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공유하라

묵상 2012. 5. 23. 17:55 |

 어제 한 일간지를 보다가 참 마음이 흐뭇했다. 우리나라 한 대기업의 등기임원 평균 연봉이 100억원을 넘어섰다는 기사다. 이날은 또한 2011-2 유럽 챔피언십에서 첼시가 우승컵을 거머쥐었다는 소식으로 안방이 떠들썩한 밤이기도 하였다. 나는 첼시가 그라운드를 누빌 때면 꼭 대한민국이 세계를 누비고 있는 환상에 젖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수들의 가슴에 새겨진 낯익은 로고 때문이다. 한 기업이 세계적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과 어려움이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며 우선 그 기업에 찬사를 보낸다. 세계적인 두뇌들을 스카웃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을 것이며 연구개발과 생산, 판매를 위하여 밤을 새워야 했던 임원, 근로자들의 노고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CEO와 임원 그리고 근로자들의 진정성이 곧 최고의 경쟁력이요 최고의 브랜드임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된 계기가 되어 이 한 밤이 마냥 즐거운 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밤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낸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자는 별로 많지 않다. 나도 최근에야 모 일간지 기사를 통해 알았으니까. 기부금이 우리 돈으로 8000억원이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건립기금 600억원을 선뜻 기부하고도 마냥 부끄러워하는 이분의 모습에서 “어린(어리석은) 백성이 니르고져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자가 많이 있는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라” 하신 세종대왕의 애민(愛民) 정신을 보는 듯했다. 나는 이분의 다음 말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내가 기업인이기에 돈 버는 데는 남 다른 재주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을 더 벌면 재벌밖에 더 되겠습니까?” 이 말을 들어보면 이분은 분명 재벌은 아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최고의 멋쟁이로 느껴진다. 멋이 무엇인가?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권리를 나에게만 쓰지 않고 남과 더불어 나누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이렇게 멋지게 한번 살고 싶지 않은가?

 

 나는 재벌을 맹목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나는 이번의 기사를 통하여 한 재벌기업의 임원연봉 1년치가 2조원이 넘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조원이면 천문학적 금액이다. 재벌이 임원연봉 1년치만 열악한 대학의 기초 과학 연구에 기부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인재를 배출할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철의 왕국 포항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흥해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영일만의 바닷가 한적한 야산 한 자락 끝에 자리한 한동 대학교, 이 대학에는 정말 많은 석학들이 와 있다. 돈으로 따지면 연봉이 최소 백억은 다 넘는 분들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오로지 사명 하나로 왔다. 돈의 위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이지만 돈이 사람을 돌게 만들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 초연해진 사람이 있다. 나는 한동대학에서 이런 분들을 만나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이분들 중 상당수는 미국에서 연구하던 과학자들이다. 이분들이 한동대학의 설립목적을 알고 이 대학에 동참했던 것이다. 내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이 대학의 총장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렇다. 바로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이 학교는 학교 운영의 상당부분을 이 대학을 졸업한 동문들의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가슴이 뭉클하였다. 정신은 정신을 낳고 인재는 인재를 낳는다는 말은 언제나 진리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가? 이제는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을 따져 보아야 할 때다. 하잘 것 없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며 바둥거리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부부가 싸우다 싸우다 결론이 나지 않으면 한마디 내뱉는 말, “그래, 너 잘났다.” 우리는 도처에서 서로 잘난 것 때문에 싸운다. 수탉 두 마리가 암탉을 사이에 두고 왜 싸우는가? 내 잘났다고 싸우는 게 아닌가? 인간 사회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돈으로 경쟁하고 자리로 경쟁하고 미모로 경쟁하고 하다 보니 싸움할 일만 남는다.

 

 대학 입시에 논술이 등장하고 난 이후 우리나라에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한 권 있다. 그게 바로⟨논리야 놀자⟩라는 책이다. 나는 이 책으로 많은 학생들에게 논술 지도를 해 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논리적 오류는 무엇인가? 흑백논리의 오류이다. 흑백논리의 오류에 빠진 자는 내편이 아니면 모두 나에게는 적이다. 내가 선이면 상대는 악이기에 뭉개 버려야 하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기에 공감이 없고 공존이 없다. 가정에서는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가 그렇고 회사에서는 상관과 부하 사이가 그렇다. 학교는 어떤가? 내 자식이 최고니까 내 자식을 훈계하면 안 된다. 교사는 교원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지식을 파는 자일뿐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교단생활 삼십삼 년 동안 참 많이도 매질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잊지 못한다. 자신이 스스로 깍지 못하는 제 머리를 내가 깎아 주었으니까.

 

 요사이 부모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신세대부모라 부르면서 편을 가른다. 그러나 부모의 개념 속에는 신세대 구세대가 없다. 왜냐하면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꼭 같기 때문이다. 소위 자신들이 신세대라 스스로 일컫는 자들은 농사법을 모른다. 그들이 언제 밭에 나가 씨를 뿌려 본 적이 있는가? 내 자식 무서운 아이로 키우고 싶지 않거든 오늘 당장 주말 농장을 한 밭떼기 마련해 보라 권고해 보고 싶다. 그리고 그 밭에 씨 뿌리고 기다려 보라. 씨 뿌린 밭에 무엇이 함께 나는가를 보라. 내가 뿌리지도 않은 잡초씨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잡초는 새싹보다 훨씬 더 많다. 그 잡초가 나중에 곡식의 새싹을 자라지 못하게 하고 감아 올려서 온통 잡초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자식 농사도 매 한가지다. 고운 자식일수록 더 엄하게 키워야 한다. 여기서 엄하게란 말은 ‘절제 있게’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 나만이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겸손을 배워야 한다. 겸손을 가르치는 최고의 스승은 자연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명이 긴 나무는 양평 용문사에 있는 일천오백 년 된 은행나무란다. 나무박사의 말이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이상은 살지 못한다. 삶이 그렇고 앎이 그러하다. CEO를 넘어 재벌을 꿈꾸는 젊은이여, 꿈을 꾸며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꿈을 꼭 이루기를 바란다. 그러나 다음 말을 마음에 새기며 자신에게 되물어보기를 바란다, “재벌 되고 난 다음에는 무엇 할래? 그 돈으로”

 

 돈으로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영원은 안 된다. 영원은 결코 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그 많은 돈 움켜쥐고 놓으려 하지 않는 어른은 마치 양 손에 과자를 잔뜩 쥐고도 더 달라고 때 쓰는 어린애 같다고나 할까? 어른들이여 제발 철 좀 들게. 철들자 죽는다더니 일찍이나 철들면 할 일 좀 하고 가지. 그러면 돈 없으면 할 일도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나 같이 돈이 없어도 글재주가 있지 않은가? 나에게 없는 것을 탓하지 말고 있는 것을 찾아보자. 찾아보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많다. 있는 것으로 나누면 된다. 이것이 인생을 공유하는 것이다.

 

 요사이 재능 나누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홈스쿨에서는 여러 가정의 부모들이 자기의 전공과 재능을 살려 학생들의 훌륭한 교사가 되고 있다. 문제는 내 것을 내놓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내 것을 공개하면 경쟁에서 뒤진다는 생각이 우리를 늘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놓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는 것이다. 요사이 취업을 앞둔 젊은이에게 중압감을 주는 말이 무엇인가? 스팩이란 말이다. 그래서 스팩을 쌓기 위하여 학원에 다니거나 해외연수를 다녀오기도 한다. 그 흔한 자격증 몇 개쯤은 기본으로 따 두어야 면접시험에서 낙방하지 않을 테니까. 요사이는 남보다 차별화 된 그 무엇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이다. 블루오션 이론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차별화된 전략이다. 인생의 성공조건에 차별화 전략이 필요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나는 그래서 이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물구나무서서 세상 바라보기는 생각의 틀을 바꾸라든지 고정관념을 깨라든지 하는 발상의 전환을 위한 한 교육 프로그램의 일종이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공한 연후에 그 성공의 과일을 독식하지 말자는 말이다. 과식하면 설사하고 오히려 손해를 보듯이 돈도 재능도 가질 만큼 가진 자들은 이제 자기가 취할 만큼 취하고 나누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하나도 아닌 두 아들을 세계적 명문대학에 나란히 교수가 되게 하는 영광을 얻은 가정을 소개한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다. 두 아들을 기른 아버지의 말씀 왈(曰) “50%는 너 자신을 위해 살고 나머지 50%는 나라와 세계를 위해 살아라” 이 친구들 이제는 정작 자기를 위해 사는 데는 자신의 열매의 오분의 일로도 족하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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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2

묵상 2012. 4. 18. 12:04 |

 지구 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해수온도가 상승하자 북극권의 대기온도가 올라갔다는군요. 그게 뭐 대수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숩니다. 왜 그러냐구요? 봄이 오지 않습니다. 예년 같으면 벌써 봄꽃이 지고 신록을 준비해야 할 때인데도 4월의 중순도 훨씬 지난 지금에야 겨우 벚꽃을 서울에서 보게 되네요. 왠 줄 아십니까? 북극권이 더워져 찬 공기를 북극권이붙잡아 두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쟎아요.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러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타고, 더 많이 움켜쥐고픈 나의 욕심이 지구로 발광(發狂)나게 하는 것입니다. 열대우림이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한다는군요. 얼마 전 영상으로 세계의 3대 폭포를 보았습니다. 그 중에 둘은 열대우림 한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세 개 나라와 경계를 하고 있는 남미의 이과수 폭포는 내가 가 본 나이아가라 폭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나를 압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장관도 얼마나 더 불 수 있을지 미지수랍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한 무분별한 벌채(伐採)는 열대우림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행복을 꿈꾸세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나에게 행복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면서 기대하십시오. 기대하는 자에게는 설렘이 있습니다. 설레며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서 베란다의 창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다가 맞은 편 산자락 위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일출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저층이라 불평했고, 동향이라 불평했던 나에게 아침 일출을 선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새삼 감사했습니다. 연한 새싹을 이제 막 내민 나뭇가지 사이로 솟아오른 새빨간 태양은 늦가을 감홍시보다도 더 붉었습니다. 이 어찌 동향의 저층에 사는 나만의 분복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가지는 알맞은 욕심이 잘못일까요? 아닙니다. 알맞은 욕심은 당연한 욕구(欲求)입니다. 그러기에 알맞은 욕심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선물을 감사하게 받는 것은 순리(順理)입니다. 순리를 지키지 않으면 유기체와 그 유기체가 속한 가정과 사회는 도태되고 마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고 최선의 지혜와 최선의 노력으로 수확을 얻으려 노력하는 행위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따르는 거룩한 행위인 것입니다. 생업(生業)은 성직(聖職)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탐심(貪心)입니까? 성경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탐심은 바로 죄를 낳는 욕심입니다. 인간 최초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내가 먼저의 글 ‘약속’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약속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이요 선언적인 것이라면 인간의 그것은 쌍방적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인간은 그가 지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인간에게 행복하게 살 권리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권세와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은 자기의 주권적 선언이신 약속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2장 16∼17절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선언적 약속을 인간에게 주셨을까요? 바로 인간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인간으로 하여금 확실히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첫째, 인간은 피조물(被造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해 아래서 새것은 없나니’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둘째. 인간은 흙이라는 것입니다. 그 코에서 영이 떠나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찾아온 거짓의 아비 사탄은 이브에게 무어라고 꾀고 있습니까? 창세기 3장 4∼5절을 보십시오.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말합니다. 이브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리고 창세기 3장 6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인간의 비극인 죽음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한 인간의 죽음이 여기에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바로 나의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죽음은 나를 죄와 심판과 지옥으로 끌어가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신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뿐 아니라 나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나도 죄와 사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좀 더 깊이 살펴볼까요? 이브는 왜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을까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탐심이 내면 깊숙이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탐심은 우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상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마음이 가 있는 그것이 우상입니다. 이브는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자기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탐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 자기 오만 바꾸어 말하면 자기가 곧 하나님이라는 망령된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비극입니다. 이 오만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을 불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필연 불순종으로 귀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얼마나 분명합니까.

 

 탐심에 사로잡힌 자의 특징을 보십시오. 욕심이 자기를 삼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합니다. 돈에 미치면 돈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합니다. 명예, 지위, 여자,… 다 마찬가지입니다. 탐심에 사로잡힌 자는 오만합니다. 그것만 가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하는 미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얻기 위해 그것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돈을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영혼을 파는 것입니다. 영혼을 누구에게 팔까요? 사탄에게 파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와서는 지식이 우상이 된 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상대적 가치 그 이상은 결코 천착(穿鑿)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깊이 파고 들어가도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유(萬有) 속에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만유를 지으신 자시요 만유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더할수록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증명할 뿐입니다.

 

 인간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탐심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의 주로 영접하는 길 이외에는 없습니다. 죄는 주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을 주인으로 삼아 사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한 피흘림만이 나의 모든 죄를 깨끗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요19:30)

 

 나는 여기서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사적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을 낙원에서 쫓아내신 하나님이 다시 택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브라함입니다. 이를 성경은 밝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系譜)라”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가나안(지금의 팔레스타인)이 아닌 갈대아 우르(지금의 이락)에서 살았습니다. 아담의 아들 셋의 후손이지만 아버지는 우상을 만드는 자라는 기록으로 보아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부르셔서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명령하셨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순종하여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살펴보면 기복(起伏)이 많았지만 최종 결론을 내리면 믿음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됩니다.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을 때도,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을 때도 한결같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4:18) 하나님이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오고 오는 세대에 경고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탐심의 대상이 되거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짧습니다. 참으로 순간이지요.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모든 것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갔는지를. 그러나 나에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다시 내가 시작해야 할 세상이 있습니다. 그 세상은 영원합니다. 그 영원한 세상에서의 행복한 보장을 성경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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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행

묵상 2012. 3. 7. 11:58 |

 오래 전 일이다. 겨울 철새들이 보고 싶어 주남 저수지에 간 일이 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저수지의 전망대에 오르니 철새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대략 십만 마리 정도에 이른다 한다. 고니, 재두루미, 청둥오리, 기러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이 두 발로 물살을 차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군무(群舞)를 볼라 치면 정말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그래서 언젠가 나는 또 한번 금강 하구언을 찾은 적이 있다. 덩치가 큰 고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은 꼭 보잉 747기가 활주로를 이륙하는 것 같다. 두 발을 가지런히 뒤로하고는 물살을 차고 하늘로 15도 각도로 날아오른다. 내려앉을 때도 너무나 닮았다. 비행기가 랜딩 기어를 내리고 활주로를 미끄러져 내리듯 두 발을 나란히 앞쪽으로 모으고 스키를 타듯이 물위로 내려앉는 것이다.

 
오늘 나는 중양천 둑 위에서 겨울 철새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놈들은 갈 길도 바쁠 터인데 아직까지 미그적거리고 있다. 언제쯤 북쪽으로 떠날려나 궁금하다. 몽골이나 시베리아가 지척이 아닌데 제대로 주린 배나 채웠는지 모르겠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참 재미가 있다. 꼭 두 마리씩이다. 조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암컷과 수컷을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수컷은 목에 흰 테두리를 하고 있다. 한 놈이 자맥질을 하다가 짝을 놓칠라 치면 잽싸게 다시 자기 짝에게로 돌아온다. 어떤 놈은 배불리 먹었는지 물 밖으로 나온다. 한 놈이 나오면 꼭 나머지 한 놈도 따라 나온다. 몸통에 비해서 유달리 두 다리가 가늘다. 필연 뒤뚱거리기 일쑤다. 저러다가 짓궂은 개에게라도 물리면 어쩌노… 걱정이 된다. 참 창조의 질서와 오묘함이 고마워진다. 저들에게 날개가 없었다면 아마 지상에서 기러기류(類)는 제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늘의 나의 이 들여다보는 즐거움도 없었으리라.

 
나이 오십을 넘긴 사람이라면 아마 미국쯤은 한 번 정도는 가 봤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미국은 새삼스러운 나라도 아니다. 그러나 ‘미국의 트러커’에 관하여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대형 트럭을 모는 운전기사들이다. 나는 어느 지상파 방송에서 미국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한국교포의 트러커 생활을 취재하여 소개한 기사를 보면서 참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기사를 재구성해서 소개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두 가지의 보물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름다운 동행이요 나머지 하나는 치열함이다.

 
미국에서 대륙을 횡단하며 미국 전역을 누비거나 아니면 멀리 캐나다 동 서부까지 뛰는 장거리 트러커는 약 오만 명이 되고 있단다. 게 중에 한국인은 겨우 1%인 오백 명이다. 이들 대부분의 생활은 도로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것도 끝없이 펼쳐진 하이웨이 위에서다. 어쩌다가 도로 위에서 멀리 지평선 너머로 내려앉는 낙조를 볼 때면 정말 행운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맡겨진 화물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제 시간에 맞추어 배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에겐 시간을 마냥 즐기거나 자연의 풍광(風光)에 취할 여유가 없다.

 여기 한 커플로 소개된 한국교포 한 쌍은 정말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나는 지금도 이 한 쌍의 행복이 계속되길 빌어본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 이들과 이들의 가족을 축복하소서. 나는 이들 부부를 통하여 행복을 배웠습니다.” 이 부부는 언제나 둘이지만 하나였다.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운전석 뒷좌석을 아름답게 꾸며 주었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디스크자키를 자청한다. 그리하여 언제나 함께 간다. 정말 아름다운 동행이다. 집에는 보름에 한 번 정도이다. 부부가 함께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가 좋다. 서로가 배려하는 모습은 정말 눈물 나도록 아름답다. “여보, 오늘은 휴게소에서 뭘 먹을까? 저녁은 내가 쏜다. 당신 먹고 싶은 것 다 먹어” 아내가 남편의 기(氣)를 채운다. 보약 중에 제일 좋은 보약은 배려와 인정이다.

 
오백 명의 한국 트러커 중에는 대부분이 혼자이다. 어떤 이들은 고가 도로 위에서 보내는 나날의 고독을 사진으로 달래거나 책읽기 내지 글쓰기로 자기를 달래며 가족에의 그리움을 대신하고 있다. 사진이나 책읽기 등 여가는 이들에겐 사치다. 그러나 이 사치를 치열(熾烈)함이 극복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라. 이들이 트러커인 자신에게 사진이나 글쓰기가 가당한 일이냐고 냉소하며 그 일들을 버렸다면 트러커의 생업도 조만간 끝내고 말았음이 틀림없다. 이들이 핸들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이러했다. “나 같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체험을 할 수 있어요? 나는 행운아지요. 나는 하이웨이 작가입니다.” 바로 이것이 트러커로서의 자부심의 동력(動力)이다.

 
이들에게는 삶의 치열함이 삶의 매너리즘으로부터 이들을 구했다. 삶의 치열함은 썩음을 방지한다. 바닷물은 썩지 않는다. 바닷물에 소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3%다. 3이 나머지 97의 썩음을 방지한다. 우리의 삶에서 치열함이 있다면 개인이 살고 그 개인이 소속되어 있는 가족이 행복해지고 나라가 행복해진다.

 
바닷물을 바닷물되게 하는 요소가 3%의 소금이라면 내 삶의 치열함의 요소는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순수(純粹)라 말하고 싶다. 순수가 없는 치열함은 가식(假飾)이다. 예를 들어 보자. 한 사람이 자기의 짝을 두고 다른 이에게 사랑의 치열함을 보였다 하자. 그 치열함은 결국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가식이요 자기기만(自己欺瞞)이다. 순수가 전제되지 아니하는 치열함은 썩음을 방지하기는커녕 썩음을 더욱 부채질하게 된다. 사회에는 종종 잘못된 열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는 일들을 볼 수 있다. 잘못된 인간의 야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 왔는가?

 
나는 길거리를 가다가 인도 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휴지조각을 보게 되면 줍게 된다. 언젠가는 주운 휴지를 버릴 통이 없어 한참 동안이나 들고 다닌 적이 있다. 나의 치열함으로 인하여 행복해 하는 이웃이 있다면 이 또한 얼마나 행복한가!

 
“인생에 남는 것은 자식과 여행뿐이다” 라는 말이 있다. 서양 사람들은 돈을 모으는 목적이 여행을 하고자 함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말대로 서양 사람들은 여행에 목숨을 거는 것 같았다. 일정액이 모이면 다니던 직장에도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여행을 떠나는 모습도 보았다. 정말 나에게는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방송 프로에 ‘그곳에 가고 싶다’는 프로가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즐겨 보곤 하였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드물다. 일생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을 가보고 포토나 영상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싶은 것도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알프스, 눈 덮인 킬리만자로, 만연설의 알래스카 빙하, 루레이 동굴 등, 시간과 돈이 허락된다면 소중한 분들과 훌쩍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분명 좋은 일이라 생각된다.

 
용산에 있는 국립 박물관의 전시실은 조도가 굉장히 낮아서 나에게는 불만이 많다. 시원히 밝아서 잔글씨도 잘 보이면 좋을 텐데 왜 그리 어둡게 해 놓았는지 용을 써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죽고 먼 훗날 내 삶을 들여다볼 자들이 있을까를 생각하며 나는 살아야 한다. 세상에는 자기 자식들도 자기 부모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는 삶을 살아가는 부모들이 많다. 말하자면 이들은 막살기 삶을 사는 자들이다. 왜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가? 구린내가 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삶이 자식들에게 구역질나는 삶으로 각인되어 있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나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렇게 기억한다. ‘우록어른은 법 없이도 살 사람, 청도댁은 시골교회의 새벽종치는 박 집사’ 로.

 
먼 훗날, “얘들아, 오늘은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하며 아이들을 재촉하는 나의 아들과 딸들을 상상하며 나는 오늘도 나의 작품을 열심히 만들며 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선포와 복음 전파를 위하여.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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