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탐욕2

비전 2014. 5. 13. 09:08 |

 싱그러운 신록의 숲 사이로 아침햇살이 눈부시다. 참 오랜 동안 기다려온 봄비였기에 더욱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어젯밤부터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나는 잠을 설쳤다. 어젯밤에는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좋아서 나는 창문을 열고 기린처럼 목을 길게 늘이고 뺨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차가운 감촉을 즐기면서 모처럼 마음이 한가로웠다.



 4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이던가! 딱딱한 땅껍질을 헤집고 나오는 새순의 반란(反亂)을 보며 영국의 한 시인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하였다던데, 껍질이 깨어지는 아픔 뒤에 봄이 온다면 4월은 잔인하여도 좋지 않은가. 그러나 이 땅에는 지금 새로운 대지(大地)의 봄은 오지 않고 있다. 깊고 푸른 바다가 이 땅의 봄을 묶어 버린 채 우리네 소중한 아들과 딸들을 삼켜 버리고 한 마디 말이 없다.



 그렇게 잔인한 4월이 가고 5월의 봄비가 대지를 흠뻑 적셨지만 봄은 여전히 겨울에 묶인 채 시청 앞 광장 한 모퉁이에 분노로 맴돌고 있다. 합동분향소엔 아직도 조문객들이 끈이지 않는다. 깃대에 매달린 노오란 리본들과 광장 잔디밭 위의 노오란 종이배들만이 저 깊고 푸른 바다를 향하여 저 마다의 사연을 토해내고 있다. 나는 얼마 전 이곳 분향소를 찾았을 때 어른이 된 나의 모습이 이때처럼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내 뒤로는 대부분 젊은이들이 도열하여 있었기에 자꾸만 뒤통수에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손등으로 거기를 가리고 서 있을 수도 없고…이날처럼 모자를 쓰고 오지 않음을 후회한 날도 없다 .왜냐면 내 머리 중 흰머리가 뒤통수에 가장 많았기에. 조문객들이 정렬해 서 있는 머리 위에는 따가운 햇살을 가리기 위해 차일이 쳐져 있고 천정에는 수많은 글귀들을 쓴 종이들이 펄럭이는데 하필이면 ‘어른들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라는 글귀는 왜 그렇게도 선명하고 크던지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미국에서는 십만 부가 팔렸다고 하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백만 부 이상이나 팔라는 밀리언셀러가 되었다니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의에 목말라 하는가? 시중의 서점가에는 정의와 관련된 책자는 넘쳐나는데 홍수 때는 정작 먹을 물이 없다더니 정의로운 사회는 왜 아직도 요원한가? 홍수 때 생명을 살리는 물이 될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번 세월호 참사를 통하여 인간이 얼마나 탐욕적인 존재인가를 알게 되면서 나 지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소름이 끼쳤다. 인간의 탐욕의 끝은 어디인가? 내가 어릴 때는 할머니와 손자가 깊어가는 밤에 수수께끼를 할 때가 많았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묻기를, ‘이 산, 저 산 다 잡아 먹고 아가리 쩍 벌린 게 뭐게? ’ 그러면 손자는, ‘아궁이’ 한다. 할머니가 반색하며 대답 왈, ‘그래, 맞다’ 탐욕적 인간은 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도 부족하여 아가리 쩍 벌린다.



 어쩌다 광화문 광장에 나갈 때면 나는 세종대왕 동상을 무관심하게 지나치거나 아니면 곁눈질로 흘깃 보고 지나치는 게 일쑤다. 삼십여 년 동안 훈민정음으로 먹고 살았으니 나보다 세종대왕을 더 잘 아는 자 없으리라는 오만과 편견의 소치(所致)리라. 그러나 이 자만은 곧 무식의 소치요 오만의 발로에서 시작된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인데 모르면서 안다고 하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지 않은가. 세월호의 침몰은 총체적 부실 때문이다. 선장과 선원, 선사(船社)와 감독기관, 그 어느 곳에도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존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나는 이번의 대 참사를 통하여 세종대왕을 조금 알 것 같다. 조선 오백 년 동안 많은 왕들이 있었지만 유독 세종과 정조가 후세인의 사랑을 받는다. 왜일까? 역대 어떤 왕들도 못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일까? 바로 서얼(庶孼)을 관리로 등용한 일이다. 서얼들을 관리로 등용한다는 일은 당시에는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못할 일이다. 사람은 신분에 관계없이 존엄하다는 사상으로 무장된 애민정신(愛民精神) 말이다.



 요사이 우리나라에는 오바마의 열풍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산업화세대나 그 이전세대는 대부분이 미국을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경향이 있지만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고 대단히 합리적이다. 그들이 오바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바마 대통령이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점도 다소 있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미국 역사상 백 년 동안 끌어왔던 숙제를 오바마 대통령이 풀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건강보험 개혁안이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하므로 삼천 이백만 명의 서민층이 새로이 의료혜택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서민을 사랑하는 마음은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동일하다. 오바마는 미국에서 상대적 소수계층인 흑인, 아시아계 이민층이나 히스패닉계 이민층을 사랑하여 그들을 위하여,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공화당과 싸우면서 마침내 이 법안을 상․하 양원에서 통과시키는 승리를 얻어냈다.



 나는 이번 국가적 대 재난을 겪으면서 나 자신을 겸허히 반성해 본다. 그리고 나의 남은 삶을 어떻게 정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 아주 오랜 일이 생각난다. 나의 교사 초년생 시절의 일이다. 고 2학년 담임을 맡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우리 반 학생 중 한 명의 아버지가 사업에 부도를 내고 전 가족이 종적을 감추어 버린 해괴한 사건이 있었다. 갑자기 천애의 고아가 되어 버린 제자를 바라보며 나는 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아내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제자를 나의 집으로 데려오고 말았다. 오륙 개월 후 누나라 하는 자가 학교로 찾아와 그 학생을 데려가기까지 나는 귀여운 딸아이와 함께 아내와 넷이서 방 둘 딸린 13평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다. 아내는 그때 둘째를 임신 중이었지만 내가 저지른 일을 원망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아내에게 미안하고 한없이 고맙기 그지없다.

 


 이제 자판 앞을 떠나려 한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그래서 성경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 한다. 성경(갈5:14)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이로 보건데 정의(正義)는 곧 이웃사랑이다.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정의인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정의(正義)다. 크리스천이면 응당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사랑하여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는 일이다. 세상에는 항상 가난한 자가 있을 것이니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네가 구제할 수 있을 때 구제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겸손히 귀를 기울여 나에게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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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보인다.

묵상 2013. 11. 25. 16:31 |

  창밖의 느티나뭇잎에 늦가을의 따뜻한 햇살이 눈부시다. 나뭇잎들이 셋에 둘은 떨어지고 이제 그 하나만 남아 겨울을 재촉하고 있다. 느티나뭇잎이 처음에는 노랗게 물들었다가 다음에는 붉게 변하고 떨어질 때쯤이면 검붉게 물들어 땅 위에 갈린다는 사실도 서울에 와서 살면서 비로소 알았다. 그만큼 나의 서울생활이 하루가 소중하고 고마운 날이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무심히 보던 나뭇잎 하나도 유심히 보게 되고 관심 있게 보게 된 소이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흔히 단풍하면 진홍색의 붉은 단풍을 연상한다. 그러나 단풍에는 노랗게 물드는 단풍들도 있다. 특히 한여름 내내 실실이 푸르던 수양버들이 늦가을에 노랗게 물들어 연못가에 가지를 드리우는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내가 즐겨 찾는 서울시립대 캠퍼스 연못가 벤치에는 오늘도 선남선녀들의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젊음이 있고 낭만이 넘쳐나는 대학 캠퍼스에서 인생의 후반기를 달려가는 한 시니어가 젊음과 함께 오늘도 남이 보지 못하는 노란 단풍을 보너스로 보면서 사랑하면 보인다는 진리를 깨친 사람에게만 허여(許與)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림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조금 있다 중랑천으로 나가볼까 한다. 반가운 손님들의 귀환(歸還)을 보려 함이다. 매년 이맘때면 찾아오는 손님이지만 내 마음의 한켠에는 무거움이 가시지 않는다. 양계농을 하는 농민들의 한숨소리 때문이다. 이들이 조류독감을 몰고오는 주범이라고 방송에서 연일 보도를 쏟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은 참 어려울 일, 세상은 고루 공평하지 않다. 그러기에 겨울에는 가정마다 닭 한 마리 더 먹기 운동을 벌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반가운 철새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그들의 찬란한 비상(飛翔)을 이 땅의 강과 호수 어디에서나 마음껏 볼 수 있기에 그러하다.



 오래 전의 추억이다. 어느 모진 겨울밤, 나는 퇴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날따라 매서운 칼바람의 겨울 추위가 옷 속을 파고들어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오는 내 발걸음이 퍽이나 빨랐던 것 같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와서 집쪽으로 방향을 틀려 하는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오는 한 모자(母子)상이 나의 발걸음을 그 자리에 그대로 묶어 버렸다. 한 여인이 조그만 연탄화로를 놓고 지하철 입구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군밤을 구워 팔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등 뒤에는 귀여운 한 아기가 매달려 연신 콧물을 흘리며 앙증스런 두 손으로 엄마의 목을 끌어안고 자기 코를 비벼대도 있지 않은가. 얼핏 보기에도 그 여인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스카프로 머리를 살짝 동였지만 얼굴이 희고 이목구비가 또렸했다. 나는 그 순간 그 여인이 너무나 고마웠다. 나의 손은 저절로 나의 주머니 속을 뒤적이고 있었다. 나는 내 지갑을 꺼내들고 그 여인의 군밤을 사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거기 군밤 구워 놓은 것 봉지채로 다 싸 주세요. 아기가 참 귀엽내요” 나는 그 여인이 팔려고 내어놓은 군밤 봉지들을 몽땅 다 샀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여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몽땅 다 사 주는 일뿐일 것이라 믿어졌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 머릿속은 갑자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저만한 인물이면 쉽게 살 수 있을 텐데, 그 길을 마다하고… 아! 그 엄마 고마워.‘”



 전에 내가 나의 블로그에 ‘아름다운 동행’이라 하여 한 편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는 미국에 사는 우리 교포 부부 한 쌍을 대상으로 했지만 이번에는 우리나라에 현재 살고 있는 한 부부의 이야기다. 이 부부의 이야기는 이미 방송에 소개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이 방송을 보면서 참 행복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부부라고 생각했다. 매일 방송되는 이야깃거리에는 정말 하잘것없는 것들도 많다. 어떤 프로는 시청자들의 비위에 맞추느라고 지식과 스펙을 고루 갖춘 이들을 패널로 등장시킨다. 프로를 짜는 입안자들은 구색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이건 정말 대 착각이다. 구색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식과 스펙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세상은 왜 더 자꾸 꼬여만 가는가? 소위 지식인이란 작자가 자행하는 만행들을 그들은 보지 못하는가? 지식과 스펙만 그렇게 좋아한다면 그들은 진정 맘몬주의에 맹종하는 굴종적 노예근성의 발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이라 할 수밖에 없다. 화려한 말잔치 뒤에 남는 것은 허무와 공허뿐이다. 이것들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오로지 사랑만이 가능하게 할 뿐이다.



 배에는 단 네 사람만이 타고 있을 뿐이다. 선장과 세 사람의 인부. 선장은 한 쪽 팔이 없고 나머지 세 사람은 외국계 노동자 청년. 이 배는 오징어잡이 어선이다. 선장은 고향 울릉도를 떠나 오징어의 이동을 좇아 연중 동해에서 서남해안으로 이동 중이다. 그러니 고향으로 입항하는 일은 일 년에 한두 번이나 될까? 바다에서의 생활이 태반이다. 바다에서의 일이야 소개할 필요도 없는 일, 한 마디로 극한 작업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의 가슴을 찡하게 해 주었던 일은 바로 선장의 진정성이다. 그에게 있어서 외국계 청년들은 단순한 고용인이 아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이다. 남이 어떻게 자신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사랑하면 보인다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그에게는 보이는 것이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더니 선장의 아내를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이 부부를 존경함을 금할 수 없었다. 배가 어느 날 몇 시에 어느 부두로 입항한다는 남편으로부터의 소식이 오면 아내는 불원천리(不遠千里) 남편 곁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새벽이든 한밤이든 시외버스 터미널에 그녀는 서 있는 것이다. 남편을 만나기 위하여, 남편의 항구로 그녀는 가는 것이다. “선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선 새벽, 선창가에 서서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의 입에서 하선(下船)하는 남편에게 던지는 이 한마디의 말! 당신은 내 삻의 이유란 뜻이 아닐까(You mean everything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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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탐욕

묵상 2013. 9. 1. 08:35 |

 오늘은 고향으로 가는 날이다. 서울역 광장은 온갖 사람들의 물결로 넘쳐난다. 다들 물 찬 제비처럼 발걸음도 가볍다. 나는 맥도날도에서 빅맥을 셋트로 주문하여 플랫폼으로 내려간다. 8번 게이트를 지나 에스컬레이트에 몸을 기댄 채 아래로 얼음 타듯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옆의 젊은이들을 힐끗 쳐다본다. 도톰한 얼굴에 뽀얀 살결이 정말 아름다운 얼굴의 소녀다. 아마 막바지의 피서를 해운대로 가는 모양이다. 언제나 그러하지만 여행만큼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은 없다. 나는 벌써 고향의 들판을 달리는 소년이 되어 있는 것이다.



 열차는 홈을 빠져나와 남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다운타운을 다 지나기까지 나는 잠을 청하기로 했다. 선글라스를 벗고 시트에 몸을 맡기니 나른해지면서 잠이 온다. 얼마를 잤을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눈부신 정경에 나는 잠을 깼다. 차는 충복 영동을 지나고 있었다. 차창 밖은 온통 초록의 바다다. 싱그러운 팔월의 들판은 온통 파랗게 칠해진 한 폭의 수채화다. 언제나 보아도 싫지 않고 질리지 않는 푸르름. 너는 때론 강이 되어 흐르고 때론 산이 되어 그곳에 우뚝 서 있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바다로 모든 것을 휘몰아 가기도 하는 난폭자. 그러나 너 푸르름을 만드는 모태를 너는 아는가? 언제나 안아주고 품어주며 다 주기도 하지만 자신의 실체(實體)는 드러내지 않는 것이 바로 흙이 아닌가! 푸르름도 결국 한 줌의 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벋으며 무성한 숲을 이루어 들판과 산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나의 눈앞에 펼쳐지는 푸르름의 파노라마를 보면서 내가 흙의 고마움을 새삼 발견하게 되니 이번 여행이야말로 나에게는 참으로 유익한 여행이 아닐 수 없다. 문득 한 권의 책이 생각난다.



 뭐 읽을 게 없나 해서 딸애의 방을 기웃거리던 열흘 전쯤 전, 책 한 권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장하준 교수가 최근에 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아! 인간 세계에도 ‘흙’과 같이 살아가려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듯이 장하준 교수는 이제 흙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그는 유명해졌고 세상이 다 아는 석학이다. 그런데 고마운 것이 그는 의도적으로 흙이 되어 살아가려 하는 모습을 나는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캠브리지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한 해가 1990년부터라니까 한 지성이 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해 오던 최근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세계에는 정말 정의가 있었던가 되묻고 싶다. 정의(正義), 정의가 무엇인지 나는 그것의 정의(定義)를 내릴 만큼 해박하지 못하다. 더더욱 나는 정의(正義)를 논할 만큼의 당당한 삶을 살지도 못한 한 사람의 범부(凡夫)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세상에는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 정의에 관한 많은 저서들도 쏟아져 나와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보게 된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세상에는 언제나 가난한 자들이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면서 재판관은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지 말 것이며 장사하는 자들은 저울추를 속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다. 세상에는 언제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억누르는 자와 억눌린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가 있기에 고아와 과부는 내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인간은 정말 정의를 논할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성경은 오히려 인간을 탐욕적 존재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어느 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으라는 사탄의 유혹을 받는다. 사탄은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다. 성경에는 탐욕과 죄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는 몇몇 구절이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이 두 구절들에서 보듯이 죄의 뿌리는 욕심 곧 탐욕이다. 그리고 탐욕의 정점(頂点)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는 것이다.



 인간은 정의를 논할 가치가 없는 존재다. 근본적으로 타락하고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진노의 자식이다. 죄와 허물로 죽어버린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사이비 정의가 도처에 넘쳐난다. 난삽(難澁)한 지식적 정의나 나를 헷갈리게 하는 변증적 정의 등등. 그러나 이것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박제물처럼 생명이 없다. 그러기에 감동이 없고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 이런 때에 장 교수의 책 한 권은 나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고 나로 이 글을 쓰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였으니 고마울 수밖에. 경제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쉽게 이해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이 우선 고마웠고 방대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를 통하여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주어 더욱 애착이 가는 책이었다. 그러나 이것뿐이었다면 나는 이 책을 다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를 가장 감동시킨 이유는 전혀 딴 곳에 있었다. 장 교수가 크리스천인지의 여부에 대하여 내가 아는 바는 없다. 다만 그의 책 속에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정의 편에 서려 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나 본능적으로 권력에 약하다. 최근 삼십여 년의 세계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의, 주장이 현실화되는 강대국의 지배 세상이었다고 책에서는 밝히고 있다. 더더욱 영국은 자본주의의 발상지요 힘은 좀 잃었지만 여전히 강대국인 나라다. 그 중심에서 영국의 이념과 이상을 끊임없이 재창조해야 하는 대학에 몸담고 있는 자로서 어찌 주류(主流)에 속하고 싶은 유혹이 없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경제학자들과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우면서 강대국의 패권주의를 신랄히 비판하고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의 빈국(貧國)이나 동남아, 라틴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약자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옹호하는 경제정책의 모델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온몸으로 실천하려 하는 한 지성의 리얼한 정의를 만나니 내 마음 참으로 흡족하다. 책을 읽으면서 그 내용은 어려워 비록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저자의 따뜻한 인간애를 읽을 수 있어서 읽는 동안 내내 행복하였다.



 인생은 짧다. 영원히 살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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