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책 그리고 캠퍼스

묵상 2012. 10. 10. 16:13 |

“선생님, 김철입니다. 댁으로 몇 번 전화 드렸더니 소식이 없어 외국 나가셨나 했습니다”

언제나 들으면 반갑고 다정한 그 때 그 목소리의 제자 음성이다. 가을과 함께 묻어오는 추억의 목소리들, 올해 가을은 나에게는 유난하다. 아내의 육순을 맞는 가을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내를 만난 것도 가을이며 밤나무 아래에서 가슴조리며 기다린 것도 역시 그해 가을이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내가 즐겨 찾는 여기 시립대학교 캠퍼스엔 서서히 가을이 오고 있다. 학생들의 옷맵시가 사뭇 달라졌다. 남자야 뭐 늘 그렇지만 여자는 패션에서 계절을 읽을 수 있다. 소매가 길어지고 셔츠 위에는 가벼운 니트가 걸쳐지면 이제 가을이다. 옛날에는 두툼한 대학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도서관을 맴도는 것이 캠퍼스의 낭만이었는데 이제는 삼삼오오 교정의 비치파라솔 밑에 앉아서 스마트폰 조작으로 바쁘다. 님은 먼 곳에 있는 걸까?

 

 

 나는 오늘이 행복하다. 오늘 내가 대학의 캠퍼스를 거닐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 여기 대학은 젊음이 있고 꿈이 있고 낭만이 있어서 좋다. 나는 이곳에서 새로이 태어난다. 지난 사십여 년 전의 나의 대학생활은 정말 각박하였다. 나에게서의 대학 사년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고 낭만이 아닌 사실(寫實)이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나는 낭만을 그리워하고 아직도 꿈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고호와 고갱이 좋고 르느와르의 욕녀(浴女)가 좋다.

 

 

 캠퍼스의 한쪽켠에 자리잡고 있는 연못은 꽤나 고풍스럽다. 연못가는 이끼 낀 돌들이 어깨동무하며 주위를 감싸고, 물 위에는 부레옥잠이 무리지어 떠다닌다. 연못 위를 가로지른 반달 모양의 나무다리 위에서 수십 마리의 참붕어 새끼들이 어미를 따라 원을 그리며 물속을 유영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그대로 동양화 한 폭이다. 그러나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다른 한 손에는 아메리카노 커피잔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옛적의 우리 선조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니 말하자면 퓨전이라 할까?

 

 

 가을 단풍의 왕자는 단연 능수버들이다. 단풍이 꽃보다 배승(倍勝)하다는 것은 물론 정비석의 ‘산정무한’에서 알았지만 능수버들의 단풍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정말 몰랐다. 연못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여기 능수버들은 실실이 황금색깔을 띠었다. 꼭 페르시아의 황금빛 카펫 같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 스마트폰에 담아보지만 영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래, 아름다운 것은 그대로 두고 보아야지, 꺾어서야 되는가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한다. 캠퍼스에 찾아올 때마다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많은 것에 고마워하고 많은 것을 보려 한다. 왜냐하면 이것도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인생 이모작의 시기에 대학 캠퍼스를 찾을 수 있고 한 권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참 열심히 살아온 결과로 얻어진 행복이라 생각되기에 더욱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첫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아내에게 고맙다. 아내를 만난 지 사십사 년 동안 많이도 싸워 왔지만 아내는 내 인생의 아름다운 동반자요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또한 나는 자녀들에게 감사한다. 다들 잘 자라왔으니까. ]

 

 

 캠퍼스에 소리들이 몰려오고 있다. 나는 캠퍼스를 가로지르며 뻗어있는 넓은 보도 위에서 이 소리들을 맞고 있다. 캠퍼스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소음이 아니다. 나뭇잎 부딪는 소리, 낙엽 갈리는 소리, 보도 위로 굴러가는 젊음의 구두소리는 아름다운 화음이다. 나는 지금 가을 햇살을 가리는 파라솔 밑의 벤치에 앉아 이 화음을 즐기면서 책을 읽고 있다, <미술관 옆 인문학>이라는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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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묵상 2012. 9. 13. 22:13 |

 한여름날 서울의 기온이 35도를 웃도는 날이 열흘째 계속되고 있다. 18년만의 기상 이변이란다. 한밤중에도 열대야로 잠을 설친다. 강변이든 다리 밑이든 열기를 피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초만원이다. 꼭 죽을 것만 같다. 오늘은 또 어디로 피신을 해야 하나? 이제까지 즐겨 찾던 근린공원 정자 밑도 시원할 것 같지 않다. 청량리 롯데 백화점으로나 가 볼까? 거기는 백화점과 플라자, 마트가 한곳에 몰려있어 눈치 보지 않아도 좋다. 또한 고객이 왕이라는데 배짱 한번 부려보면 어떨까? 지하철에서 내려 자연스레 들어가기도 좋아 정말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그런지 요사이는 백화점 1층 로비는 연일 초만원을 이룬다. 볼거리도 많다. 연중세일 이벤트로부터 각종 문화행사까지 정말 고객을 위한 맞춤복 마케팅이다. 이래서 롯데는 글로벌 유통망을 세계로 내리 깔았는가? 참 재주도 좋다.

 

 

 인간 만사 막히면 답답하다. 부부간이 그렇고 부자간이 그렇다. 어찌 이뿐이랴. 세상은 종과 횡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해와 득실로 얽히고 영욕과 빈부귀천으로 얽힌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반목과 질시로 진흙탕 싸움이다. 세상 어디에 시원하게 뚫어줄 자 없는가? 항간에서 탈출 모티브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빠삐용은 그래서 대중의 우상이다. 쇼생크 탈출이 시원하고 도망자 시리즈가 대중을 매료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 막힌 것을 뚫어주고 가진 자의 승자 독식을 시원하게 날려 버리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자녀들이 어릴 때의 이야기다. “얘들아, 오늘 아빠하고 대화 좀 하자.” 해 놓고 가족회의를 하면 언제나 똑 같다. “아빠, 이게 뭐 가족회의야? 아빠 혼자 실컷 아빠 말만 다 해 놓고, 우리는 듣기만 했잖아, 다시는 이런 가족회의 안 한다.” 뭐 이런 식이다. 그러니 우리 집에는 애시당초 아빠나 남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폭군 한 사람만 있을 뿐 도대체 소통이 없다.

 

 

 올해 여름 우리나라의 하늘이 왜 이렇게 달구어졌는가? 자연의 질서가 깨뜨려졌기 때문이다. 자연도 막히면 광분한다. 사람들은 다를까? 우리나라는 G7에는 들지 못해도 G20에는 든 국민소득 2만 불의 선진국이다. 그런데도 7년째 세계에서 자살률 1위의 나라다. 하루에 42명꼴로 매일 죽는다. 원인이 무엇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후진국의 여러 나라와 비교해 보아도 상당히 낮은 편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돈이 아니면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한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나다. 60년대 이후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는 산업화 과정에서 돈의 위력을 최대로 맛본 나와 같은 기성세대다. 멀리는 못 보더라도 내 자식에게라도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할 어른세대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치지 못한 책임이 재앙으로 되돌아온 결과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돈을 섬기는 물신주의에 빠져 모든 가치관을 유물적(唯物的) 사고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한국사회는 돈이 양반이다.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을 읽어 보라. 양반이면 안 되는 게 없다. 오늘날이 그렇다. 그러기에 돈으로 부부간을 막아 버리고 부모와 자식 사이를 막아 버린다. 한강은 유유히 흐르지만 돈이 남북으로 갈라놓는다.

 

 

 대안은 없는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돈이라면 최고라는 잘못된 외길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돌이켜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모든 것을 다 잃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가? 자녀를 낳으면 일류 대학에 입학시켜야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생각이 복잡하다. 그래서 1차, 2차 5개년 계획들을 세운다. 왜 일류 대학인가? 바로 돈이다. 일류 대학 나오면 돈 많이 받는 대기업이나 사(士)자가 보장되는 라이선스를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녀들을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이라 생각하고 감사하지 않는다. 자녀들의 능력이나 취미, 적성 등을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은 다반사고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는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내 자식만 생각하는 지극한 이기주의가 날로 팽배해져 이제는 소위 사회 지도자층에서도 더불어 사는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사회화 훈련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진정 이 사회에 황희와 같은 청백리는 없는가? 이 시대는 청빈(淸貧)을 요구할 수 있는 전제군주 시대가 아니다. 자유와 경쟁이 가치로 자리 잡은 민주자본주의 시대다. 그러기에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와 같은 청부(淸富)가 미덕이요, 그러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더욱 그리워진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기성세대의 잘못된 가치관으로 도처에서 체증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멀지 않아 추석 귀성길 고속도로는 자동차로 뒤범벅이 될 것이다. 도로야 막히면 뚫으면 되지만 내 안에 막힌 답답함은 어쩌노? 남편과 아내가 생각이 달라 끊임없이 평행선을 달리고 부모와 자식이 평행선을 달려만 가니 누가 뚫어줄꼬? 나만 옳다는 생각으로 아무리 달려가도 평행선일 뿐이다. 만나는 접점(接點)은 없다. 이제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내려놓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되돌아보는 것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절대시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상대화하는 것이다. 내 것만이 옳고 네 것은 틀리다는 혹백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치관과 인생관은 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잘못된 가치관과 인생관의 관성에서 벗어나리란 쉽지 않다. 그러기에 대단한 결단이 필요하다. 내가 잘못된 가치관으로 나의 자녀들을 강요하고 있다면 이제라도 늦지 않다. 나보다 나의 자녀들은 살 날이 많다. 나의 사랑스런 자녀들의 앞날의 행복을 위하여 이것쯤은 해 줘야 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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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가 필연인가

묵상 2012. 7. 11. 14:33 |

 오늘은 참으로 즐겁고 설레는 날이다. 사돈댁에서 나들이를 함께하자는 제안이 왔기 때문이다. 나는 사돈 내외와 모처럼 동승하여 바깥사돈이 직접 모는 승용차 안에서 한여름의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차는 서울 시내를 빠져나와 경부고속도로 위를 질주한다. 일요일 늦은 오후이니 주말도 막판인데 차는 왜 이리 많은지, 톨게이트까지가 한 시간 남짓 걸린다. 참 세월도 많이 변했다. 처음 경부고속도로가 뚫렸을 때는 차라고 해 봐야 고속버스나 트럭 몇 대 정도가 고작이었으니까.

 

 고속도로 위를 달려보면 나라의 고마움을 느낄 때가 많다. 특히 화장실이 그러하다. 세계에서 우리나라 고속도로 화장실이 최고다. 뉴욕이나 파리를 여행하는 관광객이라면 한번쯤은 화장실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2000년 여름이다. 내가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스카이 라운지에 올라갔을 때의 일이다. 전망대에서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는데 화장실가야 할 일이 생겼다. 화장실 앞에는 남녀가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때 화장실 때문에 겪었던 너무나 난감한 일을 지금도 뇌리에서 지울 수 없다. 우리나라가 제 1회 국제 화장실대회를 개최한 주최국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고속도로 화장실이 바뀐 하나의 사건이 우리나라를 문화의 선진국으로 끌어올린 근본적 계기가 되었다 주장한다면 이는 지나칠까?

 

 세상에는 우연이란 없다. 고속도로 화장실 대변혁의 원인을 나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한 전직 군사령관 출신의 도로공사 사장이 취임한 이후 제일 먼저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을 개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신선하고 충격적인 일인가! 옛날 우리네 조상들은 화장실을 뒷간이라 부르면서 멀리 두기를 좋아했다. 냄새나고 불결한 곳이니까 당연히 집 뒤 으쓱한 곳에 두어야 했으리라. 우리속담에도 뒷간과 처가는 멀수록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한 최고경영자의 발상의 전환으로 화장실을 나의 안방같이 가꾸고 나의 가장 가까이하는 친근한 곳으로 바꾼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아니고 무엇인가.

 

 차는 경부고속도로에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로 진로를 바꾸고 얼마 후 논산에서는 다시 호남고속도로를 갈아타고 달리다가 다시 장수익산간 고속도로로 진입하여 달리더니 이번에는 광양익산간 고속도로 위를 바꿔타고 쾌주하기 시작한다. 이 좁은 나라에 왜 이리 고속도로가 많은지 국도나 지방도를 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진짜 행복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어디 우연이 있는가? 이 많은 고속도로를 누가 만들었는가? 비로 우리네 산업역군들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나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으면 우연으로 돌려 버린다. 심지어 나의 나고 죽음까지도 말이다.

 

 과연 나는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그리고 우연히 죽어 가는가? 과학자들은 인과론을 절대시한다. 그런데도 유독 우주생성은 우연이라 주장한다. 이 얼마나 기막힌 자기모순인가. 나는 산이나 들판에 나갔다가 개미떼들을 보면 생각에 잠길 때가 많다. 만약 내가 저놈들을 밟아 짓뭉개 버리면 저놈들은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죽어갈까? 재수가 없어 여기서 죽는다고 말할까? 아니면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죽는다고 말할까? 그들이 뭐라고 말하고 죽는다 하더라도 그를 죽인 자는 분명 나요 나의 구둣발임이 분명하다.

 

 얼마 전에 나는 집 근처의 공원에 나갔다가 나와 연배가 비슷하게 보이는 한 남자분을 만났다. 나는 공원으로 나갈 때면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한다. “주님, 오늘도 복음을 전할 한 영혼을 만나게 해 주세요” 그날따라 저녁때가 되어 그런지 공원은 고즈넉하였다. 벤치에 걸터앉아 스마트폰에 내장된 성경을 읽고 있는데 맞은편에 한 남자분이 앉아 있다. 얼핏 보니 퍽 쓸쓸해 보인다. 내 마음속에서 자꾸 가까이 가 보라는 사인이 온다. 나는 속으로 성령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인이라 생각하면서 그분 곁으로 다가가 말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그분 역시 은퇴자였다. 오랜 공직 생활을 끝내고 낯선 서울로 올라와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오랜 먹물 생활이 몸에 배어 있어서 그런지 자신을 쉽게 오픈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그와 대화를 나눈 지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선생님은 세상에 우연이 있다고 믿습니까?” 그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을 찾아 보여 주면서 확고하고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나를 지으셨습니다.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나고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필연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합리적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연으로 돌리지만 창조물에는 그것을 지은 창조자가 있고 그 창조물에는 창조자의 목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많은 혼란을 겪는 것 같았다. 생각의 충돌이 일어날 때면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나는 어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른은 생각이 많고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고정관념이 많다. 이 고정관념이 철옹성이다. 그래서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월요일 아침, 오늘은 여수엑스포 가는 날이다. 아침을 먹고 바깥사돈과 가벼운 마음오로 차에 오른다. 1992년 대전 엑스포 이후 20년 만이다. 그때는 아이들과 함께 갈 것이라고 날짜까지 잡아놓고 있었는데 폭풍우가 몰아쳐 우리가족의 엑스포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내 평생에 엑스포 관람은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차는 조금 후 이순신대교로 오른다. 이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광양여수간 소요 시간이 80분이 걸렸단다. 그런데 이제는 10분이면 족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현수교로 길이가 2260m다. 더욱 자랑스러운 것은 주탑높이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발 270m. 참으로 장관이다. 한국의 토목공학 기술이 이 정도인가 생각하니 정말 감개무량하다. 여수 앞바다는 해수의 유속이 굉장히 빠르다. 바다위로 교각을 세우기가 결코 쉽지 않을 터인데 63빌딩보다 높은 교각을 세우고 지구를 두 바퀴나 돌 양의 강선을 엮어 케이블을 만들고 양 교각을 케이블로 연결한 현수교는 필연(必然)의 결정체가 아니고 무엇인가?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온통 에메랄드빛이다. 건너편 광양항의 컨테이너부두에서는 연신 화물들을 하역하고 있다. 1976년, 내가 처음으로 여수를 방문했을 때는 여수는 정말 조용한 어항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공단의 화학단지를 지나면서 우리민족의 위대함을 실감한다. 원유정제공장 간에 거미줄같이 엉겨있는 가스관과 원유관이 우리나라의 에너지 심장부가 여기임을 확인하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여행의 둘째 날, 오늘은 정말 내 개인에게는 의미 있는 날이다. 왜냐하면 내 신앙의 뿌리를 찾아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는 백여 년밖에 안 된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와 호주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기독교 선교에 힘썼지만 주로 미국과 캐나다, 호주 세 나라 선교사가 우리나라를 지역별로 분할하여 선교하였다고 들었다. 그런데 호남지방으로 들어온 선교사가 가장 먼저 들어온 지역이 바로 순천지역이다. 지금도 순천과 그 인근지역은 기독교 인구가 많음을 이번에 확인하게 되었다. 내가 이틀 동안 묵은 지역은 순천 인근 지역인데 일찍이 백여 년 전에 미국의 선교사가 들어와 교회를 설립한 곳으로 주민의 70%가 교인이라 한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교사가 들어와 마을에서 최초로 교회를 세운 곳에 지금도 교회가 그대로 남아있다.

 

 바깥사돈이 이번에 나를 인도한 곳은 기독교 선교 백주년 기념관이다. 이곳은 깊은 산 속에 위치해 있었다. 선교사가 직접 교회를 세우고 마을 사람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전한 그 자리에 전라남도 기독교 연합회에서 헌금을 모금하여 기념관을 세워놓았다. 나는 이곳을 방문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정말 감사하였다. 이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을까 생각하니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너무나 고마워진다. 나는 이들에게 빚진 자다. 그러기에 나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세 분의 순교비도 세워져 있었다. 나는 이곳을 방문하면서 초기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아왔는지를 생생히 느껴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였겠지만 차츰 박해를 받았을 것이고 그 박해를 피하여 산 속으로 산 속으로 은신하여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 복음을 전하여 현지인 사역자를 양성하였을 것이고 복음의 사명에 불타는 현지사역자가 마을로 돌아와 가정교회를 열고 교회를 시작하였을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 선교사역의 역사다.

 

 여러분은 짱뚱어란 고기를 아시나요? 이놈은 남해안 개펄에서 사는 정말 못난 놈입니다. 몸통은 개펄처럼 시커멓고 아구(입)가 커서 정말 못생긴 놈입니다. 옛날에는 어민들조차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벌교나 순천지방에서는 별미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순천의 생태공원, 얼마 전까지도 순천 갈대숲이라 불렸던 곳을 방문했다. 바로 이곳에서 짱뚱어를 만났다. 물이 빠진 개펄로 여러 놈이 기어올라 한여름의 선팅을 즐기고 있다. 말 그대로 못난이다, 참 시대를 잘 만났다. 옛날이면 어디 고기축에도 들었을까? 그러나 지금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짱뚱어탕 한 그릇에 자그마치 사만 원이다. 엄청 비싸다.

 

 세상만사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다시 한번 만사가 필연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자연의 일이 그렇고 인간의 일이 그러하다. 결과에는 원인이 반드시 있다.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 여러 사례에서도 지적하였듯이 결과와 원인이 가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결과와 원인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람이 그 둘을 동시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수를 한다. 요사이 우리나라에는 남녀노소, 식불식(識不識) 간에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자가 많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일들을 보면 내 속에서 분노가 일어난다.

 

 나는 우연히 와서 우연히 가는 존재가 아니다. 태어난 목적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리고 가야 할 곳이 확실히 있다. 태어남이 필연이요 죽음이 필연이며 죽음 이후의 가야 할 곳이 어디임을 성경은 밝히 말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우연적 삶을 살지 않는다. 당당히 필연적 삶을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창조되었으며 나를 창조한 분이 누구이며 나는 죽음 이후에 어디로 가는가를 알고 살기 때문에 나의 삶이 자조적(自嘲的)이거나 절망적(絶望的)이지 않다. 오히려 소망적(所望的)이요 환희(歡喜)의 삶이다. 절망적인 사람의 삶의 특징은 자기방치 내지는 자기방기(自己放棄)다. 자기를 아무렇게나 내버리는 삶이다. 자기를 방치하지 않는 삶은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따르는 삶이다.

 

 “나의 하나님, 나를 지으시고 나의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시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오늘도 나의 앞에 행복하고 가슴 벅찬 일을 준비하실 당신을 기대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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