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는 누구인가

비전 2009. 1. 13. 18:59 |
 


사자봉 산등성이 위로 하얀 억새꽃이 피고 하늘바람이 온 대지를 휘저으면서 벌써 강원도 산간에는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겨울을 재촉하고 있다. 정말 가을이 가고 있다. 인도 위를 걷고 있는 연인들의 코트 깃이 한껏 올라가고 낙엽이 가로수 위로 어지러이 뒹구는 깊어 가는 이 가을을 맞아 사랑하는 제자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길 기도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제자들의 졸업 20주년 home coming day 초청장이 날아오고 그때마다 그 날의 제자들이 생각난다. 그 날의 제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젊은 패기와 큰 꿈을 가지고 더 넓은 세계로 달려 나간 그 많은 제자들은 지금…?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만난 제자는? 멀리 캐나다의 산간에서 만난 그 다정다감하던 제자는 다들 잘 있을까?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의 새끼들을 기를 일이다.’ 이럴 때 미당의 이 시 한 구절이 얼마나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가. 아마 나의 제자들도 열심히 자기의 자식들을 기르고 있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이 가을에 나의 제자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 본다.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되겠다는 내 마음의 깊숙한 곳으로부터의 외침을 들으면서 말이야.  이 순간 내 마음은 뛰놀기 시작한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 내외(內外)는 하나님의 자녀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말이다. 우리 부부가 자네 내외를 만난 이후 나는 자네 가정을 위하여 쉼 없이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은 지금 자네 내외를 만나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리고 자네 내외를 사랑하고 계신다. 또한 하나님은 자네 가족 하나하나를 축복하기를 원하신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나는 얼마나 가슴 벅찰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내어놓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우리를 영원한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다. 

“사람이 한번 죽는 정한 이치요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하고 성경은 밝히 말한다. 우리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지만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심판은 엄연히 있고 이 심판을 피할 수 없음도 엄연한 현실임을 어찌하나. 삶에는 우선순위가 있지 않은가. 가장 근원적인 것이 우선 순위의 ㅇ순위가 되어야 하리라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겠지. 이 세상에는 영속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져야 하고 영원히 내 곁에 두고 싶은 것도 언젠가는 두고 가야 한다. 그렇다면 영속하지 못하는 것은 우선 순위의 ㅇ순위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해지지 않았나.


죄로 말미암아 영속하지 못하는 우리 인생이 영생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 사망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사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기적이요 그것은 그저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복된 소식이지.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고 말이야.


우리는 아무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나그네라 했거든. 일찍이 당나라의 이백(李白)은 춘야연 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부 천지자는 만물지역여요, 광음자는 백대지과객이라(夫天地者, 萬物之逆旅. 光陰者, 百代之過客) 이 부생이 약몽하니 위환이 기하오(而浮生若夢, 爲歡幾何)라 하면서 인생을 꿰뚫어보는 혜안(慧眼)을 가지고 우리를 마음껏 희롱했지 않나.  그래서 이 싯구가 지금도 인구에 회자(膾炙)되지 않나 생각해.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지.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그렇다. 우리는 나그네요 풀잎 위의 이슬이며 아침 안개에 지나지 않아. 나그네인 우리의 본향(本鄕)은 천국이다.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소풍 온 것이라 할까. 나그네인 인생은 궁극적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밝히 말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말하고 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 했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게.  


자네는 자녀의 손을 잡고 해운대 백사장으로 나가 본 적이 없나? 백사장에는 많은 아이들이 나와 놀고 있다. 조개 껍데기를 줍는 아이, 종이배를 접어 한바다로 보내는 아이, 모래로 성을 쌓는 아이….   

“아빠, 나 저 배 사 줘.”

물거품을 일으키며 바다를 가르는 모터보트를 바라보며 소년은 아빠를 조른다.

“아빠, 나 저 비행기도 사 줘.”

바다 축제를 축하하여 백사장 위를 선회하는 헬리콥터를 바라보던 소년은 또 아빠를 막무가내로 조른다.  그러나 차츰 소년은 청년이 되어 가면서 아빠를 조르지 않는다. 왜냐고? 아빠는 나의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성으로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지.

 
  사랑하는 나의 제자 내외는 이제 하나님을 찾아라. 그리고 부르짖으라. 반드시 만나 주신다. 나를 낳아준 아버지는 나의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 없지만 하나님은 영생 그 자체요 우주의 창조자이심으로 능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걸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일컫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고 말이다.

 
 자네는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 나의 등뒤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분의 선한 오른손이 나를 도우신다. 나를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하여 참 자유를 주시고 나에게 평안과 안식을 주시는 그분은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 예수를 믿으면 너-무 좋다. 나는 자네 내외를 위하여 계속 기도하겠다. 오늘 자네 내외가 동산교회를 방문해 준 것을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하신다 그리고 우리 교회와 우리 부부가 뜨겁게 환영한다. 이 귀한 발걸음이 복된 발걸음이 되고 천국을 선물로 받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 편지를 자네가 가장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자네의 아내에게도 꼭 읽어 주었으면 좋겠어.  다음 주에 교회에서 다시 만나자. 사랑한다, 안녕.    스승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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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묵상 2009. 1. 3. 16:56 |
 

  봄은 더디 오더니 가을은 신속히 오고 있다. 신혼시절 한 지붕 세 가족의 슬레이트집 아래에서 아내와 등을 서로 붙이며 잔인한 겨울밤을 견뎌야 했던 나는 생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두메산골 소녀처럼 봄을 기다려 오곤 했다. 나에게 봄을 기다리던 추억이 유별나다면 가을은 또 어떨까?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은 나의 곁에 성큼 다가와 눈부시리 만큼 현란한 자태로 다가온다. 학교 뒤 사색의 뜰에는 울긋불긋 오색의 색동저고리로 차려입은 나무들이 마치 품평회를 벌이듯 자신들을 뽐내고 있다. 이쯤 되면 뒤뜰로 나가보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하던 일을 잠시 접고 나는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뒤뜰로 나가게 된다. 하늘은 심해처럼 짙푸르고 맑다. 뜰은 바야흐로 단풍의 축제가 막 시작되고 있다. 주인을 기다리는 벤치 옆의 느티목은 차츰 원색의 옷으로 곱게 갈아입기 시작한다. 올해는 유난히도 단풍의 색깔이 곱다. 해마다 여름이면 찾아오는 짓궂은 태풍도 올해는 이웃나라 일본이나 대만으로 비켜가고 일조일이 유난히도 길었던 탓인지 여느 해보다 곱게 물들었다. 단풍은 가지 끝에서부터 서서히 안쪽으로 물들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직 다 붉어지지 않은 탓인지 나무 전체가 꼭 대웅전의 단청 같다. 대자연의 위대함에 릴케의 시가 아니라도 나 자신 숙연해지지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얼마나 내적으로 성숙해져 있는 걸까?

 
 한국의 가을만큼 화려하고 요란한 경우가 있을까? 지난해 가을은 나에게는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 학교에 부임한 지 서른 해만에 3학년 담임 십여 명과 가을 나들이를 할 수 있는 특혜를 누렸기 때문이다. 11월 6일, 수능시험을 치른 이튿날 우리 일행은 지리산으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우리는 노고단 산장에 다다랐다. 단풍은 거의 끝무렵이라 별로였지만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더 넓은 평원에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은 억새였다. 주위가 온통 억새의 바다였다. 가을의 정취는 차라리 군무를 이루는 억새밭을 거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억새꽃이 하늘거리는 계곡에 서면 나도 솜털을 달고 어디론가 하늘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다음날의 내장산과 백양산 단풍은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라더니 이에서 더할 수 없으리 만큼 화려함의 극치였다.

 
  이제 가을은 더 깊어갈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의 외투깃은 한층 올라갈 것이고 가로수길 위로는 낙엽이 뒹굴 것이다  몇 달 후면 우리네 제자들도 교정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한 학교에서 나의 사명을 시작하여 한 학교에서 그 사명을 마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교사로서의 첫발을 들여놓고 지금까지 나의 소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곧 나의 의식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요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대지를 정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니 기쁘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이뇨?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그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뇨.” 이 말씀은 구약 성경 미가서에 있는 말씀이다. 나는 오늘도 조용히 반문해 본다.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는 세상은 어디일까? 이 지상에서 그곳이 과연 있기나 할 것인가?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 나의 중심에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그곳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얼마나 교만해져야 만족할 것인가? 교만과 패역이 가득한 세상에 비움과 낮아짐으로 섬기다가 갈 뿐이다. 나의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에 약속으로 보장된 천국에 나는 갈 뿐이다.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이 기쁜 복음의 소식을 주고 싶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보장은 없다.

 
 자연에는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고 그 겨울이 가면 또 봄은 찾아오겠지만 인간 세상에 태어난 나에게는 자연의 순환 같은 것은 없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이후에는 심판이 있을 뿐이다. 깊어가는 이 가을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심판을 면하고 영생을 선물로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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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합창

경배와 찬양 2008. 12. 15. 10:58 |
 

  고즈넉한 산사(山寺)의 돌각담을 끼고 흐르는 계류(溪流)를 따라 우리 일행은 돌작밭길을 타박타박 걸으며 산의 정상으로 오르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능선길을 택하여 오르고 계곡길로 하산하기고 하였다. 아무래도 늦가을의 왕자는 억새풀이다. 푸른 대숲을 끼고 돌아 한참을 능선길을 따라 오르니 절의 서북쪽으로 더 넓은 억새풀밭이 펼쳐진다. 이십여 년 전, 을숙도 갈대밭에서 받은 감흥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을숙도 갈대밭의 주인이 철새떼라면 이곳 억새밭의 주인은 바람이다. 우리의 머리 위로 이따금 스쳐가는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소리만이 바람결에 묻혀버릴 뿐이다. 사각사각 발밑에서 부서지는 억새풀의 숨소리를 들으며 발길 사이로 난 외길을 헤집고 일렬 종대로 오르는 우리의 모습이 퍽이나 왜소해 보이기도 한다. 사람 키의 몇 길이나 자란 억새풀 속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내 키는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해 본다.

 
 산의 팔부 능선쯤 올랐을까? 한 마리의 까마귀가 우리의 머리 위를 선회하면서 겨울을 재촉하는 울음을 울고 간다. ‘까악, 까악…’ 계곡을 건너 반대편 능선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긴 여운을 남긴다. 발바닥에 와 닿는 낙엽의 따스한 체온, 높푸른 가을하늘의 해맑음, 계곡을 훑어 불어오는 바람 이 모두는 우리를 풍요하게 한다.

 
 하나님과 자연과 사람을 사랑하면서 배우고 가르치며 울고 웃고 부대끼기 어언 삼십여 년, 육십이면 이순(耳順)이라 했다는데 나도 이제 최소한의 철이 든 것인가? 공자는 논어의 허두(虛頭)에서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멀리서 오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했다는데 내게는 사랑할 가족과 이웃이 있고 가르칠 제자가 있고 밤을 새워 기도할 시간이 있으며 내가 경외할 하나님이 계시니 나의 이 행복을 어찌 공자에 비기겠는가!

 
 황소등같이 민듯한 능선을 타고 오르는 우리 일행의 숨결이 자꾸 가빠진다. 손에 잡힐 듯이 가까운 앞산의 두 능선이 마주보며 다정하게 아래로 달음박질하다 곤두박질한 지점에는 아직 푸르름이 남아있고 계곡 아래로는 물줄기가 몇 차례 낙차를 이루어 폭포를 만들고 면면히 흘러 소(沼)를 이루고 있다.

 
 나는 산을 오르며 힘찬 산의 숨소리를 듣는다. 산은 인간의 나타(懶惰)와 안일(安逸)을 거부한다. 산은 다만 겸허와 절제로 다가오기를 바랄 뿐이다. 앙상한 가지의 나목(裸木)들로 을씨년스럽기까지한 산은 겨울이 되면 백설의 은세계로 다시 옷을 갈아입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산을 찾을 것이다. 어느 선승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했다더니 산은 언제나 거기 그곳에 우뚝 서 있다. 다만 인간만이 변할 뿐이다. 그들도 가고 너도 가고 언젠가는 나도 가는 것이다.

 
 또 한 바탕 바람이 일어난다. 뭇 소리의 합창이 시작된다. 나뭇잎 갈리는 소리와 저 지구의 중심에서 울려오는 산울림 소리가 엄숙한 하모니를 이루며 계곡 속에서 숨죽이던 멧새들을 일제히 푸른 하늘로 날려올린다. 새들의 비상(飛翔)이 시작된다. 태양을 향하여 날개를 퍼득이며 날아가는 새떼들의 군무(群舞)! 고요하던 산들이 일제히 용틀임을 한다. 이 소리의 합창 속에서 나는 갑자기 창조의 섭리를 깨닫는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산의 질타(叱咤)소리에 우리도 가세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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