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파리인가

비전 2018. 1. 6. 19:18 |

 여행은 가슴 떨릴 때하고 다리 떨릴 때하지 말라는 미국속담을 이제 두 번째 실천한다.

한 번은 2년 전 연말, 스페인여행 때이고 이번은 지난 연말 파리여행 때이다. 두 번 다 자유여행으로 딸과 함께였다. 패키지여행이 아니니 마음의 여유도 있고 시간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어서 좋고, 현지인의 삶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어 더욱 좋다. 그러나 자유여행에는 가이드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행전문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영어에 어느 정도 능숙하고 한두 번의 외국여행 경험이 있으며 컴퓨터검색에 능한 센스 있는 젊은이와 동행하면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항공권 예매부터 현지숙소 예매를 비롯하여 여행에 필요한 제반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함께하는 딸이 이 모든 것을 담당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아내와 함께 단지 여행을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지난 연말 12월 21일 새벽 일찍, 눈이 내려 노면도 살짝 얼어붙은 아파트길가에서 두 대의 택시를 놓치고 가까스로 세 번째 택시를 집어타고 공항버스정류소로 향하는 우리부부는 이번 여행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즐겁게 여행을 시작했다. 여느 해보다 추운 혹한에 장거리여행을 하는 것이 부담이 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더 늦기 전에 가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딸애의 주선이 너무나 고마웠다. 아빠, 엄마와 함께하고파하는 딸의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가!  



 인천공항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다. 아침 7시밖에 안되었지만 수많은 여행객으로 공항은 몸살을 앓을 정도다. 작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사람들은 둘 중 한 사람 꼴로 외국을 더녀왔다는 통계가 나왔으니까 이천오백만이 외국여행을 다녀왔다는 말이다. OECD국가 중 여행증가율이 우리나라가 으뜸이다. 중국은 인구대비 10%인 1억 2천만, 일본은 인구대비 10%인 1천 2백만이 작년에 외국여행을 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외국을 잘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볼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꿈을 잃어버린 것인지 모르지만 자만이나 절망은 둘 다 망하는 지름길임이 틀림없다. 우리나라사람들이 외국으로 많이 나가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우리가 남들보다 월등이 잘 살아서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어느 때보다 더 어렵다. 그러기에 꿈을 가지고 도전해야 한다. 더 많이 살피고 더 많이 힘써야 한다. 어려울수록 더욱 도전해야 한다. 주저앉으면 죽는다. 인천공항을 오가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면서 나는 우리의 밝은 미래를 본다.



 비행기는 한 시간 반을 연착해서 12시 30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했다. 물론 외국계 항공기인 폴란드항공이다. 우리는 바르샤바 공항에서 두 시간 정도 머물고 다시 폴란드 항공의 다른 비행기를 갈아타고 피리로 들어가야 한다. 인천에서 바르샤바까지는 열 시간을 날아가야 한다. 기내에서의 열 시간이 가장 고역이다. 나는 아예 잠으로 이 시간을 짖뭉게버릴 심산이다. 집에서 준비해 온 안대로 잠을 청하자 다행히 단잠이 나를 평안으로 인도한다. 기내에서는 두 번의 서비스가 있다. 식사와 간식으로 밥과 빵, 음료를 제공한다. 기내식도 우리의 음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이 여행대국으로 올라선 지 오래다. 인천공항으로 들어오는 외국계 항공이 국적항공을 포함해 백 개국에 이른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자고 먹고 하다가 바르샤바공항에 도착했다. 세계도처에서 자행되는 테러 때문인지 공항 검문검색은 몹시 까다로웠다. 검색대원은 공항수비대 소속의 현역군인들이다. 무표정한 모습에 겁이 났다. 여기서부터 유럽이니까 유럽의 관문인 셈이다. 그러니까 더욱 그렇다. 검문이 철저할 수밖에 없다. 한번 보이콧당하면 그만이다. 한국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자연히 긴장이 된다. 다행이 우리 셋은 잘 통과되었다.


 다시 파리 비행이다. 바르샤바에서 파리까지는 두 시간 남짓이다. 잠시 눈을 붙인 듯한데 파리의 드골공항이다. 새벽녘의 공항은 한산하다. 무사히 게이트를 통과하여 택시정유장으로 와 차를 타고 숙소로 향한다. 택시비는 유로화로 50불이다. 한 시간 반 정도를 부지런히 달려 와 숙소에 이르렀다. 숙소는 파리 2번구에 있었다. 딸애가 서울에서 미리 예약한 현지인의 아파트다. 오층 건물이 ㅁ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4층에 우리 숙소가 있었다. 엘리베이트는 삼인용이라 아주 미니였다. 그러나 건물이 백년은 족히 된 건물이라 놀라울 수밖에 없다. 숙소는 아주 잘 정돈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구조와는 사뭇 다른 세로형 구조다. 거실, 주방, 화장실, 안방이 일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그네들의 라이프스타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여튼 여행객을 배려해서 모든 게 다 갖추어져 있다. 우리는 서울에서 미리 준비해 온 것을 내려놓는다. 햇반 30개, 누룽지, 김을 비롯하여 캔 반찬 등을 완벽히 준비했기에 아침, 저녁은 너끈히 우리식으로 먹을 수 있다. 유럽에서도 슈퍼는 아주 싸다. 과일이 더욱 그렇다. 스페인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파리에서의 외식은 돈이 많이 든다. 물가가 서울보다 조금 비싸다. 특히 레스토랑요금이 비싼 편이다.



 파리에서의 아침을 햇반으로 맛있게 해결하고 본격적으로 파리투어를 시작한다. 파리는 세계 최고의 관광지다. 역사와 문화예술, 쇼핑으로 전 세계인이 연중 몰려든다. 가장 한가한 계절이 겨울이라니 좀 조용히 돌아볼 것 같기도 하다. 숙소가 시내 중심가에 있어 여간한 곳은 도보로 20분 거리다. 루브르박물관, 오세르 미술관, 콩코드 광장, 세느강, 개선문이 오늘의 코스다. 루브르까지는 도보로 15분 거리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걸으며 중세기의 건물들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비가 간헐적으로 찔끔거리지만 대부분의 파리장들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 기온은 서울보다 따뜻해서 영상을 유지한다. 오가는 사람들도 정말 다양하다. 백인, 중동인, 아시아인, 흑인, 정말 인종 전시장 같다. 그 중에 흑인이 많다. 프랑스가 오랜 동안 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특히 북아프리카계가 많다고 한다. 아시아계도 적지 않으니 이는 베트남을 비롯해 동남아가 한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딸애의 말로는 파리에서는 인종차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단다.



 루브르, 말이 필요 없다. 와서 봐야 한다. 그 규모나 웅장함이 가히 세계의 압권이다. 12세기 후반에 필립 2세에 의하여 착공되었지만 본래는 궁이었다. 그 후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궁을 지어 옮긴 후 왕실의 유물을 전시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증축 중이다. 박물관 옆으로는 세느강이 흐르고 강을 건너 맞은편은 오세르 미술관이 위치해 있다. 우리일행은 6일간의 파리 무지움 패스권을 사서 삼각 피라미드를 통과한다. 여기서도 검문검색은 철저하다. 궁으로 착공되었던 기초석을 비롯하여 궁의 석벽이 지하 3층에 아직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곳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소중한 것들을 남겨 놓으려하는 선조들의 정신은 후세를 풍족하게 한다. 루브르에서의 모나리자는 단연 관광객들에게는 최대의 볼거리다. 모나리자 앞에서 인증샷을 하고 무진장한 유물 속으로 역사의 여행을 시작한다.



 루브르에서 나와 세느강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의 한 정치 망명가를 생각한다.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파리의 속살을 실감 있게 전해 준 정치평론가, 우리의 아픈 현대사와 함께한 초로의 신사를 떠올리며 콩코드 광장을 걸어 올라간다. 루브르와 개선문 간의 거리는 걸어서 40분 정도 되는 것 같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현장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뮤지컬로 상영된 적이 있는 ‘레미제라블’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다. 드디어 개선문에 도착했다. 콩코드 광장에서 곧장 걸어 올라오면 지하로 개선문에 이르게 되어 있다. 여기서도 역시 무지움 패스로 검문소를 통과하여 개선문 내부 통로 계단을 거쳐 5층 높이의 개선문 전망대에 오르니 에펠탑이 잿빛 하늘 아래 나타난다. 파리가 완전한 계획도시임을 여기 전망대에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개선문에서 열두 거리가 펼쳐진다. 열두 거리의 노폭도 거의 일정하고 일직으로 뻗은 모양이 개선문이 원의 중심점이다. 건물의 높이도 철저히 제한되어 있어 높아야 육칠층 정도다. 우리나라처럼 우후죽순 솟아올라 스카이라인을 다 가려버린 도시와는 사뭇 달랐다.



 파리에서의 둘째날은 오르세 미술관, 셋째날은 몽마르트 언덕과 에펠탑, 넷째날은 노트르담 대성전, 다섯째날은 피카소 미술관과 로댕 미술관, 여섯째날은 베르사이유궁전, 일곱째날과 여덟 번째날은 시내투어, 마지막날은 고흐마을 방문, 이렇게 파리여행 계획을 잡았다.



 오늘은 베르사이유궁을 보러가는 날이다. 베르사이유는 파리 교외에 위치해 파리전철을 이용해야 한다. 아침 9시경, 숙소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파리는 지하철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목적지를 찾아가기도 쉽다. 스마트폰에 구글지도를 앱으로 다운받아 놓으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다. 여행객에게 구글지도와 번역기는 필수다. 역에서 교외로 나가는 전철을 타고 목적지로 향한다. 베르사이유로 가는 관광객이 많다. 전철은 아주 깨끗하며 시트도 아주 편안하다.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단다. 차창밖으로 내다보니 교외로 나갈수록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다. 고층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있고 더러는 지금 공사 진행 중이다. 타워 크레인이 분주하게 자재를 나르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한 시간 후 전철역에서 내려 베르사이유궁 앞 광장에 다다르니 선착객들이 벌써 줄을 서 있다. 비가 내리고 상당히 추운 날이었지만 상당수는 우산도 쓰지 않고 있다. 말로만 듣던 곳, 실제 와 보니 그 규모가 실로 대단하다. 궁의 철제 정문은 황금색 왕관으로 장식되어 있고 H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 궁들은 모두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다. 한 시간 가량 줄을 서 기다린 후에 무지움 패스로 들어간 궁 안의 실상은 문짜 그대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화려한 궁은 결코 없으리라는 확신이 왔다. 루이 14세 때 착공하여 루이 16세 때까지 지었으니 공사 기간도 길었지만 궁에 소요된 경비로 나라의 재산이 거덜났다는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볼 수 있었다. 루이 16세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하여 지은 궁을 오고 오는 세대에 수많은 관람객은 와서 무엇을 보는가? 그 화려함인가? 아니면 화려함의 미인가? 그것도 아니면 화려함의 뒤에 감추인 인간의 사악함인가? 궁을 돌아본 우리일행은 궁 앞으로 펼쳐진 정원으로 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 조성된 인공정원을 보면서 여기에 동원된 노역꾼이 얼마일까 생각해 본다. 정원 사이로 난 넓은 길을 따라 한 시간 정도 내려오니 숲 속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별궁이 나타난다. 이 별궁은 본궁과는 달리 아주 검소하다. 소위 마리 앙투아네트의 영지라 불리운다. 수많은 농노들을 거느리며 농사도 지었다니 앙투아네트는 누릴 것은 다 누린 사람이다. 루이 16세나 안투아네트는 결국 프랑스 대혁명으로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이것이 역사의 진실 아니겠는가 싶다. 혁명의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만 했을까를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가 입헌 군주국을 고집하지 않고 온전한 공화정의 길로 나아갔던 것을 볼 때 후세인들에게 시사해 준 교훈이 너무나 크지 않았나 생각되어진다.



 파리는 피카소와 로댕과 고흐를 사랑하며 베르사이유를 가지고 있는 도시다. 나는 아내와 함께 나의 사랑하는 딸의 안내를 받으며 고흐마을까지 돌아보고 왔다. 한 사람이 무엇을 남기고 갔으며 어떻게 살다 가야 할지를 나에게 가르쳐 준 파리였다. 왜 파리인가 다시 생각해 본다. 파리야, 고맙다. 언제 다시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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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칙칙하고 무거웠던 온갖 잡내의 무게를 홀가분히 털어내고 기어이 가을은 성큼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한낮의 가을 공원풍경은 참으로 눈부시다. 우거진 숲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가을 햇살은 마법사의 지팡이로 한바탕 자연의 진수성찬을 차려 놓는다. 빛의 깊이와 각도에 따라 나뭇잎의 색상은 모두 조금씩 달라진다. 모양이 다르고 색상이 다르니 잎만으로도 훌륭한 앙상블을 이룬다. 가을바람이라도 한번 불라 치면 숲속은 여지없는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 베토벤의 <전원>을 여기에 견주랴?

 

 중국 발 미세먼지와 사드의 보복으로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지루하고 답답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름의 무더위와 칙칙함을 견딤이 없다면 가을의 풍성함도 없을 것이다. 한 개인의 삶도 그러하고 한 나라의 장래도 그러하다. 짓누르는 무거움 속에서 내일을 생각해야 하고 내일의 소망 속에서 알참을 준비해야 한다. 준비가 없고 치열한 노력과 기다림이 없으면 어찌 탐스러운 열매가 있으랴?

 

 가을은 생각의 계절인가? 요즘 부쩍 생각이 많아진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걸작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보면 생각이 없는 인간은 투명인간이 아닌가?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고 생각을 발전시켜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이 자기를 갉아먹는 해악(害惡)으로 변질되어 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요사이 생각에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생각이 걱정이나 근심으로 나를 몰아넣지는 못한다. 문제없는 인생은 없다. 나는 삶의 거의 태반을 문제를 보고 그 문제에 매몰되어 살아왔지만 이제는 문제를 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보지 않으려 한다. 문제 너머에 계시는 문제를 주시는 그분의 의도를 보려한다. 내 힘으로 문제를 풀지 못하면 전능자 하나님에게 그 문제를 맡겨 버린다. 그러기에 생각하며 살아가는 특권을 누리면서 그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맛보며 산다.

 

 이 가을에 소중한 나의 깨달음 하나, 함께 나누고 싶다. 얼마 전에 나의 소중한 벗을 한번 만났다. 못 만난 지 오륙년 되었으니 참 반가웠다. 그러나 함께 오래 머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인생이 그런 게 아닐까? 그리워하면서도 아니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니 인생은 언제나 미완성이다. 벗이 나에게 이렇게 말해요, “요사이 당신도 잘 아는 그 사람 있잖아, 거의 매일 나를 불러내어서 귀찮아 죽겠어, 만나면 자기 자랑인데, 집이 칠십 몇 평이라느니, 자기 아들은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의 치과를 나와서 수하에 네 명의 부원장을 거느리고 있다느니… 하면서 자랑하는데 듣기 싫어 죽을 지경이야, 그런데 그 친구, 벗들을 위해 밥 한 끼는 절대 내지 않아” 이 말을 다 듣고 난 나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벗님, 버리십시오” 버림이 정답이다.

 

 시간이 지나도 결코 쇠퇴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 그게 바로 자랑이다. 시간이 지나면 쇠퇴하거나 어쩔 수 없이 놓아 버려야 할 것들이 많다. 건강도 그러하고 돈도 명예도 지위도 다 놓아야 한다. 그러나 자랑만은 절대 놓지 않는다. 자랑에는 끝이 없다, 외모, 힘, 건강, 자식, 배우자, 돈, 명예, 지식, 지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자랑할 것이 없으면 ‘내 이웃에 그 부자, 그 사람 살았잖아’ 이 식이다. 그래서 호가호위(狐假虎威)란 말이 생기지 않았을까?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 한다. 나의 중학교 2학년 때 에피소드이다. 옆의 친구가 쉬는 시간만 되면 무엇을 꾹꾹 씹는다. 육이오 한국 전란이 끝나고 오륙년쯤 지났으니 껌도 귀한 시절이었으니까 껌을 씹는 줄로만 알고 ‘야, 같이 씹자’ 했다. 그 시절엔 친구가 씹던 껌도 받아 씹었으니까. 그런데 이 친구,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더니 조그맣고 바짝 마른 무엇을 주는 것이다. 뭔고 보니, 하얗게 생긴 도라지 같은 뿌리였다, 먹어 보니 약간 쓴 맛이 나면서 아주 딱딱했다. ‘이거 뭔데?’ 물은즉, ‘인삼이다, 이 바보야’ 나는 졸지에 바보가 되어 버렸다. 이 친구는 자기 엄마가 시내의 약방주인이었기에 늘 인삼을 가지고 와서 먹었으니 키도 크고 얼굴도 달덩이같이 함지박얼굴이었다. 이때 나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옆의 한 친구가 끼어드는 장면 한번 보소, “ 우리 엄마는 다섯 명이다, 나의 엄마는 그 중에 넷째다, 한 번씩 우리 큰엄마한테 가면 바나나 실컷 먹는다, 우리 큰엄마, 나에게 엄청 잘 해 준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큰엄마 자랑한 그 친구네집, 엄청 복잡합디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랑하는 혀를 끊어 버리신다 하였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극단적인 말씀을 하셨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도 그저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 이제 와서야 깨닫게 하시다니, 신문기사의 한 토막이지만 어느 영국 의학전문 잡지에 실린 연구결과를 보니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말 속담이 사실이었다. 임상통계에 의하면 사촌이 논 샀다는 말을 듣고 실제 배가 아픈 자들이 대부분이었단다. 아담 이후, 타락한 사람이란 존재는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보아 준다. 그래서 남이 자랑하는 것을 들으면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시기심과 질투가 솟아나고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나며 심하면 상대방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랑은 듣는 자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 이를 잘 아시고 자랑하는 혀를 끊어 버리시겠다고 하셨다. 정말 자랑하고 싶으면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라, 바울처럼.   

 

 

 



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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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가족

작은 행복 2017. 1. 4. 13:19 |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라 안의 산적한 문제들로 마음이 심히 심란해 소파에 앉아 있지 못하고 거실을 서성이는 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 올해 나 다 쓰지 않은 휴가가 엿새 남았어. 연말연시, 공휴일까지 포함하면 열흘이야, 우리 어디 가자” 하는 전화였다. “그래, 한번 생각해 보자” 그러고 끝이었다. 또 며칠 후 “아빠, 나에게 마일리지가 남았거든, 올해 안에 꼭 써야 해, 안 그러면 소멸해 버리거든, 그러니 꼭 가자. 우리 어디 갈까? 아빠가 늘 유럽 한번 가고 싶다 했잖아, 파리 어때? 좀 생각해 봐” 또 일방적 제안 후에 끝이었다. 가끔 엉뚱한 데가 있지만 나에겐 가장 소중한 둘째 딸의 제안에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는데 경비도 문제지만 나머지 자녀들이 켕겼다. 가족! 가족이 무언가?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전우가 아닌가? 그렇다면 기쁨도 슬픔도 함께해야 하는 게 가족이 아닌가?

 


 “아빠, 생각해 봤어? 지금은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이라 파리는 너무 혼잡할 것 같아, 소매치기 당할 위험도 있고, ‘꽃보다 할배’로 소문난 스페인 가자, 경비는 걱정 마, 내가 다 알아 할 테니까” 언제나 일을 저지르고 나면 그 뒷감당은 책임지는 멋진 딸애 덕분에 우리 가족의 스페인 자유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2월 22일 밤 8시30분, 인천 국제공항으로 나온 우리 일행은 나, 아내, 둘째딸, 그리고 부산의 큰손자 이렇게 네 명이었다. 나머지 가족들은 생계 때문에 함께하지 못했다. 큰손자는 이제 중학교 2학년인데도 체격이 우람하여 가끔 고등학생으로 취급 받기도 할 정도로 키가 크다. 그보다 더 대견한 것은 이 아이의 몸에 밴 국제 감각이다. 공항에서의 수속과 세련된 일처리나 매너는 수준급이다. 아마 어릴 때부터 몇 번 아빠, 엄마를 따라 바깥세계로 나가 본 경험의 소산이 아닌가 한다. 젊은이에게 글로벌 감각을 익혀 주는 가장 빠른 길은 국제공항을 밟게 하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밤 0시 50분발 카타르 항공편으로 인천공항을 이륙한 우리는 8시간의 비행 후에 사우디 아라비아 반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중간 기착지인 도하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도하공항은 환승을 주로 하는 허브공항이라 수많은 승객이 여기를 거친다. 유럽이나 아프리카를 가려면 여기를 대부분 거친다. 우리 일행은 여기서 아홉 시간을 머문 후에 다시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다. 여덟 시간의 비행으로 노독이 심했지만 그래도 감사한 게 딸애의 세심한 배려로 나와 아내는 비즈니스석을 타고 왔기 때문이다. 나에겐 여러 번의 비행경험이 있지만 비즈니스석은 워낙 비쌌기에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과분한 호강을 하게 되다니.



 도하공항은 여느 공항과는 조금 달랐다. 오가는 대부분의 승객이 아랍인이다. 꼭 아랍 복색 전시장에 와 있는 기분이다. 남자들은 제각기 자기 나라의 복색을 입고 있다. 바지 위에 반쯤 오는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테 없는 둥글고 붉은 모자를 쓴 남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남자는 몸 전체를 눈부신 흰색 천으로 통옷을 만들어 입고 머리 역시 눈부신 흰색 천의 두건을 두르고 이마 위쪽으로는 둥근 타반을 둘렀다. 아랍 특유의 구리수염에 짙은 눈썹, 오똑한 콧날, 알맞은 키에 정말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따로 없다. 상당히 귀족적으로 보인다. 여인들 중에는 머리에만 히잡을 쓴 이도 있지만 머리부터 전신을 새까만 통치마로 장식한 여인들도 있다. 얼핏 보아도 상당히 부유층에 속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블랙골드의 위력을 실감하면서 갑자기 내 나라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냉혹한 국제 파고에 휩쓸리면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던가!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내 나라를 생각하면서 나의 두 눈에선 이슬이 맺힌다. 이모 옆에 앉아서 스마트폰 게임에 열심인 손자를 보며 우리의 후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세계 속에 당당하고 행복해야 할 텐데… 갑자기 생각이 많아진다.



 다시 바르셀로나로, 인천 공항에서와는 달리 탑승객 중에 한국인은 거의 없다. 이제 열 시간을 더 비행하여야 한다. 노독이 쌓여오지만 마음을 즐겁게 먹으려 한다.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어떤 경우든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모두 합쳐 열여덟 시간의 비행거리를 여행할 수 있다는 게 내 나이에 쉽기나 한 일인가? 평생을 집 안팎만 맴돌다 끝내는 인생이 얼만데 이렇게 지구의 반대편까지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선택받은 축복인가, 감사할 뿐이다. 비행기는 예정대로 이튿날 새벽 두 시, 바르셀로나공항에 안착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주소를 건넸다. 고맙게도 주소대로 사십여 분 만에 정확히 집 앞에 우리를 인도한다. 흔히 듣는 바가지요금도 없다. 고맙기 그지없다. 숙소는 한국에서 미리 예약했기에 주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부부 같은데 얼마나 친절한지 꼭 이웃사촌을 만난 기분이다. 간단한 가이드를 받고 우리는 짐을 풀었다.



 아침에 일어나 한국에서 가져온 햇반, 포장 김치, 김 등으로 식사를 하고 본격적으로 시내 투어를 나가기로 했다. 여기는 지하철이 잘 되어 있어 시내 어디든 갈 수 있다. 바르셀로나는 건축계의 거장 가우디와 미술계의 거장 피카소와 미로를 배출한 도시다. 자연히 우리 일행은 미술관을 먼저 돌아보기로 했다. 우리가 찾은 미로 미술관은 바르셀로나 시가지 한 가운데 있는 축구장 스무 개 정도의 펑퍼짐한 언덕 한쪽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미술관은 미로의 풍부한 작품들로 잘 전시되어 있다. 시대 순으로 전시되어 있어 그의 작품세계를 한 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언덕에는 또한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황영조 선수가 바로 여기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곳으로 유명하다. 메인스타디움을 돌아보며 저 멀리에서 언덕배기로 숨을 헐떡이며 달려 들어오는 황영조 선수를 본다. 장하다. 여기 지구의 반대편에 한국의 혼을 심어 두어 지금 이곳을 찾는 우리를 감동시키다니. 메인스타디움 관광을 마치고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도로를 따라 아래로 십여 분 내려오니 멀리 지중해의 검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더없이 푸른 바다는 에메랄드빛 그대로다. 부둣가 선착장에는 크루즈선 한 척이 정박해 있다. 정말 평화롭고 낭만적이다. 우리 일행은 전망대 카페에서 멀리 지중해를 바라보며 따끈한 한 잔의 커피로 객창감을 달랜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그러기에 중세의 건물들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은 가톨릭 대성전이다. 대성전은 규모에 있어서도 압도적이지만 그 정교함이 천하일품이다. 대리석 기둥과 웅장한 정문, 하늘로 치솟은 첨탑과 십자가, 수많은 인물과 동물의 조각으로 건물 자체가 온통 거대한 조형물이다. 인간이 정말 만든 것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의안이 벙벙하다. 우리가 방문한 날이 마침 성탄절이었기에 미사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나는 미사 중의 신도들 사이로 조용히 비집고 들어가 대성전 중앙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돔으로 된 둥근 천장 벽면에는 각종 인물과 천사로 양각된 조각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 열두 사도나 속사도 내지 수도사들의 얼굴이 아니겠나 생각되어진다. 대사원의 중앙 홀을 둘러 양옆으로는 다시 통로를 만들고 외벽을 쌓고 낭실을 수없이 만들어 각기 낭실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도사들을 조각하여 입상을 세우고 촛불을 켜 두어 신도들로 참배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었다. 섬기는 자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는 없었다. 시내 중심가에 산재되어 있는 가우디에 의해 창조된 건물들을 찾아 그 조형미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도 바르셀로나 여행의 묘미가 아닐 수 없다.



 바르셀로나의 바닷가에는 한 손에는 세계지도를 쥐고 멀리 대서양을 응시하는 콜럼버스의 동상이 높이 서 있다. 이곳은 관광객으로 일 년 연중 붐비는 곳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콜럼버스를 바라본다. 에스파냐(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을 받아 1492년에 마침내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앞선자의 선견(先見)을 부러워하며 그 용기, 그 결단을 나와 나의 후손들도 가져 주기를 소망한다.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날, 시내 중심가에 있는 현대미술관과 피카소 미술관을 관람하였다. 바르셀로나는 피카소가 초기에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다. 그래서 1915년부터 약 삼 년간 활동한 작품을 중심으로 동시대 다른 작가의 작품들도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관람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그야말로 피카소가 이 도시를 먹여 살리는 게 아닌가 착각하게 만들 정도다. 고풍스런 도시, 역사가 멈추어 버린 도시인 것 같지만 사람들은 한 시대를 만든 사람을 보러 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유산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는 마드리드다. 바르셀로나 여행을 마치고 오후 3시경 우리 일행은 상트역으로 향했다. 마드리드행 고속열차를 타기 위해서다. 두 도시는 사백 오십여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 랑페로 두 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프랑스에 떼제베가 있다면 스페인에는 랑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열차에 올라보니 놀람 그 차체다. 우리의 KTX와는 비교가 안 된다. 좌석 간의 간격도 넓고 시트도 너무나 고급스럽고 안락하다. 정말 사람을 배려함이 여실이 묻어난다. 마드리드에서의 숙소는 더 고급스럽다. 주인 청년의 친절함과 준비된 배려가 신뢰를 자아낸다.



 마드리드 여행의 시작은 소울광장이다. 시내 어디서든 메트로를 통하여 이 광장에 나올 수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아홉 거리가 팔방으로 뻗어있고 무수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광장 중앙에는 시티투어 판매소가 있어 이곳에서 여러 방면의 시티투어를 이용할 수 있다. 마드리드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건축물들의 조형미를 감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투어버스를 이용하여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시내 중심가를 관통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이층버스의 맨 앞좌석에 앉으니 시야가 탁 틔여 한 눈에 시내 전경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대부분의 고층 건물들은 대리석으로 지어졌고 전면에는 여러 모양의 조각상들이 새겨져 있어 예술미가 극치를 이룬다. 개중에 어떤 건물은 중세기 건물이 아닐까 생각되어질 정도로 고색 찬란하기까지 하다. 또한 우리는 이들의 일상적 삶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유럽은 시내 중심가에 레스토랑이 많다. 레스토랑마다 메뉴판을 밖에 비치해 두기 때문에 관광객에겐 굉장히 편리하다. 메뉴와 가격을 알기에 주머니 사정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고 바가지요금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 좋다. 일 년 연중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곳에선 이 또한 관광객을 배려하는 섬세한 마케팅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이런 지혜를 좀 가지고 있었으면 한다. 없으면 배우든지, 비꼬지만 말고.



 거리의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노천카페, 겨울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 노천카페는 개업 성황 중이다. 나 홀로족을 찾아보기 힘들다. 쌍쌍이 아니면 가족끼리, 친구끼리, 그야말로 끼리끼리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왁자지껄 요란스럽다. 노천카페에 앉아 있는 우리 부부에게 지나가는 연인들이 다정한 눈인사를 선물한다. 옆에서 가만히 들어보면 연신 말을 입 속에서 굴린다. “여보, 당신은 저렇게 굴리겠어?” 옆의 아내에게 뚱딴지 같은 질문을 하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싱긋 웃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정작 대화가 있는가?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남남끼리 만나 무슨 할 말이 있나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남남끼리 만났으니 더더욱 대화가 필요하다. 모든 것이 다르기에 다름을 틀림으로 치부하여 배척하기 전에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를 넘어 담소의 단계로 더 나아가 연인같이 정담을 주고받으며 일생을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와 아내가 시내 중심가 이층 건물에 위치한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씩을 시켜놓고 거리로 오가는 군중들을 살핀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달리 중년 부부가 많다. 모두들 거리를 오가며 팔짱을 끼고 다정히 걷는다. 거리고 연신 혀를 굴린다. 무슨 말이 저리 많은지? 그러나 말이 많은 만큼 행복하다. 늙어서 말이 없는 부부만큼 살맛 없는 부부가 있을까? 늙어서도 몸매를 가꾸는 아내, 늙어서도 매력 있는 남자로 여전히 배려하는 남편,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이것을 확인하고 간다. 메트로역 한쪽 코너와 광장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거리의 악사들, 그들의 그 진지함과 아름다운 선율이 나의 심금을 울린다. 고맙고 감사하다. 다시 한번 찾고 싶다. 마드리드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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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힛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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