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진정 자살을 방지할 대안이 있는가
1. 현대사회의 병리현상
한국의 발전상은 가히 눈부실 정도다. 가난과 패배의식 속에서 절망의 날들을 지새우면서 나는 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해방둥이인 나로서는 조국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나는 나의 조국이 한없이 자랑스럽다. 나의 아들과 딸들은 이제 더 이상 패배의식에 젖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이 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많은 이방나라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어 강좌로 몰려드는 젊은이들을 보며 참으로 크나큰 격세지감을 갖는다. 우리는 이제 당당하다. 우리는 오랜 동안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바뀌었지 않는가.
그런데도 유독 이해할 수 없는 병리현상 중의 하나가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하루에 삼십오 명꼴로 죽는다. 그것도 젊은이가 대부분이다. 인터넷 사이트에는 자살 사이트가 횡행하고 젊은이의 자살을 미화하며 부추기는 글들이 버젓이 올라와 있음을 보게 된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시절인 60년대는 참으로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격동의 시기였다. 아마 젊은이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기에 참 어려웠던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나의 자취방에서 벗들과 함께 시대와 사회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주고받은 적이 많았지만 우리의 대화 속에서 자살을 소재나 주제로 다룬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내가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다.’ 하는 삶에 대한 치열(熾烈)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뭐 생명의 존엄성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때 그런 사치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몸으로 열심히 살면서 고민했을 뿐이다.
지금 우리는 풍요 속에서 빈곤의 갈등을 겪고 있다. 물질적 풍요, 문화적 풍요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적응(適應)과 안착(安着)을 갈구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이 사회에 연착륙(軟着陸)할 것인가는 개인에게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도 그것이 쉽지 않다는 데에 고민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의 속도 속에서 살고 있다. 내가 그 시간의 속도 속에서 나의 좌표를 찍기도 전에 시간은 아득히 멀리 달아나 버리고 만다. 그러기에 나는 그 시간 속에서 무력해지고 절망하게 된다.
근자에 우리는 신문 지상이나 방송 매체를 통하여 유명세를 타는 배우나 탤런트들이 자살하는 일들을 접하게 된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때마다 한국 기독교계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자살을 막을 것인가?
2. 자살을 방지할 수 있는 대안은 있는가
자살을 막아야 한다는 대안은 수 없이 많이 쏟아진다. 그런데도 효과가 별로 없다는 데에 고민이 있다. 자살을 방지하고자 하는 기독교적 대안 중에 가장 많이 제시되는 안이 바로 이것이다.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 하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은 이것이 성경적이라 보고 있으며 자살을 방지하는 최선의 길이라 보고 있다. 그러면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에 자살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곳은 없다. 성경에서 살인을 어떻게 보는가를 살펴보면서 자살에 관한 성경적 이해를 돕고자 한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 말씀하시면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니(마15:19)’ 라고 규정하셨다. 이는 죄가 곧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며 행위에 근거하지 않음을 명백히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 요한도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3:15)’ 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보건데 우리가 설령 행동으로 간음하지 않았고 행동으로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간음한 자요 살인한 자로서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살인의 동기가 남을 미워함이라면 자살의 동기는 자기를 미워함이다. 야고보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라고 하였으니 남에 대한 미움이 증폭되면 살인을 낳고 나에 대한 미움이 증폭되면 절망에 이르고 결국 자신이 자신의 생명을 끊는 일이 일어난다 할 수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나는 나를 미워한 적이 없어.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 절망해 본 적이 없어’ 라고 말할 사람이 과연 있는가?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그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면서도 한 번도 자살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젊은이들이 쉽게 자신의 생명을 끊는 일을 보고 내심 분개해 왔다. 그러나 이 얼마나 가소로운가! 나는 나 자신 나를 미워한 적이 수없이 많았으며 나에게 절망한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볼 때 나는 무수히 자살 죄를 지어왔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구원을 받았더라도 자살하면 받았던 그 구원이 취소된다’ 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버리시면서 ‘다 이루었다(요19:30)’ 말씀하셨으니 이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완벽하게 씻어주시고 용서하셨다는 말씀이다. 또한 히브리서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히10:12)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4)’ 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보아 한번 받은 구원이 그 후의 어떤 죄로 인하여도 취소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벽하고 온전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성경 몇 구절에서 살펴보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12:31)’ 라고 말씀하시면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9:6)’ 하셨으니 주님은 나를 포함한 사람이 지은 모든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시다.
이 모든 성경말씀을 종합해 보건데 주님의 십자가 죽음 다시 말해서 보혈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함이 명백하다. 따라서 자살 죄로 인하여 이미 받은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음도 명백하다. 왜냐하면 구원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남이니 한번 생명으로 태어나면 그 생명은 취소될 수 없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인 새 생명을 받았으니 그 생명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살하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주장은 잘못된 믿음이요 비 복음적 독소라 할 수 있다. 이 주제에 대하여는 총신대학원 교수의 글이나 침례회 신학대학원 교수의 글에서도 이미 확인한 바 있고 구원관이 확실하고 바른 성경관을 갖고 있는 많은 목회자들의 설교에서도 확인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비 복음적인 말로 성도들을 혼란케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둘째로 상당수의 목회자들과 많은 성도들이 생각하고 있는 자살에 관한 비 복음적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 즉 구원받은 자들은 자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명은 절대 주권자인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피조물인 인간에겐 자살할 권리가 없다. 자실하면 이는 하나님의 주재권에 도전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그 근거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든다. 나도 지난날 이러한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묵상해 보면 생명을 끊는 행위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불순종이 하나님의 주재권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최초의 범죄인 아담의 불순종부터 하나님의 주재권에 도전한 행위였기에 그 대가로 인간에게 죽음이 오지 않았는가.
살인죄를 지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살인죄는 내가 남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이다. 내가 남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가 과연 내게 있는가? 내가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가 나에게 없다면 더더욱 내가 남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생명을 빼앗는 죄는 하나님의 주재권에 도전함으로 보지 않고 유독 나의 생명을 빼앗는 일만 하나님의 주재권에 도전하는 일로 본다면 이는 나와 남의 생명을 동일시하지 않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사악한 죄성(罪性)의 발상이라 할 수밖에 없다. 나와 남을 가릴 것 없이 생명은 귀한 것이다. 따라서 살인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자살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리 없다.
셋째로 상당수의 목회자들과 일반 성도들이 가지는 자살에 관한 비 복음적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른 죄는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자살 죄는 회개할 기회가 없기에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하는 주장이다. 이에 관하여는 나의 글 ‘복음의 능력’에서 회개에 관하여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회개는 기독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5:17)’ 라고 말씀하셨다. 이때의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구원의 주로 영접하여 영생 얻는 회개를 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생명 얻는 회개(행11:18)’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요1:12). 그러기에 우리가 생활 속에서 죄를 짓는다면 우리는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잘못을 자복해야 한다.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1:9)’ 라고 밝히고 있기에 회개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성령의 일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회개가 구원의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만약 회개해서 구원받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 내 죄를 다 기억하는 자도 없고 기억하고 있다고 다 회개하는 자도 없으며 죄에 대한 관점과 기준이 나와 하나님 사이에 다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관점에서 보자. 만일 구원받은 신자가 삶 속에서 죄를 지었다가 회개하지 못하고 죽어서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면, 사고나 질병으로 갑자기 죽는 모든 신자는 다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이 되므로 아주 잘못된 주장이 된다. 평소 신앙생활을 잘 하던 신자가 치매에 걸리거나 우울증이 심해져 자살한 경우 구원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구원은 회개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롬10:9-10).
따라서 어떤 사람이 절망 가운데서 고민하다가 비록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할지라도 그 자신이 생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나의 구원의 주’로 영접하고 믿음의 확신을 가진 자라면 자살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이미 받은 그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넷째로 자살에 관한 또 다른 비 복음적 주장을 살펴보면 ‘자살은 마귀로부터 끈임 없이 자살의 유혹을 받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한다.’ 라는 견해다. 자살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유혹이 마귀로부터 오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도 결국 마귀의 유혹에서 왔음을 창세기 3장 1절에서 분명히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주장은 자살을 방지하는 복음적 대안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의 산물이라 할 수밖에 없다.
3. 자살을 방지할 수 있는 대안
그렇다면 구원받은 기독교인이 자살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 첫째는 기독교인에게는 산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모든 소망을 둔다. 돈과 명예, 지식과 미모에 집착한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돈은 돌고 돌아 남에게 가 버릴 것이기에 그야말로 돈이다. 명예와 지위도 영원히 내 것이 아니다. 지식도 지나면 낡아 쓸모가 없어진다. 더더욱 미모는 시간이 갈수록 추해진다. 늙은이가 왜 사진을 찍기 싫어하는가? 자기의 늙어가는 추한 모습을 보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소망은 한시적이다. 영원하지 않다. 그러기에 필연적으로 허무요 절망이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나라 저 본향에 소망을 둔다. 이것이 산 소망이다. 산 소망을 가진 자는 자신을 절망 속으로 송두리째 내던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최선을 다해서 산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 절망하고 좌절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 소망을 주는 것이 자살을 예방하는 대안이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고 사명을 깨달은 후에 어느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을 살았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라고 말한 것을 보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사명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그 해답이 여기에 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그렇다. 하나님의 영광이 종착점이다.
자살은 사명을 망각하고 하나님 앞에 망령된 행동을 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참 기독교인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결산할 날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벌(永罰)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永生)으로,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상급으로 결산을 받아야 할 날이 있는 것이다. 그때 나의 주인 되신 주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는 칭찬을 받을 것을 소망하면서 그리스인으로서의 사명을 잊지 않고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이 자살을 예방하는 대안이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의 피조물이다. 그러기에 생명을 주신 자의 거룩한 뜻에 따라 생명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날마다 일마다 감사와 찬송으로 당신의 거룩한 일을 성취하려 하면서 최선을 살아가야 할 뿐이다, 부르심에 합당한 일을 하며.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