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은 대로 거두리라

묵상 2008. 12. 14. 23:41 |
 

1.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

 
 아내를 만난 지 40년, 토요일 오후 3시경 아내가 갑자기 바닷가로 나가자고 불쑥 제안을 한다. 아내와 근간 다소 간의 갈등이 있어 미안하기고 했었는데 오랜만에 아내와 오붓한 나들이가 될 것 같아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아내가 모는 우리의 애마에 지친 몸을 실은 채 해운대 달맞이 고개를 돌아 오르기 시작했다. 가을은 바야흐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도로 양쪽으로 열병하듯 늘어선 벚나무는 모두붉은 단풍으로 아름답게 갈아입어 4월의 무리지어 흐드러지게 피던 꽃망울보다 승(勝)하다. 나는 잠시 고갯마루 위의 전망대인 팔각정 옆에 차를 세우게 하고 혼자만이 내려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맞은편 3시 방향의 시야에 들어오는 오륙도를 건너다보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바위섬들이 다섯인지 여섯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나는 자리를 옮겨 각도를 달리해서 다시 섬들을 헤아려 보았지만 여전히 확실치가 않다. 정말 기막힌 이름이다. 오륙도! 얼마나 멋진 작명인가. 6시 방향 쪽으로는 나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함께 나오곤 했던 해운대비치가 고즈넉하게 드러누워 있다. 참으로 아름답다. 동백섬 끝자락에는 누리마루가 얼씨년스럽게 송이버섯 모양을 하고 들어앉아 있다. 옛날에는 그 자리에 인어상이 있었고 바닷가를 찾아온 연인들이 널퍼짐한 바위 위에 서로의 다리를 꼬고 앉아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깔갈대기도 하면서 비바리들이 바다 밑을 자맥질해 낚아 올린 해삼이나 전복들을 시식해 보던 낭만어린 추억의 장소였었지만 이제는 AFEC 정상들이 다녀간 글로벌 명소로 탈바꿈해 버렸다. 아내는 여전히 차에서 내리지 않는다. 마음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참으로 나에게는 소중하고 좋은 아내, 저렇게 착하고 지혜로운 아내를 나는 많이도 괴롭혔지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나로 인해 아내의 마음은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을까…
“여보, 미안해.” 

 
 차는 다시 굽이진 고갯길을 돌아 송정 바닷가 끝자락에 멈춰 섰다. 가을을 재촉하듯 바닷바람이 차갑다. 전봇대 위의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있는 네댓 마리의 갈매기 떼가 배설물을 쏟아놓는다. 그 아래로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의 버넷트 위로 배설믈이 떨어진다. 파도가 쉼 없이 몰려온다. 저 파도들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파도는 절대로 중간에 소멸되는 일은 없단다. 한번 만들어진 파도는 그것이 심해(深海)의 것이든, 근해近海)의 것이든 관계없이 한 방향으로 끝까지 밀려온다는 것이다. 나는 파도를 바라보며 순간 소름이 끼치는 오싹함을 느꼈다. 파도가 나를 일깨운다. 그렇다. 만사(萬事) 심은 대로 거두는 법.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그 씨앗은 언젠가 반드시 싹이 난다. 싹은 푸른 잎을 내고 자란다. 가지가 번지고 무성하여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이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인간사의 이치를 모르는 자는 얼마나 많은지…나는 나의 주변에서 인생의 태반을 송두리째 놓쳐버리고 후회하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사람들이 죽기 전에는 ‘-걸,’‘-걸’하며 죽는단다. 진실하게 살 걸, 베풀며 살 걸 등등.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인생은 한번밖에 없다. 시행착오((施行錯誤)를 되풀이하기엔 시간이 너무나 짧다.

 
 세상사 일반인들이야 그렇다 치고 소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하는 사람들 중에도 정말 한심한 자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삶의 모델로 삼아왔다. 나의 아버지는 참으로 정직하셨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나의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 나는 나의 아버지를 감히 말할 수 없다. 다만 당신을 흠모하면서 당신의 모습을 닮아가려 할 뿐이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삶의 좌우명은 성경의 이 한 구절이다. 나는 이 구절에 목숨을 걸면서 매사에 최선을 다해왔다. 얼마 전에 어느 모임에서 나를 곁에서 오랜 동안 보아왔던 한 지인(知人)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로님은 내가 만난 무수한 사람들 중에 정말 정통적으로 산 사람 같습니다.”라고 말이다. 나는 그 순간 빙긋이 웃으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나의 나 된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를 언제나 지켜 주시고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어찌 지금의 내가 있었겠는가. 언제나 자랑스러운 눈으로 나를 믿어 주신 아버지, 자식을 위하여 기도로 한 평생을 살아오신 나의 어머니, 그리고 기도와 이해로 나를 감싸 준 나의 아내, 아빠를 존경하며 따라 준 나의 자랑스런 딸 선미, 경미, 아들 희원이.“나의 아들과 딸들아, 고맙다. 그리고 여보, 당신에게는 따따블로 고마워.”

 
 크리스챤들이여, 하나님께 무엇이든 구하면 다 들어준다고 생각하지 말라. 성경 야고보서 1장 13∼17절의 말씀을 읽어 보고 깊이 묵상해 보라. 거기에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사람이 시혐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迷惑)됨이니” 라고 하셨다. 정말 우리가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다. 성경에는 또 이런 구절이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하였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점검해 볼 일은 나의 의(義) 곧 욕심(慾心)을 위해서 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義)를 위해서 구하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동기를 보신다. 동기가 불순하면 결코 들어 주시지 않는다. 성경에 너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情慾)으로 구함이니라 한 말을 잊었는가? 일 터지고 울고불고하지 말고 대형사고 터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 그러기에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셨다.


2. 하나님의 마음을 알자

 
  나는 나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의 자녀들과 지상(紙上)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規例)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3)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이 말씀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서 그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낸다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된다. 아무리 얽히고설킨 인생의 난제(難題)도 한방에 해결된다.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구약 시대에 호세아 선지자가 살았다는 기록을 우리는 호세아서를 통하여 알게 된다. 그는 이사야와 동시대의 인물로서 남유다 왕 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와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세가 통치하던 기간에 예언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바로 이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영적∙사회적으로 가장 타락하였다. 즉, 그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망각한 채 율법을 무시하고 음란하게 우상을 섬겼으며 이웃에게 불의를 자행하는 타락과 부패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에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알려하는 자를 두루 찾고 있었다는 것을 호세아서 2장 2절에서 알게 된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에게 말씀하시니라 하는 말씀 중의 ‘비로소’에서 그 패역(悖逆)한 시대에 당신의 마음을 아는 자가 호세아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기막힌 명령을 내리신다.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명령이다. 단 한번밖에 없는 인생에서 누가 이 명령을 따를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음란한 여인과 같이 타락하여 참신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는 당신의 자녀 이스라엘 민족을 그래도 결코 버릴 수 없는 당신 자신의 마음을 호세아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호세아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하나님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여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녀를 낳았고 6장 1∼3절에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호소할 수 있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3.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라

 
 선(善)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였다. 부지런히 좋은 것을 심어야 한다. 특히 젊을 때에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것을 심어야 한다. 심지 않고 거두는 것은 잡초뿐이다. 

 
 그러면 선(善)은 고사하고 이미 많은 악(惡)의 씨를 뿌린 자는 어떻게 하여야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한 인물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가 바로 다윗 왕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나의 마음에 합한 자라 하셨다.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는 간음죄를 짓고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서 죽게 하는 살인죄의 씨를 심을 때는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말 죄의 열매는 너무나 쓰리고 괴로웠다. 시편32편 3∼4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처절하게 절규(絶叫)한다. 내가 토설(吐說)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상하고 진액(津液)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다고 부르짖는다. 백주(白晝)에 아들이 어머니를 범하는 근친상간의 치욕(恥辱)이 자행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배반하는 사건과 형제간의 살육 사건이 모두 다윗을 중심축으로 전개되는 하나님의 징계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다윗의 절규는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가장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다윗의 범죄를 통하여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우리를 교훈하시면서 또한 다윗같이 하나님의 긍휼함을 구할 것을 명령하신다. 다윗은 하나님께 철저히 죄를 회개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했다. 그리하여 용서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게 다윗의 기도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다윗같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내 모습 이대로 오면 된다. 하나님은 돌아오는 자기 자녀를 결코 내치지 않으신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좋으신 나의 하나님, 내가 당신께 돌아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받아 주소서. 할렐루야, 아멘.”  (200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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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묵상 2008. 12. 14. 23:29 |
 

    지난 토요일 오후 5시쯤이다. 이날따라 유달리 몸이 노근하여 침대로 가 두어 시간을 자고 일어나는데 아내가 나의 손을 끌면서 거실로 데려간다. 거실 TV의 CTS화면에는 마침 미국의 레이크 우드 교회 조엘 오스틴 목사와 그의 원형 교회가 클로즙되고 있었다. 미국에서 매머드 교회로 5만 3천명이 출석한다는 미국 최대의 교회다. 우선 그 규모에 주눅이 들었다. 나는 소파에 엉덩이를 엉거추춤 붙이며 예배장면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조엘 목사의 베스트셀러 <긍정의 힘>을 내가 소속된 선교회에서 북•스터디한 터라 별로 낯설지 않았다. 그의 설교는 미국의 여타 목사의 설교처럼 그리 격정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나 자신이 그 영상 설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인의 설교로는 상당히 길었다. 약 30분 이상 계속되는 것 같았다. 조엘 목사는 차분하면서도 진실하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쉼 없이 쏟아내는 화제는 가히 천부적 재질을 타고난 듯하였다. 일관성 있는 메시지와 그에 적합한 예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설교는 계속되어 갔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강한 성령의 역사였다. 그 거대한 원형 교회당 안의 좌석에 빽빽이 들어앉은 교인들은 한결같이 밝은 미소와 신뢰를 설교자에게로 보내고 있었다. 설교자와 성도들 간의 영적 교감을 나는 온 몸에 전율이 오도록 느낄 수 있었다. 흑과 백이 조화를 이루며 다정히 앉아 예배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설교의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이 설교 속의 진리를 깨닫는데 한 평생이 걸렸다. 그런데 조엘 목사는 40대 중반이니 나보다 20년 젊어 깨우쳤다 생각하니 정말 그가 부러웠다. 하나님의 뜻을 일찍 깨닫는 그만큼 하나님께 더 쓰임을 받는다.

 
 행복은 어느 누구가 그저 가져다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에게 행복하게 살 권리와 조건을 완벽하게 주셨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훨씬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은 환경적 동물이다. 환경을 떠나서 살 수는 없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대개 나보다 버거운 대상이다. 내가 극복하기에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나는 나의 불행의 원인을 언제나 환경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환경이 바뀌기를 바란다. 회사에서는 상사나 동료가, 교회에서는 형제자매가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상대가 바뀌기를 끊임없이 요구하며 기대한다. 내가 바라는 수준까지 변해 주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상대나 환경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이제 우리에게는 발상의 대 전환이 필요하다.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감사와 기쁨으로 나를 무장해야 한다. 아내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고난과 역경의 환경을 통하여 나를 단련하고자 하시는 전능자의 섭리에 감사해야 한다. 불평과 불만으로 세월을 죽이는 자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다. 낙조의 순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또한 얼마나 짧은지……

 
 우리에게는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영원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그리고 사랑과 배려로 상대방의 약점이나 추한 모습도 그대로 받아들이라. 사랑과 배려보다 더 나은 묘약(妙藥)은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들어 버리니까. 다음으로 날마다 오늘을 기뻐하며 감사하라. 새 아침의 밝아오는 개벽(開闢)에 감격하고 들녘을 감싸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기뻐하라. 황금물결로 일렁이는 들판의 벼이삭을 보라. 하나님이 창조한 대자연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장 큰 불행은 불평과 원망의 덫에 걸려 이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때가 되면 환경과 상대방을 바꾸어 주신다.  

 
 하나님의 기적은 누구에게 일어나는가?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로 기다리며 감사하는 자에게 당신은 합력선(合力善)으로 은혜(恩惠)를 베푸시며 나를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여 주신다(시107:30). 우리는 공의와 진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환경을 바꾸고 상대방을 주님의 나라에 초대하여야 한다. 그러나 내 마음의 관리가 최우선(最優先)이다. 겸손과 온유로 쉼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마11:29) 나 자신이 먼저 변할 때만이 나와 너와 행복한 삶은 보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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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베이징 올림픽이 소문만큼이나 요란하게 개막되더니 폐막식도 유난히 요란하게 막을 내렸다. 4년마다 돌아오는 올림픽이지만 이번 올림픽은 한국인들에게는 남달리 기억되는 그런 것이었다. 왜냐하면 역대 올림픽 중 가장 많은 금메달(13개)로 세계 7위에 우뚝 섰으며 스포츠 강국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올림픽과 월드컵을 유치하는 경험도 가졌고 경제적으로는 GDP 대비 세계 11위까지 진입한 적도 있지만 서구 열강이나 북미지역 몇몇 나라들은 아직도 우리를 선진국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 우리로 하여금 묵은 체증을 시원히 뚫어주는, 아니 우리로 하여금 확실한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해 주는 일이 바로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대박으로 터져 나왔다. 그게 바로 야구경기다. 야구하면 미국이요 야구는 선진국의 상징이다. 다시 말해 세계 최강 미국의 상징이 야구이기에 우리가 미국을 이긴 것이 더욱 값지다. 그러기에 일본은 야구에 목숨을 거는 나라다. 2차 대전에 패전국인 일본은 미국에 대하여는 강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은 대개 영어에 약하다. 일본을 여행하는 관광객에게 가이드가 귀띔해주는 말을 새겨들으면 크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일본에서는 영어를 쓰라. 그러면 존경을 받는다.’는 말이다. 일본인은 한국에 대하여 그릇된 편견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36년 간 저네들이 우리를 지배했다는 우월의식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일본에서 일어를 쓰면 더욱 멸시를 받는다. 나는 몇 년 전에 일본의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이것을 실감 있게 체험했다. 나의 유창한(?) 영어실력이 돋보였다. 나의 거침없는 영어실력에 일본인이 주눅들어하는 모습을 내 옆의 아내가 확인하며 나를 존경스런 모습으로 쳐다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때보다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이번 올림픽에서 아주 극적인 경기가 있었다면 단연 일본과의 준결승과 쿠바와의 결승전인 야구경기였다. 우리는 9전 전승으로 결승전에 올라왔다. 제1회 WBC(world baseball classic)경기에서 우리는 일본에게 쓴 패배를 맛보았다. 이때 일본의 야구영웅 이치로는 앞으로 30년 동안 한국이 일본을 넘볼 수 없게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런데 1년 후 우리는 올림픽의 예선과 준결승에서 일본을 호쾌히 이겨 버렸다. 그것도 모두 역전 드라마로 말이다, 결승에서의 우리의 상대는 역대 올림픽 최강팀 쿠바였다. 정작 극적 드라마는 9회 말에서 일어났다. 간략히 경기개요를 말하면 이렇다. 한국과 쿠바가 3:2의 스코어로 쿠바의 마지막 공격을 맞은 1死 후 만루의 9회 말 상황이었다. 우리에게는 작전의 여지가 없었다. 유일한 작전이 있다면 유격수나 2루수 쪽으로 굴러가는 병살타를 유도하여 3:2의 스코어를 지키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상대에게서 이것을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바보가 아닌 바에야 이 상황에서 상대방 감독이 병살 타자를 내놓겠는가. 상대방의 작전은 무궁무진이다. 홈런은 아니라도 큰 것 한방이면 상대방에게 역전의 승리로 돌아간다. 외야 플라이나 스퀴즈 번트 하나면 최소한 동점이다. 그러면 연장전이다. 그런데 기막힌 사건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상대타자가 병살타를 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상대타자가 병살타를 친 것은 확률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기적이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일들 두고 복이나 운으로 돌린다. 세상에서는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때 흔히 운이나 우연으로 돌려버린다. 그러나 세상에 우연은 없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다. 우리민족이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받은 것이다. 이 은혜가 누구에게 찾아오는가?


 구약 성경 에스라書(1:1∼4)에서 나는 이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패망과 회복을 통하여 세계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모든 주재권(主宰權)은 하나님 당신에게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일찍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당신 앞에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의 적국에 패망할 것과 포로생활 할 것을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줄기차게 경고하여 왔다. 그러나 목이 곧은 이스라엘 민족은 이를 거부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추종하고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를 핍박하여 그를 땅 속에 묻기까지 하였다. 하나님께 배역한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망하고 말았다.(렘52:12∼16)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길고 긴 포로생활의 질고(疾苦) 속에서 소망 없는 나날을 살아가고 있었다. 적대국 바벨론에서의 70 년의 노예생활은 계속되어 갔지만 그 어디에도 해방의 소식은 없었다. 치욕(恥辱)과 모멸(侮蔑)의 나날은 더욱 목을 옥조여오고 한탄과 절망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생활은 여전히 계속되어갔다.      


 그러나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어 당신의 주관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굴러가서 예정된 시간에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하나님은 준비하고 계시었다. 마침내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패망하게 된 것이다. 제국 페르시아를 세운 고레스왕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민족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불을 숭상하는 조로아스트교의 신봉자다. 그가 하나님을 알 리가 없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선포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로만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가 될 것이며 포로생활 70년 만에 해방되어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을(렘29:10)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고레스를 감동시킨 것이다.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말씀을 좇아간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보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을 기억하신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어디를 가든지 가장 먼저 그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흔히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기도 하고 복음의 통로라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 잠시 찾아보자. 창세기 12장 4절에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라는 기록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좇아간 사람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너의 친척 아비의 집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명(命)하셨을 때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말씀을 좇아갔다고 히브리書 기자는 그를 평하였다. 그는 또한 예배를 최우선 순위에 둔 사람이다. 창세기 12장 7∼8절에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라는 기록이 있다.


 나도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라. 은혜란 곧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입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은혜를 주시는가? 겸손과 온유함으로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간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나는 나의 자녀들이 복음의 통로가 되기를 항상 기도하고 있다. 그러기에 말씀을 좇아가고 예배에 목숨 걸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예배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훈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민족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당신의 은혜를 받기를 소원한다. 그리하여 열방을 향하여 전능자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나누고 베푸는 풍요한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기적을 맛보면서 감사와 환희의 삶을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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