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난제 풀이
1. 화장실에 목숨 건 사나이
동네 공동변소에서 엉덩이를 까고 앉아 시원스레 큰것을 보고 있는 한 소년은 이제사 온통 이곳이 자기 것이 된 듯이 의기양양하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내 차례를! 소년은 늘상 차례에서 밀려나곤 했으니까. “야, 임마, 너는 나중에 봐. 쬐그만 꼬마가 왼 새벽부터 변소에 오기는.” 소년은 날마다 어른들의 핀잔만 받았다. 어느 날인가 엄마가 어쩌다가 생콩을 갈아 별식으로 칼국수를 빚어 줄 때면 소년은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진다. 먹고 나면 그날은 어김없이 뱃속이 전쟁터로 변하기 때문이다. 설사다. 변소에 가야 한다. 소년은 배앓이를 참지 못한다. 매번 먹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뿐 소년은 또 생콩 칼국수를 먹게 된다. 어른들은 변소가 빨리 찬다고 야단들이다. 소년의 동네는 전쟁 통에 급조된 산동네다. 소똥같이 다닥다닥 들어붙은 판자촌이다. 그러기에 분뇨차가 오지 않는다. 소년의 소망은 온통 변소가 있는 내 집이다.
시간은 가고 소년은 어느 듯 어른이 되었다. 산 너머 남촌에서 바람이 부는가 했더니 태평양 너머로 양풍(洋風)이 몰아쳐 변소가 슬그머니 화장실로 바뀌고 그 소년은 이제 어른이 되어 내 집 안에 아담한 화장실 하나를 갖게 되었다. 그 동안 강산이 세 번쯤 바뀐 것 같다. 구청의 정화조 차가 일 년에 한 번씩은 꼭꼭 집주인을 찾아온다. 참 세월이 많이도 변한 것 같다. 이제는 신 새벽에 동네 변소에서 줄 설 일은 없어졌다. 어른들의 핀잔을 받을 일도 없다. 화장실에 앉아서 느긋하게 여유를 즐겨도 된다.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소년은 어느 새 중년의 신사가 되었고 세월은 바뀌어 남북으로 길게 벋은 고속도로 위로는 까만 세단들이 꼬리를 물고 시원스레 달린다. 이제 중년의 신사는 다시 새 소망을 가져 본다. 화장실이 안방에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식구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식탐(食貪)을 마음껏 부려도 좋다. 왜냐하면 화장실이 보호해 주니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나와 화장실만이 알뿐이다. 한밤중이든 신 새벽이든 내가 갈 때면 언제든 맞아주니까 말이다. 말 타듯 양변기에 의기양양하게 앉아서 볼일을 시원히 보고 손을 뒤로 돌려 엄마의 젖꼭지 같은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모든 비밀은 물과 함께 흘러가 버린다. 아, 좋은 세상이다. 나는 이런 세상을 꿈꾼다.
시간은 또 저만치 한참 달려가서 시속 300km의 고속 열차가 중년의 신사를 한 실버타운 앞에 내려놓는다. 중년의 신사는 이제 노신사가 되었다. 노신사는 자기 집 안방으로 들어가 화장실의 양변기에 겨우 걸터앉는다. 거동이 몹시 불편한 모양이다. 주름진 손등 위에는 점점이 저승꽃이 번져 나온다. 손이 조금 떨린다. 맞은 편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노신사의 목덜미에는 유달리 잔주름이 많다. 깊게 패인 얼굴의 주름살은 꼭 시골 동네 한가운데 터줏대감처럼 엉버티고 자리한 사백 년 된 느티목 밑둥의 주름살 같다. 아내더러 신문을 가져다 달란다. 신문의 문화면을 훑어본다 거기에는 낯선 작가의 꽁트 한 편이 실려 있다. ‘화장실에 목숨 건 사나이’ 천천히 기사를 읽어가던 노신사의 얼굴에 갑자기 경련이 일어난다. 안면 근육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기 시작한다. “ 아, 나는 정말 다 얻었는가? / 아니야, 아니야. 절대 아니야. 오히려 다 잃어 버렸어.”
2. 난해한 문제에도 해답은 있다
며칠 전에 아내가 인터넷의 개인 블로그를 뒤적거리다가 거기에 실린 이야기를 읽고 나에게 들려준 것인데 자꾸만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아 하나님께 묻기를 계속하였더니 나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있어 우리세대와 같이 어두웠던 시절을 살아오던 때를 회상하면서 그 이야기를 꽁트로 잠깐 재구성해 보았다. 거울 앞에서 이 노신사는 왜 끝없이 절망하는가? 화장실이 가치 없다는 말도 아니요 화장실에 목숨 거는 일이 무가치하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이 노신사는 자기가 진정 목숨 걸어야 할 곳에 걸지 못했다는 자괴감(自愧感)과 절망감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정답을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다. 나는 유달리 수학을 못했다. 그러기에 나는 수학을 싫어했고 수학이 두려웠으며 수학 시간은 나에게는 고문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소위 명문고였기에 학교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어른이 빨리 되고 싶어 교복을 거부하고 사복을 고집하던 그 때에도 상의(上衣) 중에 남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어느 한 곳에는 언제나 학교 뱃지를 달고 다녔고 그것이 결국 증거물이 되어 학교 훈육주임(생활 지도 부장선생님)에게 교외지도에 걸려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자연히 국∙영∙수 세 과목은 필수 과목으로 다들 열심히 하였다. 나는 국어 영어 과목은 전교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았지만 수학은 만점이 100점이면 25점을 매번 넘지 못했다. 한번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어느 여름날 집에서 수학 문제를 풀다가 너무나 풀리지 않아 머리를 벽에다 사정없이 박으며 내 머리를 탓하면서 나를 낳아준 부모마저 원망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는데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수학 문제집을 바깥에다 냅다 던져 버렸더니 종이가 퉁퉁 불어 다시는 못쓸 줄 알았더니 며칠 뒤 다시 햇볕에 말려서는 그 문제집으로 내 생애 처음으로 수학 점수 50점을 받는 쾌거를 거두고는 전교 모의고사에서 럭키 세븐(전교 7등)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수학 선생님이 이를 아시고 동정 점수를 주시곤 한 기억도 있다. 나는 이때 깨달을 것이 있었다. 대학에 갈 때는 수학이 없는 곳으로 가면 된다는 깨달음이었다. 결국 나는 우여곡절 끝에 국어 선생님이 되었고 너무나 자랑스런 나의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다. 나에게는 수학이 없는 전공의 선택이 내 인생에 정답이 된 셈이다. 나에게 이 길을 가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인생의 정답을 알려 주시고 그 길을 가게 하셔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날마다 나의 전공에 기쁨과 보람을 가지고 더 깊고 넓은 지식을 제자들에게 가이드해 줄 수 있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3. 감사가 해답이다
지난여름 아들이 있는 수원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4층에 있는 아들의 원룸에서 슬리퍼를 신고 계단을 다 내려와서 1층의 마지막 계단을 밟다가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져서 왼쪽 엉덩이와 오른 쪽 팔목을 심하게 다친 것이다. 전날 저녁에 비가 많이 와서 미끄러운 대리석 계단을 더욱 미끄럽게 만들고 있었음을 내가 미처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였다. 넘어지면서 엉겁결에 오른 손을 짚다가 계단 끝부분에 오른 쪽 팔목이 부딪히면서 팔목도 다치게 되었다. 물 위에 넘어진 나는 너무나 아픈 고통으로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아들을 부를 만큼의 여력도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감사의 마음이 용솟음치며 나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나 자신에게 놀라고 있었다. 내가 그런 놈이 아닌데 이상하잖아. 평소 같으면 틀림없이 불평이나 원망의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을 터인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픈 통증의 신음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벌벌 기어서 4층까지를 되돌아 올라와서는 아들의 방문을 겨우 비틀었다. 이틀간을 아들의 방에 머물면서 자가 치료를 하는 동안 한 번도 불평의 말이 나오지 않았으니 나에게는 지금도 그 일이 불가사의하다. 아들과 딸은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지 않는다고 성화였지만 팔이 붓지 않고 다리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을 보고 뼈에는 이상이 없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나에게 감사의 시험을 치렀다고 자꾸만 생각이 되었다.
문제에도 난이도(難易度)가 있듯이 세상의 삶에도 난이도가 있다. 세상에는 쉬운 삶을 두고 굳이 어려운 삶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어려운 삶이란 곧 꼬여 있는 삶, 뒤틀린 삶, 막혀 있는 삶이라 할 수 있다. 닫히다와 열리다, 뚫리다와 막히다 등 낱말에도 짝이 있다. 나의 삶이 막혔는가? 절망하지 말고 짝이 되는 반의어를 찾아보라. 막히면 뚫으면 되고 닫히면 열면 된다. 그러면 혹자(或者)는 나에게 이렇게 힐문(詰問)할지도 모른다. “이 바쁜 세상에 나하고 말장난하자는 거요? 그쯤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소? 시건방진 짓거리 그만 하시오.” 하고 말할지 모른다. 맞다. 이 정도 반의어 하나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라고. 문제는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나를 옥조여오는 엄청난 상황 앞에서 당황해 하고 주저앉을 뿐 상황 너머에 있는 해답의 길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막힌 것을 뚫어주고 닫힌 것을 열어주는 길 되시고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답답해 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의 전문가요 생명을 살리는 전문가이다.
성경 누가복음 17장에는 열 명의 문둥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병을 치료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열 명의 문둥이가 모두 치료를 받았지만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인 한 명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다시 돌아와 감사를 드렸을 때 주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셨는가? “이 이방인 이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 기록에서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감사를 돌리는 행위를 주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감사하는 자에게 주님은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주신 것을 보라. 문둥병을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 곧 죄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얻는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감사하지 않는 삶은 원망하는 삶이다. 성경 민수기 14장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원망했을 때 하나님은 이 백성이 나를 멸시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꼬이고 뒤틀리고 저주받은 삶이 될 수밖에 없다.
4. 감사는 훈련이다.
성경 데살로니가 전서 5장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이 나온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은 권면이나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셨을까? 이는 범사에 감사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랜 훈련과 인고(忍苦)의 끝에 깨닫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에게 당신의 아들을 하나님이 요구하신다면 선뜻 감사하며 순종할 수 있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순종은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만큼 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감사로부터 시작된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는 순종이 있기까지 그에게는 얼마나 많은 훈련과 인고의 세월이 있었겠는가!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이 명령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기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셨다. 우주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신 주님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신 연후에 십자가의 구원 사역에 순종할 수 있었다. 감사는 쉬운 삶으로 들어가는 열쇠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보장하고 하나님이 책임지는 삶으로 들어가는 열쇠이다. 우리 모두 쉬운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감사하라. 억지로라도 감사하라. 그러면 당신의 삶에 기적이 일어난다. 감사는 축복을 불러오고 원망은 저주를 불러온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