면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가 싹트며 분노는 둥지를 틀고 내 속에서 자리 잡게 되면서 자라가게 되고 언젠가는 증오로 폭발하게 된다.
4. 성경적 결혼은 축복이다.
사랑만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던 결혼 생활도 세월이 가면 ‘생활’이란 방패 뒤에 나를 교묘히 감출 수 있게 되면서 고운 정은 어느 새 미운 정으로 자리바꿈하고 허울 좋은 세월 속에 길들어져 있는 나는 사악한 한 마리의 포식자(捕食者)로 바뀔 뿐이다. 나는 결국 이런 자였나 하는 자괴감(自愧感)에 빠지면서 자신의 추한 모습에 끝없이 절망하고 분노하면서 나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결혼 생활을 오래 한 남편이나 아내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당신은 결혼 생활을 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상대에게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란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는가?” 라고. 우리는 언제 이런 이방인의 감정을 느끼는가? 상대방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정체성(正體性)을 깨달았을 때 즉, 인간은 궁극적으로 타락한 존재요 이기적 존재라는 것, 자기 생존을 위하여 철저히 상대를 이용하려는 에고이즘을 보았을 때 다시 말하면 위장된 사랑을 보았을 때 당신은 상대에게서 소름끼치도록 차가움을 느끼며 끝없이 절망하게 된다.
그러면 잠깐 시각을 바꾸어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에 관한 내용은 어떠한가를 한번 살펴보자. 지혜자 솔로몬은 이렇게 말한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전9:9)” 결국 성경은 결혼이 해 아래서 의미 있는 삶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엡5:31∼32)” 라고 말하면서 결혼의 성스러움을 강조하였다. 결국 결혼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5. 행복의 용광로는 결코 꺼질 수 없다.
가) 열정을 가지라
나는 올해로 아내를 만난 지 41년을 맞는다. 7년 간 연애하고 34년을 부부로 살아왔다. 나를 아끼는 어느 인생 선배는 연애를 하려면 오래 하라 그러면 다시 헤어지는 일은 없다는말을 했다. 정말 꼭 맞는 말이다. 연애를 오래 하다보면 장점과 단점이 다 보이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상대의 단점이 보이면 실망하게 되고 자신이 미워지기도 하지만 어느 새 상대가 나에게는 거울이 되어 그 단점이 나의 것으로 확인되어지며 상대에게 미안해지고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하다가는 끝내는 둘은 하나가 된다. 그러기에 미운 정도 정이라 하지 않는가. 입 안의 혀도 물릴 적이 있다는데 40여 년 동안 어찌 부부 간에 위기가 없었겠는가. 오랜 세월 동안 굴곡도 많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서 순결하게 살아오려고 노력하여 왔다. 고지식하리만치 진실하게 오직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여 왔다. 위기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집중할 수 있었다. 말씀이 나를 지켜 준 셈이다. 요셉을 지켜 준 말씀은 나에게도 능력으로 다가왔다. “내가 어찌 여호와 앞에 범죄(犯罪)하리이까(창39:9)” 이것은 신전 의식(神前意識)이다.
행복은 거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주 안에서 계속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신앙을 가지고 순결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부부간의 갈등으로 정말 힘들 때가 있을 것이다. 이때마다 좋은 것만 생각해야 한다. 첫 만남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려보라. 첫사랑의 아름다움도 되씹어보라. 여건이 허락되면 추억의 그 장소에도 한번 들러보라. 얼음장 아래에서 새봄을 준비하는 미나리의 새싹처럼 당신들의 사랑의 새순은 얼어 죽지 않고 그날 그곳에서 새봄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이러다 보면 당신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들여오는 당신도 소스라쳐 놀라는 이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데!” 이 순간 행복에의 열정을 가지고 사랑의 용광로를 다시 지피라.
나) 배려하고 존경하라
나를 지으신 자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않음을 아시고 돕는 배필로 하와를 지어 주셨다. 부부간의 사랑을 성경적으로 정의하면 배려와 존경이라 할 수 있다. 배려를 일방적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상대로부터 받음이 없이 무한정 베풀 수는 없다. 각자에게 부족한 부분을 서로가 보완하여 주는 것이다. 내가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면 언젠가는 상대방도 나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 지어진 상대방을 존경하는 것이다. 그 속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속성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상대방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약점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되면 이루리라는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상대방의 인격을 존경하고 나에게 돕는 배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여보, 부족한 나에게 당신은 너무나 과분하오.” “여보, 당신이 자랑스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