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침

작은 행복 2015. 6. 2. 00:32 |

 요사이 아내는 나에게 심심찮게 묻는다. “여보, 요사이는 글 안 쓰세요?” 그러고 보니 글 안 쓴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난 것 같다. 작년의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내 블로그에 글을 올린 이후 아예 쓴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요사이 글을 쓴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나의 글이 바람에 흩날려 다니는 하찮은 휴지조각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나는 문득 글을 쓰고 싶어졌다. 꼭 이 말만은 하고 싶어졌기에.



 어제 아내를 따라 의정부시에 있는 코스트코에 갔다. 쇼핑을 하고 내가 즐겨 사 먹는 쇠고기베이크도 하나 사서 즐겁게 이층 주차장으로 올라와서 쇼핑백을 내 차에 싣고 있는데 옆에서 한 중년 신사 한 분이 쇼핑백 몇 개를 차 뒤트렁크에 싣고 있다. 참 인상이 좋다. 수수한 아웃도어 차림에 흰색 러닝화를 신었다. 전형적인 가장상이다. 그런데 차가 에쿠스450이다. 이때부터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저쯤 되면 돈으로는 대한민국 1%다. 영국에서는 돈 많은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는데 한국에서는 왜 그렇지만은 않은가? 부자를 적으로 간주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사다리가 없어져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가 1960년대부터 삼사십년 동안은 희망의 시대였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였다. 가난의 대물림을 나의 시대에 와서 끊어 버릴 수 있었다. 실력 하나로 대기업의 임원도 되고 창업해서 대기업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조선사회로 회귀해 버렸다고 탄식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부와 지식의 대물림이 고착화하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그래서 더러는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해 버리고 스스로를 삼포세대라 부른다.



 나는 사회학자도 아니고 경제학자도 아니다. 한국이 이렇게 되어버린 원인을 분석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할 능력도 없다. 다만 사랑하는 아들과 딸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손자를 거느린 할아버지로서 이 나라가 지구상에 존속해야 한다는 당위성 앞에 서 있기에 나뿐만 아니라 오천만 국민은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일 때문이다. 내 나라는 나와 나의 후손이 두 발을 엉버티고 살아가야 할 땅이다. 그러기에 한 가지 미덕(美德)만 가져 달라는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바로 한 단계씩만 낮춰 달라고 주문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 묻고 싶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고. 만약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을 정확히 안다면 세상의 절반을 얻었다 할 수 있다 하겠다. 왜냐하면 세상을 다 얻었다 하더라도 그 정답을 모르면 최소한 얻은 것의 절반 이상을 도로 잃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어릴 때 호랑이가 제일 무서운 줄 알고 자랐다. 밤잠을 안 자는 아이에게 ‘호랑이 온다’ 하면 울던 울음을 뚝 그쳤으니까. 내가 어릴 때 나의 어머니는 당신의 무릎 위에 나를 눕히고 수수께끼 하나를 하셨는데, “이 산 저 산 다 잡아먹고 아가리 쩍 벌린 게 뭐게?” 한다. 답을 몰라 동그란 눈망울만 굴리면서 엄마의 입만 바라보는 아들에게 엄마는 “아궁이” 한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 말 속에 무궁무진한 진리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릴 적에는 우리나라의 온 산이 민둥산이었다. 한국 전쟁으로 황폐화된 산에 그나마 남은 나무는 먹고살기 힘든 백성들의 땔감으로 마구잡이로 베어져 버렸기에 산에는 나무 한 그루가 없었다. 그러니 이 산 저 산 다 잡아먹은 것은 아궁이가 맞았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 그것은 바로 탐욕이다. 성경은 밝히 말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라고 하였고 또한 “욕심(탐욕)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죽음)을 낳느니라” 하였으니 이보다 더 명쾌한 정답이 어디 있는가. 탐욕은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 탐욕은 블랙홀이다. 가족, 체면, 윤리 도덕, 이런 것들이 탐욕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세상의 그 무엇도 탐욕의 질주를 막을 수 없다. 탐욕은 과도한 욕심이다. 물론 알맞은 욕심은 개인이나 사회를 성장하게 한다. 우리가 바라는 발전적 욕구,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지구는 새로운 희망적 욕구로 진보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그 희망적 욕구가 한 사람이나 몇몇 특수집단의 이익으로 변질될 때 무서운 탐욕으로 바뀐다. 아내나 자식보다 돈이 좋게 보일 때 경고신호, 아내나 자식보다 돈을 선택할 때 범죄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경고신호를 의식하지 않거나 아예 무시해 버리기 일쑤다. 돈의 힘에 끊임없이 찬탄을 보내면서 다른 모든 것은 하찮게 보기 시작한다. 이 단계가 돈에 중독된 중증단계, 이쯤 되면 갈 데까지 다 간 단계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면 돈을 섬긴다고 성경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16:13) 탐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돈보다 사랑하는 자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탐욕과 싸우는 훈련을 해야 한다, 최소한 한 단계 낮추는 훈련만이라도. 에쿠스를 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제네시스를 탄다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일까? 자기가 가진 능력을 다 누리지 않고 이웃을 위하여 한 몫만 남겨 둔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자기 밭에서 곡식단을 거두는 농부는 밭에 떨어진 이삭을 다시 줍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 나무의 과일을 따고 다시 돌아보아 따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 가난한 자, 나그네를 위하여 한 몫을 남겨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나의 욕심을 꺾는 연습은 한 단계 낮추는 훈련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가족과 함께 시민공원에 바람 쐬러 나가보면 행객들이 여기저기 마구 버린 휴지더미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때 한 단계 훈련을 나부터 실행할 일이다. 내가 안 버리기 훈련은 첫 단계요 버려진 휴지를 줍는 것은 두 번째 단계가 아닐까? 행복은 먼데 있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바깥으로 나와 보니 아파트단지 사이의 보드블록에 씹다버린 껌들이 흉물스럽게 덕지덕지 눌러붙어 있었다. 나는 걸음을 돌려 집으로 올라가 껌 제거용 주걱칼을 찾기 시작했다. 퇴직하며 갖고 나온 소중한 보물이다. 그날 나는 껌 제거에 한나절을 보냈다. 그날 나는 참으로 행복했다.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날까지 타락한 인간은 탐욕이라는 적과의 동침을 피할 수 없다.그러나 그 탐욕이라는 적을 다스리며 살아야 한다,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러면 행복한 날이 올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탐욕과 싸워 이겼다는 보람은 탐욕을 제어하고 남을 위해 한 몫을 남겨 본 사람만이 아는 즐거움이다. 얼마 전에 신문 기사에 난 화제 한 토막, 우리나라 대기업 총수 중에 어떤 한 분은 아직 개인 승용차로 카니발을 탄다고 하는 기사였다. 그것도 십여 년째 동일한 그 차란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개인재산이 최소 몇 천억일 터인데. 만약 나라면 가능한 일일까 생각할 때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만약 내가 수백억의 재산가가 된다면 현재와 무엇이 달라질까? 차부터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어’를 오늘도 되뇌어본다.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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