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2
지구 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해수온도가 상승하자 북극권의 대기온도가 올라갔다는군요. 그게 뭐 대수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숩니다. 왜 그러냐구요? 봄이 오지 않습니다. 예년 같으면 벌써 봄꽃이 지고 신록을 준비해야 할 때인데도 4월의 중순도 훨씬 지난 지금에야 겨우 벚꽃을 서울에서 보게 되네요. 왠 줄 아십니까? 북극권이 더워져 찬 공기를 북극권이붙잡아 두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쟎아요.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러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타고, 더 많이 움켜쥐고픈 나의 욕심이 지구로 발광(發狂)나게 하는 것입니다. 열대우림이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한다는군요. 얼마 전 영상으로 세계의 3대 폭포를 보았습니다. 그 중에 둘은 열대우림 한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세 개 나라와 경계를 하고 있는 남미의 이과수 폭포는 내가 가 본 나이아가라 폭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나를 압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장관도 얼마나 더 불 수 있을지 미지수랍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한 무분별한 벌채(伐採)는 열대우림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행복을 꿈꾸세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나에게 행복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면서 기대하십시오. 기대하는 자에게는 설렘이 있습니다. 설레며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서 베란다의 창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다가 맞은 편 산자락 위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일출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저층이라 불평했고, 동향이라 불평했던 나에게 아침 일출을 선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새삼 감사했습니다. 연한 새싹을 이제 막 내민 나뭇가지 사이로 솟아오른 새빨간 태양은 늦가을 감홍시보다도 더 붉었습니다. 이 어찌 동향의 저층에 사는 나만의 분복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가지는 알맞은 욕심이 잘못일까요? 아닙니다. 알맞은 욕심은 당연한 욕구(欲求)입니다. 그러기에 알맞은 욕심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선물을 감사하게 받는 것은 순리(順理)입니다. 순리를 지키지 않으면 유기체와 그 유기체가 속한 가정과 사회는 도태되고 마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고 최선의 지혜와 최선의 노력으로 수확을 얻으려 노력하는 행위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따르는 거룩한 행위인 것입니다. 생업(生業)은 성직(聖職)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탐심(貪心)입니까? 성경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탐심은 바로 죄를 낳는 욕심입니다. 인간 최초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내가 먼저의 글 ‘약속’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약속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이요 선언적인 것이라면 인간의 그것은 쌍방적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인간은 그가 지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인간에게 행복하게 살 권리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권세와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은 자기의 주권적 선언이신 약속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2장 16∼17절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선언적 약속을 인간에게 주셨을까요? 바로 인간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인간으로 하여금 확실히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첫째, 인간은 피조물(被造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해 아래서 새것은 없나니’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둘째. 인간은 흙이라는 것입니다. 그 코에서 영이 떠나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찾아온 거짓의 아비 사탄은 이브에게 무어라고 꾀고 있습니까? 창세기 3장 4∼5절을 보십시오.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말합니다. 이브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리고 창세기 3장 6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인간의 비극인 죽음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한 인간의 죽음이 여기에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바로 나의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죽음은 나를 죄와 심판과 지옥으로 끌어가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신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뿐 아니라 나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나도 죄와 사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좀 더 깊이 살펴볼까요? 이브는 왜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을까요?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탐심이 내면 깊숙이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탐심은 우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상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마음이 가 있는 그것이 우상입니다. 이브는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자기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탐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 자기 오만 바꾸어 말하면 자기가 곧 하나님이라는 망령된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비극입니다. 이 오만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을 불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필연 불순종으로 귀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얼마나 분명합니까.
탐심에 사로잡힌 자의 특징을 보십시오. 욕심이 자기를 삼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합니다. 돈에 미치면 돈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합니다. 명예, 지위, 여자,… 다 마찬가지입니다. 탐심에 사로잡힌 자는 오만합니다. 그것만 가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하는 미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얻기 위해 그것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돈을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영혼을 파는 것입니다. 영혼을 누구에게 팔까요? 사탄에게 파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와서는 지식이 우상이 된 자도 많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상대적 가치 그 이상은 결코 천착(穿鑿)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깊이 파고 들어가도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유(萬有) 속에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만유를 지으신 자시요 만유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더할수록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증명할 뿐입니다.
인간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탐심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의 주로 영접하는 길 이외에는 없습니다. 죄는 주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을 주인으로 삼아 사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한 피흘림만이 나의 모든 죄를 깨끗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요19:30)
나는 여기서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사적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을 낙원에서 쫓아내신 하나님이 다시 택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브라함입니다. 이를 성경은 밝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系譜)라”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가나안(지금의 팔레스타인)이 아닌 갈대아 우르(지금의 이락)에서 살았습니다. 아담의 아들 셋의 후손이지만 아버지는 우상을 만드는 자라는 기록으로 보아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부르셔서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명령하셨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순종하여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살펴보면 기복(起伏)이 많았지만 최종 결론을 내리면 믿음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됩니다.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을 때도,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을 때도 한결같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4:18) 하나님이 이를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오고 오는 세대에 경고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탐심의 대상이 되거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짧습니다. 참으로 순간이지요.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모든 것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갔는지를. 그러나 나에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다시 내가 시작해야 할 세상이 있습니다. 그 세상은 영원합니다. 그 영원한 세상에서의 행복한 보장을 성경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