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아버지의 마음

힛데겔 2011. 1. 15. 09:11
 

 겨울의 차가움이 목덜미 속으로 깊숙히 파고든다. 낯선 서울에서 겨울 맛을 톡톡이 보게 되나보다. 말없이 흘러가는 중양천은 오늘 밤도 철새들을 맞을 준비로 바쁘다. 발원지를 알 수 없는 이 강물은 백여리를 남쪽으로 돌고 돌아 한강 본류와 합쳐져서 서해 바다로 흘러든다. 중양천은 참 많은 것도 남쪽으로 실어 나른다. 인라인 스케이팅을 즐기는 사람, 쉼 없이 페달을 밟아대는 사이클링 족, 다정한 연인들, 그리고 천리 밖을 서성대는 영원한 이방인인 나.

 

 내가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온 지도 벌써 일년이 다 되어간다. 내 주위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또 많은 것들이 변했다. 나는 나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이렇게 내가 변했을까 하고 스스로 놀라게 된다. 물론 환경적인 변화도 있었지만 그건 별게 아니다. 사람은 환경적 동물 아닌가. 환경을 초월하고 살 수는 없다. 그러기에 하루가 끝나면 고달픈 육체야 거저 침대 위에 얹고 쉬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내 영혼이다. 내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 나는 자기 진단을 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은 편치 못하였다. 영혼의 쉼이 없이는 참된 쉼은 없다. 그러기에 주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짊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하지 않았는가. 내 영혼이 진정 주 안에서 안식할 수 있다면 환경이야 어떠하든 기쁨과 감격으로 하루를 맞을 수 있을 텐데 진정 내 영혼에 쉼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자신이 없다. 가만히 묵상해 보면 내 영혼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나와 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임을 말씀하려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말씀하시려 한 비유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종종 이 부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둘째 아들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첫째와 둘째가 다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탕자다.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기에 탕자요 영과 육이 아울러 곤고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의 독백을 들어보자.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는구나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아들의 고백은 이러하였지만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반응은 어떠한가?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성경 구절 속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까지 나는 너무나 먼 길을 돌아온 탕자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까지 육십여 년이나 걸린 것이다. 육신으로는 나는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또 세 자녀를 낳아 길러왔던 한 아버지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신분으로 살아보면서도 정작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지금 곰곰 생각해 본다.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아마 육신의 정욕으로 인하여 나의 영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나는 나의 자녀들에게는 그렇게 집착했지만 정작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는 하지 않았다. 세월이 물같이 흐르고 이제 하나님 앞에서 정리하는 시간이 가까워오니 나도 철이 드나보다. 자식들을 돌아보며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보니 내 영안이 열리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자식을 바라보는 마음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측은히 여김’이다.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나의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의 이야기다. 시골에 계시는 노부모님을 뵈려 한 달에 한 번씩 고향집을 방문할 때면 늘상 어머니가 하시는 말, “얘야, 너거 아부지 너희들 온다고 일주일 전부터 매일 동구 밖 버스 정류장에 나가셨다.” 하신 말이 생각난다. 그럴 때면 매번 나는 어머니에게 핀잔을 주었다. “엄마, 뭣땜에 그래요? 올 시간에 나가보면 되지 번거롭게” 하면 어머니는 “나도 모른다. 영감이 왜 그런지”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아들과 딸들이 측은히 여겨진다. 아들과 딸들이 사는 곳에 불쑥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런 마음을 아들과 딸들이 핀잔을 주겠지. 나는 요사이 인천과 부산에 떨어져 사는 아들과 딸에게 한 번씩 전화를 걸어본다. 아들과 딸의 답전은 매번 시큰둥하다. 그래도 자식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좋다. 언젠가 TV 광고에 이런 장면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느 재벌 그룹의 큰 사무실에서 한 젊은이가 열심히 제 업무에 몰두하고 있는데 옆의 동료가 와서 전하는 말, “박 대리, 로비에 나가 봐, 자네 아버지가 와 있어.” 전갈을 받은 젊은이가 헐레벌떡 로비로 나간다. 거기에는 머리가 반백이 된 노신사 한 분이 창밖을 내가보고 있다. “아버지, 이 시간에 어떻게 오셨어요, 집에 무슨 일이 있어요?” “예야, 일이 있어야만 오니? 너 얼굴 한번 보고 싶어 왔다. 얘, 아버지 간다.” 하고 밖으로 사라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젊은이의 모습이 클로즙되면서 동구 밖에서 기다리던 나의 아버지가 눈에 선하다.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신자들에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성경속의 하나님일 뿐이다. 왜 그럴까?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이 떡을 달라할 때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할 때 뱀을 주는 부모가 있겠느냐 세상의 악한 부모도 그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그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나의 하나님은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 내가 내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고 언제나 나의 자식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듯이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일로 아버지를 만나기를 원하는 첫째는  왜 탕자인가? 그는 아버지의 속을 끓게 한 적도,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도,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적도 없었던 소위 모범생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15:31)” 라는 아버지의 말을 깊이 묵상해 보면 첫째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진정 알지 못했기 때문에 탕자다.

 

 아버지 하나님은 나의 전부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삶에 하나님이 전부이었기에 롯에게 선택권을 먼저 줄 수 있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창13:9)” 하는 이 구절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양떼를 치는 이들에게는 물과 푸른 목초지는 가히 삶의 전부나 다름없다. 척박하고 메마른 가나안 땅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빼고는 양떼를 칠 만한 적절한 곳은 없다. “소돔과 고모라는 여호와께서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13:10)” 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곳이 얼마나 비옥하고 풍요한 땅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롯의 양떼들도 본래는 다 아브라함의 재산이다. 애굽 왕을 통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선물로 주신 것들이다. 그러기에 마땅히 아브라함이 먼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조카 롯에게 양보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요 전부였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내가 예배하는 교회에서 존경하는 목사님으로부터 이 설교를 들었다. 아브라함이 피자 네 쪽 중에서 한 쪽을 때내어 롯에게 준 것이 아니라 전부를 포기하고 전부를 선택했다는 말씀을 듣고 나의 영안이 번쩍 열림을 깨달았다. 그렇다. 하나님은 내 삶의 전부이다. 하나님을 선택하면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 동서남북 전부를 얻는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당신을 언제 어디서나 내 삶의 전부로 환영합니다.

 oh Lord, anytime anywhere welc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