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묵상 2012. 2. 2. 11:04 |

 새해 첫 달의 마지막 날 밤에 함박눈이 하얗게 내리고 있다. 대도회지에서 맞이하는 눈꽃들의 환희에 함께해 보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솜털같이 가벼운 눈송이가 내 어깨 위에 사뿐사뿐 내려앉는다. 정말 기분 좋은 밤이다. 한겨울의 눈꽃만큼 소년을 설레게 하는 사건은 없다. 소년은 눈 내리는 논두렁 밭두렁을 삽살개와 함께 내달린다. 그 소년이 이제 고희를 바라보며 서울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아주 조용히 성스러운 눈송이를 두 손 모아 맞고 있다.

 
이 밤에 나는 조용히 생각해 본다. 아름다운 삶은 무엇일까? 자연은 약속을 지켜 작년에 내린 눈이 올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와 긴 겨울밤이 새하얀 눈송이로 이불을 덮는데 인간 사회에는 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까? 정계가 그렇고 재계가 그렇고 교육계도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어디에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면 인간 사회에는 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까?

 
인간에게 있어서의 약속은 일방적이 아니다. 언제나 쌍방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파기권(破棄權)이 약속한 주체에게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들은 약속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다. 쉽게 약속하고 쉽게 그 약속을 깨뜨려 버린다. 약속을 쉽게 깨뜨리는 사람의 내면을 살펴보면 사악한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자신만이 목적이요 가치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약속이 상대에 대한 나의 전인적(全人的) 존중이요 또한 나의 전인적(全人的) 담보임을 인식하지 않는다.

 
인간사에 약속의 허망(虛妄)함을 비꼬는 말로 “인간은 믿을 존재가 아니다. 다만 사랑해 주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요사이 TV 패러디 물에 ‘내 남자는 나의 팻’이란 프로가 있다. 이 프로를 제작하는 PD가 팻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나 이외의 남이 나에게 애완견이 될 수는 없다.

 
아름다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할 것이다. 하나는 현상적 아름다움이요 다른 하나는 내면적인 아름다움이라 할 것이다.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 꽃의 아름다움은 한시적(限時的)일 뿐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였듯이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 눈으로 덮인 세계는 성지(聖地)같이 아름답다. 그러나 눈이 녹는 세상은 녹슬고 일그러진 추한 모습일 뿐이다. 참으로 아름다움은 내면적인 그것이다. 아기를 품에 품은 어머니의 모습이 왜 아름다운가? 그 품 안의 자녀에 대한 엄마의 약속과 그 약속을 지키려는 믿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 밤에 나는 깊은 묵상을 하게 된다. 요사이 나는 모세 오경을 다시 읽으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읽으면서 그 동안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니 너무나 감사하다. 창세기부터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모세 오경을 토라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 토라를 가장 중요시한다. 이 토라는 율법서이다. 기독교인이 지키고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기 때문에 기독교인에게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 중에 나에게는 레위기가 잘 읽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주로 제사의식에 관한 것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루한 레위기의 제사의식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나로 알게 하셨다.

 
창세기에서부터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일관되게 제사를 원하신다. 그것도 반드시 피의 제사를 원하신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 이어 출애굽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왜 그렇게 피의 제사를 원하셨을까? 우리가 모세 오경을 읽어가노라면 제사의 종류와 제사의식이 얼마나 복잡하고 번거로운가에 놀라게 되고 또한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제물이 되어 죽어갔는가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러면 이 제사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약속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인격체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요 우리는 그의 지으신 바 된 피조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이다. 일방적이라 함은 약속의 주체가 객체(상대)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를 갖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셨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약속한 동기는 무엇이며 약속한 내용은 무엇인가? 동기는 인간에 대한 사랑(엡2:4/요3:15)이며 내용은 아들을 제물로 내어놀았다(창3:15)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사43:21)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송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지도 아니하고 주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의 종이 되어 버렸기에 하나님 앞에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엡2:3)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죄와 사망에서 나를 해방하여 영생을 주시려고 당신의 아들 예수를 구원의 주로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 그 증표로 제사에 일관되게 제물을 요구하셨다는 것이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히9:22) 하였으니 제단에 드려지는 제물로서의 소나 양의 피는 곧 당신의 아들이 저주의 십자가 위에서 나를 위해 흘리시는 대속의 피를 말하는 것이니 이는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줄기차게 죄인된 나에게 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사랑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한다. 너를 위해서 내 아들을 너의 죄의 댓가로 제물로 내어놓았다. 너를 위한 나의 사랑을 제발 좀 알아 주렴” 하고 호소하는 것이다.

 
아담 이후 창세기의 족장들은 아직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자기네의 조상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드리는 피의 제사를 보아 왔으며 이 피의 제사에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을 믿고 자기들도 피의 제사를 믿음으로 드렸음을 볼 수 있다. 보지 못하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갈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 하였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11:6) 하였다.

 
결국 구원의 길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다. 오직 예수, 오직 구원. 이 구원을 무엇으로 받을 수 있는가? 바로 믿음이다. 창세기 6장 9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 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라고 하였는데 노아의 행위가 완전하여 의인이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님과 동행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를 당대의 의인으로 보아 주신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피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노아는 홍수가 그치고 방주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 앞에 정결한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린 일(창8:20)이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를 알고 보지 못하나 보는 것같이 믿고 살아갔음을 보여 준다.

 
나로 하여금 모세 오경의 제사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도움에 깊이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선물로 주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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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과 낭만

묵상 2011. 11. 24. 11:42 |

 굽이돌아 흐르는 낙동강 물 위로 낙조가 아름답다. 때 이른 겨울 철새들의 비상(飛翔)을 느긋하게 즐기며 포근한 시트 속에 피곤한 몸을 파묻고 모처럼의 객기(客氣)를 즐기는 나에게 아이들은 난리다. 아빠는 왜 KTX를 타지 않고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말이다.

 
제자들의 과분한 대접을 받으며 부산을 떠나 귀경길에 오른 내가 굳이 새마을을 고집한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이란 놈을 내가 좀 요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사야 빠르면 좋고, 많으면 좋은 게 아닌가. 그러나 왠지 이번 귀경길은 확 한번 뒤집어 보고 싶었다. 시간이란 놈의 목을 조여주고 싶었다. 시간이란 놈은 괴력을 가진 존재다. 자기 앞에 모든 것을 꿀리고야 만다. 재물, 지위, 명예, 미모 등등 어느 하나 시간을 이기는 절대 강자는 없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시간 앞에 비굴해진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새마을은 좋은 열차였다. 이것만 타면 어깨가 으쓱해지고 무언가 헛기침이 나오면서 갑자기 신분 상승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부끄럽다. 새마을 타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쉽사리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나는 내가 앉은 시트를 자세히 살펴본다. KTX와 비교해 보면 시트의 안락함도 그만 못하지 않고 시트 간 간격도 KTX보다 더욱 넉넉하여 오히려 편안하다. 다만 목적지에 도착시간이 배로 길어질 뿐이다. 그런데 묘하게 이 배(倍)의 시간이 나를 졸지에 2등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오늘 2등 인간으로 서울로 귀향한다. 차창 밖으로는 늦가을의 정취가 참으로 그림 같다. 시골 담장 밖으로 벋은 감나무 가지 끝에 발갛게 익은 감들이 아직도 대롱대롱 매달려 까치를 기다리고 곡식을 거둔 들녘에는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열치가 낙동강 철교를 건너고 있다. 정다운 쌍둥이 철교가 교각을 강물 위로 반쯤 드러내며 나란히 버티고 서 있다. 하나는 부산행이요 다른 하나는 마산행이다. 열차가 아마 삼랑진역으로 진입하려는 모양이다. 삼랑진역은 나에게 참으로 한(恨)이 서린 역이다. 이 역에서 부산과 마산으로 갈린다. 옛날에는 대구에서 마산을 가려면 삼랑진역에서 환승을 해야 했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청도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마산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나는 방학이면 청도 외가로 놀러가곤 했었다. 외가로 갈 때든 집으로 돌아올 때든 나는 반드시 삼람진역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삼랑진에서 마산가는 열차는 도대체 없는지… 아침에 내려와도 밤중, 오후에 내려와도 밤중에만 열차가 있었다. 그러니 청도에서 마산을 가려면 하루가 꼬박 걸리는 거리였다. 그렇게도 멀던지 마냥 역 대합실에서 기다리기만 하던 지난 어린 시절의 삼랑진역으로 나의 열차가 지금 진입하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열차 안을 한번 휘 둘러본다. 커튼을 열고 차창 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왜 사람들은 차창 밖을 내다보려 하지 않는가? 삶에 지쳐 모든 것이 귀찮아진 것인가? 아니면 바깥세상이 두려운 것인가?

 
인생의 삶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들 말한다. 과정적 삶과 결과적 삶이다. 많은 사람들은 결과적 삶을 택한다. 나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어릴 적 시절을 굉장히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러기에 가난은 나에게 반드시 퇴치해야 할 가장 잔인한 적이었다. 결혼한 이후 나는 꼭 십 년 동안 이 가난과 싸워왔다. 나는 결코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 후 오 년 만에 나는 동료가 부러워하는 ‘나의 집’을 가졌고 경제적 안정도 되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결과적 삶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무엇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띵해지면서 갑자기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다 잃어버리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의 주위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돌이켜 보니 나는 나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주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의 아내, 나의 자녀들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데 나는 끊임없이 그들에게 생채기를 내면서도 이것을 몰랐다. 오직 결과만을 이루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너무 많이 나가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깨어진 사발 맞추기식이었다. 후회막급이었다. 이미 아내는 나의 독화살에 상처를 입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독선과 아집, 자만과 고집으로 점철된 나의 괴팍한 삶은 전혀 아내에 대한 배려와 존경이 없었다. 사랑도 일방적이요 대화도 일방적이니 이건 뭐 소통이란 게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삭막한 모래언덕뿐이니 오아시스는커녕 샘물 하나 없었다. 나의 가정에 낭만(浪漫)은 어느 구석에도 없었다.

 
아! 나의 무지(無知)여, 이러고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는가? 내가 문학도라 할 수 있는가? 인생을 모르고야 어찌 문학을 논할 수 있는가? 결과만 추구하는 인생은 결국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시는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내가 이 말씀을 일찍 좀 알았다면 시행착오적 삶을 빨리 끝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앞선다. 하나님의 만드신 삼라만상에는 그 하나하나에 당신의 창조의 목적이 숨어 있다. 그러기에 그 어느 하나도 인간인 나에게 수단이 될 수 없다. 나의 이기적 수단으로 부려먹을 종이나 도구가 아니다. 심지어 풀 한 포기, 돌 하나도 나의 사악한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이용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일들을 찬양하는 것이기에 경이(驚異)의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보이는 모든 것과 들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걸작인데 어찌 우리가 경탄하고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정적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부합하는 삶이다. 과정적 삶은 과정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삶이다. 그러기에 한 순간 한 순 간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소중하고 나에게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깨닫다 보면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소중할 뿐이다. 가족이 소중하고 이웃이 소중하다. 따라서 나에게는 오늘이 소중하고 오늘에의 기대로 가슴이 부풀게 된다.

 
더글러스 태프트 전 코카콜라 회장은 2000년 신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테리며 오늘은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재를 선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 오늘이 없는 내일은 무의미할 뿐이다. 나는 오늘도 감사와 환희로 내 삶의 바구니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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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커밍데이

묵상 2011. 11. 4. 11:33 |

 꽃비 오는 가로수 길을 걸어 본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늦가을이 성큼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온통 오색으로 채색한 듯 요란스런 단풍 길을 혼자 걸어 본다. 사십여 년 살아오던 정다운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지도 어언 2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이 도시는 언제나 나에게는 낯이 설다. 
 
 며칠 전 나는 제자에게서 다정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삼십 년 전의 제자이다. 고교 졸업 삼십 주년을 기념하는 홈커밍데이를 가진다는 것이다. 정말 반가운 전화다. 그들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제자들이다. 내가 브니엘에 몸담은 것이 1974년 시월 말이다. 그때 나는 시간 강사로 잠깐 그곳에 머물렀다. 나는 그곳을 내 삶의 징금다리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에게는 그곳이 내 삶의 고갱이인 이곳으로 바뀌게 되어 버렸다. 나의 이곳은 나에게는 내 생애 노른자위였다. 이곳 브니엘에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 교사로서, 신실한 한 기독교인으로서 제자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다. 
 
 내가 브니엘에 부임하여 강단에 처음 선 날을 나는 잊을 수 없다. 2학년 어느 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윤동주의 ‘서시’를 강의하고 난 후 학생들에게 짤막한 과제를 부여하고 나는 교실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교실 뒤켠에 가서 앞을 보니까 교실 정면 칠판 위 한 가운데는 태극기가 걸려 있고 조금 낮은 위치에 칠판 양옆으로 교훈과 급훈이 걸려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이상하게 교훈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나는 조금 자세히 볼 양으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가 그 교훈을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동공이 커지면서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그 교훈이 나를 이 브니엘에 붙박아 놓아 버렸다. 그 후 33년 동안. 

                                       
교훈
1. 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려는 사람이 되련다.
2. 나는 마음껏 공부하고 마음껏 뛰노는 사람이 되련다.
3. 나는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사람이 되련다.
4. 나는 조국과 민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좋은 교훈이 없노라고. 나는 이 교훈을 제자들에게 체질화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다. 어떤 때는 제자와 밤을 새며 무릎을 맞대고 고민한 적도 있었다. 매질도 많이 하였다. 어찌 나뿐이랴. 나의 동료 선후배 선생님들이 이렇게 제자들을 사랑했다. 그러기에 우리 브니엘은 대학 진학에 있어서 전국 최상위 10위권 안을 유지하는 확실한 명문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남다른 자부심도 갖게 되었다.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이라 확신한다.   

 나는 지금도 조용히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 정말 브니엘은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시는 학교라는 것을 말이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브니엘을 졸업한 제자들은 이 교훈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긴다. 그리하여 언제 어디에 있건 간에 '반드시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브니엘맨들은 언제나 자기의 정체성(正體性)을 잊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서 자기 몫을 감당한다.

 오늘 그 현장을 나는 서울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제자들 칠팔 명과 조촐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삼십 년 전의 그때의 그 얼굴들을 대면하니, “사제(師弟) 간의 정담은 이래서 좋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3학년 9반은 학급 정원이 65명이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콩나물 시루였다. 복교실(복도를 사이에 두고 두 교실이 마주보고 있는 시스템)에 수많은 학생들로 붐비는 우리 학교는 교실 환경이 최악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복도는 자갈치 시장보다 더 요란했다. 그런데도 우리 졸업생들은 모교를 왜 잊지 못하는가? 바로 학생 저들 사이의 참으로 끈끈한 우정과 선생님들의 남다른 사랑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되어진다. 오늘 졸업 30주년을 맞아 나이 오십이 되는 이들은 참으로 자랑스런 나의 제자들이며 시대정신을 갖고 새벽을 일깨우는 이 땅의 진정한 동량지재(棟梁之材)들이다.

 고등학교 시절은 꿈이 가장 활발하게 내면적 동기를 충동질할 때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할 보금자리를 준비할 때이기도 하다. 이러한 때에 만난 진정한 한 친구는 나의 삶에 고향과도 같다. 고향은 언제나 나에게 푸근함을 주듯이 친구는 그런 존재다. “얘들아, 친구란 말의 정다움을 너희들은 아는가?” 
 
 며칠 뒤면 스승과 친구들을 만나러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싣겠지. 너희들은 콧노래를 불러라. 해운대, 송정 백사장에서 봄 소풍 때 담임선생님을 들어 차가운 봄 바다에 헹가래치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우리, 그날 밤 해운대 티파니21 유람선 위에서 만나자. 사랑한다, 제자들아.

나의 좋으신 하나님이 너희들을 축복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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