갚아 주시는 하나님
한 달 전 저녁 무렵,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김창진입니다. 1977년에 저희들이 2학년 D반이었을 때 선생님께서 저희들을 담임해 주셨잖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철없는 저희들을 위하여 애쓰신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저희들이 이번에 선생님을 모시고 실로 32년 만에 반창회를 하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며칠 후에 선생님 댁을 방문하겠습니다. 멀리 뉴욕에 있는 봉집이도 오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선생님 찾아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내가 브니엘 고등학교에서 근무한 33년 동안 가장 잊지 못할 추억을 간직했던 학생들이라면 바로 이 2학년 D반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브니엘 학교에 근무한 지 4년째 되는 해였고 한 학급당 65명을 배정받아 그야말로 콩나물시루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수업하던 시절, 그해에는 한 해 동안 반이 두 번이나 바뀌었던 해였기도 했었다. 학년 초인 3월에는 한 학년을 우열반으로 나누어 편성하였으나 열반 학생의 학부형들의 빗발치는 비난과 상부기관에의 진정으로 급기야 학교가 감사를 받게 되고 시정명령을 받아 6월에 다시 반 편성을 해서 한 학년 열 개 반을 모두 보통반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반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우리 반 학생들이 스스로 이렇게 불렀다)였다고 할까.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였다. 1974년 고교 평준화 이후 우리 학교는 대입 진학 성적이 월등하게 좋아 서울대 진학 전국 10위권에 들어 학생들의 자부심도 대단했지만 학부형들의 열성도 가히 굉장하였다. 그럴수록 담임의 책무는 무겁고 힘든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학년 D반은 학급 장악이 정말 만만하지 않았다. 성적이 탁월한 학생도 많았지만 소위 문제아로 지목된 부적응 학생이 아주 많았다. 개중에는 불량서클에 가입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폭력과 각종 비위행위를 자행하는 아이들이 육, 칠 명이나 있어서 골머리를 여간 썩이는 게 아니였다. 그야말로 학급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이틀이 멀다하고 사고가 빈발하였다. 다른 반 학생들을 구타하고 금품을 갈취하는 사건 등등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런데도 한편 감사한 것은 가정환경이 좋고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 가정적으로 어렵고 공부에 쳐지는 자기 동기들을 끔직이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1년이 채 못 되는 기간 동안 정말 최선을 다해서 학급을 경영하였다. 문제아들을 붙잡고 밤을 새워 상담하고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며 마음과 몸을 함께 하였다. 다른 반에서는 불량서클에 가입한 학생들을 다른 학교로 전학을 보내거나 자퇴를 종용한 사례도 많았지만 나는 끝까지 함께 안고 간다는 생각으로 잘라내는 일을 하지 않았다. 나의 교육철학은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였다는 생각과 함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하나님의 걸작품을 한 순간의 실수나 과오로 말미암아 미리부터 그 밑둥을 자를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먼 훗날에야 안 일이지만 나의 이 마음을 하나님이 아시고 기뻐하셨다는 일이요 또한 그때 나의 제자들이 그들도 성인이 되고 아들 낳고 딸 낳아 기르면서 알아주더라는 사실이었다. 여하튼 나는 나의 하나님께 무한 감사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당신이 홀로 영광을 받으소서.”
5월 9일, 참으로 이날은 하나님이 나에게 갚아 주시는 날이었다.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제자들을 만나는 날이다.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이후로 종종 잠을 설치곤 하였다. 이들도 이제는 졸업한지 30년이 되었으니 나이 50이 되었을 테고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었으니 어떻게들 변해 있을까? 가정은 어떻게 꾸리고 자녀들은 얼마나 두었을까? 다들 훌륭히 자라서 사회에 중요한 한몫을 감당하고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설레는 날들이었다.
낮 12시에 집으로 찾아온 제자의 차를 타고 산성에 위치한 만남의 장소로 올라가니 제자들이 마당에 나와서 일렬로 도열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나를 맞아주는 제자들 중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이들도 몇 있었지만 얼굴은 예전 그대로였다. 나는 참으로 반가웠다. “얘들아, 잘 있었나? 정말 보고 싶었다.” “선생님, 보고 싶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잘 키워 주셔서 우리도 올곧게 잘 자랐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나는 제자 한 명 한 명을 포옹해 주면서 그들에게서 정말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그 제자들이 다 모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 순간 32년 전의 그 아이들을 보듯이 감개가 무량하였다. 나는 감사의 눈물을 5월의 신록 속에 담아두면서 제자들과 못다 한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나의 하나님이 이 순간을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하니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실로 32년 만에 거두는 열매가 아닌가! 당시에 학급반장을 맡아 정신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봉집이가 왔다. 그것도 태평양을 건너 단숨에 달려왔다, 친구와 스승을 만나기 위해. 이쯤 되면 자랑하지 아니하고 어찌 배길 수 있으랴. 2학년 D반은 정말 멋진 아이들이고 나는 정말 축복받은 선생이 아닌가!
“선생님,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 말은 나의 소중한 제자 봉집이의 말이다. 봉집이는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날 생각에 수 주 동안 잠을 잘 자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꿈에 나를 두 번이나 보았다고 고백하였다.
애들아, 나는 너희들이 정말 소중하다. 너희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나의 제자요 이 땅의 자랑스러운 국민이다. 부디 모교의 교훈을 잊지 말라.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면서 조국과 민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정직과 성실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임을 잊지 말고 감사하며 살아 풍성한 의(義)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히는 나의 자랑스러운 제자들이 되기를 나의 하나님께 기도한다. 다시 만날 때까지 역사를 창조하는 멋있는 삶을 살기를, 안녕 (2009년, 5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