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

비전 2009. 2. 3. 15:00 |

 

  지루한 칠월의 장마가 보름째다. 오늘은 영도교회 중고등부 수련회에 특강을 해 주기로 약속이 된 날이다.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아침녘에는 폭우가 되어 퍼붓기 시작한다. 나를 특강 장소에까지 바래다주기로 되어 있는 영도교회 중고등부 부장 집사님을 만나러 나는 지금 지정된 장소로 가는 중이다.

 

 나를 태운 차는 언양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지방 국도를 타고 이십여 분쯤 더 북쪽으로 올라가더니 산길을 더위잡아 오르기 시작한다.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빠져 나갈 수 있을 듯한 시골길이다. 시멘트 포장은 되어 있어나 곳곳이 패어 장마비로 웅덩이가 되어 있다. 그러나 나를 픽업해 가고 있는 집사님은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영과 영은 통하는 법, 집사님을 통하여 주님의 흔적을 보게 되니 정말 기쁘다. 주님의 일에 내가 동참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감격을 이 베스트 드라이브를 통해 읽고 있으니 정말 흐뭇해진다. 길은 두 산의 계곡을 따라 산 중허리로 뻗어 있다. 장마비로 계곡은 물의 천지다. 빗소리와 물소리로 계곡은 지금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중이다. 짙푸른 녹음이 싱그럽다 못해 그 짙고 검푸른 녹색 물로 우리를 삼켜 버릴 듯이 달려든다. 칠월의 장마비와 소란스런 계곡물, 싱그러운 녹음과 빼어난 산세(山勢). 정말 기막힌 자연의 궁합이요 오묘한 하나님의 창조 신비다. 우리는 매양 하나님의 축복 속에 당신이 차려 준 진수성찬을 먹으면서도 날마다 투정하고 살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수양관의 식당은 먼저 온 교회의 도우미 여집사님들의 손길로 바쁘다. 부장 집사님과 나를  반갑게 맞아 준다. 모두의 얼굴에는 기쁨과 감사의 웃음이 활짝 피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여기서 보는 것 같다. 영도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마음이 흐뭇하다.

 

 청소년들의 여름 수련회는 언제나 마음 설레는 집회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에게는 일생일대의 회심(回心)의 계기가 되는 추억이 한 번쯤은 있다. 그런데 그 기회는 대개 청소년기의 여름 수련회일 때가 많다. 그러기에 이 여름 수련회는 더욱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신앙생활에 굴곡은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을 향한 질펀한 감격과 환희의 눈물이 있었다면 메마른 사막과 같은 절망과 좌절의 모래언덕도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때 지난날의 첫사랑을 추억할 일이다. 주님과의 첫사랑을 기억할 일이다. 이 추억을 우리 청소년이 오늘 여기 이 집회에서 만들어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내가 여기에 왔다는 거룩한 사명을 깨닫는다.

 

 해맑은 청소년들의 얼굴을 바라보니 나의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 사십여 년 전 신마산 교회에서의 중․고등부 시절,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우리는 한 달 내내 교회에서 죽치고 살았었다. 밤마다 남녀 학생들이 교회당에 모여 연극을 준비하였고 여름 수련회 때는 많이도 울었던 기억이 새로워진다. 우리를 그렇게도 울렸던 강사 목사님의 목쉰 소리 속에 녹아 있던 그 ‘예수’. 그분이 지금도 나의 용광로가 되어 나를 활활 불태운다.

 

 오늘 여기 모인 젊은이들이여, 예수의 불로 나를 태우고 소명(召命)의 불로 나를 담금질하여 나로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꾸게 하소서. 양치기 목자의 손 안에 있는 마른 지팡이가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로 바뀌게 하소서.

“주여, 나는 이제 더 이상 실망과 좌절의 미디안 광야 모세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명자입니다. 오, 주여, 나를 사용하소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옵소서.”

 

 나는 오늘 이 젊은이들을 통하여 미래의 영도 교회를 보며 미래의 한국을 보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 또한 미래의 젊은이를 키우는 영도 교회의 열정적인 교사들을 보게 되니 더욱 기쁘다.

 

 우리의 만남에 우연은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다.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하고 나의 하나님을 자랑하면서 나는 살아 갈 것이다. 영도교회의 청소년들과의 아름다운 만남을 예비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2006. 07, 17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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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

묵상 2009. 2. 2. 21:47 |
 

                                                 
 주말이면 어머니의 품속처럼 그립고 따스한 나의 집으로 돌아와 집 근처의 목욕탕으로 가는 것이 나의 즐거운 일과 중 하나가 되어 버린 지도 어언 일 년이 넘었다. 따뜻한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앉아 있으면 여기가 바로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오늘도 세상사 잡다한 걱정거리를 다 씻어 버리고 빈 마음으로 돌아오고자 가벼운 마음으로 목욕탕으로 간다.

 

 탕 밖으로 나와 휴게실 소파에 앉은 나의 시야에 모 유력 일간지의 경제면 톱기사가 들어온다. ‘한국 경제, 성장 동력이 멈추는가’ 라는 기사다. 각종 경제지표가 1997년 12월의 IMF 모라토리움 때보다 더 악화되어 나타나 40년 이래 최악이라느니 30년 이래 최저라느니 하는 어두운 기사로 신문의 둘째 면을 도배하고 있다. 세계 경제 위기의 먹구름이 한국 하늘을 뒤덮고 있어 어디에도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죽는다고 아우성이다.

 

 요사이 들어 내 주변에는 마음 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믿음의 선•후배들, 그리고 나와 마음을 같이 했던 지인(知人)들 중에 유달리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우울증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여보지 않았다. 그런데 예사롭지 않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 중엔 상당한 식자(識者)들도 많다. 지식과 인격이 이 병을 이길 저항력이 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은 엄밀히 따지고 보면 대부분 우울증에 대한 잠재적 보균자라 할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내일은 미스테리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현대인에게는 이기기 힘든 골리앗이라 할 수 있다. 직장, 재산, 지위, 명예 등 자기를 든든히 지켜준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를 외면해 버리거나 매몰차게 자기를 떠나가 버렸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한다. 자기가 목숨걸고 있던 것을 갑자기 잃어버리거나 빼앗겼을 때 받는 충격은 가히 죽음과 맞먹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때 사람들은 심한 박탈감을 느끼고 분노의 감정을 갖게 되며 결국에는 자학(自虐)과 칩거(蟄居)의 상태로 들어가거나 사람들을 기피하게 된다.

 

 나는 현대의학에 문외한이지만 현대인의 우울증의 원인은 두려움에서 온다고 나는 단언하고 싶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두통을 호소하거나 소화불량이나 근육무력증으로 고통을 당하며 심한 정서 장애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보아왔다. 결혼한 부부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배신으로 상대가 심한 우울증을 앓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성경에서는 두려움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근본 원인은 관계의 단절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전능자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자이시다. 그러기에 그분에게 원인을 물어야 한다.  서양의 어떤 철학자는 인간 존재를 피투체(被投體) 즉, 허공에 던져진 존재라 하였다는데(물론 이 철학자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임) 절대 고독의 존재는 바로 하나님을 떠난 존재가 아닐까 싶다. 하나님을 떠난 존재는 근본적으로 불안하다. 에덴에도 찾아왔던 사탄은 이때에도 찾아온다. 그리고 백설 공주를 찾아온 마귀할멈이 주고 간 사과처럼 우리를 죽이고 파괴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끌고 가는 두려움을 주고 간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려하지만 사탄의 계략에 휘말려들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결재가 나지 않고는 절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참새 한 마리도, 들의 풀꽃 한 송이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거나 시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또 이렇게도 말씀하신다. “까닭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잠26:2) 하고 말이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라. 내 모습 이대로 돌아가라. 그분은 나보다 먼저 동구밖에 나와 당신께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이제 그 먼 방황의 세월을 끝내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보라.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께 나를 맡기어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팔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하는 말씀 속에 모든 해결책이 다 들어 있다. 나는 이 말씀을 하루에도 십여 번씩 암송한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나를 두려움으로부터 지켜주기 때문이다. 사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두려움을 주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셨다. “강하고 담대하라”

 

 사탄(마귀)을 대적하라. 하나님은 말씀을 가지고 사탄을 대적하라고 하셨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두려움이 찾아온다. 그러기에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사탄을 대적할 수 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자 하나님이시요 나의 간구(懇求)를 들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임을 믿어야 할 것이다.

 

 믿음의 말을 구사하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말을 하고 절망 중에도 소망의 말을 하라. 말대로 된다. 하나님이 나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기를 원하는가? 긍정의 말을 심으라. 긍정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                                               2009년 1월 31일  토요일 씀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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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4:12~16)

 멀리 교회의 종탑이 하얀 눈송이를 뒤집어쓰고 있는 12월의 칼렌다 그림 한 장이 나를 갑자기 반세기로 되돌려 놓는다. 나의 유년부 시절은 6․25 직후인 마산의 신마산 교회로부터 시작된다. 눈 덮인 교회는 언제나 나의 유년 시절이요 나의 천국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눈이 좋고 눈 덮인 교회가 좋다. 매년 12월 성탄절이 되면 나의 모 교회인 신마산 교회는 나를 비롯한 고아들에게 생 대구국과 먹음직한 흰 쌀밥을 배가 터지도록 먹여 주었으니 말이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도 유달리 별났다. 성탄절 전야제를 위한 모든 프로그램을 고등부가 도맡아 했으니까. 연극과 찬양, 실내 장식 등 정말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들은 12월 한 달을 거의 교회에서 살았다. 여학생들은 아예 교회에 재봉틀을 가져다 놓고 크리스마스 장식을 위한 준비물을 만들었고 남학생들은 그림 그리기에 분주하였다. 우리들은 연극과 찬양 연습으로 12월 한 달을 교회에서 죽치고 살았다. 밤이 깊으면 교회의 어머니들이 나와서 새참으로 떡국을 끓여 주기도 하고 고구마도 삶아 주었다. 우리들은 장작불이 벌겋게 타오르는 난롯가에서 주님의 밤을 준비하곤 하였다. 그렇게 12월의 밤은 깊어만 갔다.   매년 한해가 가고 또 한해가 오건마는 올해는 나에게는 유난스럽다고 해도 좋을 만큼 의미 있는 해인 것 같다. 내가 이 세상에 와서 나이 예순이 되었고 새로운 사명을 확인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브니엘에 온 지도 벌써 31년이 되었다. 이제 2년이 지나면 나는 이 정든 교정을 떠나게 된다. 내가 브니엘과 인연을 처음 맺을 때는 이곳이 나의 선교의 사명지란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여느 다른 이들과 같이 거저 내 생계의 현장이요 내 삶의 든든한 말뚝이었을 뿐이었다. 돌이켜 보면 브니엘을 향한 나의 자부심과 정열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나는 브니엘을 향하여 나의 최선을 다하여 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밤을 새워 교재를 연구하였고 누구보다 많이 제자들을 명문 대학으로 진학시켰고 제자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겨 그들과 눈물을 같이 하였지만 감히 나의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럽다. 때때로 제자들에게 복음을 담대히 전하기도 하고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제자들과 신앙 상담을 한 적도 있었고 억지로라도 교회로 인도한 한 기억도 있지만 감히 주의 제자로서 사명을 감당해 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이제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중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주님은 고향을 떠나서 사역하셨고 아브라함도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났다. 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이제 응답하려 한다. 내가 하나님의 사역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는 연한은 그렇게 많지 않다. 많아야 육 칠 년이다. 하나님은 사명을 가진 자를 지켜 주신다. 사명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 나는 가끔 이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그러나 내가 주의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리라 확신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명자를 도구로 사용하여 친히 당신의 일을 하신다.

나에게는 이 믿음이 있다. 하나님이 하신다. 할렐루야, 아멘 (2005. 12, 08)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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