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무엇이냐

묵상 2016. 5. 3. 12:57 |

 족히 5미터도 더 될 듯한 방음벽 위로 살금살금 기어오르더니 마침내 정상에 이르고는 한 고개를 넘어 뒷 등허리까지 다 점령해 버릴 기세다. 한 해의 사분의 일을 이 낯선 서울에서 보내야 하는 길고도 지루한 겨울 동안 나는 이 상계고등학교 담벼락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담쟁이를 바라보면서 노원 롯데백화점으로 향하곤 한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런데 가끔씩은 주의 깊게 보게 된다. 그때는 물론 내가 신호대기를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멍청히 서 있을 때이다.



 싱그러운 5월의 첫날이다. 오늘도 상계고등학교 담벼락을 감싸고 있는 담쟁이들은 수많은 촉수로 가파른 수직의 벽에 발을 내리고 한걸음 한걸음, 조금씩 조심 조심, 위로 올라 마침내 연초록 물감으로 그 우울하고 답답했던 겨울의 무거움을 단번에 날려버린다. 간밤에 내린 비로 말끔히 먼지가 씻긴 잎들이 너무 영롱하여 길 가던 나를 멈춰 세운다. 생명이 충일한 잎들이 등교하는 수많은 젊음에게 축복을 선사한다. 담쟁이 잎이 아름답지 않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담쟁이만큼 고마운 넝쿨식물도 더물다. 칙칙한 담벼락에 푸르름을 선사하고 무너질 듯 불안한 담벼락을 제 몸으로 얼기설기 얽어매어 안전을 선사하고 때로는 코흘리개들의 물티슈 대용으로도 쓰이지 않는가? 가을의 단풍은 또 어떤가? 담쟁 잎만큼 아름다운 단풍을 나는 보지 못했다. 해마다 가을이면 나는 담쟁이 잎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서울시립대학 캠퍼스를 찾곤 한다. 공과대학 서편건물의 사분지 삼을 점령한 담쟁이 잎이 가을햇살에 반사될 적이면 세상은 온통 반․고흐의 캠버스 위에 짓이겨진 진홍의 유화 그대로다. 담쟁이 잎은 자기를 불태우며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러나 세상은 담쟁이 잎을 주목하지 않는다. 늦가을이 되면 담쟁이 잎은 거저 귀찮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낙엽 수거자루에 담겨 어디론가 실려가 버리는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이는 빌라도가 자기 앞에 붙잡혀 온 예수에게 한 질문이다. 세상을 살 만큼 살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질문을 한 번쯤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나는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정말 혼란스럽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낙엽 수거자루에 실려가 버리는 담쟁이 잎처럼 실려 가 버리는 것 같다, 주목받지 못한 채. 사람은 최소한 주목 받고 살아야 한다. 주목 받음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알게 되고 자신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나는 삼심여 년 교단에 서 오면서 주목 받는 사람을 키운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깨달았다. 주목 받지 못하는 담쟁이 잎이 작가 오․헨리에게서 ‘마지막 한 잎’으로 거듭나고, 시인 수필가에게서 그리고 드물기는 하지만 조경사나 화가에게서 재조명을 받지 않는가? 그렇다면 담쟁이 잎을 재조명한 이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나는 오래 전에 나의 블로그에 ‘사랑하면 보인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빌라도는 자기 앞에 세워 두고도 그가 곧 진리임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 수 없었고 그러기에 그를 십자기에 내어 주지 않았는가? 진리는 공허한 관념도 아니요 심오한 이론도 아니다. 길이요 생명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모든 인류의 그리스도(구세주)가 되어 자기 몸을 주어 만 사람의 몸을 사고, 자기 생명을 주어 만 사람의 생명을 산 것이다. 이 모든 동력(動力)의 원천이 무엇인가? 사랑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자기를 떠나간 제자들을 부활 후에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었다. 사랑은 평강을 만들어 내지만 탐욕과 아집은 끊임없이 미움과 증오, 분노와 울분을 만들어 낼 뿐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대상이 무엇이든 진정 사랑하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주목 받는 자로 나 자신이 바꾸어질 것이며 평강을 만들어내는 자로,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자로, 더 나아가 주목 받는 자를 만드는 자로 나 자신을 바꾸어 나갈 것이다.  

Posted by 힛데겔
:

열정

비전 2015. 10. 6. 12:11 |

 반가운 단비가 내린 캠퍼스는 방금 목욕한 아기같이 해맑다..가을 햇살에 주홍으로 물들어가는 싱그러운 잎사귀들이 너무 고와 눈부시다. 보도 위를 걷는 젊음의 물결이 짙은 초록의 나뭇잎들과 잘 배합되어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린다. 정말 부럽다. 나에게도 이런 날들이 있었던가. 오랜만에 시립대학 캠퍼스를 찾아 깊어가는 가을을 맛본다. 이제 멀지 않아 나무들은 겨울을 준비하며 자기 몸을 잔뜩 움츠리겠지? 그리고 또 얼마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분신들을 허공에 날려 보내야 하겠지? 그러면 이 캠퍼스는 온통 낙엽으로 뒤덮일 것이고 숲속 연못에는 잎의 잔해들로 물이 탁해지겠지? 문득 하늘을 본다. 높고 푸른 가을하늘을 보며 잠시 우울해진 나의 마음을 날려 버린다. 그리고 발걸음도 가볍게 젊음의 대열 속으로 합류한다.


 올해는 대한민국이 광복 칠십 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나는 1945년 해방둥이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감회가 더욱 새롭다. 나와 같은 동년배의 삶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해방둥이들은 치열한 삶을 살았다 할 것이다. 나는 빈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에 한국 전란이 일어나자 부모님을 따라 마산으로 피난하여 그곳 피난지 마산에서 아홉 살에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마산은 전쟁 통에도 적화되지 않은 몇 안 되는 도시였기에 토착민 반, 피난민 반으로 전쟁고아의 천지였다. 그러기에 1학년 한 반의 정원이 칠십명을 넘었다. 게 중에는 코 밑에 제법 시커먼 솜털이 난 형님들도 있었다. 작게는 일곱 살부터 열 살 넘는 아이까지 천막 수업을 받았으니 낭만은 그야말로 외계인의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대학 캠퍼스를 자주 찾는 것은 나의 학창시절, 초등에서 대학까지 맛보지 못했던 낭만을 이제라도 보상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캠퍼스를 거닐면서 젊음을 보고, 그들의 꿈을 보며 나의 낭만과 꿈을 확인할 때 나는 무한한 희열과 행복을 맛본다.

 

  그런데 지금 이 낭만의 캠퍼스가 고민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중심에 서야 할 그들이 아파하고 있다. 혹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도 하지만 살면서 한 번쯤 아파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 아픔이 생명을 죽이는 병의 인자가 아니라면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그 아픔은 나의 삶을 풍요하게 하는 더 좋은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나의 청춘 시절, 우리는 삼류 영화관에서 영화 자이안트를 보면서 꿈을 키워갔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텍사스의 광활한 평원을 질주하는 자동차 대열을 보면서, 메마른 황야에서 석유 시추에 목숨을 거는 제임스•딘의 구리 빛 얼굴에서 희망을 보았다. “친구야, 우리 미국 땅에 도전하자.” 그날 그 자리에서 함께 다짐했던 나의 고교 벗 다섯 중에 셋이 지금 미국에 둥지를 틀었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지금 생명을 서서히 옥조여오는 죽음의 인자와 고된 싸움을 하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내가 읽은 어느 철학자의 책이 생각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암이나 에이즈가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육체를 파괴하고 정신을 피폐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이나 영혼을 파괴할 수는 없다. 그 반증으로 이러한 무서운 질병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면서도 위대한 저서를 남기거나 불후의 명곡을 남긴 작가나 작곡가가 많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면 가장 무서운 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절망이라는 병이다. 문화 인류학에서는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라 정의한다. 이는 인간은 희망을 가진 동물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명백하다. 인간에게만 유일하게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희망을 선물로 주었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요 인간만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니니 평강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느니라(렘29:11)"

 

 어떤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일까? 행복에도 여러 가지 갈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것도 다분히 주관적이라 생각하기에 나의 행복이 남에게는 행복이 아닐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사례는 주위에서 얼마든 찾아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악(邪惡)하다. 그러기에 인간은 저마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가 하는 문제는 인간(person)을 페르소나(persona)라 하는 다른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페르소나는 원래 탈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정체는 언제나 가리어져 있다. 탈 뒤에 숨겨진 실체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자신의 실체를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할 수 있다. 인간들이 그렇게나 추구하는 행복은 대부분 본질적 행복이 아니라 현상적 행복일 뿐이기에 그 현상이 사라지면 행복감도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첫째는 아직까지 건강하여 일할 수 있는 기쁨이요, 둘째는 아직까지 나에게 일할 데가 있다는 기쁨이며 셋째는 나룰 믿고 나를 기다려 주는 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행복은 돈이나 명예 따위의 현상적 행복과는 무관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나의 하나님, 하루를 설레며 기대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주위의 사람에게 행복을 주게 하소서” 조용히 기도해 본다.


 삼포세대니 오포세대니 심지어 N포세대니 하는 말이 언론매체나 방송매체를 통하여 요사이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음을 본다. 영어로 n은 무한대를 뜻하는 말이니까 요즈음 젊은 세대 중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자들이 많다는 말이 아닌가? 일부 언론이나 방송, 잡지들에서 빈정대듯 내뱉는 무책임한 이런 말들이 얼마나 많은 청춘들을 더 많이 아프게 하는가? 대안 없는 말만 무성하면 열매 없는 잎만 무성한 나무와 무엇이 다른가? 세 가지는 포기할 수 있다 치자.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 연애나 결혼 출산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연애나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사는 자들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고 믿기에 스스로 연애, 결혼을 포기한 자들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그러나 희망이나 꿈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 이것을 포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포기하는 일이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제일 행복해 보일까? 자기 일에 열정(熱情)을 가지는 사람일 것이다. 바로 그 열정의 동력(動力)은 무엇인가? 꿈이요 희망이다. 꿈이 있는 사람은 상황 앞에 주저앉지 않는다.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길은 보이는 법! 길이 없으면 내가 길을 만들면 된다. 내가 가면 길이 된다. 인생 후반기에 조국을 떠나 라오스의 오지에서 육년 만에 커피농장을 일군 장한 한국인이 있음을 본다.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눈을 들어 멀리 보자. 세계가 나의 시장이요 나의 삶의 터전이 아닌가? 젊은이여 블루오션의 꿈을!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적과의 동침

작은 행복 2015. 6. 2. 00:32 |

 요사이 아내는 나에게 심심찮게 묻는다. “여보, 요사이는 글 안 쓰세요?” 그러고 보니 글 안 쓴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난 것 같다. 작년의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내 블로그에 글을 올린 이후 아예 쓴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요사이 글을 쓴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나의 글이 바람에 흩날려 다니는 하찮은 휴지조각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문득 글을 쓰고 싶어졌다. 꼭 이 말만은 하고 싶어졌기에.



 어제 아내를 따라 의정부시에 있는 코스트코에 갔다. 쇼핑을 하고 내가 즐겨 사 먹는 쇠고기베이크도 하나 사서 즐겁게 이층 주차장으로 올라와서 쇼핑백을 내 차에 싣고 있는데 옆에서 한 중년 신사 한 분이 쇼핑백 몇 개를 차 뒤트렁크에 싣고 있다. 참 인상이 좋다. 수수한 아웃도어 차림에 흰색 러닝화를 신었다. 전형적인 가장상이다. 그런데 차가 에쿠스450이다. 이때부터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저쯤 되면 돈으로는 대한민국 1%다. 영국에서는 돈 많은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는데 한국에서는 왜 그렇지만은 않은가? 부자를 적으로 간주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사다리가 없어져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가 1960년대부터 삼사십년 동안은 희망의 시대였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였다. 가난의 대물림을 나의 시대에 와서 끊어 버릴 수 있었다. 실력 하나로 대기업의 임원도 되고 창업해서 대기업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조선사회로 회귀해 버렸다고 탄식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부와 지식의 대물림이 고착화하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그래서 더러는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해 버리고 스스로를 삼포세대라 부른다.



 나는 사회학자도 아니고 경제학자도 아니다. 한국이 이렇게 되어버린 원인을 분석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할 능력도 없다. 다만 사랑하는 아들과 딸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손자를 거느린 할아버지로서 이 나라가 지구상에 존속해야 한다는 당위성 앞에 서 있기에 나뿐만 아니라 오천만 국민은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일 때문이다. 내 나라는 나와 나의 후손이 두 발을 엉버티고 살아가야 할 땅이다. 그러기에 한 가지 미덕(美德)만 가져 달라는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바로 한 단계씩만 낮춰 달라고 주문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 묻고 싶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고. 만약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을 정확히 안다면 세상의 절반을 얻었다 할 수 있다 하겠다. 왜냐하면 세상을 다 얻었다 하더라도 그 정답을 모르면 최소한 얻은 것의 절반 이상을 도로 잃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어릴 때 호랑이가 제일 무서운 줄 알고 자랐다. 밤잠을 안 자는 아이에게 ‘호랑이 온다’ 하면 울던 울음을 뚝 그쳤으니까. 내가 어릴 때 나의 어머니는 당신의 무릎 위에 나를 눕히고 수수께끼 하나를 하셨는데, “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 쩍 벌린 게 뭐게?” 한다. 답을 몰라 동그란 눈망울만 굴리면서 엄마의 입만 바라보는 아들에게 엄마는 “아궁이” 한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 말 속에 무궁무진한 진리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릴 적에는 우리나라의 온 산이 민둥산이었다. 한국 전쟁으로 황폐화된 산에 그나마 남은 나무는 먹고살기 힘든 백성들의 땔감으로 마구잡이로 베어져 버렸기에 산에는 나무 한 그루가 없었다. 그러니 이 산 저 산 다 잡아먹은 것은 아궁이가 맞았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 그것은 바로 탐욕이다. 성경은 밝히 말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라고 하였고 또한 “욕심(탐욕)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죽음)을 낳느니라” 하였으니 이보다 더 명쾌한 정답이 어디 있는가. 탐욕은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 탐욕은 블랙홀이다. 가족, 체면, 윤리 도덕, 이런 것들이 탐욕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세상의 그 무엇도 탐욕의 질주를 막을 수 없다. 탐욕은 과도한 욕심이다. 물론 알맞은 욕심은 개인이나 사회를 성장하게 한다. 우리가 바라는 발전적 욕구,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지구는 새로운 희망적 욕구로 진보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그 희망적 욕구가 한 사람이나 몇몇 특수집단의 이익으로 변질될 때 무서운 탐욕으로 바뀐다. 아내나 자식보다 돈이 좋게 보일 때 경고신호, 아내나 자식보다 돈을 선택할 때 범죄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경고신호를 의식하지 않거나 아예 무시해 버리기 일쑤다. 돈의 힘에 끊임없이 찬탄을 보내면서 다른 모든 것은 하찮게 보기 시작한다. 이 단계가 돈에 중독된 중증단계, 이쯤 되면 갈 데까지 다 간 단계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면 돈을 섬긴다고 성경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16:13) 탐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돈보다 사랑하는 자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탐욕과 싸우는 훈련을 해야 한다, 최소한 한 단계 낮추는 훈련만이라도. 에쿠스를 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제네시스를 탄다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일까? 자기가 가진 능력을 다 누리지 않고 이웃을 위하여 한 몫만 남겨 둔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자기 밭에서 곡식단을 거두는 농부는 밭에 떨어진 이삭을 다시 줍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 나무의 과일을 따고 다시 돌아보아 따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 가난한 자, 나그네를 위하여 한 몫을 남겨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나의 욕심을 꺾는 연습은 한 단계 낮추는 훈련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가족과 함께 시민공원에 바람 쐬러 나가보면 행객들이 여기저기 마구 버린 휴지더미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때 한 단계 훈련을 나부터 실행할 일이다. 내가 안 버리기 훈련은 첫 단계요 버려진 휴지를 줍는 것은 두 번째 단계가 아닐까? 행복은 먼데 있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바깥으로 나와 보니 아파트단지 사이의 보드블록에 씹다버린 껌들이 흉물스럽게 덕지덕지 눌러붙어 있었다. 나는 걸음을 돌려 집으로 올라가 껌 제거용 주걱칼을 찾기 시작했다. 퇴직하며 갖고 나온 소중한 보물이다. 그날 나는 껌 제거에 한나절을 보냈다. 그날 나는 참으로 행복했다.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날까지 타락한 인간은 탐욕이라는 적과의 동침을 피할 수 없다.그러나 그 탐욕이라는 적을 다스리며 살아야 한다,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러면 행복한 날이 올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탐욕과 싸워 이겼다는 보람은 탐욕을 제어하고 남을 위해 한 몫을 남겨 본 사람만이 아는 즐거움이다. 얼마 전에 신문 기사에 난 화제 한 토막, 우리나라 대기업 총수 중에 어떤 한 분은 아직 개인 승용차로 카니발을 탄다고 하는 기사였다. 그것도 십여 년째 동일한 그 차란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개인재산이 최소 몇 천억일 터인데. 만약 나라면 가능한 일일까 생각할 때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만약 내가 수백억의 재산가가 된다면 현재와 무엇이 달라질까? 차부터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어’를 오늘도 되뇌어본다.

Posted by 힛데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