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과정과 낭만

힛데겔 2011. 11. 24. 11:42

 굽이돌아 흐르는 낙동강 물 위로 낙조가 아름답다. 때 이른 겨울 철새들의 비상(飛翔)을 느긋하게 즐기며 포근한 시트 속에 피곤한 몸을 파묻고 모처럼의 객기(客氣)를 즐기는 나에게 아이들은 난리다. 아빠는 왜 KTX를 타지 않고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말이다.

 
제자들의 과분한 대접을 받으며 부산을 떠나 귀경길에 오른 내가 굳이 새마을을 고집한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이란 놈을 내가 좀 요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사야 빠르면 좋고, 많으면 좋은 게 아닌가. 그러나 왠지 이번 귀경길은 확 한번 뒤집어 보고 싶었다. 시간이란 놈의 목을 조여주고 싶었다. 시간이란 놈은 괴력을 가진 존재다. 자기 앞에 모든 것을 꿀리고야 만다. 재물, 지위, 명예, 미모 등등 어느 하나 시간을 이기는 절대 강자는 없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시간 앞에 비굴해진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새마을은 좋은 열차였다. 이것만 타면 어깨가 으쓱해지고 무언가 헛기침이 나오면서 갑자기 신분 상승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부끄럽다. 새마을 타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쉽사리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나는 내가 앉은 시트를 자세히 살펴본다. KTX와 비교해 보면 시트의 안락함도 그만 못하지 않고 시트 간 간격도 KTX보다 더욱 넉넉하여 오히려 편안하다. 다만 목적지에 도착시간이 배로 길어질 뿐이다. 그런데 묘하게 이 배(倍)의 시간이 나를 졸지에 2등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오늘 2등 인간으로 서울로 귀향한다. 차창 밖으로는 늦가을의 정취가 참으로 그림 같다. 시골 담장 밖으로 벋은 감나무 가지 끝에 발갛게 익은 감들이 아직도 대롱대롱 매달려 까치를 기다리고 곡식을 거둔 들녘에는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열치가 낙동강 철교를 건너고 있다. 정다운 쌍둥이 철교가 교각을 강물 위로 반쯤 드러내며 나란히 버티고 서 있다. 하나는 부산행이요 다른 하나는 마산행이다. 열차가 아마 삼랑진역으로 진입하려는 모양이다. 삼랑진역은 나에게 참으로 한(恨)이 서린 역이다. 이 역에서 부산과 마산으로 갈린다. 옛날에는 대구에서 마산을 가려면 삼랑진역에서 환승을 해야 했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청도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마산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나는 방학이면 청도 외가로 놀러가곤 했었다. 외가로 갈 때든 집으로 돌아올 때든 나는 반드시 삼람진역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삼랑진에서 마산가는 열차는 도대체 없는지… 아침에 내려와도 밤중, 오후에 내려와도 밤중에만 열차가 있었다. 그러니 청도에서 마산을 가려면 하루가 꼬박 걸리는 거리였다. 그렇게도 멀던지 마냥 역 대합실에서 기다리기만 하던 지난 어린 시절의 삼랑진역으로 나의 열차가 지금 진입하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열차 안을 한번 휘 둘러본다. 커튼을 열고 차창 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왜 사람들은 차창 밖을 내다보려 하지 않는가? 삶에 지쳐 모든 것이 귀찮아진 것인가? 아니면 바깥세상이 두려운 것인가?

 
인생의 삶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들 말한다. 과정적 삶과 결과적 삶이다. 많은 사람들은 결과적 삶을 택한다. 나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어릴 적 시절을 굉장히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러기에 가난은 나에게 반드시 퇴치해야 할 가장 잔인한 적이었다. 결혼한 이후 나는 꼭 십 년 동안 이 가난과 싸워왔다. 나는 결코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 후 오 년 만에 나는 동료가 부러워하는 ‘나의 집’을 가졌고 경제적 안정도 되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결과적 삶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무엇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띵해지면서 갑자기 자신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러다 다 잃어버리는 것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의 주위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돌이켜 보니 나는 나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주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의 아내, 나의 자녀들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데 나는 끊임없이 그들에게 생채기를 내면서도 이것을 몰랐다. 오직 결과만을 이루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너무 많이 나가 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깨어진 사발 맞추기식이었다. 후회막급이었다. 이미 아내는 나의 독화살에 상처를 입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독선과 아집, 자만과 고집으로 점철된 나의 괴팍한 삶은 전혀 아내에 대한 배려와 존경이 없었다. 사랑도 일방적이요 대화도 일방적이니 이건 뭐 소통이란 게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삭막한 모래언덕뿐이니 오아시스는커녕 샘물 하나 없었다. 나의 가정에 낭만(浪漫)은 어느 구석에도 없었다.

 
아! 나의 무지(無知)여, 이러고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는가? 내가 문학도라 할 수 있는가? 인생을 모르고야 어찌 문학을 논할 수 있는가? 결과만 추구하는 인생은 결국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시는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내가 이 말씀을 일찍 좀 알았다면 시행착오적 삶을 빨리 끝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앞선다. 하나님의 만드신 삼라만상에는 그 하나하나에 당신의 창조의 목적이 숨어 있다. 그러기에 그 어느 하나도 인간인 나에게 수단이 될 수 없다. 나의 이기적 수단으로 부려먹을 종이나 도구가 아니다. 심지어 풀 한 포기, 돌 하나도 나의 사악한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이용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일들을 찬양하는 것이기에 경이(驚異)의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보이는 모든 것과 들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걸작인데 어찌 우리가 경탄하고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정적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부합하는 삶이다. 과정적 삶은 과정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삶이다. 그러기에 한 순간 한 순 간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소중하고 나에게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깨닫다 보면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소중할 뿐이다. 가족이 소중하고 이웃이 소중하다. 따라서 나에게는 오늘이 소중하고 오늘에의 기대로 가슴이 부풀게 된다.

 
더글러스 태프트 전 코카콜라 회장은 2000년 신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테리며 오늘은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재를 선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 오늘이 없는 내일은 무의미할 뿐이다. 나는 오늘도 감사와 환희로 내 삶의 바구니를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