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날같이 뾰족한 창포잎 끝에 새벽이슬이 맺혔다. 어제 밤부터 세차게 내리던 마른장마 뒤의 폭우라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창가를 거반 가리는 느티나무 잎들 위로 우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는 나의 잠자는 동심(童心)을 깨워 놓는다. 황순원의〈소나기〉가 아니라도 여름날 소나기는 시원하다. 밤새도록 시원스레 내리는 소나기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새벽을 기다린다. 새벽이 주는 새 세상을 보기 위함이다. 모두가 깨끗하다. 보드라운 비로드 천으로 곱게 닦아 놓은 듯 나뭇잎은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풀잎마다 블루다이아몬드가 맺혀 있다. 투명한 이슬방울 속에 내 얼굴이 들어 있다. 육십여 년 전의 그 앳된 소년의 얼굴이.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행복할까? 사람들은 나름대로 행복을 찾아 동분서주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껏 행복을 찾아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면서 못할 짓들 많이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나에게 정말 행복한 선물을 내가 태어날 때 이미 주셨다는 것을 세삼 깨닫게 된다. 그게 바로 불 수 있다는 축복이다.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태어나서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그러하고 엄마를 닮은 나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더욱 그러하다. “엄마, 이게 뭐야?” 아기가 태어나서 세상을 볼 때 제일 먼저 하는 질문이다. 세상과의 대화의 첫 질문이 봄을 통해 시작된다. 만약 아기가 볼 수 없다면 세상과의 소통(疏通)이나 교분(交分)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볼 수 있다는 축복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눈을 마음의 창(窓)이라 하지 않는가. 눈은 마음의 창을 열어 나와 너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게 하고 나와 너를 공유하게 하며 나와 풀잎, 뭇 새들과의 속삭임의 다리를 놓아주기도 한다. 나는 요사이 태어나 이제 반년 남짓 된 손자의 해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읽고 있다. 손자의 눈동자는 나로 가족을 보게 하며 가족 너머 대양(大洋)을 보게 한다. 그리고 우주(宇宙)를 보게 될 때에는 만유(萬有)를 지으시고 나를 조성하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러니 어찌 보게 되는 축복을 누림이 행복하지 아니한가!

 


 우리가 공원을 산책하거나 등산을 할 때면 꼭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한두 명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을 꺾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왜 이럴까? 꼭 꺾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잇는 욕망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세 가지의 욕망을 경계하셨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이면 누구나 생득적(生得的)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셋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 육신의 정욕이다. 육신의 정욕은 그 끝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안목의 정욕은 보암직한 정욕을 말함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먹음직한 정욕으로 나아가려 하는 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당신이 지으신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축복을 주셨다. 그러나 철저하게 안목의 정욕을 경계하신다.



 갤러리에 가게 되면 입구에 ‘보시기만 하고 만지지는 마세요’ 란 팻말이 붙어 있음을 본다. 이는 바로 안목의 정욕을 경계함이다. 자동차의 가속기능과 제어기능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바보 같은 질문일지 모르나 정답은 제어기능이다. 왜일까? 제어기능을 소홀히 하면 오 분 먼저 가려다 오십 년 먼저 간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제어기능을 잘 작동시키지 못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패가망신하게 된다. 요사이 항간에는 정말 바보 같은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간 큰 남자들이 있음을 본다. 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종종 분노를 넘어 허탈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제발 철 좀 들었으면 한다. 교수, 법관, 의사 등등 소위 최고의 도덕관을 지닌 자요 지성인이라는 자들이 지하철에서 성희롱을 하였다, 자기의 집무실에서 제자나 환자와 성희롱 내지 성폭행을 하려다 어찌어찌되었다는 기사로 거의 매일 일간지를 도배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막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실망감을 가지게 된다. 반년만 더 살면 내 나이 고희(古稀)에 이르게 된다. 나와 같은 세대는 어릴 때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이렇게 배워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하는 것을 체득(體得)하도록 말이다. 다시 말하면 가속기능보다 제어기능을 더욱 소중히 배워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 중에 최고의 걸작은 여인이다. 그러기에 여인의 몸을 보는 것은 아름다운 축복이다. 르느와르의 누드화는 불멸의 명작이다. 나도 대가들의 누드화 보기를 좋아한다. 동서양을 넘나들며 동양화 서양화 가릴 것 없이 누드화를 즐겨 본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칠 뿐이다. 보지만 꺾으려 하지 않는다. 여체의 신비를 통하여 하나님의 청조섭리를 보게 되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꺾으려 할 때 비극이 발생한다. 순간적인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여 나 자신을 파멸의 늪으로 던져버릴 것인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책임져야 할 가정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순간의 쾌락은 지극히 달다. 그러나 그 결과는 지극히 쓰다. 욕망의 유혹은 악마의 속삭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 순간의 쾌락에 나와 내 가정의 행복을 송두리째 걸 수는 없다. 한 순간의 쾌락이 나와 내 가정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족쇄가 된다는 것을 뼛속에 새길 일이다. 나는 언제나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삶을 마음속에 간직한다.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요셉을 유혹하였으나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득죄(得罪)하리요” 하면서 말씀을 붙잡았던 요셉의 삶을 나의 삶의 지표로 삼아왔다. 어른이면 다 어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나에게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철 든 어른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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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쉬울 줄이야

묵상 2013. 1. 7. 14:42 |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승강구 좌우편에 이런 광고가 종종 붙어 있음을 보게 된다. “×× 대학병원에서 고혈압 임상실험에 참가하실 분을 모집합니다” 질병에는 임상실험이 있는데 삶에는 왜 임상실험이 없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참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께나 먹고 세상을 살만치 산 내가 인생은 단 한 번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라는 것을 모르다니 말이다.

 

 

 나는 오늘 이 글에서 일반 독자들을 상대로 하기보다는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인생의 난제(難題)를 던져보려 한다. 한자어의 갈등을 어원적으로 풀이해 보면 칡 갈(葛)자와 등나무 등(藤)자의 합성어가 갈등(葛藤)이다. 칡과 등나무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꼬면서 올라간다. 그러기에 칡과 등나무가 만나면 그 꼬임이 결코 풀리지 않는다. 우리의 삶에서 너무나 답답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질병의 경우처럼 임상실험이라도 한번 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때가 종종 있지만 인생은 그럴 수 없는 게 운명이다. 그만큼 고민도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에 쓰려하는 글은 또한 나의 블로그에 이미 올린 ‘약속1,2’에서 따져 본 주제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그 연장이라 보아도 좋겠다. 인생을 살아갈 적에 답이 둘이어서 답답할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에 어떻게 하는가? 세상 사람들이야 점괘도 보고 사주관상도 보고 각종 운명서적도 뒤적이면서 용하다는 사람 다 찾아가면서 별별 짓 다해 보겠지만 우리 크리스천은 어떻게 하는가? 성경에 정작 답이 있음에도 얼마나 많은 세월을 죽여가면서 허둥대고 있는가? 칡과 등나무가 서로 엇갈려 꼬인 것처럼 내 인생은 더욱 더 꼬여만 가는가?

 

 

 나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인 지난 12월 30일 주일 아침, 예배에서 불현듯 이 사실을 깨달았다. 15분 정도 먼저, 교회 예배실에 도착하여 ‘나의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아들이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하고 묵상기도를 하고 ‘내가 여호와의 계시는 집과 여호와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라는 시편의 다윗의 시를 읊조리면서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날 예배의 주제는 역대상(29:10-19)절을 중심으로 다윗의 삶을 최종 결산하는 ‘비전의 삶과 믿음과 감사의 삶’이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중에 너무나 또렷하게 성령의 감동이 나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나의 입에서 나온 세 마디의 말, ‘이렇게 쉬울 줄이야’

 

 

 예배를 드리고 교회 문을 나서는 나의 발걸음은 새털같이 가벼웠다. 이 비밀을 먼저 나의 자녀들에게 알려 주어야지 하면서 집으로 달려온 나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을 나와 내 자녀만이 아니라 믿음의 동역자들과 나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크리스천 독자님들과 함께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 동안 인생의 난제(難題) 앞에서 얼마나 좌절하고 절망해 왔는가? 그리고 혼자 가슴앓이 하면서 날밤을 지새운 날이 그 얼마이던가? 명색이 집사요 장로며 몇십 년 믿었다는 경륜은 있지만 그것들이 정작 문제의 해답이 되었던가? 못 되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성경 창세기 18장 10절 이하에는 한 여자가 등장하는데 이름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사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는 약속을 하신다. 그때 사라가 장막 문에서 듣고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엿고 내 주인도 늙었거늘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이때 하나님이 사라에게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하시니

 

 

 성경 누가복음 1장 11절 이하에는 또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한 여자는 마리아요 한 남자는 제사장 사가랴이다. 아느 날 하나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하시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가랴는 그가 자기 아들의 태어남을 볼 때까지 벙어리가 되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이 일이 이루리라’

 

 

 한편 사가랴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가 육개월 후에 마리아에게 나타나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연이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니 마리아가 대답하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하매

 

 

 창세기의 사라와 누가복음의 마리아와 사가랴의 기록을 통하여 살펴볼 때 인생의 난제들에 대한 모든 해답이 바로 성경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다. 사라와 마리아에게 공통적으로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라는 질문이다. 그러면 지금 나에게 요구되는 믿음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다’ 라는 믿음이다. 바로 창세기 1장 1절의 믿음이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다. 창세기 21장 1절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기록이 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쎄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여기에서 ‘말씀대로’ 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거듭 나온다. 그렇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민수기 23장 19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라기 이후 400년 간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지만 때가 되니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 땅에 구주로 오셨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되 온전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했다.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물으시는 그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의 얄팍한 지식을 믿었고 돈을 믿거나 철밥통을 믿어왔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이외는 다 가 버린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나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뢰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라고 말씀하셨으니 나의 길을 하나님께 맡긴다. 그리하면 말씀대로 일은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이루신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다. 그러니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신다. 말씀대로, 말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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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서운 한파가 살 속으로 파고들어 온 몸이 저려온다. 하필이면 이때에 어금니를 뺄 게 뭐람, “선생님, 무조건 빼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안 되겠는데요.” 제자의 말을 입 속으로 반추하면서 나는 을지로 입구, 지하철 게이트로 터덜터덜 내려온다. 이쯤 되면 나도 이제 영락없는 영감인가? 머지않아 고희를 바라보는 나를 아내는 그래도 만년 청춘이란다. 그래, 나에게도 청춘은 있었지, 나에게 펭귄이란 닉네임을 붙여 준 제자들 덕분에 나는 남극의 신사처럼 올곧고 멋지게 청춘을 보낸 적이 있었지.

 

 

 그 펭귄에게도 어김없이 겨울은 찾아오고 또 한 해가 저물려 하고 있다. 온 세상을 용광로같이 달구던 여름의 태양은 어디로 숨어 버렸는가? 베란다의 아침 햇살은 어찌 그리 인색한지 두 손을 내밀고 맞으려면 어느 새 숨어 버린다. 내가 사는 아파트의 베란다 절반도 찾아 주지 않는다. 동향 아파트는 그래서 서럽다. 그러나 어찌하랴, 절반의 은택에도 감사할밖에. 쪽방 촌에 사는 독거노인이 얼마며 이 겨울에 동사하는 노숙자가 얼마인가.

 

  

 12월의 세상은 온통 선거물결로 쓰나미다. 공영방송뿐 아니라 지상파 방송은 모두 선거로 도배를 했다. 무슨 세상에 애국자는 그렇게 많은지, 말말이 애국이요 나라 살리는 비책이란다. 그러나 대부분은 구라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임을 국민은 안다. 그런데 정작 정치인은 모른다. 이게 바로 역설(逆說)이다. 기막힌 역설!

 

 

 광화문 광장은 시차를 두고 진분홍, 연녹색 머플러의 물결로 넘쳐난다. 왕의 남자들, 천하의 말꾼들은 다 모였다. 군중 뒤에 점잖이 않으신 세종대왕이 빙긋이 웃고 있다. “말꾼들아, 너희가 어린 백성의 마음을 아는가?” 세종대왕이 대갈일성을 하실 것 같다. 바로 앞 시청광장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구세군 자선냄비가 들어섰다. 어느 독지가가 일억을 기부하였다 하여 장안의 화제다. 기부자에 정치가는 없는 것 같다.

 

 

 오늘은 펭귄이 서울도서관으로 출근한다. 며칠 전에 도서관 회원증을 발급받았다. 나도 이제 당당한 서울시민이다. 왜냐하면 서울시민이 아니면 회원증을 발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산지도 벌써 삼 년이 넘었다. 그러나 언제나 이방인 같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다르다. 인구 천만의 서울시민 중의 한 사람이다. 옛 서울시청 청사가 도서관으로 개조되었다. 내부시설을 완전히 개조해서 서울시민을 위한 지식의 산실로 만든 서울시에 정말 감사한다. 국제 열람실을 비롯하여 열람실에는 주니어뿐 아니라 시니어를 배려하여 연령에 관계없이 서로 간 대화가 가능한 공간을 마련하여 단절을 넘어 소통을 도모한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어 너무나 좋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세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도서관으로 출근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도서관은 신대륙에 도전하는 젊은이의 타이타닉이다. 도서관에는 열람할 책도 많고 검색할 정보도 많다. 나는 도서관에서 나의 무료함을 떨쳐 버린다. 책들을 열람하고 책표지의 신선한 유혹에 흠뻑 취하다 보면 나는 어느 새 젊은이가 된다. 생물학적 젊은이가 아니라 생각의 젊은이로 거듭난다. 지금 우리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처럼 더 높이, 더 멀리 날개를 쳐야 한다. 그리하여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함께 울고 함께 웃어 주어야 한다. 공감과 소통을 위하여.

 

 

 서울 도서관 오른쪽 건너편에는 덕수궁이 눌러앉아 있고 궁을 안고 도는 돌담길을 돌아 조금 올라가면 서울시립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는 천경자홀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관람료는 기획전시를 제외하고는 무료이므로 부담이 없다. 서울에서 사는 쏠쏠한 재미는 미술품을 많이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림을 볼 때마다 화가가 그 시대의 아픔을 체화(體化:몸으로 느끼면서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작업)한 모습을 보기에 다른 어떤 예술보다 좋아한다. 서울의 변천사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서울사진전도 기획전으로 전시되어 있어 이 또한 분외의 복이다. 개화기 서울의 모습으로부터 현재의 서울의 모습까지를 천개천 천변풍경을 비롯하여 서울의 중심거리의 변천사를 아울러 볼 수 있어 좋다. 이 사진전을 보고 있노라면 서울이 정말 인고와 환희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속에서 나는 나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갑자기 며칠 전에 본 TV의 어느 연예프로가 생각난다. MC가 예닐곱의 남녀 대담자들을 상대로 이혼을 주제로 대담을 벌이고 있었다. 이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한 갑론을박으로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MC가 뜬금없이 대담자들 가운데 앉은 한 원로 여성 연예인에게 주제와는 상관없는 질문을 했다. “OO 선배님, 남녀 간에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이때 이분, 대뜸 동문서답 같기도 하고 질문자에게 무안을 주는 것 같기도 한 말 한 마디를 내뱉는데 그 표정이 정말 너무나 진지해서 TV를 보는 나에게는 너무나 아픔으로 다가왔다. “사랑은 무슨? 빌어먹을, 다 주는 거야. 받으려면 상처만 남아.” 이 말 속에 담긴 뜻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나의 아내와 만나고 사십여 년만에야 알았다.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로 오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가난한 자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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