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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1.04 꽃보다 가족
  2. 2015.06.02 적과의 동침 1

꽃보다 가족

작은 행복 2017. 1. 4. 13:19 |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라 안의 산적한 문제들로 마음이 심히 심란해 소파에 앉아 있지 못하고 거실을 서성이는 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 올해 나 다 쓰지 않은 휴가가 엿새 남았어. 연말연시, 공휴일까지 포함하면 열흘이야, 우리 어디 가자” 하는 전화였다. “그래, 한번 생각해 보자” 그러고 끝이었다. 또 며칠 후 “아빠, 나에게 마일리지가 남았거든, 올해 안에 꼭 써야 해, 안 그러면 소멸해 버리거든, 그러니 꼭 가자. 우리 어디 갈까? 아빠가 늘 유럽 한번 가고 싶다 했잖아, 파리 어때? 좀 생각해 봐” 또 일방적 제안 후에 끝이었다. 가끔 엉뚱한 데가 있지만 나에겐 가장 소중한 둘째 딸의 제안에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는데 경비도 문제지만 나머지 자녀들이 켕겼다. 가족! 가족이 무언가?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전우가 아닌가? 그렇다면 기쁨도 슬픔도 함께해야 하는 게 가족이 아닌가?

 


 “아빠, 생각해 봤어? 지금은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이라 파리는 너무 혼잡할 것 같아, 소매치기 당할 위험도 있고, ‘꽃보다 할배’로 소문난 스페인 가자, 경비는 걱정 마, 내가 다 알아 할 테니까” 언제나 일을 저지르고 나면 그 뒷감당은 책임지는 멋진 딸애 덕분에 우리 가족의 스페인 자유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2월 22일 밤 8시30분, 인천 국제공항으로 나온 우리 일행은 나, 아내, 둘째딸, 그리고 부산의 큰손자 이렇게 네 명이었다. 나머지 가족들은 생계 때문에 함께하지 못했다. 큰손자는 이제 중학교 2학년인데도 체격이 우람하여 가끔 고등학생으로 취급 받기도 할 정도로 키가 크다. 그보다 더 대견한 것은 이 아이의 몸에 밴 국제 감각이다. 공항에서의 수속과 세련된 일처리나 매너는 수준급이다. 아마 어릴 때부터 몇 번 아빠, 엄마를 따라 바깥세계로 나가 본 경험의 소산이 아닌가 한다. 젊은이에게 글로벌 감각을 익혀 주는 가장 빠른 길은 국제공항을 밟게 하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밤 0시 50분발 카타르 항공편으로 인천공항을 이륙한 우리는 8시간의 비행 후에 사우디 아라비아 반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중간 기착지인 도하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도하공항은 환승을 주로 하는 허브공항이라 수많은 승객이 여기를 거친다. 유럽이나 아프리카를 가려면 여기를 대부분 거친다. 우리 일행은 여기서 아홉 시간을 머문 후에 다시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다. 여덟 시간의 비행으로 노독이 심했지만 그래도 감사한 게 딸애의 세심한 배려로 나와 아내는 비즈니스석을 타고 왔기 때문이다. 나에겐 여러 번의 비행경험이 있지만 비즈니스석은 워낙 비쌌기에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과분한 호강을 하게 되다니.



 도하공항은 여느 공항과는 조금 달랐다. 오가는 대부분의 승객이 아랍인이다. 꼭 아랍 복색 전시장에 와 있는 기분이다. 남자들은 제각기 자기 나라의 복색을 입고 있다. 바지 위에 반쯤 오는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테 없는 둥글고 붉은 모자를 쓴 남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남자는 몸 전체를 눈부신 흰색 천으로 통옷을 만들어 입고 머리 역시 눈부신 흰색 천의 두건을 두르고 이마 위쪽으로는 둥근 타반을 둘렀다. 아랍 특유의 구리수염에 짙은 눈썹, 오똑한 콧날, 알맞은 키에 정말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따로 없다. 상당히 귀족적으로 보인다. 여인들 중에는 머리에만 히잡을 쓴 이도 있지만 머리부터 전신을 새까만 통치마로 장식한 여인들도 있다. 얼핏 보아도 상당히 부유층에 속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블랙골드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갑자기 내 나라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냉혹한 국제 파고에 휩쓸리면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던가!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내 나라를 생각하면서 나의 두 눈에선 이슬이 맺힌다. 이모 옆에 앉아서 스마트폰 게임에 열심인 손자를 보며 우리의 후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세계 속에 당당하고 행복해야 할 텐데…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다.



 다시 바르셀로나로, 인천 공항에서와는 달리 탑승객 중에 한국인은 거의 없다. 이제 열 시간을 더 비행하여야 한다. 노독이 쌓여오지만 마음을 즐겁게 먹으려 한다.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어떤 경우든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모두 합쳐 열여덟 시간의 비행거리를 여행할 수 있다는 게 내 나이에 쉽기나 한 일인가? 평생을 집 안팎만 맴돌다 끝내는 인생이 얼만데 이렇게 지구의 반대편까지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선택받은 축복인가, 감사할 뿐이다. 비행기는 예정대로 이튿날 새벽 두 시, 바르셀로나공항에 안착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주소를 건넸다. 고맙게도 주소대로 사십여 분 만에 정확히 집 앞에 우리를 인도한다. 흔히 듣는 바가지요금도 없다. 고맙기 그지없다. 숙소는 한국에서 미리 예약했기에 주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부부 같은데 얼마나 친절한지 꼭 이웃사촌을 만난 기분이다. 간단한 가이드를 받고 우리는 짐을 풀었다.



 아침에 일어나 한국에서 가져온 햇반, 포장 김치, 김 등으로 식사를 하고 본격적으로 시내 투어를 나가기로 했다. 여기는 지하철이 잘 되어 있어 시내 어디든 갈 수 있다. 바르셀로나는 건축계의 거장 가우디와 미술계의 거장 피카소와 미로를 배출한 도시다. 자연히 우리 일행은 미술관을 먼저 돌아보기로 했다. 우리가 찾은 미로 미술관은 바르셀로나 시가지 한 가운데 있는 축구장 스무 개 정도의 펑퍼짐한 언덕 한쪽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미술관은 미로의 풍부한 작품들로 잘 전시되어 있다. 시대 순으로 전시되어 있어 그의 작품세계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언덕에는 또한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황영조 선수가 바로 여기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곳으로 유명하다. 메인스타디움을 돌아보며 저 멀리에서 언덕배기로 숨을 헐떡이며 달려 들어오는 황영조 선수를 본다. 장하다. 여기 지구의 반대편에 한국의 혼을 심어 두어 지금 이곳을 찾는 우리를 감동시키다니. 메인스타디움 관광을 마치고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도로를 따라 아래로 십여 분 내려오니 멀리 지중해의 검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더없이 푸른 바다는 에메랄드빛 그대로다. 부둣가 선착장에는 크루즈선 한 척이 정박해 있다. 정말 평화롭고 낭만적이다. 우리 일행은 전망대 카페에서 멀리 지중해를 바라보며 따끈한 한 잔의 커피로 객창감을 달랜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그러기에 중세의 건물들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은 가톨릭 대성전이다. 대성전은 규모에 있어서도 압도적이지만 그 정교함이 천하일품이다. 대리석 기둥과 웅장한 정문, 하늘로 치솟은 첨탑과 십자가, 수많은 인물과 동물의 조각으로 건물 자체가 온통 거대한 조형물이다. 인간이 정말 만든 것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의안이 벙벙하다. 우리가 방문한 날이 마침 성탄절이었기에 미사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나는 미사 중의 신도들 사이로 조용히 비집고 들어가 대성전 중앙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돔으로 된 둥근 천장 벽면에는 각종 인물과 천사로 양각된 조각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 열두 사도나 속사도 내지 수도사들의 얼굴이 아니겠나 생각되어진다. 대사원의 중앙 홀을 둘러 양옆으로는 다시 통로를 만들고 외벽을 쌓고 낭실을 수없이 만들어 각기 낭실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도사들을 조각하여 입상을 세우고 촛불을 켜 두어 신도들로 참배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었다. 섬기는 자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는 없었다. 시내 중심가에 산재되어 있는 가우디에 의해 창조된 건물들을 찾아 그 조형미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도 바르셀로나 여행의 묘미가 아닐 수 없다.



 바르셀로나의 바닷가에는 한 손에는 세계지도를 쥐고 멀리 대서양을 응시하는 콜럼버스의 동상이 높이 서 있다. 이곳은 관광객으로 일 년 연중 붐비는 곳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콜럼버스를 바라본다. 에스파냐(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을 받아 1492년에 마침내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앞선자의 선견(先見)을 부러워하며 그 용기, 그 결단을 나와 나의 후손들도 가져 주기를 소망한다.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날, 시내 중심가에 있는 현대미술관과 피카소 미술관을 관람하였다. 바르셀로나는 피카소가 초기에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다. 그래서 1915년부터 약 삼 년간 활동한 작품을 중심으로 동시대 다른 작가의 작품들도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관람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그야말로 피카소가 이 도시를 먹여 살리는 게 아닌가 착각하게 만들 정도다. 고풍스런 도시, 역사가 멈추어 버린 도시인 것 같지만 사람들은 한 시대를 만든 사람을 보러 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유산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는 마드리드다. 바르셀로나 여행을 마치고 오후 3시경 우리 일행은 상트역으로 향했다. 마드리드행 고속열차를 타기 위해서다. 두 도시는 사백 오십여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 랑페로 두 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프랑스에 떼제베가 있다면 스페인에는 랑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차에 올라보니 놀람 그 차체다. 우리의 KTX와는 비교가 안 된다. 좌석 간의 간격도 넓고 시트도 너무나 고급스럽고 안락하다. 정말 사람을 배려함이 여실이 묻어난다. 마드리드에서의 숙소는 더 고급스럽다. 주인 청년의 친절함과 준비된 배려가 신뢰를 자아낸다.



 마드리드 여행의 시작은 소울광장이다. 시내 어디서든 메트로를 통하여 이 광장에 나올 수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아홉 거리가 팔방으로 뻗어있고 무수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광장 중앙에는 시티투어 판매소가 있어 이곳에서 여러 방면의 시티투어를 이용할 수 있다. 마드리드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건축물들의 조형미를 감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투어버스를 이용하여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시내 중심가를 관통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이층버스의 맨 앞좌석에 앉으니 시야가 탁 틔여 한 눈에 시내 전경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대부분의 고층 건물들은 대리석으로 지어졌고 전면에는 여러 모양의 조각상들이 새겨져 있어 예술미가 극치를 이룬다. 개중에 어떤 건물은 중세기 건물이 아닐까 생각되어질 정도로 고색 찬란하기까지 하다. 또한 우리는 이들의 일상적 삶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유럽은 시내 중심가에 레스토랑이 많다. 레스토랑마다 메뉴판을 밖에 비치해 두기 때문에 관광객에겐 굉장히 편리하다. 메뉴와 가격을 알기에 주머니 사정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고 바가지요금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 좋다. 일 년 연중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곳에선 이 또한 관광객을 배려하는 섬세한 마케팅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이런 지혜를 좀 가지고 있었으면 한다. 없으면 배우든지, 비꼬지만 말고.



 거리의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노천카페, 겨울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 노천카페는 개업 성황 중이다. 나 홀로족을 찾아보기 힘들다. 쌍쌍이 아니면 가족끼리, 친구끼리, 그야말로 끼리끼리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왁자지껄 요란스럽다. 노천카페에 앉아 있는 우리 부부에게 지나가는 연인들이 다정한 눈인사를 선물한다. 옆에서 가만히 들어보면 연신 말을 입 속에서 굴린다. “여보, 당신은 저렇게 굴리겠어?” 옆의 아내에게 뚱딴지 같은 질문을 하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싱긋 웃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정작 대화가 있는가?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남남끼리 만나 무슨 할 말이 있나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남남끼리 만났으니 더더욱 대화가 필요하다. 모든 것이 다르기에 다름을 틀림으로 치부하여 배척하기 전에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를 넘어 담소의 단계로 더 나아가 연인같이 정담을 주고받으며 일생을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와 아내가 시내 중심가 이층 건물에 위치한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씩을 시켜놓고 거리로 오가는 군중들을 살핀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달리 중년 부부가 많다. 모두들 거리를 오가며 팔짱을 끼고 다정히 걷는다. 거리고 연신 혀를 굴린다. 무슨 말이 저리 많은지? 그러나 말이 많은 만큼 행복하다. 늙어서 말이 없는 부부만큼 살맛 없는 부부가 있을까? 늙어서도 몸매를 가꾸는 아내, 늙어서도 매력 있는 남자로 여전히 배려하는 남편,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이것을 확인하고 간다. 메트로역 한쪽 코너와 광장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거리의 악사들, 그들의 그 진지함과 아름다운 선율이 나의 심금을 울린다. 고맙고 감사하다. 다시 한번 찾고 싶다. 마드리드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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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동침

작은 행복 2015. 6. 2. 00:32 |

 요사이 아내는 나에게 심심찮게 묻는다. “여보, 요사이는 글 안 쓰세요?” 그러고 보니 글 안 쓴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난 것 같다. 작년의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내 블로그에 글을 올린 이후 아예 쓴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요사이 글을 쓴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나의 글이 바람에 흩날려 다니는 하찮은 휴지조각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문득 글을 쓰고 싶어졌다. 꼭 이 말만은 하고 싶어졌기에.



 어제 아내를 따라 의정부시에 있는 코스트코에 갔다. 쇼핑을 하고 내가 즐겨 사 먹는 쇠고기베이크도 하나 사서 즐겁게 이층 주차장으로 올라와서 쇼핑백을 내 차에 싣고 있는데 옆에서 한 중년 신사 한 분이 쇼핑백 몇 개를 차 뒤트렁크에 싣고 있다. 참 인상이 좋다. 수수한 아웃도어 차림에 흰색 러닝화를 신었다. 전형적인 가장상이다. 그런데 차가 에쿠스450이다. 이때부터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저쯤 되면 돈으로는 대한민국 1%다. 영국에서는 돈 많은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는데 한국에서는 왜 그렇지만은 않은가? 부자를 적으로 간주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사다리가 없어져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가 1960년대부터 삼사십년 동안은 희망의 시대였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였다. 가난의 대물림을 나의 시대에 와서 끊어 버릴 수 있었다. 실력 하나로 대기업의 임원도 되고 창업해서 대기업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조선사회로 회귀해 버렸다고 탄식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부와 지식의 대물림이 고착화하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그래서 더러는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해 버리고 스스로를 삼포세대라 부른다.



 나는 사회학자도 아니고 경제학자도 아니다. 한국이 이렇게 되어버린 원인을 분석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할 능력도 없다. 다만 사랑하는 아들과 딸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손자를 거느린 할아버지로서 이 나라가 지구상에 존속해야 한다는 당위성 앞에 서 있기에 나뿐만 아니라 오천만 국민은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일 때문이다. 내 나라는 나와 나의 후손이 두 발을 엉버티고 살아가야 할 땅이다. 그러기에 한 가지 미덕(美德)만 가져 달라는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바로 한 단계씩만 낮춰 달라고 주문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 묻고 싶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고. 만약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을 정확히 안다면 세상의 절반을 얻었다 할 수 있다 하겠다. 왜냐하면 세상을 다 얻었다 하더라도 그 정답을 모르면 최소한 얻은 것의 절반 이상을 도로 잃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어릴 때 호랑이가 제일 무서운 줄 알고 자랐다. 밤잠을 안 자는 아이에게 ‘호랑이 온다’ 하면 울던 울음을 뚝 그쳤으니까. 내가 어릴 때 나의 어머니는 당신의 무릎 위에 나를 눕히고 수수께끼 하나를 하셨는데, “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 쩍 벌린 게 뭐게?” 한다. 답을 몰라 동그란 눈망울만 굴리면서 엄마의 입만 바라보는 아들에게 엄마는 “아궁이” 한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 말 속에 무궁무진한 진리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릴 적에는 우리나라의 온 산이 민둥산이었다. 한국 전쟁으로 황폐화된 산에 그나마 남은 나무는 먹고살기 힘든 백성들의 땔감으로 마구잡이로 베어져 버렸기에 산에는 나무 한 그루가 없었다. 그러니 이 산 저 산 다 잡아먹은 것은 아궁이가 맞았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 그것은 바로 탐욕이다. 성경은 밝히 말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라고 하였고 또한 “욕심(탐욕)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죽음)을 낳느니라” 하였으니 이보다 더 명쾌한 정답이 어디 있는가. 탐욕은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 탐욕은 블랙홀이다. 가족, 체면, 윤리 도덕, 이런 것들이 탐욕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세상의 그 무엇도 탐욕의 질주를 막을 수 없다. 탐욕은 과도한 욕심이다. 물론 알맞은 욕심은 개인이나 사회를 성장하게 한다. 우리가 바라는 발전적 욕구,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지구는 새로운 희망적 욕구로 진보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그 희망적 욕구가 한 사람이나 몇몇 특수집단의 이익으로 변질될 때 무서운 탐욕으로 바뀐다. 아내나 자식보다 돈이 좋게 보일 때 경고신호, 아내나 자식보다 돈을 선택할 때 범죄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경고신호를 의식하지 않거나 아예 무시해 버리기 일쑤다. 돈의 힘에 끊임없이 찬탄을 보내면서 다른 모든 것은 하찮게 보기 시작한다. 이 단계가 돈에 중독된 중증단계, 이쯤 되면 갈 데까지 다 간 단계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면 돈을 섬긴다고 성경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16:13) 탐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돈보다 사랑하는 자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탐욕과 싸우는 훈련을 해야 한다, 최소한 한 단계 낮추는 훈련만이라도. 에쿠스를 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제네시스를 탄다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일까? 자기가 가진 능력을 다 누리지 않고 이웃을 위하여 한 몫만 남겨 둔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자기 밭에서 곡식단을 거두는 농부는 밭에 떨어진 이삭을 다시 줍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 나무의 과일을 따고 다시 돌아보아 따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 가난한 자, 나그네를 위하여 한 몫을 남겨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나의 욕심을 꺾는 연습은 한 단계 낮추는 훈련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가족과 함께 시민공원에 바람 쐬러 나가보면 행객들이 여기저기 마구 버린 휴지더미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때 한 단계 훈련을 나부터 실행할 일이다. 내가 안 버리기 훈련은 첫 단계요 버려진 휴지를 줍는 것은 두 번째 단계가 아닐까? 행복은 먼데 있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바깥으로 나와 보니 아파트단지 사이의 보드블록에 씹다버린 껌들이 흉물스럽게 덕지덕지 눌러붙어 있었다. 나는 걸음을 돌려 집으로 올라가 껌 제거용 주걱칼을 찾기 시작했다. 퇴직하며 갖고 나온 소중한 보물이다. 그날 나는 껌 제거에 한나절을 보냈다. 그날 나는 참으로 행복했다.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날까지 타락한 인간은 탐욕이라는 적과의 동침을 피할 수 없다.그러나 그 탐욕이라는 적을 다스리며 살아야 한다,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러면 행복한 날이 올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탐욕과 싸워 이겼다는 보람은 탐욕을 제어하고 남을 위해 한 몫을 남겨 본 사람만이 아는 즐거움이다. 얼마 전에 신문 기사에 난 화제 한 토막, 우리나라 대기업 총수 중에 어떤 한 분은 아직 개인 승용차로 카니발을 탄다고 하는 기사였다. 그것도 십여 년째 동일한 그 차란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개인재산이 최소 몇 천억일 터인데. 만약 나라면 가능한 일일까 생각할 때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만약 내가 수백억의 재산가가 된다면 현재와 무엇이 달라질까? 차부터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어’를 오늘도 되뇌어본다.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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